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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주원장)

주원장이 회족이라는 9가지 증거

by 중은우시 2013. 10. 13.

글: lovesue

 

적지 않은 사람들은 주원장(명태조) 혹은 그의 아들 주체(영락제)의 종교속성에 대하여 의문을 나타낸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색목인(色目人)으로, 정종의 회족 무슬림이라고 한다. '한족(漢族)'이 나중에 이슬람으로 개종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타이완에서 온 중국의 한 무슬림(회족)이 있는데 그의 성은 장(張)씨이고, 이름은 약슬부(約瑟夫, Yusuf)이다. 그는 주원장 혹은 그의 아들 주체가 무슬림이라고 생각한다. 타이완에는 학자들 중에 이에 대하여 책을 쓴 사람도 있다. 장선생에 따르면, 그의 조상은 명나라의 공주를 부인으로 취했다. 그리하여 그도 주원장의 후예라고 할 수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명왕조 황족이 무슬림을 신앙한 비밀을 알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사람들이 깜짝 놀랄만한 증거를 내놓아 자신의 주장을 입증했는데, 그 증거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1. 주원장이 어렸을 때, 그의 가족은 굶주림으로 죽었다. 주원장은 백포(白布)로 시신을 쌌다. 백포로 시신을 싼다는 것은 무슬림의 장례특징이다. 이슬람교는 무슬림망자는 반드시 "극범(克凡, 白布殮衣)"을 입은 후 매장되어야 한다.

 

주: 해외의 저명한 사학자 여동방(黎東方) 박사가 쓴 세설중국역사 시리즈 중 <세설명조>에는 이런 기재가 있다: "그는 빈농가정의 분수를 지키는 자제였다. 그가 17세 되던 해 원순제 지정4년(1344년) 가뭄, 메뚜기떼 및 진염병이 차례로 그의 고향을 쓸고 지나갔다. 호주 종리현(안휘현 봉양)에서 부친 주세진, 모친 진씨, 큰형 주흥륭이 며칠내에 차례로 사망한다. 집안에 현금이 거의 없어 관 3개를 살 돈이 없었다. 더더욱 묘지를 살 돈은 없었다. 다행히 이웃집의 유씨(劉氏)가 마음이 좋아서, 그와 둘째형 주흥성이 부모와 큰형 3명의 시신을 백포로 싸서, 유가분의 한쪽 귀퉁이에 묻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2. 주원장의 가장 가까운 문신무장은 주로 무슬림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므로, 명나라는 무슬림이 개창하여 건립한 왕조이다.

 

주: 안휘지구에는 대량의 색목인이 있었다. 민간에는 십회보일부(十回保一朱)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각각, 상우춘, 호대해, 풍국용, 풍승, 정덕흥, 남옥, 목영, 화운, 이문충등을 가리킨다. 주체가 찬탈한 후 효수된 병부상서 철현도 바로 색목인이다. 민간문학 <대명영렬전>에서 그들의 무공업적을 얘기할 때 그들을 "강렬한 회민(剛烈之回民)"이라고 불렀다.

 

3. 주원장은 금주령을 선포한다. 한번은 주원장의 한 심복의 아들이 이 규정에 위반하여 처형을 당했다. 이슬람신앙을 믿는 사람은 엄격히 금주한다.

 

4. 주원장의 황후는 마씨이다. 그녀도 무슬림이다. 그녀는 친히 주원장을 위하여 모든 음식물을 준비했는다. 주원장이 황제가 된 후에도 마황후는 여전히 주원장을 위하여 음식물을 준비해주었다.

 

5. 명왕조 황실의 색깔은 녹색이다. 녹색은 바로 이슬람의 상징이다.

 

6. 주원장이 황제가 된 후, 그는 남경에 청진사(淸眞寺)를 짓도록 명령한다. 그리고 친히 시사 <백자찬(百字讚)>을 지어 이슬람과 선지자 모하메드를 찬양한다. 이 <백자찬>의 의미는 비범하다. 무슬림은 주원장의 선서(syahada)라고 본다. 주원장의 이슬람신앙에 대한 증빙이다.

 

주원장이 서안 및 운남, 복건, 광동등지에 청진사를 세운다. <백자찬>은 청나라때 유지(劉智)의 저작 <천방지성실록>에 실려 있는데, 전문은 다음과 같다: "건곤초시(乾坤初時), 천적주명(天籍注名), 전교대성(傳敎大聖), 강생서역(降生西域), 수수천경(受授天經), 삼십부책(三十部冊), 보화중생(普化衆生), 억조군사(億兆君師), 만성영수(萬聖領首), 협조천운(協助天運), 보비국민(保庇國民), 오시기우(五時祈祐), 묵축태평(默祝太平), 존심진주(存心眞主), 가지궁민(加志窮民), 증구환난(拯救患難), 통철유명(洞徹幽冥), 초발영혼(超拔靈魂), 탈리죄업(脫離罪業), 인복천하(仁覆天下), 도관고금(道冠古今), 항사귀일(降邪歸一), 교명청진(敎名淸眞), 목한묵덕(穆罕默德), 지귀성인(至貴聖人)."

