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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분석/중국역사의 기록

중국고대의 도청(盜聽) 시스템

by 중은우시 2013. 6. 26.

글: 오구(吳鉤) 

 

명나라초기에 두 명의 관리가 있다. 모두 송(宋)씨이다: 송렴(宋濂). 송눌(宋訥). 두 사람은 나이도 비슷했다. 송렴은 1310년에 태어났고, 송눌은 1311년에 태어났다. 명나라 홍무연간 송렴은 <원사(元史)>를 편찬하는 총채관에 임명되고, 송눌은 국자감 제주(지금으로 말하면 북경사범대학교 총장)가 된다.

 

어느 날, 송렴은 아마도 즐거운 일이 있었는데, 몇몇 친구를 불러서 술을 마시며 즐겼다. 술을 취하도록 마셨지만, 송렴은 사람됨이 조심스러워, 술에 취했지만 헛소리는 하지 않았다; 송눌은 기분좋지 않은 일이 있었다. 그의 다기(茶器)를 국자감의 몇몇 학생이 깨뜨려 버린 것이다. 아마도 그 다기는 귀한 것이었는지 송눌은 화가 많이 났다.(<명사>에는 이 두 건이 같은 날 발생한 것으로 하지 않았지만, 서사의 편의상 여기서는 함께 쓰기로 한다)

 

다음 날 조회때, 주원장은 미소를 지으며 송렴에게 묻는다: "송애경, 어제 저녁에 술을 마셨는가? 취하도록 마셨는가?" 송렴은 속이지 않고 말한다: "그렇습니다. 폐하." 주원장이 다시 묻는다: "손님은 누가 있었는가?" 송렴은 역시 사실대로 대답한다. 주원장은 그의 대답을 듣고 아주 기뻐하며 말한다: "진실되구나. 그대는 짐을 속이지 않았다." 송렴은 그 말을 듣고 온 몸에 식은 땀을 흘린다. 속으로는 자신이 황상을 속이지 않기를 잘했다고 여겼다. 원래, 황제는 일찌감치 '사람을 몰래 보내어 정탐하도록' 했던 것이다. 암중으로 정보원을 보내어 송렴을 감시했다. 송렴이 손님을 불러서 술을 마신 이야기를 하나하나 주원장에게 고한 것이다. 만일 송렴이 한 마디라도 거짓을 고했더라면, 아마조 즉시 기군지죄로 목을 부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당시 주원장이 목을 날린 신하가 몇 명인지는 그 수를 헤아리기조차 어렵다. 한동안,  대신들은 매일 아침 조회에 나가기 전에 처자식과 고별을 했고, 후사를 부탁했다. 조회에 나간 후 황제에게 무슨 이유론가 붙잡여 들어갈 수 있었고, 그렇게 되면 유언도 남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주원장은 다시 웃으면서 송눌에게 묻는다: "송애경, 어제 당신은 왜 화를 냈는가?" 송눌은 속을 깜짝 놀란다. 그래서 사실대로 고한다: "어제 학생이 다기를 깨트렸습니다. 저는 마음 속으로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다고 생각하여, 화가 났었습니다. 폐하께서는 어찌 그 일을 아시는지요." 주원장이 손을 들어 태감에게 그림 하나를 가져오게 하여 송눌에게 보여준다. 그림 속의 인물은 바로 송눌이었다. "위좌(危坐, 단정하게 앉다), 유노색(有怒色)". 송눌은 바로 꿇어엎드려 황은에 감사했다. 원래 주원장은 그림을 빨리 그릴 수 있는 특무를 보내어 송눌을 감시했던 것이다. 특무는 숭눌이 화를 내는 모양을 생생하게 그림으로 그려서 황제에게 보고했던 것이다.

 

이 두 가지 사건은 명나라때의 도청시스템의 발달을 보여준다. 당시 아마도 대신들의 곁에는 모조리 간첩이나 정보원이 매복하여 감시하고 있었을 것이다. 주원장은 원래부터 의심이 많았다. 수하의 관리와 군대에 대하여 안심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감시하는 이목을 많이 심어두었다. 이들 밀탐은 정부에 예속된 것이 아니라, 직접 황제에게 책임졌다. 매일 그들은 대신들의 동향과 사생활의 상황을 탐지하여 모조리 황제에게 보고했던 것이다.

 

이목을 심어놓고, 백성과 신하를 감시하는 것은 주원장의 독창이 아니다. 중국역사상 전쟁이 빈번하고 정치투쟁도 계속되어, 군사안전 및 정치안전의 필요에 따라, 일찌감치 도청하는 정보요원이 나타났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4대미인"중ㅇ서 두 사람이 바로 그러한 정보요원이다. 서시는 월나라가 오왕 부차에게 심어놓은 간첩이었고; 초선은 왕윤이 동탁과 여포의 곁에 심어놓은 간첩이었다. 전국시대, 각 나라간에는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간첩조직이 없을 수 없었다. <육도>에는 중국고대의 간첩조직에 대하여 규정하고 있다:

 

"이목(耳目) 7인, 주로 적군과 아군 사이를 오가면서 적국의 언론을 탐지하며, 변화를 관찰한다. 각국의 반응과 군대상황을 수집한다.

