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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주원장)

열강루(閱江樓): '유기무루(有記無樓)' 육백년

by 중은우시 2012. 9. 19.

글: 포강객(浦江客) 

 

요즘 남경 사자산 열강루에 가본 사람들은 "층만용취(層巒聳翠), 상출중소(上出重霄); 비각유단(飛閣流丹), 하림천지(下臨天地)"의 웅자에 경탄을 금치 못한다. 그러나, 이 역사의 수수께끼를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남경 열강루는 무한 황학루, 악양 악양루, 남창 등왕각과 함께 역사상 강남4대명루로 칭해졌는데, 남강 열강루만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은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열강루는 2001년에 신축한 것이다. 이전에 열강루는 600년동안 "유기무루(有記無樓)"하였다.

 

역사의 기록에 따르면, 지정20년(1360년), 진우량(陳友諒)은 군대를 이끌고 동으로 내려가 주원장이 지배하는 남경을 공격했다. 주원장은 적을 깊이 끌어들여, 친히 사자산위에서 홍기, 황기를 신호로 하여 수만의 복병을 지휘해, 일거에 진우량의 40만대군을 격패시켰다. 파양호결전에서 진우량을 철저히 섬멸하고, 결국 대명왕조의 기초를 닦는다. 그래서, 주원장은 사자산을 복지(福地)로 보았다. 1374년 사자산의 꼭대기에 "산에 대를 쌓고, 누각을 만들어 산머리를 덮고 이름을 열강루라 하라"고 지시한다.

 

왜 누각을 만들었는가? 주원장은 그의 <열강루기(閱江樓記)>에 정정당당한 이유를 내세웠다: "이 누각을 짓는 것은, 어찌 연조의 요조숙녀, 오월의 미녀들과 춤을 추며 돌고, 밤새도록 술마시며 노래하기 위함이겠는가? 실제로는 백성을 안정시키고, 경사를 튼튼히 하여 사방을 누르기 위하여, 이 누각을 짓는다." 주원장의 말에 따르면, 누각을 짓는 것은 이전의 황제처럼 여자들과 놀기 위함이 아니라. 사적으로는 이곳의 전공을 기념하기 위함이고, 공적으로는 백성을 안정시키고 경사를 튼튼히 하여 사방을 누르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나중에 왜 열강루의 건축을 중단했을까? 이에 대하여, 역사상 여러가지 견해가 있다. 주원장은 자신의 <우열강루기(又閱江樓記)>에서 두 가지 이유를 말했다: 하나는 하늘에서 돌연 꿈 속에 나타나 그에게 급히 누각을 짓지 말라고 말하고, 둘째는 그가 깊이 생각해 보니, 급히 해야할 큰 일을 먼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열강루를 건축하는 것은 연기해야 한다고 했다. 첫번째 이유는 하늘의 뜻을 빌리는 것으로 역대제왕들의 관용수단이어서 믿기 어렵다. 핵심은 두번째 이유이다. 주원장은 많은 글로 그가 심사숙고했다는 점을 드러냈고, 이것은 연구해볼만하다.

 

당시, 명나라는 이미 형을 받고 있던 죄수들을 동원해서 사자산의 꼭대기에 누각을 짓기 위한 "평지(平砥)"를 만들었다. 즉 오늘날로 말하자면 '터'를 만든 것이다. 주원장은 누기를 쓰고, 기초까지 닦은 후에 돌연 건축을 중단한다. 이것은 그의 범상치 않은 예지와 용기를 말해주는 것이다. 열강루를 짓는 일에 대하여 주원장은 아주 명확히 알았다. 그는 다른 의견을 듣고 싶었다. 주원장은 <우열강루기>에서 이렇게 말한다. 누각건축을 개시하기로 결졍한 때부터 시공을 하려는 때까지 조정에서 누구 한 명도 나서서 건언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시험을 해보기로 한다. 열강루를 제목으로 하여 조정의 문신들에게 각각 한 편의 <열강루기>를 쓰게 한다. 이를 통해서 대신들의 생각을 알아보려 한다. 아쉽게도 당시에 내놓은 많은 '답안지'들 중에서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은 단지 송렴(宋濂)의 글 뿐이다.