 

명무종 주후조(1506-1521년 재위)는 각 종교에 대한 평론과 <어제존진주사시>를 썼다. 명무종이 각 종교를 평론할 때 이렇게 말한다: "유가의 학문은 비록 개물성물(開物成物)할 수 있지만, 궁신지화(窮神知化)를 하는데는 부족하다. 불로지학(佛老之學)은 궁신지화에 유사하지만, 복명귀진(復命歸眞)할 수 없다. 여러 종교의 도는 각각 한쪽으로 치우처져 있다. 오로지 청진인주의 교(淸眞認主之敎)만이 정리(正理)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다. 그래서 만세와 천지에 오래동안 지속될 수 있다." <존진주사시>에는 이렇게 적었다: "일교현현제교미(一敎玄玄諸敎迷), 기중오묘소인지(其中奧妙少人知), 불시인수인시불(佛是人修人是佛), 부존진주각존수(不尊眞主却尊誰)"

 

통상적인 이치대로라면, 주원장의 "화상(和尙)" 경력은 그가 불교에 대하여 특별한 호감을 가지게 해야 마땅하다. 다만 명왕조의 법률은 엄격하게 불교를 제한했다. 대량의 불교사원을 폐지하고, 매 현마다 최대 1개의 큰 절을 남기게 했다; 대량의 승려와 비구니를 환속하도록 강제했고, 남자 40세이하, 여자 50세이하는 출가할 수 없도록 했다. 동시에, 당시 세력이 그다지 강대하지 않았던 이슬람교와 회족에 대하여는 유화적인 정책을 쓰고, 많은 청진사를 칙령으로 건설한다.

 

7. 명왕조때 많은 무슬림들이 요직에 있었다. 명확한 증거중 하나는 정화(鄭和)가 방대한 240여척이 해선, 2만7천4백명의 선원으로 구성된 함대를 조직하여, 목적지를 아랍의 이슬람성지 메카(고대에는 '천방(天方)'이라 칭함)로 하여, 메카에서 명황족을 대신하여 성지참배하도록 했다. 명족황제가 무슬림신앙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비밀이므로, 비무슬림신도가 알게 해서는 안되었다. 그리하여 명조황제는 친히 하지(朝覲 조근)할 수 없었다.

 

주:

(1) 하지(哈只, 영어 Hajji), 아랍의 메카 성지순례를 한 사람에 대한 회교도의 존칭이다. 즉 오선공(五善功)을 완성한 사람에 대한 존칭이다. 오선공은 증신, 예배, 천과, 재계와 조근이다. 하지라는 말의 아랍어 원래 의미는 '순례자' '조성자(朝聖者)'이다.

(2) 정화하서양의 도중에, 동남아에서 이슬람교를 전파했다. 동남아는 원래 불교위주이다. 다만 명나라가 오늘날의 이슬람기지로 바뀌었으므로, 세계인구가운데 신도수가 최다가 되었다. 물어보자. 명나라가 대량의 돈을 썼는데, 만일 황제가 비준하지 않았다면, 정화가 감히 동남아에서 이슬람교를 전파할 수 있었을까? 정화가 장거라항해중 동남아를 지나갈 때, 매번 한 곳에 도착하면 따르던 무슬림 마환(馬歡), 곽숭례(郭崇禮), 합삼(哈三)등으로 하여금 이슬람의식을 거행하고 교의를 전파하게 하였다. 그리고 중국계 무슬림사회지구를 건립하여 이슬람을 전파했다. 정화가 동남아에서 이슬람을 선전하면서, 동남아지구 특히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의 이슬람은 신속히 발전한다. 그후, 정화하서양의 자료는 명나라에서 스스로 없애버린다. 명나라는 왜 스스로 없애버렸을까?

(3) <명사.정화전>의 기록에 따르면, 정화의 항해보선은 모두 63척이다. 최대의 배는 길이 44장4척, 너비 18장이다. 당시 세계최대의 해선이다. 오늘날의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길이 151.18미터, 너비 61.6미터이다. 배는 4층으로 되어 있고, 배에는 9개의 돛대에 12장의 돛을 달 수 있다. 닻의 무게는 수천근이다. 이백명이 있어야 움직일 수 있었다. 1척의 배에는 천명이 탈 수 있었다. <명사.병지>에는 "보선의 크고 높아서 누각과 같았고, 바닥은 좁고 위는 넓었으며 천명이 탈 수 있었다." 다만, 지금 아무도 실제항행할 수 있는 44장의 '보선'을 복제하지 못한다. 그래서 진실성은 의심을 받는다. 목재의 강도에도 한계가 있고, 지나치게 큰 선체는 수밀성(水密性)을 보장할 수 없고 장기간 항행을 할 수 없다.

