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남무우(藍無憂)
중남해가 제작하고, 보시라이가 주연한 <왕의 재판>은 1년여를 끈 후메 마침내 종영했다. 이 영화는 원래 중국사람들이 별로 좋게 보지 않았었다. 대부분은 그것이 그저 대충 만들어서 형식적으로 진행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아주 재미있었고, 헐리우드 영화보다 나았다. 이틀짜리 재판은 5일로 연장되었고, 정보량도 아주 많았다. 편집과 삭제를 거친 후의 재판기록만 십여만자에 이르고, 보시라이 개인의 증언, 변론의견만 해도 3만여자에 이른다.
재판은 연극이었나? 어떻게 말해야 하나? 만일 중남해가 리듬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고, 피고인의 소위 진술번복도 미리 각본에 짜여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믿기가 어렵다. 관영매체가 첫날 저녁에 미친 것처럼 욕을 해대던 것을 보지 못했는가? 진술번복할 것을 알았으면 어떻게 그를 정신착란으로 만들 것인가? 보시라이가 진술번복할 것을 분명히 알았으면서 그에게 자신의 생각을 진술할 기회를 주면서, 백성들의 반응을 통제할 수 있다고 한다면, 아마도 그렇게 위험을 감수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만일 제남법원의 법관이 독립적으로 재판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인류의 IQ를 모욕하는 일이다. 함리적인 해석은 당국은 당연히 재판을 조종하고자 했고, 보시라이는 따르는 척하면서 상대방을 속여넘겼으며, 적절히 타협이 된 것으로 알고 재판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보시라이가 갑자기 진술을 번복하여 미처 대비를 하지 못했다. 아이웨이웨이는 이렇게 평론한다: "정치국은 오늘 밤에 회의를 열어서 머리를 맞대야 할 것이다."
보시라이가 진술을 번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상대방의 약점을 제대로 보았기 때문이다. 상대방은 투서기기(投鼠忌器)하고 관건문제에서 분리처리해야 한다. 진정한 죄행은 건드리지 못하고, 모두 자신의 몫을 가진다. 꺼내놓은 '기소내용'은 보시라이가 충분히 버틸 수 있는 것이다. 보시라이는 반드시 진술을 번복해야 했다. 그렇게 해야 자신의 정치지도자로서의 이미지를 유지할 수 있다. 찔러도 피한방울 나오지 않을 웅변으로 지지자의 신념을 강화하는 것이다. 그에 있어서, 정치적 영향력을 지속할 수 있다면, 미래에 한 가닥 희망이 있다. 만일 공개적으로 머리를 숙이면, 영원히 재기할 수가 없다.
보시라이에게 한방 맞았지만, 이미 시작한 "문자생방송"(비록 정교하게 삭제된 이후이지만)을 돌연 중지한다면 그것은 너무나 보기 좋지 않다. 이를 악물고 버텨 나가야 한다. 다만 이것은 주요한 것이 아니다. 관건은 시진핑등이 검토를 거친 후, 진술번복이 골치아픈 일이기는 하지만, 그냥 흐름을 따라가는 것으로 이용하겠다고 결정하였다. 보시라이는 허망한 '불굴의 이미지'를 지키고 싶은 것이고, 시진핑은 흐름을 따라 "적수를 잘 대해주었다"는 이미지를 남길 수 있다. 보시라이의 지지자들을 최대한 다독거리고, 보시라이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자원을 받아들인다. 다른 한편으로 법치를 존중하는 이미지도 만들어 낸다. 어떤 네티즌은 "감독이 말안듣는 배우를 만났다"고 표현했다. 또 어떤 사람은 보시라이가 "또 다른 감독"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후자가 아마도 더욱 정확할 것이다. 변화가 발생했지만, 그대로 진행해 간다. 이것이 바로 시진핑과 보시라이의 '묵계'이다. 그것은 바로 싸우지만 판은 깨지 않는 것이다. 지더라도 계속 불만을 품고 있고, 전체 판을 뒤집지는 않는 것이다.
