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유진(庾晋)
주원장은 명나라의 개국황제이며, 중국역사상 걸출한 정치가중 한 명이다. 같은 개국황제인 유방, 유수, 사마염, 이세민, 조광윤등은 상대적으로 관용적이고 통이 크며, 공신들을 잘 대했다. 그러나, 주원장은 중년말년에 계속하여 포악한 행동을 저지른다. 이것은 주원장의 자격지심이 그렇게 만든 것이고, 나아가 인격을 왜곡시켰다. 이 점은 기본적으로 사학자들이 컨센서스를 이루는 점이다. 주원장의 일생을 보면, 생활궤도는 비천(卑賤)에서 부귀(富貴)로 갔지만, 그의 심리역정은 자신(自信)에서 자비(自卑)로 갔다.
신하들을 시기하여 신경질적으로 바뀌다.
일찌기 주원장은 어쩔 수 없이 황각사(皇覺寺)에서 스님생활을 한 적이 있다. 그때 세상 인심의 염량세태를 많이 맛보았다. 나중에는 곽자흥(郭子興)의 부하가 되어 금방 장수가 된다. 주원장은 인재를 발굴하는데 능했고, 금방 일군의 고급모사들을 모은다. 그들은 주원장을 위하여 계책을 내놓고, 주원장이 원나라통치를 전복시키게 하는 동시에 다른 농민반란군들도 제거하도록 한다. 그리고 1368년에 대명왕조를 건립한다. 슬픈 일이라면, 주원장이 천하를 개창할 때, 아직 천하의 문인현사를 널리 모았고, 수하장수들을 믿고 썼다. 그러나 천하가 안정되자, 그는 문신들이 그의 출신의 비천함을 비웃을까봐 우려했고, 무장들이 그의 황위를 찬탈할까봐 걱정했다.
주원장의 꿈은 가천하(家天下)의 국면을 형성하는 것이다. 20여명의 아이들이 전국각지를 분봉받고 병권도 가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개국공신들이 자신의 강산을 찬탈하지 않을까 걱정했다. 그래서 그들을 없애야만 안심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심마(心魔)'가 작용하여 시간이 흐르다보니, 주원장은 전형적인 조급한 신경병 증세를 보이게 된다. 자신감이 심각하게 결핍되고, 의심암귀로 극도로 민감하며 쉽게 망상에 빠진다. 초조함을 해소시키기 위하여, 그는 여러가지 비인도적인 형법을 만들거나 회복시킨다. 야만적이고 잔혹한 정도는 역대군왕을 초월한다. 주원장은 조정관리를 숙청하고, 관민을 도살하는 것을 즐겼다. 예를 들어 그는 정장(廷杖)의 징벌수단을 발명하여 위로는 재상, 아래로는 평민까지 누구든지 인격적인 존엄을 유지할 수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곤장아래 죽어나갔다. 곤장을 맞고 죽지 않으면 병신이 되었다. 그리고 봉양 혹은 기타 변방의 주군으로 유배되어 군대에 배속된다.
주원장은 평화시기에 4만여명의 문신무장을 도살했다. 홍무9년(1376년)에만 봉양에 유배보낸 관리가 1만여명에 이른다. 홍무26년에서 28년 사이에 주원장은 먼저 대장 남옥을 주살하면서 1만5천명을 같이 죽인다. 나중에 서달로 하여금 그가 내린 거위찜을 먹게 하여 죽이고, 부우덕은 자살하도록 핍박한다. 그리고 요영충이 용포를 몰래 훔쳤다고 무고하여 감옥에 가두고 죽여버린다. 심지어 집안에서 쉬고 있던 풍승도 죽음의 액운을 벗어나지 못한다. 짧은 3년동안, 주원장은 당초 그를 따라 함께 강산을 차지했던 나머지 원로를 하나하나 제거한다. 이에 대해, 사학계에서는 지금까지 이것이 주원장이 스스로 세상에 오래 살아있지 못할 것으로 여겨서 공신을 제거하는 발걸음을 빨리하게 되었다고 보았다.
