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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그림

중국 당대화가의 그림은 초고가의 가치가 있는가?

by 중은우시 2013. 11. 9.

글: 한호월(韓浩月) 

 

 

 

2008년 웨민쥔(岳敏君)의 <굉굉(轟轟)>이 5,408만홍콩달러에 낙찰되었고, 같은 해 류샤오동(劉小東)의 <온상(溫床)>이 인민폐5,712위안에 거래되었다; 2011년 장샤오강(張曉剛)의 <혈연:대가정1호>는 6,562만홍콩달러에 낙찰되었고, 금년 10월 5일 쩡판즈(曾梵志)의 <최후의 만찬>은 홍콩 소더비경매에서 1.8억홍콩달러의 가격에 팔려, 아시아 당대예술품거래기록을 갈아치운다.

 

"기록갱신"이라는 말은 당대화가작품의 경매가격에서 자주 나타난다. 천만의 판매가격이라는 문턱을 넘어선 후, 당대화의 거래액은 이미 '롤러코스트'라는 말로는 형용할 수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롤러코스트는 높을 때도 있고 낮을 때도 있는데, 당대화는 계속 가격이 오르기만 하여, 마치 하늘로 쏘아올린 로케트와 같기 때문이다. 최초의 놀라움 내지 약간의 자부심이 지나간 후, 초고가를 갱신하는 당대화는 계속하여 의문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중 가장 큰 두 가지 문제는 다음과 같다: 당대화는 도대체 얼마의 가치가 있느냐? 당대화는 왜 이렇게 비싸게 팔리는가?

 

이 두 가지 문제는 기실 간단하게 당대화의 가격과 가치로 귀결된다. 당대화 가격의 급등은 여러가지 원인이 있다. 예를 들어, 화가가 해외로 진출하여 용감하게 자신을 프로모션하고, 예술품시장을 지속적으로 개방하여, 외국의 투자자들이 국내에서 자유롭게 거래하며, 명백히 경영적인 색채를 지닌 화랑이 대도시에 다시 나타났으며, 수요가 있으면 매매가 있고, 매매가 있으면 투자와 소장이 있다. 당연히 투기와 조작이 있을 수 있다. 당대화의 휘황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것이라는 것은 모두 시장이 만들어낸 사실이다.

 

당대화의 가치에 대하여, 중국의 보통 소장자 내지 방관자들의 태도는 왜 반 고호의 작품을 사는 가격으로 중국당대화를 사야하느냐는 것이다. 왜 치바이스(齊白石), 쉬베이홍(徐悲鴻)등 사망한 유명화가의 명작을 사시 않고 아직 살아있는 중년화가의 작품을 다투어 사느냐는 것이다. 이런 관념이 보편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중국인의 예술품소장에 대한 객관적인 인식 내지 장기적 투자의식이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역사기억과 생활방식에 기하여 만들어진 투자습관, 심미습관이 모두 과거시대에 머무르고 거기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공중의 당대화에 대한 인식은 시대기억과 사상장애를 벗어날 수 없다. 그렇다면, 당대화가는 자신의 제한을 벗어나고 자신의 한계를 초월할 수 있을까? 쩡판즈의 <최후의 만찬>은 13명의 소선대원(少先隊員)이 홍령건(紅領巾)을 매고 수박을 먹는 화면이다. 잘라진 수박은 갈라진 머리갔고, 소년의 손에서 흐르는 수박즙은 마치 선혈과 같다. 원래 활발한 얼굴을 해야 할 아이들은 하나같이 차갑고 살의을 지닌 어른의 얼굴을 하고 있다. 다빈치의 원작에서의 배신자 유다의 위치에 쩡판즈는 금황색의 넥타이를 맨 소년을 배치했다. 이에 대한 그의 해석은 "금색 넥타이는 금전을 대표하다. 서방자본주의를 대표한다. 넥타이를 매는 것은 1980년대에 중국에 보급되기 시작했다." 쩡판즈의 말에 따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의 뜻은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그림의 매입자는 믿을 것인가? 그것의 중국내 감상자들이 믿을 것인가? 모든 사람들이 보고는 알아차릴 화면에 대하여 모두가 믿지 않을 말을 하는 것. 이것은 중국예술가에게 있어서 너무나 익숙한 일이다.

 

홍령건과 삼도강(三道杠)은 쩡판즈 그림의 중요한 요소중 하나이다. 이것은 그가 소선대원이 되고 싶었지만 될 수 없었던 소년시대의 경력과 무관하지 않다. 이런 기술은 듣기에 우스룬 것같지만, 당금 현재중국의 '뭐가 부족하면 뭐를 보충한다'는 현상을 연상할 수 있고, 마음 속으로 쩡판즈의 창작동력이 왜 단일하지만 오래 지속되는지 알 수 있다. 이전에 우리는 굶는 것이 겁났다. 그래서 식탁위를 풍성하게 차렸다. 산해진미를 다 먹지 못해서 버려도 전혀 아까워 하지 않았다. 이전에 우리는 물질이 부족했다. 그래서 해외로 나갔을 때 가장 중요한 일은 줄을 서서 물건을 사는 일이다. 혹은 현금 혹은 카드를 긁어서 상점내의 모든 명품을 싹쓸이 했다. 신용이 사치품이 되었을 때 신용을 소리높여 외쳤다. 할머니가 길바닥에 쓰러져도 아무도 일으켜 세워주지 않게 되자 도덕을 호소했다. 이런 사회환경은 쩡판즈의 소선대원 주제를 계속할 수 있게 해주었다. 강렬한 실망과 참혹한 표현으로 사람을 자극시켜 과거와 현실간에 진정한 이별을 하는 것이다.

