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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서태후)

진실한 서태후: 공헌, 행운 그리고 비애

by 중은우시 2013. 4. 13.

글: 마용(馬勇) 

 

근대중국에서 서태후는 여러번 요마화된 정치인물이다: 강유위(康有爲), 양계초(梁啓超)등은 1898년 정치변혁의 실패에 대한 죄책을 모두 황태후에게 돌렸다. 그리고 서태후를 권력을 농단하는 할망구(弄權的老太太)로 묘사했으며, 그저 그 가련한 양자를 괴롭힐 줄만 아는 악부(惡婦)로 묘사했다; 혁명당인 손중산(孫中山), 장병린(章炳麟)등은 혁명대의를 위하여 만주족을 몰아내는 혁명을 주장했고, 서태후를 근대중국에서 모든 죄악의 근원으로 묘사했다; 나중에 마르크스주의 사학자들은 '반식민반봉건'의 정치판단을 논증하기 위하여, 손중산, 강유위등의 견해를 받아들여서, 만청 수십년 정치발전에 대하여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고, 서태후에 대하여 기본적으로 부정한다; 민간의 야사에서는 대부분 이런 사관에 근거하여 서태후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어냈고, 심지어 남권주의의 입장에서 악의적으로 공격하기까지 했다; 최근에 한 출판사는 영국청년의 꿈이야기를 가지고 무슨 이국청년과의 사랑이야기까지 만들어 냈다. 더더구나 일부 전문가들까지도 여기에 가세했다. 확실히 이들은 그저 한가지 혹은 여러가지 역사관을 드러내고자 했을 뿐, 역사적 사실을 드러내고자 하지는 않았다. 진실한 서태후는 그런 모양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저 한 여인이었고, 그저 한 비범한 여인이었을 뿐이다.

 

한 여인의 행과 불행

 

서태후는 예허나라씨이고 1835년에 태어났다. 1852년 17세의 나이로 수녀(秀女)로 뽑혀 입궁한다. 조금 후 난귀인(蘭貴人)으로 승진하고 다시 의귀비(懿貴妃)에 봉해진다. 1856년, 의귀비는 함풍제와의 사이에 유일한 아들인 황자 재순(載淳)을 낳는다. 재순은 바로 나중의 동치제(同治帝)이다. 모이자귀(母以子貴). 모친은 아들이 귀해지면 귀해진다. 이 젊은 여인은 자연스럽게 궁중에서 점점 총애를 얻고, 지위가 점점 올라가며, 점점 공고해진다. 이는 중국전통사회에서 당연한 일이다.

 

수녀에서 한걸음 한걸음 올라가는 것은 기회이고 운명이다. 그러나 그후 여러 호사가들이 보기에 이 여인은 너무나 비범했다. 마치 처음부터 권모술수를 부린 것처럼 얘기한다. 이것은 억측이다. 후인들이 소인의 마음으로 군자의 마음을 헤아린 것이다. 생각해보라. 일국지존의 함풍제는 풍류를 즐겼고, 지모가 풍부했으며, 만나는 여인들이 무수히 많았다. 지혜에 의지하여 교묘하게 황제의 자리에 오른 젊은이가 어찌 머리 속에 걱정거리를 가득 담고 있는 여인을 좋아할 수 있을까?

 

젊었을 때의 난귀인은 아마도 하늘에서 내린 선녀같은 용모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좋아할만한 아가씨였다. 이것은 그녀가 성공한 전제이다. 함풍제가 총애한 관건이다. 난귀인이 나중에 한걸음 한걸음 권력의 꼭대기를 향하여 올라가는데, 그것은 시대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역사가 그녀에게 준 기회였다. 그녀는 이 기회를 꽉 붙잡았을 뿐이다.

 

난귀인은 행운이 따랐다. 풍류를 즐긴 함풍제는 그녀가 용종을 임신하도록 해주었고, 또한 그것은 유일한 아들이었다. 이 소황자가 출생했을 때, 난귀인은 겨우 21살이었다. 그녀의 부군도 겨우 25살이었다. 이 시기는 그녀가 가장 즐겁고 가장 득의했고, 가장 근심걱정이 없던 시기였을 것이다.

