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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서태후)

네덜란드 기자가 쓴 "서태후 장례식"

by 중은우시 2017. 12. 21.

글: 추월랑(秋月朗)


1908년 11월 9일 대청제국의 자희황태후(慈禧皇太后), 즉 서태후의 장례식이 열린다. 네덜란드 기자인 헨리 보렐은 서태후의 영구가 북경성을 나서는 장면을 모두 목격하고, 일련의 귀중한 사진을 남기며, 이번 중국 최고등급 장례식의 화면을 기록으로 남겼다. 이뿐 아니라, 그는 글로 그 장면을 기록하여 <만청영상(晩淸映像)>이라는 책에 담았다. 아래는 그 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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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달동안, 신문에서는 서태후의 장례에 대한 보도가 이어졌다. 직예총독(直隸總督) 단방(端方)의 명령으로, 자금성(紫金城)에서 청동릉(淸東陵)에 이르는 도로를 평탄하게 만드는 공사가 이미 시작되었다. 서태후의 장례식을 위하여 영구를 운반하는 행렬이 이 길을 꼬박 5일간 걷게 될 것이다.





신문에서는 그녀의 일생내력에 대한 갖가지 기이한 이야기들이 실리고 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단언한다. 오랫동안 중국의 억만 인민을 통치해온 태후가 일찌기 광주에서 온 노비에 불과했다고. 그런가하면 박식한 경사대학당의 총교습 정위량(丁韙良)은 그런 이야기는 모조리 날조된 것이라고 말한다. 이미 고인이 된 이 태후는 혜정(惠征)의 딸이고, 출신이 고귀하다. 1853년 그녀는 함풍제의 의비(懿妃)가 된다. 그의 황후는 아들을 낳아주지 못했고, 의비는 함풍제와의 사이에 외동아들을 낳아준다. 그 아들이 바로 이후의 동치제(同治帝)이다. 그녀가 황태자의 생모이므로 황제의 총애를 깊이 받았다. 그녀의 조카인 광서제(光緖帝)가 동치제를 이어 황제가 되었을 때, 서태후는 수렴청정을 한다. 이렇게 하여 세상이 주목하는 동방여황(東方女皇)이 된다. 그녀의 통치하에, 대청제국은 마침내 종말을 맞이한다.





그녀는 이미 현대과학문명이 중국에 도래한 시대에 죽음을 맞이한다. 그러나 그녀의 사후 장례식에서 보여준 것은 수천년역사의 옛날식 예의였다. 


일찌기 8월에 이미 대량의 종이로 만든 명재(冥財)를 불태웠다. 이들 물건은 모두 그녀가 아끼던 재물을 상징한다. 정교하고 진짜처럼 만들었으며 교묘하고 예뻤다. 거기에는 시계, 화장대, 담뱃대, 그리고 종이로 만든 가짜사람도 있다. 이들은 나중에 저세상에서 서태후를 모실 것이다.







그리고 종이로 만든 사병도 있다. 그들은 장례식을 시작하기 2일전에 고궁의 오문밖에서 불태워진다. 그들은 모두 서태후의 장례식전에 먼저 명부(冥府)로 가서 맞이할 준비를 하는 것이다. 중국인들은 모두 믿고 있다. 이 세상에서 보는 모든 것은 육안으로 볼 수 없는 현실을 반영한다고. 그러므로 그들은 그들은 눈으로 보이는 장례를 치르는 외에 눈에 보이지 않는 장례도 치른다.







그러나, 신문의 한 글에서 제기한 바와 같이, 공자와 맹자가 저승에서 현대유럽군복을 입은 병사를 보면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그들이 부장품으로 불태워진 것을 보는 것은 조상대대로 물려온 중국식 가마가 아니라, 우아한 유럽식의 브로엄 차량이었다. 즉 운전하는 사람이 차박스밖에 앉는 사륜마차이고, 2필의 키가 크고 회색반점이 있는 유럽말, 그리고 바퀴와 유럽식 등을 보면 그들은 얼마나 놀라게 될까?


과거의 세월동안 북경은 일찌기 비극을 연출했다. 진정한 극적 의미는 아마도 다시 몇십년이 흐른 이후에야 사람들이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아주 예민하고 예술적 감각이 있는 젊은 황제는 참신한 시대가 이미 도래했음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중국을 새로운 나라로 변화시키고자 시도한다. 그러나 그는 원만한 수완을 쓸 줄 몰랐다. 하물며 그의 곁에는 그의 고모인 함풍제의 미망인이 있다. 이 여인은 역사상 드물게 보는 격정적이고 폭정적인 에술가이며, 억만인민의 위에 자리하고 최대한 그녀의 향락을 즐겼다. 황제의 곁에는 강유위(康有爲)등 일군의 혁명을 꿈꾸는 몽상가들과 엘리트지식인들이 있다. 서태후의 곁에는 보수적이고 독재적이고 절대 변화하려하지 않는 관리들이 있다. 그들의 머리 속에는 오로지 수천년전의 진부한 사상만 들어있을 뿐이다.






