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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한)

번쾌(樊噲)의 세 가지 품성

by 중은우시 2013. 11. 10.

글: 독서삼매(讀書三昧) 

 

 

 

번쾌가 개를 잡아 고기를 팔 때, 만났던 것은 동란의 시대였다. 진승이 반란의 깃발을 들었고, 성성지화(星星之火)는 억제할 수 없는 요원지세(燎原之勢)가 되어 여러가지 꿈을 안고 준동하고 있었다. 모두 이 시기에 기회를 잡아 이 흙탕물 속에서 큰 물고기를 잡고자 했다. 유감인 것은 진정 고기를 잡은 사람, 새우를 건진 사람은 몇 명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번쾌도 자신의 꿈을 품고, 유방을 따르기로 선택한 것은 많은 정도에서 이런 꿈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높고 큰 꿈을 꾸던 사람들과는 달리, 꿈을 추구하는 길에서, 번쾌의 발걸음은 아주 총명했고 아주 착실했다. 그가 나타낸 세 가지 품성은 그를 성공으로 이끌었고, 꿈을 실현하는 초석이 되었다.

 

첫번째 품성: 무실(務實)의 정신이다. 사마천은 번쾌를 위하여 전을 쓴다. 시작부분에서 상세하게 번쾌의 전적을 소개하는데, 필법이 아주 특별했다. 필자가 개략 통계를 내봤는데, 사마천이 연이어 번쾌가 참가한 크고 작은 전투 삼십여회를 기술한다. 이 삼십여회의 크고 작은 전투를 사마천이 하나하나 소개한 후, 다시 번쾌를 위하여 아주 세밀한 합산을 내놓는다; 적 176명의 수급을 참하고, 288명을 포로로 잡고, 친히 병력을 이끌고 5개의 군대를 패배시켰으며, 5개 성읍을 함락시키고, 6개군, 52개현을 평정하고, 승상 1명, 장군 12명, 이천석이하 삼백석의 장관 11명을 포로로 잡았다.

 

이처럼 장부를 적어가는 식의 기술방법은 쓸데없는 것인가. 필자의 생각에는 그렇지 않다. 사마천이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혹은 그가 일부러 우리에게 주목하도록 하는 것은 번쾌의 공명이 이처럼 전쟁터를 누비며 싸워서 얻은 것이라는 것이고, 조그만치도 운으로 투기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마천의 글에는 실제로 번쾌에 대하여 "공명은 말등에서 얻었다"는 영웅의 품격과 실질을 숭상하는 정신에 대한 찬미가 포함되어 있다. 다만 재미있는 점은 대만의 60명 교수가 공동번역한 <사기>에 이것에 대하여 이런 해석을 달아놓았다는 것이다: "번쾌는 개를 도살하는 직업을 가졌다. 사마천이 번거롭게도 상세하게 죽고 붙잡은 사람수를 기재해둔 것은 마치 일부러 그의 살인과 개도살을 나란히 언급하는 것같다." (1987년 악록판 <백화사기>), 이런 관점은 비록 듣기에 새롭지만, 내 생각에 지나치게 견강부회인 것으로 보인다.

 

기실, 고인들이 전공을 형량하는 표준은 주로 획득한 적의 수급수량과 포로(포로의 등급에 따라)의 수량이다. 적을 많이 죽일수록, 전공은 더욱 크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다. 상앙의 <상군서.경내>에는 이런 규칙을 기재해놓았다. "갑수(甲首) 하나를 얻은 자는 작위1급을 상으로 내리고, 밭 1경(頃)을 더하고, 택 구무(畝)를 더하며...." 이런 규칙은 진나라가 전쟁중에 논공행상, 승작증록의 제도이다. 후세에 미친 영향이 아주 크다. 동한시대에 붓을 버리고 군대에 들어간 반초가 군대에 들어간 이유는 결국 적을 죽여서 공명을 얻으려는 것이 아니겠는가? 광활한 전쟁터에는 용사가 나온다. 노래하고 춤추는 전당에서는 간신이 나온다. 사마천은 함축적인 필법으로 번쾌를 찬미하였고, 오랫동안 잊혀졌던 무실정신을 호소했다.

