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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분석/중국역사의 기록

중국고대인들의 봄놀이(春遊)는 어떠하였는가?

by 중은우시 2013. 4. 13.

글: 예방육(倪方六) 

 

양춘삼월, 풍화일려(風和日麗). 바깥나들이하기 좋은 계절이다. 야외나들이는 단거리여행에 속한다. 나가는 계절에 따라 춘유와 추유의 구분이 있다. 다만 춘유가 더욱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고대인들은 야외로 나가서 무엇을 하고 어떻게 놀았을까? 서로 다른 시대에 서로 다른 주제가 있었다. 선진시대의 야외나들이는 "풍정(風情)"이 있었고, 위진시대 사람들은 "정신(精神)"을 중시했고, 수당 사람들은 "먹고마시는 것"을 따졌다....

 

선진시대는 자유를 숭상하고 열정이 있으며 분방한 시대였다. 귀족계층이건 평민백성이건 모두 야외나들이를 좋아했다. 공자의 72제자중 하나인 증점(曾點)은 특별히 "풍호무우(風呼舞雩). 영이귀(詠而歸)"하기를 즐겼다. <논어.선진>의 기록을 보면 학생의 이런 행동에 대하여 공자는 단지 네 글자로 말했다: "오여점야(吾與點也)". 뜻은 나는 증점의 생각에 찬동한다는 것이다. 이를 보면 공자도 나들이를 즐겼음을 알 수 있다.

 

사서의 기록으로 보면, 선진시대의 중국고인들의 야외나들이는 아주 낭만적이었고, '풍정'이 있었다. '성교유(性交遊)'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서주초기에서 춘추중기까지 개략 5백여년동안의 시가를 모은 <시경>에는 많은 시편들이 그 시대 사람들의 나들이를 기록한 것이다. 그중 <국풍.정풍>의 시가가 있는데, <출기동문>이라는 것이다. 첫구절이 바로, "동문을 나서니 여자들이 구름처럼 많다(出其東門, 有女如雲)"이다.

 

"정풍"에서 반영한 것은 지금의 정저우(鄭州)를 중심으로 하는 중원의 나라인 정국의 나들이풍속이다. 정나라사람들은 야외나들이를 좋아했다. 특별히 봄날이 되면, 정성의 동문을 나갔고, 거기에는 나들이나온 여자들이 가득했다. 많은 남자들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자신이 마음에 둔 여자를 만났다. <진유>라는 시에는 더욱 직접적으로 적고 있다. 당시 진수와 유수의 두 강가에 정나라의 "사여녀(士與女), 은기영의(殷其盈矣)", 놀러나온 정나라의 남녀들이 곳곳에 모두 가득 차 있다는 말이다. 나들이 중 그들은 서로간의 이해를 증진시키고, 서로 사랑을 느끼고 작약을 서로 주며 평생을 약속하기도 했다.

 

당시 인구는 비교적 적어서 아이를 많이 낳고 인구를 늘이는 것이 그 시대 남녀들에 대한 기본적인 요구였다. 인류의 '생산'임무는 농민의 파종과 마찬가지로 모두 시기를 놓쳐서는 안된다. 봄날은 여자들이 임신하기 가장 좋은 계절이다. 그래서 연애를 하고, 이렇게 짝구하기식의 나들이를 즐긴 것이다. 이것이 선진시대 나들이의 특징중 하나가 된다. <시경>에 나오는 많은 사랑이야기는 대부분 이런 야외나들이기간동안 생긴 것이다.

 

선진시대의 '풍정유'는 '분(奔)'이라고 불리웠다. '분'은 회의(會意)글자이다. 금문의 글자모양은 위에 "대(大)"(人)자는  사람이 두 손을 흔드는 모양이다. 아래의 "지(止, 趾)"는 세 개가 있는데, 이는 빨리 달린다는 뜻이다. "분"이라는 글자를 가지고 여자와 남자들이 교외에서 서로 만나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더 적합할 수가 없다. 빨리 달려가서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간다. 공자도 65세된 부친 숙량흘이 15살된 어린 아가씨 안징과 교외나들이에서 '분'을 한 결정체이다. 당시 하나의 산동굴에서 결합을 완성했고, 나중에 공자의 부친은 안씨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이런 방식의 자유연애는 중매쟁이를 두고 결혼하는 정식결합과는 차이가 있다. "부대례이상분자야(不待禮而相奔者也)" 고래서 고인들은 자주 "사분(私奔)"이라는 말로 불렀다. 송나라때 금욕을 주장하는 이학자들은 이를 "음분(淫奔)"이라고 폄하해서 부르기도 했다.

 

"분"은 비록 정규결합은 아니지만, 당시 사람들은 그다지 체면깍이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국가도 이런 '실례'행위를 금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대거 제창했다. 즉 소위 "분자불금(奔者不禁)"이다. 남녀의 애정교류에 편하게 하고 '파종'시기를 놓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국가는 심지어 고정된 봄나들이 명절까지 규정했다. 상사절(上巳節).