 

그러나 좋은 시절이 오래가지는 않았다. '명이 나쁜' 함풍제는 세계적인 시야를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는 내환인 태평천국의 난이 아직 뿌리뽑히기도 전에, 한쪽 대신들의 말만 들어, 개방확대 통상항구증가등의 문제를 놓고 열강들과 사이가 틀어지고 제2차아편전쟁이 벌어진다. 1860년 8월, 영국프랑스연합군이 공격해 들어와, 대고를 함락시키고, 천진을 점령하며 북경으로 진격하고자 한다. 성하지맹으로 청나라조정은 여러가지 조건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중국은 비록 서방에 대하여 일부 개방한지 이십여년이 되었지만, 세계의 일을 잘 몰랐다. 그러나 중국을 서방국가와 같에 만드는 것은 아주 곤란해 보였다. 영국프랑스연합군은 청나라조정에 문서를 보내어, 천진을 통상해안으로 개방해달라고 하고, 각각 5천정예병을 이끌고 북경으로 들어와서 조약을 교환하겠다고 요구한다.

 

서양인들과 교류하는데 충분한 경험이 없던 함풍제와 여러 중신들에게 있어서 영국,프랑스 양국의 요구사항은 너무 심하다고 느낀다. 젊은 함풍제는 이를 참지 못했다. 그리하여 친정을 하여 승부를 보겠다고 결정한다. 영국프랑스양국의 요구사항은 직접 중국황제에게 국서를 건네고, 중국황제의 국서를 이들 사신이 가지고 돌아가겠다는 것이었다. 영국프랑스의 이런 요구사항은 오늘날 보기에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큰 일이었다. 청나라군신들은 일치하여 이런 요구는 대청의 예의에 어긋나고, 모범(冒犯)으로 인식한다. 함풍제는 지시한다. 만일 이들 사신이 직접 국서를 건네고자 하면, 반드시 대청의 예절에 따라, 절을 하고 무릎을 꿇어야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오로지 자웅을 겨루는 수밖에 없다고.

 

함풍제의 태도는 부하들에게 큰 영향을 준다. 9월 18일, 쌍방의 협상은 결렬되고, 중국측은 상대방 협상대표인 파하례(巴夏禮)와 그 수행원 수십명을 억류한다. 이는 재난을 불러온다.

 

양국이 전투를 하더라도 사신은 죽이지 않는다. 이것은 국제법의 원칙이다. 기실 중국에서도 자고이래의 법도였다. 영국프랑스연합군은 청나라군과 전면적으로 충돌한다. 청나라측은 점점 버티지 못한다. 패전을 피하기 위하여, 9월 21일, 함풍제는 친히 전선으로 나가고, 장수를 교체한다. 흠차대신 이친왕 재원등의 직위를 취소시키고, 능력있는 '귀자륙(鬼子六)' 공친왕을 흠차대신으로 삼아 일처리를 하게 한다. 이런 안배를 마친 후 함풍제는 다음 날 원명원에서 열하로 도망친다. 당연히 공개적으로 선포한 이유는 그곳에 가서 '사냥'을 하겠다는 것이다.

 

함풍제의 우려는 확실히 쓸데없는 것이었다. 공친왕은 경성을 지키면서 서양인들과 교섭한다. 중국이 일부 양보를 한 후 금방 타협을 이룬다. 천진을 통상항구로 개방하기로 하고, 영국프랑스 양국이 중국에서 노동자를 모집하는 것을 허락한 것이다.

 

타협이 이루어진 후, 경성은 이미 옛날의 평정을 되찾았다. 그저 함풍제가 이전에 취생몽사, 화천주지하던 원명원은 영국프랑스 연합군에 의하여 불에 타버려, 훼손이 심각했다. 이것이 아마 함풍제가 돌아오지 않은 원인중 하나일 것이다. 함풍제는 청나라황제중 가장 호색한 황제이다. 유일하게 경성에서 도망친 황제이다. 도망가는 중에도 함풍제는 미녀와 미주를 잊지 않았다. 몸과 마음이 피곤하고 아마도 체력도 상당히 소모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 '고명천자(苦命天子)'는 1861년 8월 22일, 죽음을 맞이한다. 나이 겨우 서른이었다.

 

숙수(叔嫂, 시동생과 형수)는 함께 신국면을 만들어내다.

 

함풍제는 생명이 위험할 때 두 가지 정치적 안배를 해놓는다. 하나는 6살된 황장자 재순을 황태자로 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재원, 단화, 경수, 숙순, 목음, 광원, 두한, 초우영등에게 일체 정무를 보필(輔弼), 찬양(贊襄)하도록 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고명팔대신(顧命八大臣)이다. 소황제 재순은 옛날 난귀인, 지금은 의귀비 예허나라씨가 낳은 친아들이다. 그리고 함풍제의 유일한 아들이다.

