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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그림

울렌스(Ulens): 처분하기 시작한 중국현대미술품 최대소장가

by 중은우시 2011. 3. 29.

 

: 중국경제주간

 

 

 

 

중국현대미술의 발전궤적중에서 한 외국인의 이름은 영원히 피해갈 수가 없다. 그는 바로 게이 울렌스 남작(Baron Guy Ulens)이다. 중국현대예술에는 두 명의 대부가 있는데, 국내의 대부는 저명한 기획자, 비평가인 율헌정(栗憲庭)이고, 국외의 대부는 바로 울렌스 남작이다.

 

어떤 의미에 있어서, 울렌스의 혜안이 없었다면, 아마도 오늘날의 팡리쥔(方力鈞), 웨민쥔(岳敏君), 장샤오강(張曉剛)등도 없었을 수 있다. 최소한 시장에서는 이것에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들은 여전히 아주 우수한 예술가가 되었을 것이지만, 아마도 초고가예술가가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당연히 이들 백만달러화가들이 울렌스 남작에게 가져다준 이익도 엄청났다.

 

1980년대부터, 중국현대예술을 접촉해오면서, 울렌스 남작은 중국현대예술에 대한 공헌이 가장 크고 가장 중요한 수장가라고 말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그의 일거일동은 사람들에게 방향성을 갖게 된다.

 

그런데, 이제 그가 떠나려 하는 것인가?

 

홍콩의 소더비는 최근 들어 4 3일에 거행되는 춘계경매에서 울렌스 현대예술 소장: 파효(破曉) – 현대중국예술의 근원추적이라는 제목의 경매가 벌어진다고 밝혔다. 그동안 벨기에 수장가 울렌스 남작이 소장한 106건이 중국현대예술품이 경매에 나올 것이다.

 

이 소식이 나오자, 마치 핵폭탄이 터진 것같이, 즉시 현대예술계의 주목을 끌었다. 심지어 이는 사건으로까지 불리운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울렌스가 중국현대예술을 포기했다. 중국현대예술에 출로가 있는가?” 한 벨기에 수장가가 자신의 소장품을 매각하는데 왜 중국예술시장은 이처럼 떠들썩하고 심지어 공황상태에 빠지는 것일까? 이것만 보아도 울렌스가 중국현대예술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울렌스는 중국현대예술품의 소장수량이 가장 많고 가장 중요한 해외소장가이다. 1970,80년대부터 지금까지, 그가 소장한 중국예술품은 2000점에 이른다. 그중 80%는 현대예술품이다. 중국현대예술의 F4(장샤오강, 웨민쥔, 왕광의(王光義), 팡리쥔의 4명의 예술가를 부르는 말)등 오늘날 미이 블루칩이 된 대가들은 대부분 울렌스가 최초의 구매자였고, 그들 작품을 프로모션해준 주요한 인물중 하나였다.

 

많은 사람들에 있어서, 울렌스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은 북경798예술구에 위치한 UCCA 울렌스예술센터이다. 2007년에 창립한 이래, UCCA 798의 가장 대표적인 예술기관이다. 또한 북경 심지어 전국에서 가장 활발한 현대예술장소이다. 4년동안, 이곳에서 무수한 크고 작은 예술전람회, 예술강좌 및 예술교육활동이 열렸다. UCCA는 비영리예술기구이며, 울렌스의 자금지원으로 운영되고 있다.

 

실제로, 곧 홍콩 소더비에서 진행되는 106건의 작품의 집단경매는 울렌스가 자신이 모은 중국예술품의 최초초의 매각처분은 아니다. 2009년 춘계경매때부터, 그는 계속하여 물건을 내놓았다. 그중 중량급의 소장품으로는 송휘종의 <사생진금도>(6,171.2만위안), 오빈의 <십팔응진도>(1.69억위안), 증공의 <국사첩>(1.08억위안), 진일비의 <도보>(4,043.2만위안), 유소동의 <양광보조>(683.2만위안), 장샤오강의 <혈연대가정계열>(1,680만위안), 구영의 <춘강도>(3000만위안), 하창의 <상강죽석도(5,936만위안)…

 

개략적인 통계에 따르면, 2009년부터 지금까지, 울렌스 소장품의 경매총가격은 6억위안이상이다. 비록 이익상황을 통계내기는 어렵지만, <국사첩>을 예로 들다면, 이 당송팔대가중 한 명인 증공의 작품은 1996년 울렌스 부부가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50.85만달러(당시 환율로 약 452만위안)에 구매한 것인데, 2009년에 1.0864억위안에 매각하여, 차익만 1억위안이 넘었다.