 

송렴은 명나라초기 문관중의 중신이다. 주원장은 그를 '개국문신의 우두머리'라고 불렀다. 그는 개국전장제도를 만드는데 참여했고, 주원장이 반포한 조령은 대부분 그의 손에서 나왔다. 송렴의 <열강루기>는 황명을 받아 쓴 글이다. 그중에 공덕을 칭송하는 내용이 넘쳐날 수밖에 없다. 다만, 작자는 역사를 인용하는데, 특히 육조가 망한 사실을 언급하며 교묘히 '역사를 귀감으로 삼아야 한다'는 목적을 표현한다. 옛 일을 들어 하지 말라고 권하는 것이 <열강루기>의 주내용이다. 글은 금릉의 산천에 왕기가 넘친다는 것으로 시작하여 열강루의 건설을 끌어낸다; 그 후 여기에 올라서 하늘과 땅이 만든 '위대한 경관'을 본다고 함으로써, '열강'의 뜻을 나타낸다; 이어서 삼열삼사(三閱三思)로 역사를 되돌아본다. 안위가 강하나에 연결된 산천의 분합으로 이루어진데 대하여 감탄한다. 송렴은 쓴다: "남조의 진후주가 건축한 임춘각, 결기각은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당나라의 조공왕이 건축한 제운루, 낙성루도 높고 컸다; 그러나 모두 여기에서 음탕한 노래를 하고 즐거워했거나 연조의 미녀를 숨겨놓고 즐겼다. 순식간에 무한한 감개가 연결된다. 나는 어떻게 해석해야할지 모르겠다." 비록 송렴은 '일통지군'을 찬양하지만, 속에 숨은 뜻은 황제에게 경종을 울리는 것이다. 황제에게 국사와 백성에 관심을 가지고 명승지를 감상하고 오르는데 신경을 쏟지는 말라는 내용을 담았다. 작자는 고대의 누각에 대한 고사들을 가지고 역사상 왕조의 흥망교훈을 언급한다. 더더욱 하지말 것을 권하는 의미가 있었다.

 

당연히 열강루를 짓지 말라고 권하는 사람은 송렴 한 사람만은 아니었다. 주원장의 <우열강일기>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또 한 명의 신하가 말을 하는데, 이런 내용이다: "이전에 손오가 남방의 큰 땅을 차지하고, 비록 간사한 조조나 충성스러운 공명도 이 땅을 차지하지 못했다. 한편으로는 장강의 험준함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손권의 두터운 은혜와 덕이 있었다. 그래서 백성들이 적지 않게 혜택을 입었기 때문이다. 설마 그들이 열강루의 역량을 가지고 적을 막아내려 하였겠는가? 지금 황은이 호탕하고, 천하에 미쳤다. 인심은 모두 황상에 기꺼이 충성하고자 한다. 이는 중요한 곳은 이미 공고히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필 열강루를 높이 지어 중요한 지역을 막아 강적에 항거하려 하는가? 궁전을 크고 넓고 화려하게 만드는 것이나, 누각을 크게 짓는 것은 현재 급한 일이 아니다. 이런 토목공사는 성현군주들이 하지 않던 일이다. 당시에 황제에게 누각을 짓지 말라고 권하던 사람이 하나만은 아니었던 것같다. 주원장은 마침내 결심을 내려 자신의 이전 지시를 뒤집어 열강루건설을 중단시킨다. 이는 치국방략에서 경중완급에 대한 고려때문이다. 건국후 얼마되지 않아 재력이 충분치 않고, 누각건설에는 큰 돈이 들기 때문에, 국가와 백성들이 감당하기 힘들다는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신하들의 뜻과 백성들의 뜻에 따랐다는 것이 중요한 원인일 것이다. 그래서 어찌되었건, 열강루의 건설중단이라는 점에 있어서, 주원장의 정치적 행동은 역대집정자들이 본받을 만하다고 할 수 있다.

 

중국역사상, 역대제왕이 공덕을 자랑하기 위하여 호화사치의 욕망을 위하여, 토목공사를 크게 벌이고 궁궐을 지었다. 멍청하고 황음한 제왕이 궁전을 더 많이 더 호화스럽게 지었다. 상주왕(商紂王)은 황금으로 황궁을 장식했고, 백리나 이어지게 지었다. 옥석으로 녹대(鹿臺)를 장식하고, 높이가 천인(千仞)에 이르었다. 오왕 부차는 3년의 시간을 들여 고소대(姑蘇臺)를 만드는데 정교하고 아름답기 그지없었고, 인력물력을 모두 쏟아부었다. 진시황은 육국을 통일한 후, 관중에 이궁 삼백곳, 관외에 사백곳을 짓는다. 그중 경도 함양의 아방궁이 가장 호화사치스러웠고, 궁전에 만명이상이 앉을 수 있었다. 그 규모의 크기는 상상이 갈 것이다. 남제의 폐제 소보권은 총비를 위하여 3개의 전각을 짓는데 황금으로 연화를 조각했다. 진후주가 건조한 임춘등 누각은 금은주보로 장식해서 사치의 극을 달렸다.

