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주원장)

주원장은 개국공신들을 어떻게 죽였는가?

중은우시 2012. 3. 21. 17:01

글: 이응전(李應全)

 

많은 사람들은 황제가 된 후, 주원장은 사마살려(卸磨殺驢), 과하탁교(過河拆橋), 토사구팽(兎死狗烹)했으며, 항상 구실을 찾아서 공신을 도살한 마귀라는 것이다. 사실이 그러한가? 만일 공신들이 건국전과 건국후에 모두 높은 덕행을 보였다면 아마도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염라대왕도 사람을 죽이라면 이유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아무 이유없는 살인은 사람들을 납득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공신들이 건국후에 국가와 인민의 공적이 되었다면, 그들을 죽이는 것이 더더욱 민심에 부합하는 일이다. 이것이 바로 주원장이 공신들을 무수히 죽이고도 황제의 보좌에 굳건히 앉아있을 수 있었던 이유이다.

 

1368년, 주원장은 남경에서 황제에 오르고 대명왕조를 개창한다.

 

1370년, 주원장은 자신을 따라 공을 세운 문신, 무장들에게 논공행상을 벌인다. 그는 6명을 공작(公爵)에 봉하는데, 한국공(韓國公) 이선장(李善長), 위국공(魏國公) 서달(徐達), 정국공(鄭國公) 상무(常茂, 常遇春의 아들이다. 상우춘은 이미 사망했다), 조국공(曹國公) 이문충(李文忠), 송국공(宋國公) 풍승(馮勝), 위국공(衛國公) 등유(鄧愈)이다. 이들은 모두 국가과 군대의 탁월한 지도자들이고 엘리트중의 엘리트이며 영웅중의 영웅이다.

 

28명의 대장군은 후작(侯爵)을 받는다. 탕화(湯和), 당승종(唐勝宗), 육중형(陸仲亨), 주덕흥(周德興), 화운(華雲), 고시(顧時), 경병문(耿炳文), 진덕(陳德), 왕지(王志), 정우춘(鄭遇春), 비취(費聚), 오량(吳良), 오정(吳楨), 조용(趙庸), 요영충(廖永忠), 유통원(兪通源), 화고(華高), 양경(楊璟), 강무재(康茂才), 주량조(朱亮祖), 부우덕(傅友德), 호미(胡美), 한정(韓政), 황빈(黃彬), 조량신(曹良臣), 매사조(梅思祖), 육취(陸聚), 곽자흥(郭子興, 이미 사망했음)등이다. 공,후,백,자,남의 작위중에서 공과 후는 가장 높은 등급이고 지위가 아주 높다. 육유가 읖었듯이, "당년에 후작에 봉해지기 위해 만리를 찾아다니고, 말을 타고 양주를 지켰다." 그러나, 이들은 육유보다 훨씬 행운아들이다. 공작 후작에 봏해졌으니,조상을 빛내고 역사에 이름을 남긴 것이다.

 

그들이 생사를 넘나들며 동서로 싸워주었기 때문에, 주원장의 대명천하는 건립될 수 있었다. 주원장도 이들에게 후하게 대해주었다. 높은 관직과 후한 녹봉을 주었고 그들에게 대량의 토지도 주었다. 그들에게 할만큼 했다. 한국공 이선장은 중서성 좌승상으로 있었고, 위국공 서달은 우승상이었으며, 조국공 이문충은 대도독으로 군대의 제1인자였다.

 

이 34명은 모두 38,194호의 전농(佃農)을 보유하고 있었다. 1인당 평균 1,124호의 소작농이 있었다. 주원장은 또한 그들과 친인척관계를 맺었다. 곽영(郭英)의 딸을 자신의 영비로 삼고, 풍승, 남옥, 서달의 딸을 황자들에게 시집보낸다. 공주는 이선장, 부우덕, 호해, 장룡등의 아들에게 시집보낸다.

 

이들 군사귀족들은 전공이 크고, 많은 사회적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주원장은 그들에게 하나의 신물을 준다. 철권(鐵券). 철권이 있으면 사람은 고양이처럼 목숨을 9개나 가지게 된다. 죽은 후에도 다시 한번 되살아나는 것처럼. 본인 혹은 자손이 범죄를 저지르더라도 몇몇 죽음을 면하게 해준다.