 

이때 의귀비는 나이 겨우 26살이었다. 기나긴 과부생활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그녀는 황숙 공친왕의 협조하에, 동태후와 함께 6살된 아들 동치제를 이끌고 공동으로 이 방대한 제국을 통치한다. 표면적인 휘황과 체념이 어떻더라고 젊은 과부의 정상적인 욕망을 감출 수는 없었다. 젊어서 과부가 되어 지킨 것은 대청왕조의 강산이 아니라 고독과 적막이었다.

 

함풍제가 죽었다. 남은 것은 고아과부이다. 난귀비는 금방 어린 황제로 이하여 황태후에 오른다. 젊은 황태후는 서태후가 된다. 또 다른 젊은 동태후와 함께 이 나라를 관장한다. 그녀들의 모든 희망은 이 어린 황제였다. 그것은 그녀들 생명의 모든 희망이었다.

 

그러나, 전통적인 정치구조에서 함풍제가 죽기 전에 남긴 정치안배, 8명의 고명대신은 이 어린황제를 보좌할 뿐아니라, 두 황태후까지도 구속했다. 그 때의 제도에 따르면, 황상의 모친은 당연히 정치에 간여할 권한이 없다. 다만, 어린 황제는 어쨌든 그녀들의 아들이다. 자시 말해서 옛날 순치제, 강희제도 어려서 즉위했다. 만일 효장황태후가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순치제가 어찌 순조롭게 통치할 수 있었겠으며, 강희제가 어찌 휘황한 업적을 낼 수 있었겠는가? 함풍제의 임종안배는 자신에 있어서는 아마도 책임지는 행동이겠지만, 대청, 미래에 대하여 특히 그 어린 황제에 대하여는 그렇지 않았다. 특히 함풍제가 권력을 넘겨준 8대신은 가장 능력있는 6왕야 공친왕을 배제하고자 했다.

 

고명팔대신은 청나라조정에 충성했고, 어린 황제에게도 최선을 다 했다. 단지 그들은 전통의 영향을 너무 깊이 받았기 때문에 두 젊은 과부를 무시했다. 특히 숙순은 스스로 함풍제의 총신이라 자부하며, 발호했다. 조정의 모든 권력을 통제하기 위하여 함풍제가 살아있을 때 의귀비를 제거하도록 건의했다고 한다. 함풍제가 죽은 후, 심지어 무사를 고용하여 의귀비를 살해하는 병변까지도 꾀한다. 의귀비는 팔대신 특히 숙순과의 관계에 있어서 죽기 아니면 살기 식의 태세, 세불양립의 상황이 이루어진다. 반드시 둘 중 하나가 죽어야 했다.

 

이치대로 말하자면, 숙순은 가볍게 의귀비를 제압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적을 너무 가볍게 여겼다. 이 젊은 과부를 너무나 만만하게 보았다. 그는 아예 생각지 못했다. 이 젊은 과부가 함풍제의 신임을 받지 못한 육황숙 공친왕과 연락할 것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들이 손을 잡은 후 거의 힘을 들이지 않고 팔대신을 일망타진하고 숙순을 죽여버린다. 이때부터 대청국의 정치권력은 이 시동생과 형수의 수중에 떨어진다. 의귀비는 이때 이미 황태후로 존칭되며 최종권력을 확보한다. 육황숙은 의정왕의 신분으로 군기처를 겸직하여 관장했다. 대청국의 일상사무의 실제권력을 장악한다.

 

육황숙 공친왕은 확실히 능력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서양인들과 교류할 때 서방에 대한 생각을 바꾼다. 중국이 이전의 피동적인 국면을 바꾸려면, 반드시 세계로 나가고, 반드시 개혁하고 반드시 서방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때부터 시작하여 조정은 공친왕이 건의하에, 총리각국사무아문을 설치하고, 양무신정(洋務新政)을 펼친다. 대청국의 면모는 금방 바뀌고, 생기가 돌게 된다.

 

대청국의 새로운 기상은 공친왕이 주재한 결과이다. 그러나 말하자면, 공친왕을 중용한 것은 서태후의 안목과 도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서태후는 공친왕을 중용했을 뿐아니라, 한족대신도 대담하게 기용한다. 그리하여 대청국의 정치분위기는 일신하게 된다. 1860년부터, 중국은 확실히 윈기를 회복하는 궤도에 올라섰다. 정사에서 말하는 소위 "동광중흥(同光中興)"은 어용사학의 과장과 수식이 있었지만 실사구시적으로 말하자면 중국은 삼십년의 평화적인 발전을 거쳐 종합국력이 크게 올라갔고, 군사역량 특히 북양해군이 건설되어 비교적 강대한 중국이 동방에서 굴기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의 회복은 당연히 서태후의 공로라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역사주의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 삼십여년은 어쨌든 그녀가 시종일관 최고지도자로 있던 시기이다. 그녀가 적극적으로 무슨 개혁방안을 내놓지는 않았다. 다만 그녀는 내외대신들의 적극성을 발휘하도록 해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중국이라는 거대한 배가 나아가야할 방향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말하자면, 서태후는 성공한 여인일 뿐아니라, 확실히 비범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중국역사상 몇 안되는 뛰어난 여주(女主)이다.