 

쩡판즈의 초고가 그림에 대하여, 네티즌들의 반응은 선명하지만 모순이 많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쩡판즈의 <최후의 만찬>은 100원을 내라고 해도 사지 않겠다." 이유는 "나는 그것을 보았기 때문에다. 나는 그 시대에 대해 깊이있고, 고통스러우며, 진실한 기억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 이 그림이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 얼마의 가치가 있는지는 나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이 네티즌은 동시에 이런 말도 했다. "작자는 나와 동년배이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당시 홍령건이 무엇을 대표하는지, 오성홍기의 한 귀퉁이를 대표한다. 모두 알고 있다. 오성홍기의 색깔은 무수한 혁명선열의 선혈을 대표한다는 것을." 이런 평가는 표면적으로 보기에 극력 그림의 가치를 부인하는 것같지만, 유사한 평가가 수백수천개가 나타난다는 것은 바로 <최후의 만찬>의 진정한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정치와 냉막한 거리를 유지하지만, 그림의 모든 문리(紋理) 및 화면 배후에 숨은 사상은 미친듯이 정치를 향한다는 것도 초고가 현대화의 공통된 특징중 하나이다. 의문을 나타내는 사람은 계속하여 말한다. 외국시장에서 중국당대화를 좋아하는 것은 이들 그림이 서방의 심미관에 맞기 때문이고, 중국의 추악하기 그지없는 일면을 드러내기 때문이라고, 이런 주장은 초고가 당대화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장이모우(張藝謀)의 <붉은 수수밭(紅高梁)>등 영화, 자장커(賈樟柯)의 일련의 작품 그리고 노벨상수상자인 모얜(莫言)의 소설까지 앞뒤로 모두 이런 여론의 도마에 올랐었다. 도대체 정치가 이들 중국예술가의 작품을 성공시켜준 것인가? 아니면 중국예술가의 작품이 일단 정치를 벗어나면 한푼의 가치도 없는 것인가? 이것은 쉽게 답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닌 듯하다.

 

미국의 <타임>지에서 표지에 팡리쥔(方力鈞)의 하품하는 대머리를 실은 후, 그는 신속히 1990년대 예술계의 대표적인물중 하나가 되었다. "큰 머리", "큰 입", "멍청한 웃음"을 상징으로 하는 대머리 장난꾸러기의 이미지는 팡리쥔의 대명사가 되었다. 오늘날 북경 798공장에는 여전히 팡리뷘의 작품을 모방한 짝퉁작품이 넘쳐난다. 이름을 날리고 돈을 버는 것은 당대화가의 두 가지 성공표준이 되었다. 돈에 대한 열정을 전혀 감추지 않는 것도 당대저명화가의 표지가 되었다. 장샤오강의 대가정시리즈, 류샤오동의 민공시리즈, 웨민쥔의 웃는 얼굴 시리즈....당대화가는 모두 자신의 창작속에 대표적인 개성을 찾았다. 이들 개성은 그들에게 명예와 돈을 가져다 주고 있고, 이로 인하여 구설수에 오르고 논쟁이 되기도 한다. 그림 자체의 가치에 대한 토론은 영원히 수면아래에 있다. 수면의 위에서 시끄러운 것은 영원히 가격, 가격 그리고 가격이다.

 

대표적인 몇몇 당대화가들과의 인터뷰에서 그들은 벌거벗은 영혼을 드러내고, 상처를 얘기하고, 솔직한 태도로 얘기하여 그들에게 탄복과 감상의 뜻이 생겨나게 만든다. 비록 몸값이 아주 비싼 화가이지만, 그들의 집단적인 의식저층에는 여전히 깃발식으로 자신의 출신, 심미, 가치관을 드러내고, 이로 인하여 모범적인 작용을 하여, 무수한 뒤따르는 자들이 오기를 바란다. 그들을 따라 상처에서 벗어나고, 이들 상처 속에 담긴 빗물에서 자신이 계속 그림을 그려나갈 에너지를 얻기를 바란다. 저명한 화가의 풍광과 비교하면, 많은 재능있고 이름없는 화가들은 거대한 생존난제에 부닥치고 있는가? 시류에 영합하고 경매에서 잘팔릴 작품을 그려서 시장이 인정하는 성숙한 풍격의 작품을 만들 것인가? 아니면 독립성을 유지하여 자신의 시대에 대한 관찰과 깨달음을 가지고 그들 눈앞에 놓인 빵과 꽃을 선택할 것인가? 여기서 인정해야 할 점은 초고가그림이 하나하나 나오면서, 더많은 화가들은 더욱 실리적인 빵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당대화의 초고가가 그 가치와 등호를 이루느냐 여부는 그 자체로 거짓명제이다. 가격이 있는 작품은 당연히 가치가 있다. 당연히 여기의 '가치'는 특별히 '투자가치'라고 말할 수 있다. 다만 가치있는 그림이라고 하여 반드시 가격이 있는 것은 아니다. 번영한 것처럼 보이는 당대화시장에서 더욱 필요한 것은 가치인정능력이 있는 사람이다. 단지 돈을 내놓을 수있는 사람이 아니라. 젊은 화가는 출로가 필요하고, 초고가그림의 화가는 아마도 길을 비켜주어야 할지도 모른다. 후배들에게 생존기회와 공간을 좀더 나눠주어야 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