 

다만, 철권은 사람이 계속 부활하게 하는 신약은 아니었다. 오히려 공신들로 하여금 잘못을 저지르도록 유혹하는 물건이 되고, 죽는 시간을 앞당기는 철패가 된다. 철권을 믿고, 적지 않은 사람들은 금방 부패 변질된다. 사람을 죽이고, 사람을 해치며, 약자들을 괴롭히고, 토지를 빼앗으며, 세금을 내지 않고, 부녀를 간음하며, 먹고 마시고 계집질하고 도박까지 하며, 뇌물을 받아들인다. 심지어 도검을 만들거나 용포를 만들어 입는 자들까지 나타난다. 그들은 한 가지 상식을 몰랐다. 임금의 곁에 있는 것은 호랑이 곁에 있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공로가 크면 군주가 놀라서 조치를 취한다는 것이다. 공신들이 너무 강하면, 주원장이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꿈에서도 부하가 반란을 일으키는 것을 두려워한다. 강산을 빼앗기고, 자손들이 다른 사람의 죄수가 되어 감옥에 갇히는 것을 두려워한다.

 

주원장이 보기에, 이들 공신은 왕조의 장기적인 안정에 심각한 위협요소이다. 그러므로 무정하게 숙청해버린다. 특히 자손에 위협이 되면 반드시 제거했다. 죽여야만 그나 그의 후임황제들이 군대를 통제할 수 있고, 황제의 보좌를 빼앗기지 않을 수 있다.

 

그가 공신들에게 뒤집어씌운 죄명은 아주 도식화되어 있다: 모반(謀反)과 연좌(連坐)이다. 사람을 죽이고 싶으면, 누군가 그가 모반을 했다고 고발하게 한다. 그 어느 죄명도 이것보다 악랄할 수는 없고, 편리할 수가 없다. 누구든지 마음에 들지 않거나, 경우를 벗어나게 되면, 죽음을 자초하는 것이 된다. 그는 한번 죽이면 일가를 모조리 죽였다. 어떤 경우는 살인수단이 극히 잔혹했다.

 

숙청운동이 연이어 일어났다. 주원장은 호당(胡黨)을 숙청하고, 공인안(公印案), 곽환안(郭桓案)을 처리하며, 백성을 해친 관리들을 체포한다. 몇번의 대사건으로 관리가 근 10만명 죽는다. 다른 사람이 흘린 피로 자신의 마음 속의 분노를 끄고자 하였다.

 

덕경후 요영충의 면사철권은 첫번째 공수표가 되었다. 그는 많은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특히 파양호전투에서는 죽기를 각오하고 싸운다. 소명왕을 강물에 익사시켜 주원장이 황제에 오르는데 장애를 없애기도 했다. 1375년, 주원장은 그를 죽인다. 이유는 그가 사사로이 용와 봉황의 무늬가 들어간 옷을 입었다는 것이다. 황제의 의복을 입는 것은 법도에 어긋난다. 이는 나라와 권력을 찬탈하려는 야심을 드러낸 것과 다름없다.

 

1380년, 영가후 주량조 부자가 채찍에 맞아서 죽는다. 주량조는 원래 원나라의 맹장이었다. 전투에 용감했다. 여러번 명나라군대에 포로로 잡혔지만, 목숨을 구걸하지 않고, 항복하지 않았다. 삶아먹든 구워먹든 너희들 마음대로 하라는 모습을 보였다. 주원장은 그의 용맹함을 좋아하여 그에게 중요한 임무를 맡긴다. 그는 사천을 평정하는 전투에 참가했다. 부하를 함부로 죽여서 황제의 상을 받지는 못한다. 그는 광동을 지켰는데, 여전히 악습을 고치지 못했고, 현지관리를 채찍으로 때렸고, 부호의 뇌물을 받았다. 이렇게 여러가지 범죄를 저지른다. 번우지현인 도동(道同)이 주원장에게 비밀자료를 보내어 주량조의 죄행을 고발한다. 주량조는 오히려 도동이 그에게 오만무례하였다고 역공한다. 대관에 오만무례한 것은 스스로 죽기를 청하는 것과 같다. 그는 도동을 사형에처하여 죽여버린다. 주원장은 주량조 부자를 남경으로 불러서 채찍으로 때려서 죽여버린다.

 

1384년, 임천후 호미가 죄를 범하여 처형당한다.

