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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분석/중국역사의 기록

여자화장실이 없던 시절

by 중은우시 2013. 11. 10.

글: 이개주(李開周) 

 

요즘 남자가 여자화장실에 들어간다면, 고도근시이거나 변태일 것이다. 만일 다른 사람들에게 발견되면 분명히 얻어맞으며 끌려나올 것이다. 다만, 민국시대에 남자가 여자화장실에 들어가는 것은 자주 있던 일이다. 믿기지 않으면 1931년 6월 5일자 <월화보>, 1931년 6월 8일자 <광주민국일보> 1931년 6월 12일자 <중앙일보>를 보면 필자가 헛소리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왜 민국시대의 남자들은 여자화장실에 자주 들어갔을까? 집단변태인가? No.  집단근시인가? No. 잘못 들어간 것일 뿐이다. 알아야 할 것은 민국중엽이전에 중국이 자랑스러워하는 그 어느 왕조때도, 도시의 공공화장실은 모조리 남자화장실이고, 여자화장실은 한칸도 없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1930년대 각 대도시에 여자화장실을 만들기 시작한 후, 경험주의의 착오를 잘 범하는 남자들은 여전히 예전처럼 화장실만 보면 들어갔다. 그래서 이런 난감한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여자들은 화장실이 없으면 어떻게 문제를 해결했을까? 마통(馬桶)을 썼다. 미 마통은 물을 긷는 마통이 아니라, 나무로 만들거나 혹은 함석으로 된 분통(糞桶)이다. 신경을 쓴 마통은 덮개도 있었다. 그렇지 않은 마통은 덮개가 없는 경우도 있다. 구식주택에도 마통을 놓아두는 사적공간은 없었다. 아가씨들은 마통을 자신의 규방 안에 놔둘 수밖에 없었다. <홍루몽>의 설보채의 형무원, 임대옥의 소상관은 듣기에 아주 우아해 보이지만, 실제로 침실의 한쪽 구석에는 한 두개의 냄새나는 것이 놓여있다. 아가씨들은 비위가 약하여 소화계통에 문제가 생길까봐, 시녀로 하여금 향에 불을 붙이게 하고, 천으로 된 가림막을 했다. 아가씨뿐아니라, 시녀와 할멈들도 마통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대갓집에는 법도가 있어서 화장실은 단지 남자들만 쓸 수 있었다. 여자가 화장실을 쓰면 풍기를 해친다고 여겼다. 믿지 않으면 대관원을 돌아보라.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살았지만, 동북쪽 귀퉁이에 작은 화장실이 하나 있을 뿐이다. 유모모, 향릉과 이미 남성화한 가보옥은 절대로 화장실에 가지 않았다. 그녀(그)들은 집안에서 놀다가 힘들고 방으로 가서 마통을 찾기 귀찮으면, 가산의 동굴속이나 꽃이나 나무덤불속에서 대소변을 해결했다. 끝내고 나면 하인을 시켜서 청소하게 했다. 민국전기의 일부 대학의 여대생은 기숙사건물에 화장실을 찾을 수 없었다. 그녀들의 '화장실'은 바로 침대 아래에 숨겨둔 마통이다. 돈많은 여학생은 일하는 아줌마를 데리고 와서 공부했다. 이들 아줌마들의 주요한 일중의 하나가 바로 아가씨들의 마통을 치우는 일이었다.

 

바깥에 화장실이 없다면, 마통을 그저 집안에서만 쓸 수 있다면, 집밖으로 나갔을 때는 어떡해야 하는가? 방법이 있다. 마통을 가지고 가는 것이다. 민국의 여자영화배우인 진연연(陳燕燕)이 자동차를 타면 반드시 가지고 가는 것이 2가지 있다. 하나는 박분합(撲紛盒), 하나는 마통이었다. 진연연의 방법은 지금도 쓸 수 있을 것이다. 북경처럼 교통이 막히는 도시에서는 조수석에 마통을 하나 놓아두면 절대로 유비무환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