 

생명중의 유감

 

서태후의 정치적 성공은 거대했다. 풍화정무(風華正茂)의 젊은 여자에 있어서, 과부생활은 확실히 질식할 것같았다. 다행히 젊은 서태후에게는 자신의 아들이 있었다. 그녀는 동치제가 점점 자라는 것을 볼 때는 마음 속의 적막과 고독이 그다지 심각하지 않았다. 하물며 정치 자체도 많은 유혹력이 있지 않은가.

 

십여년의 시간이 순식간에 흘러갔다. 1872년, 동치제가 17세가 되었다. 이제 성인이 되었으니 친정(親政)을 해야 했다. 서태후는 여러해동안 일을 했고, 이제는 수렴청정을 거두고 만년을 편히 보내며 살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겨우 3년만에, 서태후의 이 독생자이자 함풍제의 유일한 자식인 동치제는 1875년 젊은 나이에 목숨을 거둔다. 기껏해야 만 20살이 되지 않았다. 이 해에 서태후는 나이 마흔이었다. 중국의 옛말이 들어맞는다. 여인의 최대불행은 젊어서 남편을 잃고, 중년이 되어 아들을 잃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불행을 서태후는 모두 맞이했다. 이것은 서태후의 일생에서 가장 큰 유감이다. 아무리 영화부귀를 누리더라도 이는 보상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서태후는 불행한 여인이다. 그리고 불행한 모친이다. 그리고, 만일 더 깊은 의미로 말하자면, 그녀는 보친으로서 불합격이다. 개략 함풍제가 너무 일찍 죽었기 때문에, 그리고 젊은 황자는 부친의 사랑을 잃어 더욱 가련했다. 이것은 바로 서태후가 동치제를 종용교관(從容嬌慣)하게 만든 이유이다. 동치제가 어렸을 때와 청년이 되었을 때의 모든 역사를 보면, 서태후는 많은 경우 젊은 과부가 독자에 대한 지나친 사랑, 종용 그리고 원하는대로 해주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어린 황제는 어린 나이에 여러 엉망인 나쁜 아이들과 어울리게 된다. 여기에는 궁중의 태감이 포함된다. 어린 황제는 이들 무리들의 유혹하에 정도를 벗어난다. 하루종일 놀기만 하고, 남총에 탐닉하며, 심지어 자주 어린 태감들과 어울려 궁을 빠져 나가기도 했다. 미복을 입고 돌아디녔고, 매일 밤 남성 유리창, 팔애후통등 일부 차원주점, 청루기원, 화류계를 돌아다니며 음락에 빠지며 타락의 길로 들어선다. 왕왕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몰래 궁으로 숨어들어오기도 했다. 어떤 때는 군기대신을 만날 때도 술에 취한 상태였고, 말을 제대로 못하기도 했고, 부지불식간에 바깥에서 놀았던 일을 얘기해서 도저히 듣고 있을 수가 없었을 정도였다.

 

어린 황제가 미복으로 나가 돌아다니는 것은 개인적인 기호이다. 그러나 그는 황상이 되어 이렇게 하는 것이 좋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남성에서 놀고 있을 때 아는 사람을 만날까봐 우려했다. 특히 그의 '여러 애경(愛卿)을 만날까봐 우려했다. 황상으로서는 놀러다닐 권한도 있고, 사사로이 방문할 권한도 있다. 그러나, 어쨌든 동치제는 나이가 너무 어렸다. 이런 것은 모두 부적절했다. 동치제는 스스로 이를 잘 알았다. 그래서 그는 일부러 같은 기호를 가진 대신을 피했다. 왜냐하면 서로 부닥치면 이는 체면을 잃는 일일 뿐아니라, 난감한 일이기 때문이다. 혹은 그는 이런 '여러 애경'중 누군가가 황태후에게 이를 일러바치는 것도 두려워했다.