 

두번째 품격은 응변(應變)의 능력이다. 번쾌의 전적은 보통이 아니었다. 다만 사람들이 즐겨 화제에 올리는 것은 그가 홍문연에서 보여준 모습이다. 당나라때의 시인 호증은 그의 <홍문>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적었다: "항적응양육합신(項籍鷹揚六合晨), 홍문개연하망진(鴻門開宴賀亡秦), 준전약취모신계(樽前若取謀臣計), 기작음릉실로인(豈作陰陵失路人)". 항우가 유방을 보내준 것에 대하여 안타까워했고, 의문을 제기했다. 기실, 항우가 유방을 보낸 것은 여러가지 원인이 있다. 근본적으로 말하자면 절대로 항우가 '인자'하기 때문은 아니다. 역발산혜기개세의 항우는 누구도 눈아래 두지 않았다. 그러나 번쾌를 보고는 놀랐다. 왜 그런가? 원인은 다름이 아니다. 번쾌의 남다른 담량, 기지가 있는 책략이 그를 탄복하게 한 것이다. 이 양자가 완벽하게 결합하고 신축성있게 운용된 것은 번쾌의 탁월한 임기응변능력을 보여준다.

 

번쾌가 홍문연회의 영장에 뛰어들어간 후, 연이은 4가지 동작은 그의 강렬한 개성으로 한꺼번에 항우를 꼼짝 못하게 만들어버린다. 첫번째 동작은 "입(立)"이다. 암중으로 힘을 겨루고 한 마디도 말을 하지 않으면서 영장에 서 있는다. 늠연한 침묵은 항우에게 경고한다: 유방에게 일이 생기면 너도 도망칠 수 없을 것이다. 역시 항우는 그를 '장사'라고 부른다. 두번째 동작은 "설(說)"이다. 직접 맞부닥친다. 다만 말에는 강함과 부드러움이 겸비되어 있고, 조이고 푸는 것이 적절하며 인정과 사리에 들어맞았다. 역시 항우는 그의 말을 듣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한다. 세번째 동작은 "갈(喝)"이다. 호기는 다른 사람을 압도했다. 술잔을 들어서 바로 비운다. 역시 항우는 놀라서 묻는다: "다시 마실 수 있는가?" 네번째 동작은 "흘(吃)"이다. 거친 가운데 섬세함이 있다. 검으로 고기를 썰고, 검을 손에서 떼지 않는다. 고기를 먹을 때 고도의 경계심을 유지한다. 역시 항우는 마침내 유방을 암살할 생각을 포기한다.

 

모두 외나무다리에서 만나면 용감한 사람이 이긴다고 말한다. 다만 강자의 싸움은 심리상의 대항이다. 그중의 비밀은 장삿꾼의 거래와도 같다. 우리는 알고 있다. 장삿꾼이 물건을 팔 때 통상적으로 두 가지 수법을 관용적으로 사용한다: 하나는 직접적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맹세를 하듯이 과장하고 상대방의 입맛에 맞게 얘기하고 과장하여, 상대방의 신임을 얻고자 한다. 그러나 너무 노골적이고 너무 직설적이어서 왕왕 농교성졸(弄巧成拙)하는 경우가 많고, 오히려 상대방으로 하여금 의심을 품게 만든다; 또 다른 방법은 욕금고종(欲擒故縱)이다. 우회적인 방법으로 도발하고, 서동하며 사람의 역반심리를 자극한다. 상대방이 부지불식간에 그의 함정에 빠지도록 만든다. 번쾌가 항우를 굴복시킨 것은 바로 이 두 가지 심리공세를 성공적으로 운용했기 때문이다. 번쾌의 생활경험, 인생경력 및 성격박력등등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그래서 찬탄하면서도 숙연해진다.