 

상사절은 하력 삼월의 첫번째 "사일(巳日)"이어서 그런 명치을 얻었다. 주나라때의 "수빈불계(水濱祓禊)"풍속에서 유래했다. 즉 중국고대인들이 교외로 나들이하는 대표적인 명절이 된 것이다. 위진이후, 아마도 날짜를 정하기 어려워서인지 상사절을 아예 음력삼월삼일로 정한다. "수빈발계"는 물가로 가서 술을 마시는 것으로 대체된다.

 

중국고대인들이 교외나들이를 좋아한 원인은 아마도 장기간 지배지위를 차지한 유가의 '나들이사상'과 관계있을 것이다. 공자는 얘기했다. "부모가 있으면, 멀리 여행가면 안되고, 여행가면 반드시 가는 곳을 알려야 한다." 위진시대가 되면서 '멀리 여행가지 않는' 나들이가 새로운 기상으로 출현하고, 선진시대의 '풍정유'의 색채는 약해진다. 정신측면을 강조한 "현유(玄遊)"로 바뀌고, 나들이를 인생의 정취를 도야하는 일종의 방식으로 보았다.

 

현유가 제창하는 것은 "귀무(貴無)"이다. '현학'의 흥기로 현학은 유심주의철학에 속한다. 노자의 '무위'사상은 현유를 즐기는 위진시대 사람들의 숭상을 받는다. '무위'의 본질은 자연이고, 많은 사람들은 '자연으로 돌아가자'고 하게 된다. 이상을 산과 물 사이에서 나들이하는 과정에서 기탁하는 것이다.

 

위진시대에는 많은 교유명사가 나타난다. "죽림칠현"은 그 중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칠현"은 혜강, 완적, 완함, 산도, 향수, 유령, 왕융등 7명의 문인을 가리킨다. 그들은 비록 서로 다른 지역에서 태어났지만, 서로 같은 취향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함께 모였다.남조 송의 유의경은 <세설신어>에서 이렇게 하였다. 이 7인의 문인은 "죽림지유(竹林之遊)"를 좋아했다고. "7명은 자주 대나무숲의 아래에 모여, 술을 마음껏 마셨다. 그래서 세상사람들은 '죽림칠현'이라고 불렀다."

 

완적의 나들이에 대한 흥치는 가장 농후했다. 안나가면 몰라도 한번 나가면 끝장을 보았다. "등림산수(登臨山水), 종일망귀(終日忘歸)". 적지 않은 학자들은 죽림칠현이 산과 물 사이에서 논 것을 현실도피행위라고 본다. 그러나 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방식을 바꾸어 정치에 관심을 가졌다. 그들은 이런 명언을 남긴다: "지금은 영웅이 없다. 그래서 소인들이 이름을 떨치는 것이다." 이것은 완적이 하남 형양의 광무산에서 놀 때 한 말이다.

 

위진시대에 사적을 남긴 야외나들이 활동은 적지 않다. "천하제일행서"라고 불리는 <난정서>는 바로 서예가 왕희지가 삼월초삼일에 사안, 손탁등 41명의 진나라 귀족들과 야외나들이한 후에 탄생한 것이다. 이는 당시 명인들이 시가를 읊고 모은 글의 서문으로 쓴 것이다.

 

중국에서 산수시 제일인이라고 불리는 대재자 사령운(謝靈運)은 나들이방식을 가장 많이 따졌다. "산을 오르고 언덕을 넘을 때는 반드시 유준(幽峻)을 만들었다." <남사.사령운전>을 보면 사령운은 자신의 '외출모습'이 있다. 놀러 나갈 때면 머리에 곡병립을 쓰고, 발에는 목극(木屐, 나막신)을 신는다. 이런 '목극'은 당시 사람들이 '사공극(謝公屐)'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앞뒤로 치정(齒釘)을 박고, "산에 오를 때는 전치(前齒)를 제거하고, 산을 내려올 때는 후치(後齒)를 제거했다" 이는 중국최초의 등산전문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사람들이 야외나들이로 일정한 경지에 오른 사람은 도연명이 있다. 도연명은 "천고은일지종(千古隱逸之宗)"이라 불린다. 그는 원래 '창생은 널리 구제하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현실과 이상은 차이가 컸다. 13년간 공무원으로 있다가, 스스로 팽택현령을 사직하고 집을 야외로 옮긴다. 그리고 느긋한 '전원생활'을 즐긴다. 도연명의 <음주>시의 한 구절은 "채국동리하(採菊東籬下), 유연견남산(悠然見南山)"이다. 초범탈속했으니 위진 사람이라 할 만하다. 그리고 중국고대인의 교유의 최고경계이고, 지금까지도 그의 경지를 넘어선 사람은 없다.

 

당송에 이르러, 사람들은 교외나들이에 대한 흥취가 더 커졌다. 그리고 각양각색의 노는 법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내용에서는 먹고마시는 것을 더욱 중시했다. 야외나들이도 그 시대에는 크게 먹고 마시는 기회였다. 명청에 이르러, 야외나들이의 취미는 크게 줄어든다. 이전의 그 어느 시대보다 단조로웠다. 체육활동이 환영받는 것을 제외하고, 나무심는 활동정도가 전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