우익(羽翼) 4인, 주로 대외에 아군의 전적을 선전한다. 명성이 사방에 떨치게 만들어, 적국의 군심을 동요하게 만들어 적국의 사기를 약화시킨다.

유인(遊人) 8인, 주로 적국의 사악한 행위를 탐지하고, 변화를 기다리며, 적국의 인심을 흔들고, 적국의 의도를 관찰한다. 이들을 간첩이라 한다."

 

진(秦)나라이후, 역대왕조는 모두 정부에 정보기구나 정보인원을 두었다. 이들은 적국의 군사거동과 백성과 신하의 일들을 감청하는 업무를 담당했다. 예를 들어, 한(漢)나라때에는 "직지수의사자(直指繡衣使者)"를 두어, 관리와 왕공귀족의 위법행위를 감찰하는 대권을 부여했고, 필요할 때는 군대를 움직이고 관리를 주살할 권리까지 부여했다. 당(唐)나라때에는 무측천이 내정 "여경문(麗景門)"내에 감옥을 두어 내준신(來俊臣)등 혹리로 하여금 사건을 처리하게 했다. 여경문으로 들어간 자는 100명에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다.다시 사람들은 여경문을 발음이 같은 "예경문(例竟門)"으로 불렀다. 그 뜻은 이 귀문관은 들어갈 수만 있지 나올 수는 없다는 뜻이다. "예경문"은 신하들을 감시하는 기능도 있었다. 내준신이 쓴 책중에 "나직경(羅織經)"이라는 책이 있는데, 이것은 '특무행동가이드라인'이라고 할 수 있다. 송(宋)나라때의 황성사(皇城司)도 특무기능을 수행했다.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황성사는 믿을만한 병졸 40명을 경성에 보내어 감시하게 하였다". 관료와 민간의 동향을 감시했다. 그러나 황성사는 규모가 적었다. 송나라황제들은 "황성사가 백성들을 겁주고 교란시킬까"과 우려하여 그 권력을  제한했었고, 집법권은 부여하지 않았다.

 

명(明)나라에 이르러, 특무계통과 도청네트워크는 돌연 고도로 발달한다. 주원장은 먼저 "검교(檢校)"를 설립하는데, 이는 비밀경찰과 유사했다. 심복인 문무관리가 임명되었다. "전문적으로 경성내의 크고 작은 관청의 관리들의 불공정하고 불법적인 일 및 소문등을 들어서, 일일이 모두 보고했다." 그후 다시 방대한 특무기구를 설립하는데, 속칭 "금의위(錦衣衛)"인 "금의친군도지휘사사(錦衣親軍都指揮使司)"이다. 금의위는 관리와 백성의 감찰, 체포, 심문권한을 보유했다. 금의위는 직접 황제에 책임졌고, 다른 정부기관에서 독립되었다. 수령은 "도지휘사"이고, 그 아래 "도휘동지" 2명, "지휘첨사" 2명, "진무사" 2명, "천호(千戶)" 14명이 있고, 그 아래에 부천호, 백호, 시백호, 총기, 소기등 약간의 두목이 있었다. 다시 그 아래에는 보통이 금의위 밀탐이 있었는데 이들을 "역사(力士)", "교위(校尉)"라고 불렀다. 전성기때, 금의위 밀탐은 5,6만명에 이른다. 이목이 천하에 퍼져 있었다. 송렴과 송눌을 감시한 것은 아마도 금의위 밀탐과 검교일 것이다.

 

주원장에 배치한 도청시스템은 거의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명나라초기 전재(錢宰)라는 노신이 있었다. 황제는 그를 <맹자절문(孟子節文)>을 편집하도록 하였는데, 일이 힘들자 전재는 시를 하나 읊어서 마음 속의 울적함을 토로한다: "사고동동기착의(四鼓咚咚起着衣), 오문조견상혐지(午門朝見尙嫌遲), 하시득수전원락(何時得遂田園樂), 수도인간반숙시(睡到人間飯熟時)"(사고(사경, 지금의 밤2시-4시)의 북소리가 울리면 일어나서 옷을 입고, 아침 조회에 늦지 않을지. 언제나 전원으로 돌아가서 즐거움을 누리고, 아침밥이 다 되었을 때까지 잠을 자볼 수 있을까). 다음날, 전재가 조회에 나가자, 주원장은 웃으면서 그에게 말한다: "전애경, 어제 저녁에 좋은 시를 지었더군. 그러나 짐은 그대보고 늦게온다고 뭐라고 한 적은 없다. '오문조견상우지(午門朝見尙憂遲)'로 바꾸는게 어떻겠는가." 전재는 놀라서 오줌을 지릴 정도였다. 그는 죽어라 머리를 땅바닥에 박으며 용서를 구한다. 주원장은 그러나 대범하게 말했다: "짐이 오늘 너를 일찍 보내줄테니 푹 잠을 자거라" 그리고 얼마지나지 않아, 주원장은 전재를 퇴직시켜 고향으로 돌아가서 말년을 보내게 해준다(명나라사람의 필기 <수동일기>참조)