 

동치제의 이런 우려는 일상적인 정리로 보면 쉽게 이해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는 놀러다닐 때 여러 애경들을 피해다녔고, 항상 그의 못된 친구들이 끌고 다니면서 최대한 고급의 저명한 기원은 피했다. 가급적이면 길거리의 작은 점포나 후통의 깊은 곳에 숨어있는 하급기원을 드나들었다.

 

항상 강가를 거닐다보면 신발이 젖지 않을 수 없다. 시간이 길어지면서, 어느 곳 어느 때인지는 모르지만, 동치제는 불결한 병에 걸리게 되었다. 죽기전 며칠 동안, 하복부가 곪아서 냄새가 났고, 구멍으로 신장까지 보일 정도가 되어 죽었다. 혹은 매독이라고 하고 혹은 개창(疥瘡)이라고 한다. 당연히 공식문서에는 천화(天花, 천연두)라고 되어 있다. '천화'는 청나라황제들이 여러번 당한 병이고 듣기에 괜찮은 병명이다.

 

동치제의 죽음은 당연히 서태후의 닉애(溺愛)의 결과이다. 이를 보면 서태후는 모친으로서 합격자는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불합격의 모친은 중국사회에서 수도 없이 많이 볼 수 있다. 젊은 과부는 항상 자신의 아이, 특히 이처럼 독자인 경우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괴롭힘을 당할까봐 걱정한다. 그래서 최대한도로 이들 자식에게 자유를 주고, 엄격하게 구속받지 않게 하려고 한다. 이런 모친의 내심 깊은 곳에는 항상 부친이 없는 아이는 이미 가련한데, 어찌 지나치게 구속을 하겠느냐는 생각을 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서태후를 보통사람이라는 입장에서 이해한다면 그녀의 이런 처지, 선택이 사실은 보통사람들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저 불행히 후궁이 되고 불행히 황후가 되었으며, 그녀의 아들의 불행은 황위계승자라는 것일 뿐이다.

 

또 다른 사랑법

 

서태후의 독자 동치제는 이렇게 죽었다. 후손도 남기지 않았다. 그래서 뒤를 이을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동치제 본인은 독생자였고, 형제도 없었다. 그러므로 황위계승은 부사자계(父死子繼)의 원칙에 따라 자동승계될 수 없었다. 그리고 형종제급(兄終弟及)의 특별한 원칙도 적욯랄 수가 없게 되었다. 대청국은 돌연 권력승계의 난제에 직면한다.

 

이런 난제에 직면하여, 여러가지 방안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해관계를 형량해본 후, 청나라조정은 황시로가 혈연이 가까운 친척중에서 황위승계자를 뽑기로 한다. 그리하여 순친왕 혁현(奕譞)의 5살도 되지 않은 아들 재첨(載湉)을 찾는다.

 

재첨을 황위계승인으로 고른 것은 당연히 서태후와 관련이 있다. 그것은 황태후의 의지의 표현이다. 과거 오랫동안 음모론의 입장에서 서태후의 권력에 대한 탐욕을 묘사했지만, 이것은 아마도 역사의 진상이 아닐 것이고, 황태후의 생각도 아닐 것이다.

 

재첨은 1871년생이다. 그의 부친 순친왕은 도광제의 7째아들이다. 함풍제의 친동생이다. 즉 서태후의 시댁 동생이다. 재첨은 즉 황태후의 친조카이다. 황실과의 혈연관계로 보자면, 이미 자신의 아들이 없는 서태후는 이렇게 가까운 친척을 찾을 수밖에 없었고, 이보다 더 가까운 친척은 없었다.

 

그리고, 서태후의 친정으로 보자면, 재첨의 모친은 서태후의 친여동생이다. 재첨은 그녀의 외조카이다. 이중 혈연관게는 재첨을 서태후가 주목한 주요원인일 것이다. 더욱 통제하기 쉽다는 그런 이유때문이 아니다.

 

1875년 2월 25일, 젊은 재첨은 정식으로 황위를 계승하여 궁중으로 온다. 막 세상을 떠난 동치제를 대체하여, 연호를 광서(光緖)로 하였다. 그는 청나라 제11대 황제이다.

 

청년상부(靑年喪夫), 중년상자(中年喪子)의 서태후는 이 어린 황제에게 진심으로 대했다. 그들간의 모자의 정은 절대로 정치적인 반대자들 특히 무술정변후의 반대자들이 말하는 것과 같은 세불양립의 원수지간이 아니었다. 확실히 언제든지 서태후의 권세와 결단이라면, 그녀는 언제든지 이유를 찾아서 이 어린황제를 바꿔치울 수 있었던 것이다.