1908년 11월, 젊은 황제와 그의 고모는 동시에 세상을 떠난다. 그녀는 그가 자기보다 오래 살도록 놔두지 않았다. 중국을 바꾸겠다는 꿈을 실현했다는 기쁨을 맛보게 할 수는 절대 없었다. 황제와 최고권력을 놓고 다투던 여인을 묘에 묻을 때, 젊은 황제도 돌연 사망한다. 시간은 묘하게도 그의 꿈이 막 실현되려고 할 때였다. 신비한 공포가 그의 죽음을 둘러싸고 있다.





신비한 자금성의 높은 담장이 이렇게 견고하고, 이곳의 모든 것은 그렇게 은밀하다. 그래서 외인은 아무도, 그게 유럽인이건, 한인이건 만주인이건, 1908년 11월 황색 유리기와로 뒤덥힌 붉은담장안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가 없다. 사람들은 속속 추측하고, 추리하고 귓속말을 나눈다. 그러나 아무도 진상을 알지는 못한다. 그저 황제와 태후가 모두 죽었다는 것만 알 뿐이다. 그리고 수천년전의 예의대로 장례를 치른다는 것이다. 만조 문무백관이 보는데서 고독하게 죽어갔다. 아무도 손을 뻗어 그들을 위로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이 죽어가는 황제와 태후의 몸에 손을 댈 수 없기 때문이다.


몇달 전, 광서제는 이미 북경에서 4일 거리가 떨어져 있는 청서릉(淸西陵)에 안장되었다. 거기에는 옹정제, 가경제, 도광제등 청나라황제들이 안장되어 있다.





11월 9일, 필자는 친히 금황색의 천이 덮인 태후의 영구가 느릿느릿하고 장엄하게 들려져서 북경의 회색 언덕을 넘어가는 것을 보았다. 거기에는 서태후의 시체가 누워 있다.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고 가장 숭배하던 이 여인은 19세기 가장 위대한 여황이고, 생활과 권력에서 단맛, 쓴맛을 모두 본 여인이다. 그녀가 영구속에 누워서 내 곁을 지나갈 때 나는 공경하는 마음으로 모자를 벗어서 존경을 표했다. 자신의 뜻대로 생활했던 고아한 예술가에게 허리를 숙여 경례하였다.





이 차가운 겨울이 새벽 6시, 하늘에는 뼈를 에는 찬바람이 불고 있다. 나는 구피대의(裘皮大衣)로 몸을 감싸고 낡은 황포차(黃包車) 안에 앉아서 넓다란 거리를 지나서 동직문(東直門)으로 갔다. 동직문 밖의 작은 언덕 위에 외무부 관리들은 각국 공사관이 소개한 북경의 외국인들을 위하여 지붕이 있는 관망대를 만들어 주었다.





장례가 거행되기 여러달 전에, 청동릉으로 가는 도로는 이미 수선되었다. 청동릉 안에는 순치제, 강희제, 건륭제, 함풍제와 동치제등 대청황제가 안장되어 있었다. 서태후의 능묘는 광서제가 매장된 청서릉에 있지 않다. 이는 우연이 아니다. 도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증기압로기가 동원되고, 친왕과 고관들이 도로상황을 순시했다. 사람들은 모든 노력을 다하여 이미 고인이 된 서태후가 이 길ㅗ 금색 덮개를 한 황색 영구가 장엄하고 순조롭게 이 도로를 지나갈 수 있도록 하고자 했다.






필자가 거주하는 대사관구역에서 황포차를 타고 동직문까지 가려면 1시간 정도 걸린다. 앞의 반시간동안 나는 합달문(哈達門)대가를 빠른 속도로 달렸다. 왜냐하면 길거리에 사람들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직문 오른쪽의 작은 거리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길에는 모조리 경찰과 보병으로 꽉 차 있었다. 일본을 모방한 중국의 신군(新軍)은 겉으로 보기에 기운차 보인다. 일처리도 질서있게 했다. 마차, 나귀차, 말을 탄 사람과 황포차는 서쪽과 북쪽에서 속속 도착했다.