주원장은 홍무10년을 전후하여 인격분열현상을 보인다. 사람들에게 전혀 다른 사람으로 느끼게 했다. 두드러진 표현은 인군(仁君)에서 폭군(暴君)으로 바뀐다. 주원장이 미친듯이 공신들을 도살하게 된 심리적인 원인을 따져보면, 가장 대표적인 해석은 주원장이 황태자의 유약함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가 죽은 후 강한 신하들이 약한 군주를 억누를 것을 우려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전에 우환이 될만한 자들을 제거했다는 것이다. 이런 해석은 궁중에피소드 하나가 방증이 된다: 하루는 황태자가 부친에게 사람을 너무 많이 죽이지 말라고 하였다. 주원장은 가시가 가득한 방망이를 땅위에 던지며 황태자에게 손으로 들어보라고 한다. 황태자는 가시가 난 방망이를 들다가 손바닥이 찔려서 연신 아프다고 호소한다. 주원장이 말했다: "나는 너를 위하여 사전에 방망이의 독가시를 제거하는 것이다. 너는 설마 나의 이런 고심을 모른단 말인가?"
주원장은 금의위라는 정보기관을 만든다. 그리하여 특무가 전국에 쫙 깔린다. 대신들의 생활을 감시하고, 수시로 그가 제거하고 싶은 신하를 제거할 수 있게 된다. 주원장은 신민을 도살하는데 열중했따. 이것은 그의 심리압력을 감소시키려는 일종의 병적인 방식일 것이다. 이 방식은 명나라의 관리제도에 전례없는 괴이한 일들이 일어나게 하였따. 예를 들어, 대가승당(帶枷升堂), 상조여부형장(上朝如赴刑場)등이다. 크고 작은 관리들은 모두 공포 속에서 생활했다. 이는 주원장을 신속하게 아주 고독한 사람으로 만든다. 아무도 그에게 직언하지 못했다. 주변의 가까운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주원장은 밤에 잠을 자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옷을 입고 하늘을 관찰했다. 천하사방의 국세변화를 걱정했다. 시간이 흐르다보니, 심각한 신경쇠약을 앓게 된다. 의사결정에서도 날로 강박적인 회의망상이 나타나고, 강퍅자용(剛愎自用)하게 된다.
학문있는 사람을 질투하다.
주원장은 계통적인 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었다. 사람으로서의 숭고한 이상과 고귀한 정조(情操)는 결핍되어 있다. 그러므로, 고난한 신세를 사회개조와 천하창생을 구원하려는 동력으로 바꾸질 못했다. 반대로 자신이 학문이 없어서, 학문이 있고 재능이 있는 사람들을 미친 듯이 질투한다. 호유용, 이선장, 유기등의 사람들은 모두 운주유악(運籌帷幄), 결승천리(決勝千里)할 수 있는 지낭,책사였다. 주원장의 강산은 이들 세 명의 지혜의 결정이다. 송렴도 출신이 빈한하고, 신세가 주원장과 비슷했다. 이치대로라면 동병상련해야 한다. 주원장도 초기에는 확실히 그러했다. 그러나 송렴은 학문이 나무 뛰어났다. 주원장도 결국은 용인할 수 없게 된다.
주원장이 황제에 오른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누군가 와서 그에게 말한다. 문인은 결점을 잡고 비방하기를 좋아하니, 믿어서는 안된다고. 그리고 예를 들어 말했다. 장사성(張士誠)의 원래 이름은 장구사(張九四)인데 나중에 왕이 되어 문인들에게 그를 위하여 좋은 이름을 지어달라고 한다. 문인들은 사성(士誠)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맹자의 책에 이런 말이 있다: "사(士), 성소인야(誠小人也)". 기실 문인들은 은근히 장사성이 소인이라고 욕한 것이다. 장사성이 어찌 알 것인가. 사람들에게 반평생 소인이라고 불릴 줄이야. 죽을 때까지도 몰랐을 것이다. 정말 가련한 일이다. 주원장이 그 말을 들은 후, 즉시 <맹자>를 찾아본다. 과연 그런 말이 있었다. 이때부터 그는 의심이 더욱 심해진다. 문인들을 더욱 경계한다. 왜냐하면 주원장은 황제이고 생사여탈권이 있었다. 이것은 의심과 시기의 문제만이 아니다. 게다가 그는 편집적인 성격이 있어서 아주 무섭게 바뀌게 된다.
나중에, 관직에 나오지 않으려는 문인들에 대하여, 주원장은 기본적으로 죽이는 방법을 취한다. 그렇게 하여 후환을 없앤 것이다. 고계와 양기, 장우, 서비의 4명은 "오중사걸(吳中四傑)"이라고 칭해졌다. 고계의 허리가 잘린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양기도 금방 주원장에게 벌을 받아 노동을 하게 된다. 일대의 명가가 공사현장에서 고생하다가 죽었다. 몇년이 지나서, 서비도 하옥되어 죽는다. 장우는 영남으로 유배되는데 가는 도중에 돌연 다시 돌아오라고 한다. 그는 스스로 죽음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강에 몸을 던져 자결한다. 소주문인 요윤, 왕모(王謨)도 관직에 나가지 않으려 했다. 주원장의 태도는 아주 명확했다. 내가 부르는데 네가 감히 오지 않다니, 그럼 죽여버리겠다. 이렇게 그의 부름에 응하지 않은 사람은 모조리 참수되고 가산몰수되었다.