 

주문정은 채찍으로 맞아서 죽는다. 그는 주원장의 친조카이다. 강서 남창성을 85일간 굳건히 지켜서 진우량의 미친듯한 공격의 기세를 막아낸 공로가 있다. 이리하여 주원장이 파양호결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그는 나중에 교만하고 법을 지키지 않게 된다. 공공연히 부녀자를 빼앗아, 실컷 데리고 논 후에는 우물에 빠뜨려 죽였다. 그리고 사람의 혀를 베기도 하여 잔혹하기 그지없었다. 또한 용봉의 도안으로 자신의 침실을 장식한다. 주원장은 친히 강서로 가서 그를 체포하고, 안휘에 유폐시킨다. 그의 50여명의 부하들은 다리근육을 절단하여 병신으로 만들어버린다.

 

조국공 이문충은 주원장의 외조카이다. 여러번의 전투에서 많은 공를 세운다. 그는 문무에 모두 능했다. 1383년 대도독(최고군사지휘관)과 국자감제주(국립대학총장격)가 된다. 이문충은 일찌기 황제가 너무 환관에 의존하고 관리들에게 너무 가혹하게 대한다고 비판한 바 있다. 그는 독살된다(일설에는 병사) 이유는 지식인들을 예의로 대하여 그를 따르는 지식인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죽기 전에 그는 주원장에게 사람을 적게 죽이고, 환관의 악행을 방지하라고 충고한다. 주원장은 그 말을 듣고, 이문충의 막료가 교사한 것으로 생각하여 모든 막료를 죽여버린다. 이문충의 곁에 있던 의사, 노비 60여명이 모조리 멸족된다. 그러나, 주원장은 그의 의견을 일부 받아들인다. 환관의 정치간여를 금지했고, 환관이 글을 읽고 아는 것을 금지했다. 그렇지 않으면 가죽을 벗겨서 죽였다.

 

개국제일공신인 위국공 서달은 충후하고 성실했다. 주원장과는 어려서부터 같이 컸고, 담량이 적었다. 주원장이 오왕으로 있을 때, 고의로 서달을 취하게 만든 후, 그를 자신의 대왕침상에 눕혀서 자게 한 적이 있다. 이를 통하여 그의 야심을 시험해보려는 것이었다. 서달은 술에서 깬 후, 놀라서 어쩔 줄을 몰랐다. 주원장의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한다. 마치 마늘을 찧는 것처럼. 주원장은 가가대소한다.

 

바로 이렇게 착실한 서달도 부인이 말 한마디를 잘못하는 바람에 주원장에게 죽임을 당한다. 서달의 처 사씨는 사재흥의 따리다. 주원장이 스스로 나서서 그녀를 서달에게 시집보냈다. 사재흥에게는 알려주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사재흥은 원한을 품고, 장사성에게 가버린다. 주원장은 배반한 장수(叛將)들을 극히 미워했다. 그러다보니 그녀의 딸인 사씨도 좋게 볼리가 없다.

 

사씨는 무술에 뛰어났다. 백근대철추를 휘두른다. 그러나, 마음씀씀이가 세심하지는 못했다. 마음 속에 있는 말을 감춰두지를 못했다. 사씨가 입궁하였을 때, 황궁이 금빛찬란하고, 멋진 것을 보고는 마황후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희 집은 정말 멋있다. 우리 집은 너희 집처럼 좋지가 못하다." 그런데, 이 말을 주원장이 듣는다. 설마 너도 황궁처럼 집을 만들어야 하느냐. 그리고 그녀의 부친이 배신한 일도 떠올렸다. 그러다보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는 궁중에 연회를 베풀어 서달을 초청한다. 술잔이 오고갈 때, 용사를 서달의 집으로 보내어 사씨를 죽여버린다. 그 용사는 솜씨가 괜찮았다. 사씨를 죽이고 돌아와서 주원장에게 보고할 때까지도 연회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주원장은 기뻐하며 서달에게 말한다: "너는 걱정하지 말라. 이후 멸문의 화는 당하지 않을 것이다." 서달은 그 말을 듣고는 무슨 말인지 몰랐다. 집으로 돌아오니 처는 이미 차가운 시체로 바뀌어 있었다. 그제서야 무슨 일인지 알았다. 처는 죽었지만 그는 감히 원한을 품지도 못했고, 불평을 할 수도 없었다.