 

주원장이 만든 금의위 특무계통은 아주 방대했다. 그러나 그의 자손들은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았는지, 연이여 몇 개의 도청네트워크를 만든다: 명성조 주체는 영락18년(1420년) "동집사창(東緝事廠)"(속칭 동창(東廠))을 설치하고; 명헌종 주견심은 다시 성화13년(1477년) 동창외에 서창(西廠)을 증설한다; 명무종때는 대환관 유근이 정치를 독단하며 다시 "대내판사창(大內辦事廠)"(속칭 내창(內廠))을 만든다. 삼창(三廠)은 모두 환관이 통솔했다. 서창과 내창은 폐지되고 다시 설치되고 했지만, 동창은 명왕조가 끝날 때까지 남아있게 된다.

 

금의위의 정보네트워크는 이미 아주 발달해 있었다. 삼창의 감시기술은 '공포'로 형용할 수 있을 정도였다. <명사>의 기록에 따르면, 명희조때, 태감 위충현이 동창제독이 된다. "민간에서 숨어서 하는 말이 위충현에 거슬리면 바로 도륙당했고, 피부를 벗기거나 혓바닥을 뽑혔다." 민간에서 숨어서 하는 말(民間偶語)까지도 동창은 바로 알았으니, 마치 사람들마다 도청기를 달고 있는 것같았을 것이다.

 

일끼지 5명이 경성에 와서 지냈다. 하루는 여관에서 술을 마셨는데, 술에 취하여 한 사람이 말했다: "위충현이라는 이 환관은 쫓겨날 것이다." 나머지 4명이 깜짝 놀란다. 그리고 그에게 말을 함부로 하지 말라고 한다. 그러자 앞의 그 사람은 술기운을 빌어, "흥, 위충현이 비록 무섭지만, 지금은 여기에 없지 않은가. 설마 내 피부를 벗길 수 있겠는가? 내가 뭐가 무섭단 말이냐?" 그리고 술자리가 파한 후 5명이 방으로 돌아와서 잠을 잤다. 한밤중에 돌연 방문이 열리고 한 무리의 사람들이 횃불을 들고 나타난다. 한명한명 얼굴을 대조해보고는 5명을 모조리 붙잡아간다. 온 자들이 바로 동창의 밀탐이었다. 5명은 동창의 형장에 붙잡혀 간다. 위충현을 욕했던 자는 옷이 벗기고, 수족을 문판에 고정시킨다. 위충현은 웃으면서 그에게 말했다. "너는 내가 네 피부를 벗기지 못할 거라고 말하지 않았느냐. 할 수 있는지 없는지 보자." 그리고 사람을 시켜, 뜨거운 역청(瀝靑)을 그의 뭄에 붓는다. 응고된 후 하나타나 갈로 벗긴다. 그의 피부를 통채로 벗기는 것이니, 참혹해서 차마 보지 못할 정도였다. 나머지 4명은 거의 혼절할 정도였다. 위충현은 그러나 그 4명에게는 한 사람마다 금화5냥을 주고 풀어준다.(명나라말기의 필기 <행존록>)

 

위충현의 이렇게 발달한 도청기술은 방대한 인육정보네트워크때문이다. 동창에는 제독 1명이 있어 최고책임자였다. 그 아래에는 '천호' 1명이 있고, "백호" 1명이 있고, "장반", "영반", "사방"이 약간명 있어 각자의 직책을 맡았다. 구체적으로는 정탐, 도청을 담당하는 비밀경찰은 "번자(番子)"라고 부르고, '번자'의 두목을 '당두"라고 한다. '당두'는 다시 시정의 깡패들을 돈으로 고용한다. 이를 "타장"이라고 한다. '타장'은 엿들을 때마다 '당두'에게 밀고한다. '당두'는 다시 일의 경중과 대소를 따져서 그들에게 보수를 지급한다; '번자'는 매일 시정의 술집, 길거리 골목 심지어 멀리 벽지까지 '경성말을 쓰는 자'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모두 동창의 탐자(探子)들이다. 왕공대신, 공주부마의 집에도 동창의 '인육도청기'가 있었다. 예를 들어, 주체가 황제위를 찬탈한 후, "자주 밤에 소중관(小中官, 태감)을 은제(殷第, 부마의 집을 의미함)에 잠입시켜 살펴보게 했다"

 

전자감시기술이 발명되기 전에,명왕조는 '인육도청술'을 극도로 발전시켰다. 그 발달정도는 아마 근대국가마저도 스스로 따르지 못한다고 탄식할 정도일 것이다. 이 도청네트워크에 기생하던 특무, 특무우두머리는 특무정치의 논리로 엄청난 은권력(隱權力)을 얻었다. 명나라때 환관의 화는 여기에서 기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