귀계의 유생 하백계 숙질은 손가락을 자르고 절대로 관직에 나가지 않겠다고 맹세한다. 그리하여 경사에 체포되어 끌려온다. 주원장이 그들에게 묻는다. "이전에 세도가 어지러울 때, 너희는 어디에 살았는가?" 하백계가 대답한다: "홍구(紅寇, 주원장이 최초로 참가한 홍건적을 지칭함)가 난을 일으킬 때, 복건, 강서의 사이에 피해서 살았다." 주원장은 대노한다. "짐은 하백계가 마음 속에 원한을 품고 있는 것을 안다. 짐이 천하를 취한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고 생각한다." 특별히 하백계에게 말한다: "짐은 너 하백계가 고의로 홍구가 난을 일으킨 것을 언급한 것을 알고 있다. 다른 뜻이 있다. 너희가 고의로 손가락을 자른 것은 짐의 관리가 되지 않겠다는 것이다. 짐은 너희를 참수하겠다. 천하의 우부(愚夫)들이 너희를 따르는 것을 막기 위해서" 그리고 사람을 시켜 하백계 숙질을 원적으로 압송한 다음 처결한다.
원말명초의 문단영수 양유정(楊維楨)만이 유일한 예외이다. 양유정은 시로 천하에 이름을 떨친다. "철애체(鐵崖體)"라고 불렀다. 그는 원나라때 관직을 사임한 후, 산수에 뜻을 두고 관리로서의 명리에는 담백했다. 장사성이 동오에 할거하고 있을 때, 일찌기 양유정을 성대하게 요청한 바 있다. 다만 양유정은 명리에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 장사성은 다시 사람에게 의견을 물어본다. 양유정은 회신을 보내어, 장사성의 결점을 지적하고, 그가 반드시 외화(外禍)를 입을 것이라고 예언한다. 나중에 과연 그렇게 되었다. 주원장이 천하를 통일한 후, 양유정의 명성을 듣는다. 즉시 근신에게 명을 내려 입조를 독촉하도록 하다. 양유정은 주원장이 보낸 사람에 의하여 강제로 남경으로 끌려온다. 120일을 기다린 후, 상소를 올려 사직하고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노객부요(老客婦謠)>라는 시를 써서 뜻을 밝힌다: 이때 양유정은 이미 팔십이 다 된 늙은이였고 죽여야 도움이 될 것이 없었다. 주원장은 겨우 그를 풀어준다. 송렴이 시를 지어 양유정을 배웅한다. "불수군왕오색조(不受君王五色詔), 백의선지백의환(白衣宣至白衣還)"이라는 문구가 있어 찬탄을 받는다.
주원장은 사람을 쓰고서도 의심하고, 의심하면서도 쓴다. 그래서 주원장은 대권을 독점할 뿐아니라, 자그마한 권력도 자신의 손아귀에서 놓지 않았다. 이런 황제는 당연히 아주 힘들다. 그는 매일 하늘이 밝기도 전에 일어나서 일을 한다. 깊은 밤까지 일했고, 쉬는 날도 없었다. 오락도 없었다. 완전히 워크홀릭이다. 주요 업무가 공문서를 검토하고 결재하는 것이었으므로 주원장은 문인들의 글쓰는 방식을 아주 싫어했다. 앞부분에 주변 이야기를 가득 늘어놓고, 경제, 학문을 자랑한다. 길게 쓰지만 쓸모는 없다. 홍무9년 형부주사 여태소(茹太素)는 만언서를 올린다. 6천여자를 읽은 후에도 아직 구체적인 의견이 나오지 않았다. 모조리 쓸데없는 말이었다. 주원장은 성깔을 내서 사람을 시켜 여태소를 불러와서 한바탕 때린다. 다음 날 다시 읽는데, 1만6천5백자를 읽은 후에 비로소 핵심문제로 들어갔다. 5가지 일을 건의하는 것이었다. 그중 4건은 괜찮았다. 주원장은 즉시 관련 주무부서에 명하여 집행하게 한다. 그리고 여태소에게 말한다. 이런 일은 5백자면 충분히 말할 수 있는데, 왜 1만7천자나 쓸데없이 썼느냐고. 이것은 글을 번잡하게 쓰는 잘못이다. 주원장은 이 일을 특별히 기록하여 공표하고, 전국의 관민을 교육시킨다.