 

울렌스가 매각하는 대부분의 중국고대서화이고, 사람들이 주목하는 현대예술소장품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가 이전에 대량으로 소장품을 매각하는 것을 사람들은 그저 금융위기에 현금화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이번에 시작된 대량의 현대예숲작품 매각처분에 사람들의 마음은 불안해지지 않을 수 없다.

 

게이 울렌스 남작은 벨기에의 귀족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벨기에 안트워프에서 역사가 가장 유구한 몇 가문중 하나이다. 가족의 역사는 15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울렌스의 부친인 Jean Ulens는 전세계를 돌아다닌 외교관이었다. 모친은 골동품과 소장을 좋아했다. 가족의 영향으로 울렌스는 어려서부터 각국의 예술에 농후한 흥미를 나타내고, 중국예술에 흥미를 보인 것은 부친의 영향을 깊이 받았기 때문이다.

 

1921, 울렌스의 부친은 제1차세계대전에 참가한 후, 중국으로 파견되어 벨기에 주중대사관의 참찬이 된다. 그동안 그는 중국각지를 돌아다녔다. 전란으로, 시장에는 각종 골동품과 문화재가 쏟아져 나왔다. 그 당시 중국에 와 있던 다른 외교관들과 마찬가지로, 울렌스의 부친은 중국예술품을 적지 않게 구매하여 벨기에로 돌아갔다.

 

이렇게 하여, 게이 울렌스는 어려서부터 중국예숲품에 둘러싸여 살았다. 그가 가장 먼저 소장한 것은 부친이 그에게 선물로 준 중국도자기 몇 점이었다.

 

1960년대부터, 게이 울렌스는 가족사업을 물려받아, 세계최고수준의 골동상, 예술품브로커, 예술품구매자들과 접촉하기 시작한다. 그중에는 Christian Deydier, Giuseppe Eskenazi와 같은 당금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동방골동상도 들어 있다. 이렇게 하여 울렌스는 최고급의 아시아골동품을 접촉하게 된다. 그는 1970년대부터 연이어 중국의 고화, 자기와 골동품을 구매한다.

 

그외에 일부 화랑주, 비평가, 학자와 예술가들에게서 그는 많이 배운다. 예를 들어 미국에 거주하는 저명한 중국현대 및 전통예술품 소장가인 우이루(吳爾鹿) 선생, 중국전위예술을 극력 추진한 국제적인 저명한 예술평론가, 기획자 장송런(張頌仁) 선생등이 그들이다. 우리루는 뉴욕에서 가장 유명한 소장가중 하나인 Robert Hatfield Ellworth(중국명 安思遠)의 소장품을 매입한 사람이고, Ellworth는 석유왕 록펠러의 소장품을 매입한 사람이다.

 

1987년 북경을 처음 방문하면서 울렌스는 중국예술품소장의 전환기를 맞이한다. 그는 현대예술가의 작품을 대량으로 소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울렌스는 당시 이렇게 회고한다. 그가 구매한 첫번째 중국현대예술작품은 중국시인 애청의 아들인 이헌이 그린 티벳어린이였다. 당시 애헌의 작품활동조건은 아주 열악했고, 그저 25와트의 등 아래에서 그림을 그렸다.

 

그후, 상인인 울렌스는 주말이면 많은 중국현대예술가의 화실과 집을 찾아가서 그림을 보았다. 바로 그때, 그는 많은 현대예술계의 첫째 둘째가는 명사를 만난다. 당시 그들의 대부분은 체제외 인사였다. 그러다보니 화가들의 생활은 아주 힘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집단주의에서 해방된 후 창작에 활력이 있었다.