동직문 부근에서 나는 아주 밀집되어 있는 사람들 무리를 보게 된다. 유럽이었다면 나는 여기에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이때 나는 태연자약했다. 왜냐하면 여기는 중국이기 때문이다. 일꾼들과 마부 그리고 말탄 사람들이 고함소리 속에 그리고 말울음소리 속에 나는 황포차에 조용히 앉아서 편안하게 시가를 피웠다. 폭력이 절대 발생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 나의 목 근처에 말머리가 하나 나타나기도 하고, 어느 순간 하마터면 온순한 나귀를 끌어안을 뻔하기도 했다. 이렇게 한걸음 한 걸음 동직문의 문루를 나서서 사방형의 옹성에 도착했다. 거기에는 중국병사들이 가득했다. 그리고 전루(箭樓)를 통과하여 성문밖의 개활지에 도착한다. 거기에는 수천수백의 나귀차가 성밖의 사람들을 싣고 산을 넘고 고개를 넘어 이곳으로 왔다.





날카로운 한풍과 고비사막에서 오는 모래바람 속에서, 반시간동안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마침내 장례식을 볼 수 있는 관망대에 도착했다. 외무부의 입구에는 엄숙하고 영어를 잘하는 관리가 손님을 맞이해서 입장권을 받았다. 공사관에서 나줘준 입장권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이곳에 들어가서 볼 수가 없다.





정자 앞에 있는 도로에는 사람으로 꽉 들어찼다. 그들은 호기심있게 그러나 예의를 잃지 않고 "번귀(番鬼)"라고 불리는 외국인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장례식 대열이 이곳을 어떻게 통과할 지도 큰 문제일 것같다. 왜냐하면 길이 모조리 사람으로 막혀버렸기 때문이다. 7시 늦어도 7시반까지 모든 내빈은 도착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때는 모든 도로를 봉쇄해야 하기 때문이다. 7시15분때 장례식대열이 자금성을 출발한다. 다만 10시반이 되어서야 정자의 관망대에서 마침내 장례식 대열을 볼 수가 있었다. 어떻게 순식간에 도로를 정리했는지는 정말 수수께끼이다. 현대군복을 입은 중국기마경찰이 몽고마를 타고 이곳으로 왔다. 마치 마법을 부린 것처럼, 도로위의 수천수만의 방관자들은 모조리 언덕위로 쫓겨난다. 어떤 충돌이나 싸움도 일어나지 않았다. 유럽같으면 아마도 반시간은 되어야 해결할 문제를 순식간에 그들은 해결해서 도로를 비우고, 모두 언덕위로 올라가게 만들었다. 이미 누군가 나에게 말해주었다. 이 장례식대열의 경관에 아마도 내가 실망할 것이라고. 왜냐하면 싱가포르와 자바섬에서의 부유한 상인의 장례식은 아마도 더욱 대단하고 요란할 것이라고. 그래서 나는 그다지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다. 대다수의 서양인들은 잘 모르고 있었다. 장례대열의 화려한 장면은 모두 영구 위에 집중되어 있는 이유를





성에서 나온 이후의 도로는 대부분 내리막길이다. 도로의 양쪽은 얕은 언덕이다. 그러므로 정자에서 장례식대열을 아주 잘 볼 수 있었다. 앞장선 것은 현대군복을 입은 장모경기병(長矛輕騎兵)이었다. 복장이 정치하고, 행동거지가 당당했다. 이어서 노비들이 손으로 끌고 일렬종대로 선 키작은 말이었다. 그 뒤에는 다시 성홍색 비단옷을 입고 모자에는 황색털을 꽂은 노비들이다. 개략 수백명이 되었다. 그들은 돌아가며 영구를 드는 노비들이다.


이어서 다시 또 다른 장모경기병이 있었다. 그들의 장모에는 홍색의 길다란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뒤에는 마창기명(馬槍騎兵)이 왔다. 그들은 황실 금위군이다. 몸에는 홍색을 수놓은 회색군복을 입고 있었다. 그 뒤에는 붉은 옷을 입은 노비들이 줄줄이 이어졌고, 녹, 홍, 자, 황등 각종 색깔의 깃발과 낮게 펼친 비단 조폭(條幅)을 글고 있었다. 선명한 색깔의 깃발을 든 노비들의 행열을 끝이 없었다. 마치 그들이 황궁안의 모든 깃발을 들고 나와서 태후를 배웅하는 것같았다.





