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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민국 초기)

중공 "육대(六大)"는 왜 모스크바에서 개최되었는가?

by 중은우시 2013. 11. 9.

글: 섭영렬(葉永烈)

 

2013년 2월 23일 중공중앙총서기, 국가주석 시진핑은 모스크바에서 중국공산당 제6차전국대표대회기념관의 건립기공식에 참석했다.

 

시진핑은 중공 "육대"회의장소는 중국혁명역사에서 중요한 장소이며, 중국-러시아 양국인민의 심후한 우의를 대표하는 중요한 상징이라고 강조했다. 우리가 중공 "육대"기념관을 건립하는 것은 역사를 기억하고, 중국-러시아의 전통적인 우의를 계승 발전시켜 양국간에 대대로 우호관계가 유지되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당시, 중공"육대"의 대표들은 극도의 비밀을 유지한 상황하에서 소련의 모스크바로 갔다.

 

1928년 5월 9일, 중공중앙은 이유한(李維漢), 임필시(任弼時), 나등현(羅登賢)의 세 사람을 국내에 남아 있으면서 임시로 업무를 주재하게 했다. 5월 상순,중순경 중공중앙의 많은 책임자들은 속속 상해를 거쳐 소련으로 간다. 100여명의 중공대표는 속속 소련에 도착한다.

 

중국공산당에 있어서, "육대"는 국외에서 개최되었다. 이것은 예외이다. "일대" "이대" "사대"는 상해에서 개최되고, "삼대"는 광주에서 개최되었으며, "오대"는 무한에서 개최되었다. 국내가 백색공포에 휩싸여 있어, "육대"는 부득이 당시의 '홍색보루'인 소련에서 개최한 것이다.

 

중공 '육대'는 1928년 6월 18일부터 7월 11일까지 모스크바의 교외에 있는 스베니고르드진의 은색별장(원래는 귀족장원임)에서 개최되었고, 거의 한 달간 지속된다. "좌경"맹동주의를 제지하여 이때의 중공당원은 4만여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6월 12일, 중공 "육대"개최이전에, 스탈린은 중공의 주요책임자들을 접견한다. 스탈린은 담화에서 중공 "육대"를 기조를 정해준다. 구추백의 "좌경"맹동주의를 비판한 것이다. 1년전의 중공 "오대"에서는 진독수의 "우경"투항주의를 비판했었다.

 

진독수와 구추백은 모두 지식분자이다. 한 명은 "우", 한 명은 "좌"였다. 지식분자의 "동요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비추어졌다. 코민테른은 다시 한번 강조했다. 반드시 노동자출신의 인물이 중공의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고. 그리하여 향충발(向忠發)이 선임된다. 향충발은 노동자출신인 것이외에, 그가 중국공농대표단을 이끌고 온 이래, 코민테른, 스탈린, 부카린과 밀접하게 접촉했다. 향충발은 중공중앙총서기가 된다.

 

중공"육대"에서 선발된 정치국위원으로는 향충발, 소조징, 항영, 주은래, 채화삼, 구추백, 장국도이다. 그중 향충발, 소조징, 항영, 주은래, 채화삼이 상임위원이다. 정치국후보위원으로는 이입삼, 관향응, 나등현, 팽배, 양은, 서석근, 노복탄이 선임된다.

 

항영이 정치국에 들어간 것은 그가 옛날에 직포노동자였다는 겄때문이다. 그의 원래 이름은 항덕융(項德隆)인데, 1922년 중공에 가입했고, 경한철로 2.7대파업의 지도자중 한 명이다. 그는 노동자운동에 종사햇다. 그는 상해총공회당단서기, 전국총공회부위원장, 중공중앙직공운동위원회서기를 지냈다.

 

정치국 후보위원에 진입한 나등현도 노동자운동에 종사한 사람이다. 일찌기 홍콩노동자대파업에 참가한 바 있다. 양은은 1922년 중공에 가입했고, 월한철로총공회, 광구철로총공회, 광삼철로총공회를 이끌었다. 1925년 그는 성항대파업에 참가하여 지휘한다.

 

스탈린은 비판적으로 말했다. 중공은 아직 구추백, 장국도와 같은 몇몇 대지식분자에 의하여 지도되고 있다. 당연히 더 많은 노동자들을 당중앙에 진입시켜야 한다. 그리하여, 중공 "육대"에서 선임된 중앙위원과 후보위원 36명중에서(중앙위원 23명, 후보위원 13명), 21명이 노동자이다. 운대영(渾代英), 유소기등은 진입하지 못한다.

 

코민테른도 자신의 업무상 실책을 의식했다. 중공지도자의 실책을 의식했다. 그것의 대부분은 코민테른에서 중국에 파견한 대표가 잘못했기 때문이라는 것도 인식했다. 진독수의 "우경"은 라이(羅易), 포라정(鮑羅廷)의 우경과 큰 관련이 있다. 구추백의 좌경은 많은 정도에서 나명납자(羅明納玆)의 '죄경'과 관련이 있다.

 

부카린은 이렇게 지적한다: "코민테른의 대표는 개개인들이 모두 시험을 거친 것이 아니다. 중국대혁명을 지도하면서, 그들은 이런저런 실수를 저질렀다.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는 이 문제를 토론했다. 대표를 파견하지 않는 것이 잘못을 저지르는 대표를 파견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코민테른은 새로운 결정을 내린다. 중국공산당의 두 대표를 모스크바로 보내고, 코민테른은 이 두 대표를 통하여 중국공산당과 연락하는 것이다.

 

연구를 거쳐, 구추백, 장국도 두 사람의 '대지식분자'를 모스크바에 남긴다. 중국공산당의 코민테른주재대표가 된다. 이렇게 하여, 이미 정치국 상임위원에서 배제된 구추백은 국내의 지도자지위에서 완전히 멀어지게 된다. 이렇게 하여 그는 중공당내의 제일인자의 지위가 끝났다.

 

구추백, 장국도 두 사람을 제외하고, 등중하, 여비는 중화전국총공회 적색직공국제주재대표를 맡는다. 왕약비는 중국농회의 농민국제주재대표가 된다. 얼마 후, 육정일은 다시 중국공청단의 소년공산국제주재대표가 된다. 그들은 모스크바에서 중국대표단을 구성한다.

 

나중에, 코민테른(공산국제)은 다시 대표를 중국으로 파견한다. 그러나, 코민테른에서는 대표는 더 이상 중국공산당에 대한 지도작용을 하지 않고, 단순이 연락인과 전달자의 작용만 한다고 선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