 

울렌스는 2000년에 사업을 그만둔 후, 부인인 Myriam Ulens를 데리고 문화사업에 투신한다. 2002년에 스위스에서 울렌스기금회를 조직하고, 중국 및 유럽에서 거행되는 현대예술전람회를 후원한다. 긜고 박물관에 기금회의 소장품을 대여전시하였다. 이를 통해서 중국현대예술을 보급했따. 2007년 북경798예술구에 울렌스현대예술센터(UCCA)를 설립하여, 중국예술가들에게 중요한 전람장소를 마련해주었다. 그의 중국현대예술에 대한 공헌은 지대하였다.

 

2000, 울렌스는 가족사업에서 은퇴하여, 부인 미리암과 함께 모든 힘을 예술품소장과 자선사업에 쏟기로 결정한다.

 

이번에 울렌스가 모두 106건의 박물관급 현대중국예술의 걸작을 내놓았는데, 경매금액은 1억에서 1.3억홍공달러가 될 것이다.” 소더비중국 및 동남아지역 고위동사이며 현대아시아예술부 책임자인 Evelyn Lin(林家如) 여사의 말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들 작품의 대부분이 1980년대중반에서 1990년대 초반에 창작되었다는 것이다. 중국현대예술발전의 초기이고, 많은 현대예술의 대표인물들의 초기작품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개혁개방초기의 중요한 시대의 아주 좋은 증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번 제목을 근원추적이라고 하게 된 것이다.”

 

소더비는 이번 경매의 북경예비전시를 당연하게도 북경UCCA로 잡았다. “적지 않은 작품은 ‘85미술운동시기에 창작되었다. 그리고 그중 적지 않은 작품은 모두 1989년 율헌정이 기획한 중국현대예술대전에 참가한 것들이다.”

 

임가여가 말한 ‘85미술운동‘85신조(新潮)’라고도 하는데, 중국현대예술발전의 중요시기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때를 중국현대예술발전의 원점으로 잡는다. 다만, 후인들이 이를 신격화하거나 요마화하더라도 오늘날 중국현대예술에 끼친 영향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85신조가 가져온 순간적인 고조(高潮)’과 비교하면, 1989 2월 중국미술관이 개최한 중국현대예술대전은 중국현대예술이 처음으로 진정한 고조(高潮)를 맞이한 것이다. 그것은 중국현대예술사상에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사건이다. 당시에 활약하던 거의 모든 예술가들이 이 전람회에 참가했다.

 

1990년대에 들어선 이후, 정치, 사회, 경제등 환경에 거대한 변화가 발생함에 딸, 전체 현대예술집단은 심각한 분화를 겪는다. 일부는 체제내로 들어가고, 일부는 자유예술가신분으로 북경원명원, 동촌 등지에 자리잡는다. 나중에 여러 번 옮기다가 상당한 사람들은 아예 포기하게 된다.

 

임가여의 소개에 따르면, 이번 경매의 가장 주목할 점은 평가금액이 가장 높은 작품인 장샤오강의 1988년 창작품 <생생식식지애>(삼연작)이다. 평가금액은 2500만 내지 3000만홍콩달러이다. “이 작품은 장샤오강 예술생에에서 초기에 가장 중요한 대표작이다. 그림은 프랑스 후기인상파의 영향을 깊이 받았고, 이미 예술의 새로운 품격을 찾기 시작했다. 그의 화풍은 새로운 모델을 창조했으며, 이런 방식은 나중의 대가정시리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외에 이 삼연작에는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사실 그것들은 두 번의 경매에서 나누어 낙찰받은 것이다. 울렌스 선생은 이를 나누어 구매하였고, 비로소 작품이 완전하게 관중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비록 한꺼번에 백여점의 작품을 내놓지만, 울렌스는 미국의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이후 시기를 보아서 그가 보유한 1000여점의 중국예술품을 매각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 원인에 대하여 울렌스는 이렇게 말한다. 한편으로 자신의 나이가 이미 많고, 자녀들이 소장에 그다지 흥미를 나타내지 않으므로 그는 자신의 소장품을 후손에 물려주고 싶지 않다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 현재 예전의 ‘85신조의 예술가들이 이미 세계적인 예술가로 성장하여,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자원과 플랫폼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비교하자면, 현재의 신흥예술가들은 여전히 후원과 관심이 필요하다. 그는 앞으로 젊은 예술가의 창작에 더욱 관심을 가지고 싶다고 한다. 당초에 ‘85미술운동시대의 예술가들을 주목했던 것과 마찬가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