주원장의 신세와 대동소이하지만, 유방은 그렇게 심한 자격지심이 없었다. 출신과 문화가 그보다 높은 사람들에 대하여 겸용병축(兼用幷蓄)했다. 그리고 재능과 장점에 따라 중임을 맡겼다. 유방의 지낭인 장량, 진평, 소하는 호유용, 이선장, 유기와 동일한 유형의 인물이다. 그러나 운명은 천양지차이다. 전자는 유방의 예우를 받으며 선종했지만, 후자는 주원장에게 극형에 처해지고 삼족이 멸해진다.
자신의 출신에 대하여 자괴감이 있었다.
주원장은 극도로 빈곤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모두 전염병으로 죽었다. 어려서 고아가 되었고, 소를 길렀으며, 힘든 일을 하는 아기스님으로 지냈다. 천하대란때 다시 도적이 된다. 빈곤한 때 아마도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쳤을 것이고, 하층사회에서 갖은 고난을 겪었다. 그는 글에서 "광(光)" "독(禿)" "승(僧)", "생(生)", "소투(小偸)"같은 글자를 극도로 싫어했따. 반란군 한림아의 부하로 홍건적인 적이 있어, 원나라 관리에 의해 "홍구" "홍적(紅賊)"으로 불리웠다. 그래서 황제가 된 후에 "적", "구" 그리고 발음이 비슷한 글자는 모두 기휘(忌諱)했다. 절강부학 서일기(徐一夔)의 하표(賀表)에 "광천지하(光天之下), 천생성인(天生聖人), 여세작칙(與世作則)"이라는 말이 있었다. 원래의 의미는 '하늘의 아래에 하늘이 성인을 낳았으니, 세상의 모범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인'은 '승인(僧人)'과 발음이 같고 '칙(則)'은 '적(賊)'과 발음이 같다. 그래서 "하늘의 아래에 하늘이 승려를 낳았으니 세상의 도적이 된다"라고 그를 조롱하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를 즉시 참수해버린다. 얼마나 많은 문인학사, 조정관리들이 글이나 상소문에서 무의식중에 이런 글자를 썼다가 이유도 모른채 살륙당한 것이 얼마인지 모른다. 그리하여 홍무제때는 조심하고 신중하는 기풍이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명나라개국이후의 1백년동안, 문단은 비교적 암담했다. 명나라전기문학의 일부 우수한 작품은 거의 모두 원명의 교체기에 집중되어 있다. 이것도 주원장이 사상과 문화적으로 고압통치한 것과 관련이 있다. 기실 이것은 주원장의 강력한 자괴감의 표현이다. 그는 출신이 비천하고 한미했다. 비록 황제의 몸이 되었지만, 여전히 사람들이 그의 과거를 조롱할까와 겁이 났다. 주원장은 게속하여 자신의 빈민출신을 부끄러워 했다. 다른 사람들이 그가 고아, 승려였다는 점을 기억할까봐 겁을 냈다. 상류사회의 선혈로 자신의 자랑스럽지 못한 과거를 잊게 하려고 했다. 끝없는 도살은 주원장에 대한 이미지와 명왕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반대로 주원장은 흉금이 지극히 편협한 인물이라는 것을 설명할 뿐이다.
역대 개국황제들은 고대에 같은 성의 유명인물을 조상이라고 하였다. 주원장의 부친, 조부는 모두 소작농이다. 외조부는 무당이다. 당시의 사회에서 아주 비천한 인물들이고, 뭐 자랑할 것이 없었다. 주원장과 그의 문신들은 상의한 후 옥첩(玉牒, 황실의 족보)을 만들 때, 원래 송나라의 저명한 학자인 주희(朱熹, 주희는 휘주 무원 사람이다)를 조상으로 삼으려 했다. 마침 휘주사람으로 주(朱)씨성을 지닌 전리(典吏)가 배알하러 왔다. 주원장은 자신의 집안과 연결시키기 위하여 물어본다: "너는 주문공(朱文公, 후인들의 주희에 대한 존칭)의 후손인가?" 주씨 성의 전리는 묻는 이유를 알지 못하여 거짓말을 하면 화가 미칠 것이라고 생각하여 바로 아니라고 대답한다. 주원장은 자잘한 전리같은 하급관리조차 다른 사람을 자신의 조상이라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또한 몇대동안 자신의 조상과 휘주의 주씨간에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도 없었는데, 억지로 조상이라고 하게 되면, 공연히 남의 자손이 되는 것은 그만이라 하더라도, 사실이 알려진 후 다른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 거라고 여긴다. 그리하여 주원장은 주희를 조상으로 삼을 생각을 버린다.