 

당연히, 양자를 들여본 여러 중년여자들과 마찬가지로, 서태후와 어린 황제는 여러해동안 같이 살면서 모든 문제에 대한 견해가 일치할 수는 없었다. 정상적인 의견불일치는 친모자간에도 어쩔 수 없이 존재한다. 이것은 친생인지 아닌지에 따른 것이 아니다. 그러나, 만일 일상적인 감정의 측면에서 그들의 모자관계를 이해한다면 황상은 자신이 양자로 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자신은 가정과 국가의 두 측명에서 져야할 책임을 잘 알고 있었다. 더더구나 그의 이 모든 것은 황태후가 준 것이라는 것도 잘 알았다. 그러므로 그는 황태후를 존경하고 경외하고, 경앙하며, 감사했다. 이 모든 것은 이해할 만하다. 황태후가 분부한 것이나 한마디 한마디 말을 황상은 모조리 집행했다. 그리고 그의 성격 혹은 생활습관에서 천천히 황태후에 대한 의존현상이 나타난다. 모든 일을 황태후의 뜻에 따라 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슨 반골정신은 형성되지 않았다. 이 점에서 양자로 들어간 광서제와 친아들인 동치제는 서태후에 대하여 본질적인 차이가 없었다. 그들은 같은 자식이었다. 그뿐이었다.

 

일국의 가장 존귀한 황태후로서, 서태후는 아무도 얘기하지 않더라도, 그녀는 동치제의 교육문제에서 교훈을 얻었다. 그래서 그가 양자로 어린 황제를 들인 후, 황태후는 같은 문제에서 똑같은 잘못을 범할 수는 없었다. 이 아이를 배양하기 위하여, 서태후는 전국에서 가장 좋은 스승을 모시고, 이 어린 황제에 대하여 가장 엄격한 도덕품격교육, 문화훈도를 진행한다. 서태후의 내심 깊은 곳에는 어린 황제가 동치제처럼 말썽장이가 되도록 해서는 절대로 안된다는 생각이 있었다. 이 어린 황제를 일대명군으로 기르고, 대청의 만세기업을 이루도록 해야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광서제는 서태후의 양자이다. 대청의 미래 주인이다. 그리고 이 할머니가 하반생의 모든 희망을 건 대상이기도 하다. 서태후는 이 아이를 계속 버릇없게 기르길 원치 않았다. 이는 인지상정이므로 이해가 간다. 이것은 어떤 모친에게도 있는 본능일 것이다. 그리고, 서태후는 이 미래 국가주인과의 관계를 이기적으로 처리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어린 황제가 궁에 들어온지 얼마 되지 않아, 일부러 이 어린 황제의 친생부친인 순친왕을 발탁하였다. 1884년에 이르러 중국프랑스전쟁등 일련의 문제에서 순친왕으로 공친왕을 대체한다. 그리하여 순친왕은 군기처 수석군기 및 총리각국사무아문의 영반대신이 되어 대청국의 일상정무를 모조리 장악한다. 1891년 사망할 때까지 순친왕은 계속하여 권력중추에 있었다. 이때 광서제는 이미 친정을 시작했고, 권력의 과도기도 순조롭게 넘어갔다. 그래서 우리는 강유위등이 1898년이후에 전파한 이야기는 믿을 필요가 없다. 양궁간에 불공대천의 원수같이 대하였다는 말을 믿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다시 훈정(訓政)

 

광서제의 동년교육은 청나라 역대황제중 가장 좋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의 지식소양도 이들 황제중 가장 뛰어났다고 할 수 있다. 1886년에 이르러, 십년간 열심히 공부한 어린 황제는 많은 진보가 있었다. 우수한 군주로서의 모습을 이미 드러내기 시작한다. 이 해에 51세된 서태후는 광서제의 친부인 순친왕 및 군기대신 예친왕 세탁을 만나 협의한다. 광서제를 일찌감치 친정시켜 진정한 나라의 주인이 되게 하는 것을 위해서이다. 황태후의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첫째는 광서제가 이미 성장해서 어른이 되었고, 둘째는 자신이 쉬고 싶다는 것이다. 대청왕조를 위하여 더 이상 계속 애를 쓰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51세는 당시 인생칠십고래희의 시대에 있어서 이미 적지 않은 나이이다. 권력을 맛보았고, 장래 권력을 장악할 사람을 손아귀에 넣고 있는 사람으로서 권력에 그다지 미련을 둘 필요는 없었다. 황태후의 마음은 진정이었을 것이다.