 

당연히 역대왕조의 일부 대신은 국가의 장치구안(長治久安)을 위하여, 통치계급의 장기적 이익을 위하여, 왕왕 역사상 일부 현명하거나 멍청한 제왕이 궁전을 짓는데 있어서의 득과 실을 들어 권유하곤 했다. 어떤 제왕은 간언을 들어, 즉시 건축을 중단했다. 후한 명제는 영평3년 북붕을 짓는다. 상서 종리의가 갓을 벗고 간언한다. 지금 가뭄이 심한데 새로 건축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그러자 명제는 칙령을 내려 북궁의 건축을 중지시킨다. 후한 항제는 홍지(鴻池)를 확장하고 싶었다. 시중 조전이 간언한다: 홍지가 범람하여 농지가 이미 100경이나 해를 입었다. 만일 더 늘이면, 이것은 당요, 우순이 자신의 행위를 자제하던 것을 본받는 것이 아니다. 항제는 그의 건의를 받아들여, 홍지확장을 중지시킨다. 어떤 제왕은 신하의 간언을 처음에는 듣기 싫어했지만, 신하가 계속하여 이폐를 얘기하자, 결국 그 간언을 받아들여 궁전의 건설공사를 중지시킨 경우도 있다. 위명제는 궁궐을 짓기 시작하는데, 대신 양부, 중서시랑 진동장군 왕기, 비서감 왕숙등이 상소를 올려 간언한다. 위명제는 그들의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공 진군이 다시 상소를 올려 중지할 것을 권한다. 지금 오촉을 아직 멸망시키지 못했고, 장병들이 피로에 지쳐 있는데, 다시 궁궐을 짓게 되면 어떻게 적을 상대하겠습니까? 위명제는 마침내 그에게 설득당한다. 그리하여 궁전건설을 삭감하고 비용을 줄인다. 당연히 어떤 제왕은 신하의 간언을 들은척 만척하면서 토목공사를 고집한 경우도 있다. 경룡3년, 당예종은 두 공주를 위하여 금선, 옥진의 두 도관을 짓는다. 돈을 많이 썼을 뿐아니라, 민간의 땅도 많이 점용했다. 그래서 조야의 불만이 컸다. 당에종은 그래도 듣지 않고 도관을 건설한다.

 

정관초기, 당태종은 시종과 대신들에게 말한다: 수양제는 궁궐을 많이 지어 순유에 썼다. 서경 장안에서 동경 낙양까지, 이궁 별관이 앞뒤로 서로 보일 정도였다. 황제가 닦은 도로는 모두 너비가 수백보이다. 그리고 길가에는 나무를 심어서 장식으로 삼았다. 백성들은 이렇게 끊임없는 노역을 견디지 못하여 서로 모여서 반란을 일으킨다. 보라. 수나라말기에 1척 토지, 1명 백성도 모두 수양제의 것이 아니지 않게 되지 않았는가? "이를 보면, 넓은 궁실, 좋은 행행(行幸, 임금의 행차)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현명한 개국군왕은 역대제왕의 토목공사와 궁궐건설에 대하여 모두 명확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주원장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심사숙고후, 시급히 해야할 일을 해야 하고, 열강루를 짓는 일은 미루어도 된다고 결정한다. 이 미루기로 한 결정은 그가 황제로 되어 있던 기간동안 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그의 후손 황제들도 하지 않았다. 계속 6백년간 미루게 된다.

 

오늘날, 열강루 소재지는 지방의 힘으로 주원장의 숙원을 이룬다. 이건 좋은 일이다. 열강루에는 절묘한 대련이 하나 있다. "일강분해만천리(一江奔海萬千里), 양기호루육백년(兩記呼樓六百年)".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남경 열강루 육백년 풍우창상을 보여준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무엇을 보여주는 것인지 모르겠다. 육백년후에 마침내 '유기유루'를 기뻐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육백년동안의 '유기무루'가 가져온 역사를 생각해봐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