명인의 자손이 되지 못하자 주원장은 그저 농민에게 잘 보이고 농민의 지위를 끌어올리려 했다. 그는 항상 말했다: "사민(四民, 사농공상) 가운데, 농민이 가장 힘들고 가장 일을 많이 한다. 봄에는 닭이 울면 기상하고, 소를 끌고 밭에 나가 농사를 짓는다. 씨를 뿌리고 잡풀을 제거하고, 비료를 뿌려야 한다. 태양이 내리쬐면 땀을 비오듯 흘리며, 힘이 들어서 사람모양이 아니게 된다. 겨우겨우 수확을 하고나서 조세를 납부하고 나면 얼마 남지 않는다. 만일 가뭄이나 수재나 충해를 만나면 온 집안이 초조해하지만 무슨 방법이 있을 리 없다. 그러나 국가의 세금은 모두 농민이 낸다. 부역을 하고 공물을 바치는 것도 농민의 일이다...." 그는 농민의 입장에서 관리와 호족을 죽였다. 심지어 농민이 탐관오리를 붙잡아 경성으로 압송하는 것을 장려했다. 주원장은 자주 "회우포의(淮右布衣)", "강좌포의(江左布衣)", "기자전무(起自田畝)", "출신한미(出身寒微)" 같은 류의 말을 언급하곤 했다. 그는 스스로 '포의'라고 칭했다. 그러나 누구든 감히 그를 포의라고 부른다면 아마 그가 할머니라고 하더라도 살기 어려울 것이다.
대각(大脚) 마낭낭(馬娘娘)의 출신도 비교적 하천했다. 그 시대에 여자는 규문(閨門)을 나서서는 아니되었고, 집안에 전족을 하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마낭낭은 전족을 하지 않았다. 당시에 보기에는 교양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주원장이 그녀를 부인으로 맞이한 것을 보면 당시 그들의 지위와 출신이 비슷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금릉의 백성들은 사람을 우롱하기를 즐긴다. 어느 한해에 원소절에 등을 구경하는데 어떤 등에는 한 부인이 두 다리를 뻗고 품에는 수박을 안고 있는 모습을 그려놓았다. 주원장이 대노하여 누가 그렸는지 물어본다. 아무도 자신이 그렸따고 말하지 않는다. 결국 그 골목의 사람들을 모두 죽여버린다.
동병상련의 연고로, 주원장은 역대제왕중에서 유방을 가장 숭배했다. 유방은 공신을 죽였다. 그는 더욱 심하게 죽였다; 유방은 자제들을 분봉한다. 그는 더 많이 분봉한다; 유방은 고향의 사람들에게 잘 대해주었다, 그는 더욱 심하게 잘 해주었다(봉양은 명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세금을 면제해주었다). 중국의 모든 통일제국의 개국황제중에서 단지 두 사람만이 평민출신이다. 다른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호족이나 세가출신이다.
부자에 대하여 봐주지 않았다.