 

서태후의 건의는 처음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동의를 받지 못한ㄷ. 그러나, 각양각색의 권유도 황태후의 생각을 바꾸지 못했다. 몇번의 곡절을 거쳐, 젊은 광서제는 마침내 1887년 친정을 시작한다. 서태후는 여러 사람들의 요구에 못이켜 계속 어린 황제를 위하여 도와주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나 제국의 일상사무처리권은 점점 어린 황제에게 넘어갔다. 서태후는 이 문제를 시원시원하게 처리했다. 청나라조정의 각종 공식문서는 이에 대하여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1898년 가을이 되자, 아마도 육군자를 채시구에서 죽인 때문인지, 서태후는 다시 나서서 정치에 간여한다. 각종 소문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심지어 황태후가 이전에 수렴청정을 거둔 것이 진정이 아니라는 말까지 나왔다. 이것은 틀린 말이다. 왜냐하면 황태후가 권력을 내놓고 싶어하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얼마든지 이유를 내놓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청국의 조정을 이미 삼십여년이나 장악하고 있었고, 더욱 중요한 것은 청년상부의 과부로서,서태후는 먼저 친아들 동치제를 도와서 방대한 제국을 통치했고, 친아들이 없어지자, 다시 이 어린 황제를 양자로 받아들였고, 지금 어린 황제가 친정할 수 있게 되었고, 스스로 나라의 주인이 되어 국가를 다스릴 수 있었다. 모친으로서, 의심할 것이 무엇이 있겟는가. 아무리 권력에 집착하는 사람이라도, 세월이 흐르는 것을 막을 수는 없고, 생활의 유혹을 막을 수가 없다. 서태후는 확실히 한 시대를 끝내고자 준비했고, 말년을 편하게 보내려고 준비했으며, 편안한 생활을 보내려고 생각했다. 이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대청국의 정치현실은 서태후의 기대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광서제는 친정을 시작한지 몇년이 지나지 않아, 갑오청일전쟁이 벌어진다. 유신운동시 시작되었다. 대청의 전체적인 이익을 위하여, 서태후는 부득이 다시 나서야 했고, 어린 황제를 도와 국가대사를 처리해야만 했다.

 

만일 권력구성으로 보자면, 중국전통사회는 황권지상, 불가분할을 강조했다. 황권중심의 일원화는 거의 역대왕조에서 반드시 준수해야할 원칙이었다. 만청정국에 제후양궁(帝后兩宮)의 공동통치국면이 나타난 것은 완전히 특수한 상황조건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객관적인 입장에서 서태후가 1894년이후에 한 행위를 관찰한다면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녀는 권력사용을 대단히 절제했다. 그녀는 자신의 권력을 남용하여 조정에 간섭하지 않았다. 그리고 황상을 넘어서서 국가대사를 처리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그저 황상의 읫결정에서 마지막 비토권만을 보유했다. 이것은 젊은 황제를 대신해서 일을 봐준 것이다. 그래서, 비록 그렇게 많은 정치적 우여곡절을 겪고, 여러 파란을 겪었지만, 청나라 정사에서 황상의 황태후에 대한 원망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황상은 죽을 때까지도 황태후의 양육은혜와 여러해동안 잘 보살펴주고, 인내심있게 도와준데 대하여 감사해 했다.

 

원래는 따스한 감동적인 이야기

 

광서제의 몸이 좋지 않았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몸이 약하고 병이 많았다. 더욱 중요한 점은 황상으로서 당연히 해야할 후사를 잇는 일을 제대로 해낼 수가 없을 정도였다. 심지어 황후와 비빈들에 대하여 남편으로서 당연히 해야할 의무도 이행하지 못했다. 이는 남자로서 말할 수 없는 난감한 일이다. 광서제가 나중에 성격이 왜곡되는 중요한 원인이기도 하다. 그의 신장병은 유래가 오래되었다. 기괴한 것은 그는 신장기능에 문제가 있었을 뿐아니라, 혼인전부터 오랫동안 유정(遺精)이 있었다. 그 자신이 1907년에 이미 20년이나 되었다고 말하였다. 장기간 유정한 사람은 부부생활이 원만할 수 없다. 부부생활이 없는 사람은 성격형성에서 어느 정도 왜곡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현대심리학이 증명한다. 장기간유정과 장기간신장병은 황상에게 많은 곤혹을 가져다 주었고, 그가 나중에 어느 정도 머리를 들지 못하게 된 중요한 원인이기도 하다. 이런 후배에 대하여, 서태후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위로하고, 권면하는 것 이외에 또 무엇이 있겠는가? 우리는 상상해볼 수 있다. 서태후는 그저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자신의 명이 좋지 않다는 것을 한탄했을 것이다. 왜 하늘은 이런 위난의 시기에 모든 나쁜 일을 그녀에게 생기게 하였는지. 청년상부, 중년상자만 해도 충분한데, 왜 수십년간 힘들여 키운 이 아들은 이렇게 말도 잘듣고 이렇게 재능도 있는데, 이런 몸을 주었는지, 후손을 갖지 못하게 하고 젊은 나이에 요절하게 만들었는지.