다시 그 뒤에는 기이하고 장중한 장면들이 이어진다. 3필이 1열을 이룬 백색 작은 말이 각각 3개의 4륜경편마차위에 장치한 가마를 끌었다. 나의 뒤에 있던 누군가가 이렇게 설명해주었다. 이것은 서태후가 가장 좋아하던 가마라고. 그리고 흰색의 말은 그녀가 가장 총애하던 동물이라고. 뒤에 이어진 것은 다른 흰말에 황색비단장식을 한 것이다. 이 작은 말로 구성된 대열은 행진할 때 느릿하고 비통해했다. 이 광경은 사람들을 슬프게 만들었다.

 

이어서 고비사막의 거대한 낙타였다. 온몸에 털이 있고, 체격이 컸다. 마치 고대에서 온 괴물같았다. 그들은 이열종대로 도로의 양쪽 곁으로 행진했다. 그들은 등에 황색비단으로 싼 장막등 필수품을 싣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 장례행열이 청동릉에 도착할 때까지는 꼬박 5일이 걸리기 때문이다. 이 행열은 동방적인 색채가 농후했다. 먼저 노란비단을 입었고, 색채가 선명한 가마가 있었다. 그 후에 백색의 작은 말이 있다. 그러더니 지금은 커다랗고 위엄있는 낙타이다. 이러한 광경은 우리 시대에서 얼마나 요원한가. 그리고 얼마나 원시적인가.


일시에 장례행열에 틈이 생긴다. 그리고는 이어서 홍색의복을 입은 노비들이 나타난다. 그들은 무질서하게 우리 앞을 지나갔다. 길 가운데에는 괴이한 모양의 인물도 있었다. 입에서는 큰 빵을 씹고 있었다. 흑색 옷을 입은 관리들이 지나간 후에, 다시 틈이 생긴다. 그 후에 다시 엉망진창인 노비들이 지나간다. 이어서 돌연 두 개의 금항색비단장식이 나타난다. 가마꾼이 든 가마가 나타난다. 그리고 상당히 유렵화된 장례화환들도 있었다. 그 후에는 다시 빈틈이다. 





금방 지나간 말과 낙타의 똥으로 더러워진 도로를 다시 노비들이 깨끗하게 청소한다. 이것을 보면 앞에 지나간 것은 그저 길을 여는 의장대인 셈이다. 왜냐하면 뒤의 대열이 일시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멀리서 언덕의 내리막길에 금방 깃발이 보이기 시작한다. 홍색깃발이 하늘에 휘날린다. 대열을 맞춘 기병이 우리를 향헤서 오고 있었다. 더 많은 황색 가마가 지나오고 있었다. 이들 가마의 뒤에는 눈부신 금황색 화염이 빛나고 있었는데, 크기가 아주 커서 깜짝 놀랄 정도였다. 그리고 지면에서 아주 높았다. 서태후의 영구는 아주 느릿느릿하게 움직였다. 방형의 영구 위에는 커다란 금구(金球)가 꽂혀 있다. 그리고 아주 넓은 비단으로 덮어 놓았다. 그것은 백여명의 가마꾼이 길다란 대나무를 걸쳐서 그들의 머리 위로 높이 들었다. 위엄있고 장중한 방식으로 앞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일찌기 반시간전에, 태양은 이미 떠올랐다. 그리하여 영구 위의 금황색비단은 하늘의 불타는 화염이 흐르는 것같았다. 나는 처음으로 이런 황색이 황제를 대표하는 색깔이라는 것을 의식했다. 이전에 나는 이렇게 아름다운 황색을 본 적이 없다. 태양처람 찬란하고 빛나는. 그 금색의 영구 앞에는 수백의 황색 깃발이 향도가 되어 이끈다. 이 깃발은 사람들이 홍색과 남색의 깃대로 하늘 높이 들었다. 햇빛 아래에서, 이 마대(馬隊)는 마치 신비한 색채의 경신의식(敬神儀式) 같았다. 안장하는 것은 바로 신인 것처럼.


영구를 호송하는 장모경기병이 우리의 관망대를 지나갔다. 뒤에는 마창기병과 다른 사람들이 조용히 도보로 행진했다. 손에 깃발이나 북 징을 들지 않은 다른 병사들이 지나갔다. 이어서 온 것은 한 무리의 장포(長袍)와 모자에 황색 털을 꽂은 노비였다. 그들의 뒤에는 자홍색 장포를 입고 위에는 장명백세(長命百歲)"를 상징하는 금색으로 수놓은 "수(壽)"자가 있다. 이들은 손에 노란깃발을 들었다. 도처에 황색의 물결이다. 무수한 방형 혹은 원형으로, 위에는 용과 봉황이 있는 황, 록, 홍, 남등 각양각색의 깃발이다. 다른 수도없는 가마, 작은 말, 깃발, 상기(喪旗)의 뒤에는 짙은 황색가사를 입은 라마승려가 있었다. 그들은 티벳과 몽골에서 왔다.