초기의 하츨생활은 주원장으로 하여금 부자들을 원수처럼 미워하게 만든다. 그래서 황제가 된 후에 일련의 관련정령을 발표한다. <명사>의 기재에 따르면, 홍무제가 "원말의 호족들이 가난하고 약한 사람을 괴롭히는 것을 처벌하는 경우가 많았고, 법을 만들어 가난한 자를 돕고 부자를 억압했다." "당시 부자들은 많은 경우 죄를 받아 집안이 망했다." "호민거족(豪民巨族)은 모조리 없애버렸다." 홍무3년, 주원장은 부자들을 남경으로 불러서 한바탕 혼을 내고 그들에게 '사무일주(四毋一周)'하라고 요구한다. 즉 약한 사람을 괴롭히지 말고, 가난한 사람을 집어삼키지 말고, 어린 사람을 학대하지 말고, 늙은 사람을 속이지 말라는 것이다. 다음 해 다시 중서성에 유지를 내려 빈민의 토지를 겸병한 부호들을 엄벌하도록 지시한다. 홍무5년 특별히 철방을 만들어 공후(公侯)들이 평민을 괴롭히지 못하도록 한다. 심지어 대명률에도 관리들이 세금을 거둘 때 빈부에 따라 차이를 두지 못하도록 규정한다. 당시 상품경제가 가장 발달하고, 부자가 가장 많았던 태호유역은 주원장이 "호족 및 부자들의 밭은 몰수하여 관전으로 삼았다" 그 후에 토지국유화의 길을 걷는다. "(소주)부의 토지중에서 관전이 많았고, 민전은 15분의 1에 불과했다." 이런 여러가지에 대하여 주원장이 노동대중을 잘 보살펴주었다고 말하기 보다는, 그가 마음 속에 품고 있던 원한을 풀어버린 것이라고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주원장은 원나라사람들의 수중에서 강산을 빼앗은 후, 남경이라는 토지를 마음에 들어한다. "호거용반(虎踞龍盤), 유제왕기(有帝王氣)"의 풍수길지이다. 여러 사람들의 주장을 물리치고, 남경을 수도로 정한다. 남경은 도성으로서의 기초가 좋지 못하였다. 성벽이 단일하고 얇으며, 외적의 침입을 막기에는 부족했다. 성벽을 다시 만드는 것이 시급한 일이었다. 당시는 명나라가 개국한지 얼마되지 않아, 새로 해야할 일들이 많이 기다리고 있었다. 조정의 재정은 부족했다. 돈을 내서 이런 공사를 마무리할 수 있는 능력이 아예 없다고 할 수 있었다. 어떤 대신이 민간에서 자금을 모으자는 묘책을 내놓는다. 논의를 거듭하다가, 엄청난 재산을 가진 거부인 심만산(沈萬山)에게 시키기로 정한다. 그래서 심만산을 남경으로 부른다.
심만산은 태연자약하게 남경으로 온다. 그리고 자신이 3분의 1의 성벽(홍무문에서 수서문까지)은 자신이 돈을 내어 짓겠다고 말한다. 주원장은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란다. 조야가 일시에 떠들썩해진다. 1사람이 이렇게 큰 공사의 돈을 담당하다니 지금까지 듣도보도 못한 일이었다. 일시에, 오흥 심만산은 길거리에서 누구나 입에 올리는 화제인물이 된다. 다만 이때 그는 잠재적인 위기를 전혀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아마도 너무나 많은 명예 하에 태연할 수 있었을 것이다. 기한내에 성벽을 완공한 후, 성안에 있는 명나라군사의 의복이 낡고 얇은 것을 보고는 다시 큰 돈을 내어 군대에 물자를 제공하겠다고 말한다. 심만산의 동기는 쇠뿔도 단김에 뺀다는 식이었다. 주원장에게 잘 보여서 그를 배경으로 삼고자 한 것이다. 생각은 확실히 괜찮았다. 그리고 전형적인 장삿꾼의 수법이다. 다만 심만산이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은 그가 이렇게 한 것은 고기만두로 개를 때린 것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목숨까지 잃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주원장이 그 소식을 듣고는 대노한다: "필부가 천자의 군대에 물건을 내리다니. 난민이로다. 죽어야 마땅하다." 다행히 현명한 마황후의 마음이 자비로와서 주원장에게 이렇게 말한다: "법은 불법을 저지른 사람을 주살하는 것이지, 불길한 사람은 주살하지 않는 것이다. 이 초민은 부유하여 국가와 대적할만하니 당연히 불길한 자이다. 불상지민(不祥之民)이마, 하늘이 그를 망칠 것인데, 당신이 어찌 월조대포(越俎代疱)하려고 하는가?" 주원장은 그 말을 듣고 이치에 맞다고 생각하여, 조금 화를 삭인다. 심만산은 이렇게 하여 죽음은 면하지만 운남으로 유배를 떠나게 된다. 나중에 타향에서 객사한다. 일대의 재산관리대가가 비록 사람됨이 근신하고 조심했지만, 결국 집도 망하고 사람도 죽었다. 그는 아마도 죽을 때까지도 왜 주원장이 그렇게 화를 냈는지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대부호 유통해(兪通海)는 주원장을 따르면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다. 유통해는 원래 조심하고 근신했다. 그러나 주원장이 황제에 오른 후 그를 놔두지 않았다. 유통해는 진회하의 가에 호화주택을 한 채 지었다. 금의위는 유통해가 모반할 뜻을 가졌다고 무고한다. 무슨 골목이 진회하를 통과하면 용이 되고 대명천하를 빼앗는다라고 말을 만들어 낸다. 비록 주원장은 유통해를 해치고 싶었지만, 이것만으로는 공개적으로 그를 처형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유통해의 집앞에 일백개의 고양이머리를 새긴 패방을 세운다. "고양이(猫)"가 "물고기(魚)"를 잡아먹는다는 것으로(魚와 兪는 중국어로 발음이 같다), 유통해를 죽일 것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이렇게 하여 유통해가 체면을 유지하면서 자결하도록 압박한다. 유통해는 총명한 사람이다. 바로 황상의 진정한 뜻을 알아차린다. 그는 자신이 황상의 목숨을 구해준 적이 있고, 대명강산을 건립하는데 피와 땀을 흘린 공로가 있는데, 이제 교토진(狡兎盡), 주구팽(走狗烹)인 것이다. 황제의 수단은 너무 잔혹했고, 너무나 무정했다. 그는 화가나서 병석에 눕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죽고 만다. 죽을 때 나이 겨우 38살이었다. 명태조는 유통해를 죽게 만든 진상을 숨기기 위하여 친히 유통해의 집으로 가서 곡을 하고, 유통해를 손국공(孫國公)에 추봉(追封)한다. 홍무3년에는 다시 괵국공(虢國公)으로 고쳐 봉한다.