 

세번째 품성은 인간적인 성격이다. 진이세 원년에 유방이 거사한 때로부터, 한고조 12년 유방이 병사할 때까지, 번쾌는 계쏙하여 유방의 곁을 따랐고, 오래된 동료이다. 유방과는 같은 패군의 동향사람이고, 유방의 처제인 여수를 처로 삼았기 때문에, 유방과는 당연하게도 동서지간이다. 이런 관계가 일반인의 몸에 있다고 하더라도 보통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번쾌는 아주 겸손했다. 회음후 한신이 유방의 신임을 잃은 후, 병권을 박탈당했다. 평소에 그의 곁에서 아부하던 사람들이 졸지에 그가 무슨 전염병균이나 되는 것처럼 피해버렸다. 그러나, 번쾌는 한신을 시종일관 존경한다. 한번은 한신이 번쾌를 만나러 온다. 번쾌는 무릎을 꿇고 절을 하며 맞이하고, 무릎을 꿇고 절을 하며 배웅했다. 한신은 왕이므로, 번쾌는 겸허하게 스스로를 신(臣)이라 칭한다. "대왕이 신에 오셨습니다." 보라 정말 공경하는 태도이다. 총애를 잃고, 낙마한 사람에 대하여 이런 태도를 견지할 수 있다는 것은 어떤 흉금을 가져야 할까. 일반인은 할 수 없다. 그러나 번쾌는 해냈다. 그리고 아주 성실하게 해냈다.

 

더욱 감탄할 일은, 유방이 한때 병을 핑계로 조회에 나가지 않았고, 분을 지키는 사람에게 어떤 대신도 들어와서 볼 수 없도록 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번쾌는 그런 것을 믿지 않았다. 이들 대신을 이끌고 직접 쳐들어간다. 보니, 유방이 환관의 몸을 베고 누워 있었다. 동성애라도 하는 것인가? 잘 알 수는 없다. 당시의 장면은 아마도 아주 난감했을 것이다. 번쾌는 눈물을 흘리며 유방에게 말한다. "폐하와 신등이 풍,패에서 거사를 일으킬 때, 천하를 평정했을 때, 얼마나 장관이었습니까. 지금 천하가 안정되었는데, 뭐 고단할 일이 있습니까. 그런데 폐하의 병이 심하다고 하여 신등은 걱정이 많았습니다. 신등을 만나서 일을 논의하지 않고 오로지 환관과 같이 있단 말입니까? 폐하는 조고의 일을 보지 못했습니까?" 보라 찬미도 하고, 풍자도 하며 권하고, 열망도 있다. 말하는 것은 완곡하면서도 실질적이다. 유방으로 하여금 기꺼이 일어나서 조회에 참석하도록 하였다.

 

유방이 황제가 된 후, 확실히 간언을 잘 받아들이는 일면이 있었다. 다만 공신을 죽이는 일도 적지 않았다. 번쾌도 하마터면 피살될 뻔했다. 어찌된 일인가? 원래 유방이 병사하기 얼마전에, 누군가 번쾌를 무고한다. 유방의 사후, 번쾌가 유방의 총희 척씨와 그의 아들 유여의를 죽일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유방은 대노하여, 진평으로 하여금 군대로 가서 번쾌를 그 자리에서 처결하라고 명한다. 이런 이유로 살인하는 것은, 전형적으로 유방과 같은 봉건제왕들의 본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예상외로 진평은 번쾌를 데리고 장안으로 돌아온다. 진평이 이렇게 한 것은 여후를 꺼린 점도 있겠지만, 만일 평소에 번쾌가 인심을 얻지 못하였더라면, 인맥이 좋지 않았더라면, 진평이 아무리 투서기기(投鼠忌器)한다고 하더라도, 유방의 칼을 빌어 번쾌를 죽일 수 있었다. 그렇게 해도 아무도 뭐라고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진평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 점만 보더라도, 번쾌의 사람됨을 알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