마지막으로, 청나라의 고관들이 걸어왔다. 그들은 몸에 검은색 상복을 입었다. 그들의 관모에는 관직을 표시하는 장식물을 뗴어냈다. 즉 홍산호와 남보석 정자(頂子). 그리고 공작털(孔雀羽毛). 그들은 대청왕국 최고위층 관리들이다. 그중에는 친왕(親王), 어사(御史)와 대신(大臣)이 포함되어 있다. 모든 사람들은 애도하는 표정으로 우리의 앞을 지나갔다. 옷은 질박하여 일반백성과 같았고, 곁에는 아무런 시종도 따르지 않고 있었다.





방대한 영구는 현재 우리의 곁으로 가까이 오고 있었다. 지면에서 매우 높았으므로 이 황색비단으로 싼 방대한 물건은 마치 불타는 것처럼 빛나면서 밝은 금황색을 내뿜었다. 이는 내가 본 적이 없는 것이다. 중국황족과 황제만이 황색옷을 입을 수 있다. 누구도 이를 어기면 죽음이다. 그것은 100여명의 가마꾼이 들고서 천천히 앞으로 이동했다. ㄱ것이 전진하는 것은 이렇게 곤란하고 복잡하다. 마치 황금색 영구가 무거운 순금덩어리 같았다. 영구를 덮은 것은 마치 금속같았고, 비단같지가 않았다. 햇볕아래에서 그것은 황금색의 폭포같았다. 이 황실의 금황색 영구에 남봉황과 홍화가 상징물로 있었다. 도로곁에 있던 사병들은 모두 총을 들어 경례한다. 외국공사의 경위들도 영구를 향해 경례한다. 현장은 죽음처럼 적막이 돌았고, 북소리 징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언덕위에 있던 수천수만의 사람들도 아무 말이 없이 조용했다. 마치 여신이 그들의 앞을 지나가튼 것같았다. 영구는 흔들리면서 장엄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한 라마승려가 작은 나무북을 쳐서 가마꾼들의 발걸음의 박자를 맞추게 했다. 목구(木球)로 양피(羊皮)를 치는데, 사람들의 억눌린 정적 속에서 차갑고 음침한 소리가 되어 울렸다.


관망대의 모든 서방내빈들은 일어서서 모자를 벗었다. 그 방대한 영구가 이렇게 우리 눈앞을 지나갔다. 남색의 봉황은 영구를 덮은 보자기에서 날개를 폈고 붉은 꽃은 선명하게 황금색 비단 위에서 피어났다. 이렇게 일종의 현란한 색채를 보여주었다. 영구의 꼭대기에 있는 금구는 태양처럼 빛을 발했고, 그 황색의 비단은 빛이 흐르는 것같아서 사람들을 눈부시게 만들었다.





서해누는 이렇게 세상과 이별한다. 이 기묘하고 무서운 여왕이. 그녀의 늙은 영혼이 이끄는 바에 따라 그녀는 현대세계에 비극적인 결전을 전개했다. 그러나 그녀도 신시대의 개혁을 열 충분한 용기가 있었다. 바로 그녀가 1900년 야만적인 감숙의 장수 동복상(董福祥)에게 유럽의 주북경공사관을 공격하라고 명령한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결국 그녀가 가장 통한해 마지않던 서방문명을 불러들인다. 이 여인이 눈썹만 찡그려도 총독들은 가슴이 덜컥 내려 앉을 정도였고, 한번 미소만 지어주면 영예와 부를 가져다 주었다. 그녀가 한번 화를 내면 그들은 신패명렬(身敗名裂)한다.





사람들은 그녀를 북경의 성문으로 들고 나왔다. 그리고, 회색의 언덕을 지나갔다. 이 전설적인 여인은 그 어느 것도 그 누구도 꺼려하지 않았다. 그녀의 의지가 바로 법률인 여인이었다. 지금은 이미 차갑고 메마른 시체로 되었다. 그녀는 신성하고 오래된 이념의 마지막 대표자이다. 또 다른 여명이 이미 세계의 일부가 된 이 기묘한 왕국에 도래했을 때 이런 이념은 이제 그녀와 함께 죽었다.





나는 오랫동안 서태후의 영구를 주시했다. 그것이 멀리서 굽은 길을 돌아갈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