오늘 우리가 역사를 회고하면, 그의 참패는 기실 주원장이 어려서부터 빈곤하게 살았던 경력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주원장과 같이 진정으로 빈한한 농민이 나중에 개국지군이 되는 경우는 정말 보기 드물다. 비록 사람들이 항상 그와 한고조를 비교하는데, 한고조는 정장이라는 하급관리를 지냈다. 그리고 소하등의 사람들이 도와주었다. 어쨌든 중농 정도의 신분이다. 그러나 주원장은 어렸을 때 진정으로 가난했다. 집안에 수시로 양식이 떨어졌고, 부득이 고향을 등지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 한해는 재난이 있은 후에 질병이 돈다. 부친, 큰형과 모친이 차례로 1달내에 전염병으로 사망한다. 그 해에 주원장은 겨우 17살이었다. 둘째형과 두 사람은 가족의 시신을 쳐다보면서 슬프면서도 걱정했다. 주씨집안은 아무 것도 없었다. 가족이 죽어도 묻을 곳이 없었다. 고향에 돈있는 지주들은 전혀 도와주지 않았다. 나중에 마을의 약간 부유한 지주인 유계조(劉繼祖)가 불쌍히 여겨 약간의 땅을 내주어 주씨의 묘지로 삼을 수 있게 해준다. 유씨는 그 후에 복을 많이 받는다. 주원장이 그를 의혜후(義惠侯)로 추존한다.
자신의 용모에 대해서도 자격지심이 있었다.
주원장의 용모는 추악했다. 이것은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표주박같은 말상으로, 두 눈은 푹 꺼져 있고, 얼굴은 길며, 입은 크다. 얼굴에는 곰보자국이 가득했다. 쳐다보면 살기가 등등하다. 그러나, 이 진실한 화상은 계속 몰래 숨겨져 있었다. 또 다른 화상은 의표가 당당하고 얼굴에는 온화한 기운이 넘친다. 그러나 그 본인과는 조금도 닮지 않았다. 현재 주원장은 이 두 장의 모습이 서로 다른 화상이 지금까지 전해져 오고 있다. 지금 이 두 장의 화상중 한 장은 북경고궁박물원에 보관되어 있고, 한 장은 남경 명효릉의 향전(享殿) 냉 걸려 있다.
주원장의 2장 화상은 왜 이렇게 완전히 다를까? 민간에는 전설이 전해져 온다. 주원장이 등극한 후, 천하에 그림의 고수를 모집하여 자신의 화상을 그리게 한다. 첫번째로 황궁에 불려간 화가는 용상에 앉아있는 위풍늠름한 주원장을 신경써서 세심하게 그렸다. 형(形)이 닮았을 뿐아니라 신(神)도 담아냈다; 새카맣고 큰 얼굴, 이마 그리고 태양혈은 높이 솟아 있다. 관골이 두드러지고, 넓다란 턱은 상악보다도 더 길었다. 큰 코, 굵은 눈썹, 한쌍의 눈은 냉혹하고 흉악한 빛을 쏘아내고 있다. 주원장이 이를 본 후, 용안이 대노한다. 두 손으로 허리에 찬 옥대를 아래로 내렸다고 한다. 알려진 바로는 주원장이 사람을 죽일 때의 습관적인 행동이라고 한다. 화가는 놀라서 혼이 달아났다.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를 몰랐다. 바닥에 꿇어앉아 계속하여 머리를 조아렸다. 입으로는 연신 말했다: "황상성명(皇上聖明), 황상성명!" 그러나 주원장이 크게 호통치는 말만 들을 수 있었다: "여봐라! 이 놈을 끌어내라!" 이렇게 하여 화가는 목이 잘린다. 두번째 화가가 궁으로 불려들어간다. 더욱 신경을 써서 그렸다. 주원장의 화상을 그 모습 그대로 그려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끌려나가서 참수당한다.
