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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서태후)

서태후는 왜 "노불야(老佛爺)"라고 불리웠는가?

by 중은우시 2015. 2. 10.

글: 중천비홍(中天飛鴻)


"노불야"는 남성황제에 대한 칭호이다. 그리고 청나라의 역대황제는 모두 특별히 '노불야'라고 칭해졌다. 그러나, 서태후도 "노불야"라고 칭해지지 않았는가? 서태후는 비록 황태후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여류이다. 그런데 왜 청나라의 조야 상하에서는 모두 그녀를 "노불야"라고 불렀는가? 그 내력에 관하여는 대체로 4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 배불좌선설(拜佛坐禪說). <청조야사대관>에 따르면, "효흠(서태후)이 정무가 한가할 때, 관음으로 분장을 하고, 내감 이연영을 선재(善財)로, 이자(李姉)를 용녀(龍女)로 분장시켜, 서양식으로 큰 사진을 찍어 침전에 걸어두었다. 그래서 궁중에서는 모두 그녀를 '노불야'라고 부르게 된다" 즉, 서태후가 이전에 관음보살의 모습을 하고 큰 사진을 찍어서 침궁에 걸어두었기 때문에 궁에서 모두 그녀를 '노불야'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둘째, 유인가호설(有人加號說). "노불야"라는 칭호는 먼저 이연영이 그녀를 부르던 칭호라고 한다. 서태후는 부처에 대하여 아주 경건하였고, 염불하는 것을 끊이지 않았다. 어가출순할 때도 반드시 그렇게 했다. 한 해는 북경에 비가 적게 내려 가뭄이 들어, 화북지방이 모두 오곡에 해를 입는다. 습속에 따르면 이런 경우 서태후와 조정관리들은 매일 여래불에게 비내리기를 빌어야 했다. 비가 내릴 때까지. 이번에는 3일만에 바로 비가 내렸다. 이연영은 아주 흥분하여, 이 기회를 틈타 서태후를 치켜세워준다: 태후는 정만 대단하시다. 마치 부처와 같다고. 이 치켜세우는 말에 서태후는 아주 기뻐한다. 그 이후, 서태후는 이연영의 '노불야'가 되었고, 매번 말을 아뢸 때마다 그렇게 부른다. 얼마후, '노불야'라는 칭호는 소리소문없이 퍼져나가서 궁정내외, 내지 북경, 그리고 전국으로 흘러나가게 된다.


셋째, 연몽고습속설(沿蒙古習俗說). <신주일보>의 창간에 참여한 바 있는 청말민초의 문인 왕무생(王無生)은 <술암비사>에서 이렇게 말한다: "궁중에서 노불야라고 칭하는 것은 몽골의 습속을 이은 것이다."


넷째, 자가휘호설(自加徽號說). 근대의 저명한 문인 채동번은 <자희태후연의>에서 이렇게 말한다. 서태후의 60세생신때, "스스로 휘호를 더하여, 사람들에게 자신을 노불야 혹은 노조종이라고 부르게 하였다."


이상의 4가지는 모두 '노불야'라는 칭호에 대한 내력을 설명하는 것이다. 다만 그들은 모두 '노불야'라는 칭호가 서태후의 전용 혹은 독자적인 것이라고 여기는데, 사실은 이는 오해이다. 실제로, '노불야'라는 칭호는 서태후의 전용 혹은 독자적인 것이 아니다. 청나라 역대황제에 대한 특유한 칭호이다. 기실 역대제왕은 각자의 묘호, 시호, 존호가 있는 외에, 어떤 왕조에서는 황제에 대한 특별한 칭호가 있었다. 예를 들어, 송나라황제의 특별한 칭호는 "관가(官家)"이다. 명나라황제의 특별한 칭호는 "노야(老爺)"이다. 그렇다면 청나라황제의 특별한 칭호는 왜 "노불야"가 된 것일까? 이는 청나라가 여진족에 의하여 건립된 왕조이기 때문이고, 여진족의 수령에 대한 최초의 특별한 칭호는 "만주(滿柱)"였다. 그리고 "만주"는 부처 "안수(晏殊)"의 음이 변해서 만들어진 말이다. 즉 부처"길상(吉祥)"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러므려, 여진수령은 대대로 '만주'라는 칭호로 불리웠다. 나중에 혁혁한 가문, 대대로 고위직에 있던 수령도 '만주'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청나라가 건립된 후, 조정에서는 만주어 '만주'를 한어로 '불야(佛爺)'라고 번역한다. 이렇게 하여 청나라 역대황제에 대한 특별한 칭호가 된다. 서태후가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노불야'라고 부르게 한 것의 특수한 목적과 뜻은 바로 자신을 그들 남성황제와 마찬가지로 지고무상하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자신이 일찌기 꿈꾸건 "봉재상(鳳在上), 용재하(龍在下)"의 무하난 욕망을 만족시키고자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