 

나중에 서달은 등에 악성종양이 생긴다. 거위고기를 먹으면 안된다. 주원장은 좋은 뜻에서인지 고의인지 모르지만, 서달의 병세가 위중할 때, 찐 거위고기를 그에게 하사하여 먹게 한다. 먹지 않으면 황제의 명을 어기는 것이다. 서달은 사신의 감독하에 먹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편으로 눈물을 흘리면서 한편으로 치명적인 찐 거위고기를 먹었다. 며칠 후에 그는 사망한다.

 

1392년, 성격이 인자한 주표 태자가 병사한다. 새로 황태손이 된 주윤문은 더욱 유약했다. 사후의 일은 65세된 주원장에게 골치거리였다 그래서 그는 살심이 더욱 크게 인다.

 

그 해, 주원장의 어릴 대 친구인 주덕흥이 자식의 행위로 인하여 피살당한다. 그의 아들은 호유용사건과 관련이 있었다.

어느 해인가, 전공을 많이 세운 섭승이 피살된다.

1394년, 영평후 사성이 피살된다.

 

1394년, 영국공 부우덕이 자살한다. 그는 주원장에게 33년간이나 충성을 다했다. 공로도 서달, 상우춘에 못지 않았다. 아들은 부마이고, 딸은 진왕 아들의 비였다. 남옥이 피살된 후, 정원후 왕필은 주원장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부우덕에게 말한다: 황상의 나이가 많으니, 우리는 일찌감치 출로를 찾아야 겠다. 그런데, 이 말이 불행히도 주원장에게 들어간다. 주원장은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해 겨울, 황궁에서 연회를 베풀 때, 다 먹기도 전에 부우덕은 습관적으로 일어나서 입술을 훔치고 먼저 물러갈 준비를 했다. 주원장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그에게 불경하다고 질책하고 화가 나서 그에게 말한다. "너는 네 아들 둘을 데리고 와라." 부우덕이 몸을 일으켜 막 걸어나갈 때, 경비무사를 불러서 말을 전한다: 그의 두 아들의 목을 가지고 오게 하라. 얼마 후, 부우덕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머리 두 개를 들고 나타난다. 연회석의 분위기는 일순 극도로 긴장된다. 공기가 굳어버린 것같았다. 주원장이 우물거리며 말했다: "너는 정말 손을 썼단 말이냐?" 그러자 부우덕은 깜짝 놀랄 행동을 보인다. 그의 넓은 소매에서 비수를 끄집어내더니, 주원장을 향하여 큰소리로 말한다: "네가 우리 부자의 머리를 달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럼 지금 가지고 가라." 말을 마치고는 비수를 목에 대고 그어버린다. 피가 백보나 흘렀고, 목숨이 끊어진다. 주원장은 노기를 억제하지 못하고, 그의 가솔을 모조리 당히에는 가장 변방인 운남과 요동으로 유배보낸다.

 

부우덕이 죽은지 겨우 3개월만에 왕필이 피살된다. 왕필은 1388년 남옥을 따라 전투에 참전하여 어아해를 생포하였다. 용맹하며 전투에 능했다. 1392년, 부우덕, 풍승을 따라 산서, 하남에서 군대를 훈련시키기도 했다.

 

1395년 이월 이십이일, 주원장은 다시 핑계를 잡아 송국공 풍승을 죽인다. 풍승은 원나라승상 하나추의 20만군대를 항복시킨 후, 항복한 장수를 압송하여 개선했다. 풍승이 돌아와서 승리를 만끽하기도 전에 그는 죄를 지엇다고 선언받고 병권을 박탈당한다. 그리고 안휘로 유배를 간다. 또 다른 견해로는 그가 남경에 돌아온 후, 주원장이 그에게 독주를 한잔내려서 독살했다고도 한다. 풍승은 인생의 최전성기때 굴러떨어진다. 아마도 그가 너무 교만하고 행동이 법도에 어긋났기 때문일 것이다. 1389년, 그의 사위인 주왕은 비밀리에 봉양으로 가서 풍승을 만난 적이 있다. 아마도 그들의 군사동맹관계가 황권에 위협이 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대체로 4사람만이 주원장의 손에 죽지 않았다. 그들은 모사 유기, 대장 탕화, 장흥후 경병문 및 무정후 곽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