 

8. 명나라와 무슬림국가는 양호한 외교관계를 유지했다. 이것은 명왕조가 무슬림이 건립했고, 명나라황족이 이슬람신도였기 때문이다.

 

9. 이슬람달력이 명나라의 공식달력이 된다.

 

위의 9가지 이외에, 명왕조는 이슬람교의와 경문을 새긴 어용자기를 썼고 그것이 민간에 흘러들어갔다. CCTV의 감정프로그램에도 나온 바 있다. 이 진품은 국가문화재전문가의 감정을 통해서 인정받았다.

 

페르시아 여행가 사이드 알리 악바르 하타이는 1500년대 중국으로 여행온다. 1516년 당시의 오스만투르크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풀에서 페르시아어로 <중국여행기>라는 책을 쓴다. 이를 선물로 터키의 슐탄 수단살림 1세에게 바친다. 이 책은 당시의 중국사회 각방면의 상황을 전면적으로 소개한다. 작자는 무슬림의 종교적 감정으로, 비교적 많은 페이지를 들여 명왕조 왕실과 이슬람교의 관계를 소개한다: "궁정내에는 황제 전용의 청진사가 있고, 선례원이 있다. 주마일(금요일)에 황제는 성밖의 청진사로 가서 예를 바친다. 그리고 무슬림 문신,무장은 명왕조의 개국에 공헌을 했다. 황제는 그들을 중욯한다"는 등의 내용이 있다. 또한, "황제의 어떤 행위를 보면, 그는 이미 이슬람교를 신봉한다. 그러나 권력을 잃을까 우려하여, 그는 이를 공개적으로 선언하지는 않았다. 이것은 그의 국가풍속과 법규에서 그렇게 정해놓았기 때문이다..." 알리 악바르 하타이의 묘사는 그가 직접 본 것이다. 중국민간의 전설과 일치한다.

 

타이완의 마밍다오(馬明道)는 이 책 및 명나라의 정사, 야사, 사학가의 평술, 회민의 구비전설을 참조하여, 명왕조 왕실이 족속과 종교신앙에 대하여 상세히 연구를 진행한다. 그리고 1973년 <명조황가신앙초고고>라는 책을 발간한다. 주원장, 마황후 및 그 가족과 친척이 모조리 회족이라고 확인했다. 명태조 홍무제의 성은 주(朱)이고, 이름은 원장(元璋)이며, 자는 국서(國瑞)이다. 원래 이름은 흥종(興宗)이며, 안휘 봉양현에서 태어났다. 옛 이름은 호주이다. 그 주위의 각 현, 즉, 정원, 수현, 회원, 임회등이 역사상 회족의 집단거주지이다. 부친의 이름은 주세진(朱世珍)이고 모친은 진씨(陳氏)이며, 형제 4명이다. 주원장은 넷째이다. 큰형은 흥륭, 둘째형은 흥성, 셋째형은 흥조이고 온 집안이 농사를 지었다. 땅은 수 무(畝)에 불과하고 아주 빈한했다. 봉양성은 남북으로 길고, 동서로 좁은 장방형의 작은 성이고, 서문은 동문과 마주하고 있어 두 문의 사이에는 긴 거리가 있다. 이것이 봉양성을 남북으로 구분한다. 그리고 남성과 북성으로 부른다. 북성의 주민은 거의 모두 한족이고, 남성의 주민은 전부 회민이다. 그중 절대다수는 성이 주씨(朱氏)이다. 청진사가 한 곳이 있다. 남성의 중앙에서 약간 서쪽에 있다. 주원장은 남성의 주씨들 속에서 태어났다. 상리로 보자면, 주원장은 회족이다. 1935년, 마밍다오 선생은 그의 형인 마홍다오(馬宏道) 선생(1899-1968)과 봉양으로 방문하여 고찰한 바 있다. 당시 듣고 본 것과 현지 회민들이 하는 말은 위의 상황에 부합했다.

 

주유광(周有光)은 중국사회과학원 연구생원의 연구원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요, 금, 원, 명, 청의 5왕조의 1000년은 모두 외족이 중원으로 쳐들어와 통치한 것이다. 그중 요, 금, 원, 청은 외족이라는데 모두 동의한다. 명왕조는 외족인가 아닌가? 현재 새로 고증한 바에 따르면, 명태조 주원장은 한족이 아니라 회족이다. 이것은 이미 증명되었다.

 

백수이(白壽彛)의 주요저작은 <회족인물지>, <중국통사>등이 있다. 그는 저명한 역사학자이다. 1946년에 출판된 <중국이슬람사강요>라는 책에서, 각주를 통하여, "고향사람들에게 대대로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명태조는 원래 회족이다; 건문제가 떠난 것은 천방(메카)로 순례를 떠난 것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명무종도 이슬람교를 믿었다고 생각했다." (<민족종교논집>, 하북교육출판사 2001년판 412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