 

광서제의 병력은 개략 1898년 가을부터 점차 악화되었다. 다행히 그는 천자의 귀한 몸이어서, 제국의 가장 좋은 의료조건을 누렸고, 궁정어의, 천하명의의 세심한 보살핌을 받았다. 광서제의 신장병은 혈액투석이라는 의료조건이 없는 상황하에서도 10년이나 버텼는데, 그 자체는 기적이라 할 수 있다.

 

누구도 생각지 못하게 1908년 가을, 정치개혁이 가장 긴요한 순간에 처했을 때, 나이 겨우 38살인 광서제가 병으로 쓰러진다. 그리고 한번 병석에 눕자 일어나지 못하고 죽어버린다. 광서제의 사인에 관하여, 청나라의 정사와 의학전문가의 의견은 대체로 정상적 사망으로 본다. 장기간 폐결핵, 간장, 심장, 풍습등 만성질환을 겪어서 면역력이 심각하게 저하되어 결국 심폐기능이 고갈되어 합병증감염으로 사망했다는 것이다.

 

역사의 교합(巧合)은 여기에 있다. 광서제가 발병하기 전의 한동안, 73세의 할머니인 서태후는 생일때 잘못 먹은 것때문에 설사를 했다. 오랫동안 고생을 한다. 설사는 많은 경우 죽을 병이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설사가 심각하면 죽을 수도 있다. 이것도 의학상식이다. 특히 몸이 약한 노인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

 

문제의 기괴한 점은 바로 황태후의 이질이 아미 오랜 시간을 끌었는데, 만일 광서제사망사건이 발생하지 않았더라면, 황태후도 돌연 죽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광서제의 사망은 73세된 황태후에게 타격이 너무 컸다. 생명이 위급한 중에 노인은 더욱 상심하고 생각하면 할수록 자신의 운명이 안타까웠다. 그래서 모든 희망이 물거품이 되었다고 여기도, 이 양자가 요절한지 하루도 되지 않아, 그녀도 목숨을 거두고 만다.

 

이 해석은 청나라 공식문건과 청궁자료에 나온다. 대강의 뜻은 황태후가 황제의 '대행(大行)'을 들은 후 비통을 금치 못하고 스스로 억제하지 못하여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어 죽음에 이르렀다는 말이다. 이 해석은 인간적 도리에 합당하고 인정에도 맞고 상리에도 맞고 역사논리에도 맞는다. 오로지 중국인이 가장 받아들이기 좋아하는 음모론에는 맞지 않는다. 친아들이 아닌데, 어찌 그럴 리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청나라조정의 공식해석은 <청실록> 및 일체의 관방문서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기괴한 것은 이 해석이 대청왕조의 정치상 반대자들에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미국에 망명해 있던 강유위는 광서제가 서거한 다음 날, 미국대통령에게 전보를 보내어, 미국정부가 앞장서서 대청신황제를 승인해주지 말 것을 요청한다. 이유는 서태후가 그들의 영명한 광서제를 모살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강유위의 주장은 당연히 근거가 없다. 당시에는 인터넷도 없었다. 오늘날처럼 긴밀한 연락이 있다고 하더라도, 어찌 사건발생 다음 날 이런 확실한 결론을 내릴 수 있단 말인가. 강유위의 주장은 서방세계에서도 믿지 않았고, 미국정부는 더더구나 이런 소문에 근거하여 중국에 항의할 수도 없다.

 

그러나 기괴한 점은 시간이 100년이나 흘러는데, 강유위는 마침내 현대중국에서 인정받았다는 것이다. 엄숙한 역하삭자들이 청궁자료를 맏지 않고, 오히려 강유위 및 당시의 필기소설 작가들의 주장에 근거하여 광서제가 모살당했다고 주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극독에 죽었다는 것이다. 더욱 황당한 이야기는 연구자들이 나아가서 추론하는 것인데, 이 광서제모살을 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 양모 서태후라는 것이다. 음모론이 이제 마침내 확인된 것이다. 서태후는 마치 역사의 치욕의 기둥에 못박힌 것같다. 기실 이것 자체가 우스운 이야기고 말도 안되는 이야기이며 역사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