세번째 화가는 아주 총명했다. 그는 그 이유를 알아냈다. 그리하여, 주원장의 얼굴형을 크게 고친다. 미목전신(迷目傳神)에 착안하고, 이상표달(理想表達)이 치중했다. 그리하여 화를 내지 않지만 위엄이 드러나는 황제상이 그려진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주원장은 자신의 진실한 모습과는 그다지 관계가 없는 이 화상을 본 후에 크게 기뻐하며 화가에게 큰 상을 내렸다고 한다. 그리고 이 그림을 여러 장 베껴서 신하들에게 하사하고, 후세자손들에게 남기라고 한다. 그리하여, 이 고심을 다했지만, 거의 상상에 의하여 창작해낸 자애로운 눈썹과 선량한 눈을 가진 부귀노인이 나타난다. 이런 황당하고 가소로운 사정은 주원장만이 해낼 수 있는 것이다.
또 하나의 이야기가 있다. 유백온이 처음에 주원장을 만났을 때, 일찌기 마음 속으로 크게 놀랐다고 한다. 주원장의 괴이한 용모에 마음이 크게 흔들렸다: 높은 이마와 가는 눈, 쑥 들어간 코와 큰 입, 귀는 작지만 두텁고, 뺨은 두드러졌지만, 턱도 크다. 키는 크고 등은 활처럼 굽었다. 다리는 길고 무릎은 굽었다. 허리는 두텁고 어깨는 좁다, 손은 크고 손가락은 가늘다; 행동은 새우가 물에 있는 것같고, 목소리는 매가 우는 것이나 원숭이가 소리치는 것같다. 유백온은 그를 한번 보고 상술에 근거하여 결론을 내린다; 이 사람의 상은 대현(大賢)의 후박(厚朴)과 대간(大奸)의 잔폭(殘暴)을 겸비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나중의 주원장은 과연 자신의 행위로 전확하게 유백온이 말한 것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다. 이런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를 우리가 따질 필요는 없다. 사실상 그것은 후인들이 갖다붙였을 가능성이 아주 크다. 그러나, 최소한 주원장이라는 사람이나 그의 용모에 이런 말을 가져다 붙이니 더욱 그럴 듯했던 것이다. 여기서 용모에 대한 묘사는 확실히 예술가공을 거치지 않은 그 표준상에 더욱 접근한다.
주원장의 통치시기에 조정의 사람들은 모두 불안해 했다. 시시각각 화가 닥치지 않을까 우려했다. 관리들은 매일 아침에 입조하면서, 처와 결별했다. 저녁에 평안하게 돌아오면 온 가족이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관리들은 낮을 두려워하고, 밤에는 입조하지도 않고, 황제도 공무를 처리하지 않느다. 생존확률이 커지는 것이다.
주원장은 말년에 제왕으로 천하를 호령하고, 불가일세였다. 그러나 그는 행복하지 않았다. 그의 정서상태는 계속 우울하고 즐겁지 않았다. 주원장의 개인비극은 그가 자괴감에 빠져 있을 때 그는 약간의 자신감이 있었다. 그러나 그가 충분히 자신을 가질 수있을 때 오히려 더욱 자괴감을 느꼈다. 바꾸어 말하면, 주원장이 주중팔(朱重八)로 불릴 때 그는 상당히 완강하고 자신이 있었고, 현명한 선비들을 예로 대했다. 그리고 큰 도량을 보여주었다. 홍건적의 일개 장수였지만 사람들의 인망을 얻었다; 다만 주중팔에서 주원장으로 개명한 후, 그는 갈수록 민감해지고, 취약해지고, 강퍅자용했으며, 잔인하고 흉포했다. 이렇게 하여 주중팔과 주원장은 완전히 다른 두 개의 인격이다. 인군과 폭군의 선명한 대비이다.
명조의 개국황제 주원장부터 16명이 황제중 어느 황제도 흉금이 있고 기도가 있는 사람이 없었다. 이것은 아마도 유전적인 요소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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