보시라이와 시진핑, 한명은 장광발호(張狂跋扈)하고 한명은 음한복흑(陰狠腹黑)하다. 다만 본질은 비슷하다. 공동의 배경과 사고방식이 있다. 이것은 "한 산에 두 호랑이가 있을 수 없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즉, '인민내부모순'이다. 시진핑이 정권을 잡는 길과 보시라이의 충칭모델은 들어맞는다. 단지 강화버전, 업그레이드버전, 개선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보시라이는 권력투쟁에서 실패했다. 그러나 보시라이노선은 부정되지 않았다. 충칭이라는 실험밭에서의 경험은 오히려 더 크게 발전한다. 이것을 가지고 말하자면, 시진핑이 보시라이에게 너무 심하게 할 수는 없다. 서로 싸우고 권력을 다투는 것은 확실히 너죽고 나살기 식이다. 승리자가 패배자에게 바로 복수하고, 모조리 죽여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당내에서 민단에까지 반발이 일어난다. 이 점을 고려해야 한다. 같은 태자당이며 상장(上將)인 류야저우(劉亞州)의 '보시라이는 당연히 무죄석방되어야 한다'는 말과 같다.
사법이 독립되지 않았고, 법관은 '당성'을 중시한다. 범죄기소는 고의로 편집되고, 사회여론은 조종을 받는다. 보시라이에 대한 재판은 다른 정치적 재판과 마찬가지로, 결과가 어떻든지 간에, 절차에서 실체까지 모두 '정의'를 얘기하기 힘들다. 논리적 판단에 근거하여, 보시라이사건의 1심판결서는 분명히 전문이 공개될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페이지수도 적지 않을 것이다. '논리적 논증'의 부분이 강화될 것이다. 보시라이가 중형을 받을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시진핑 당국은 아마도 계속 추이를 따라갈 수도 있다. '충분히 변호의견의 합리적인 요소를 고려하여", 보시라이를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선물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1개 혹은 수 개의 기소내용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재판효과가 더욱 좋아질 것이다. 한편으로 '변호는 진실하고 효과적이었다'는 것을 드러내고, 다른 한편으로 '재판은 독립적이고 공정하다'는 것을 드러낼 수 있다. 다만 전체적인 양형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각자 해석할 여지를 남기고, 각자 필요한 것을 취하는 것이다.
보시라이는 '좌파지도자'의 역사적 지위를 수립하고자 한다. 시진핑은 '좌우를 모조리 먹어', 새로운 정치적 강자가 되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한낫 꿈이다. 보시라이는 정치적으로 감옥에 갔지만, 정치범이 아니라 양심범이다. "창홍타흑"의 검은 편향되어 있었고, 그저 도구였다. 내심으로는 정말 마오쩌둥을 숭배대상으로 생각지 않았을 수 있다. 설사 고위직에 있을 때라 하더라고, 그에게 의심을 품은 좌파인사가 적지 않았다. 그를 지지하는 것은 왕왕 일방적인 바램으로 인하여 잘못 해석한 것이다. 그리고 보시라이는 진정 민간과 관계를 건립하지 않았다. 그 자신이 공민의 적이다. 그는 일찌기 마오쩌둥파의 당원을 체포한 바 있다. 보시라이가 간 길은 자체모순의 막다른 골목이었다. 시진핑은 더욱 높은 단계에서 유사한 막다른 길같은 곳으로 갔다. 시대를 잘못 판단하고, 자신을 잘못 판단한 것이다.
글을 하나 읽은 적이 있다. '반성문'을 쓰려면 어떻게 해도 제대로 쓰기 힘들다. 경험이 풍부한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너를 지지하는 사람도 만족하게 만들고, 너를 반대하는 사람도 만족하게 만들고, 잘 모르는 사람도 만족하게 만들어야 한다." 이 '3개만족'은 아주 교묘하다. 중국인의 지혜가 충만하다. 이상적인 경지라 할 만하다. 이것은 반성문을 쓸 때 사용할 수 있을 뿐아니라, 널리 보급할 수 있다. 시진핑의 처리는 지지자, 반대자 및 잘 모르는 사람도 모두 '만족'하게 할 수 있을까? 마찬가지로, 보시라이의 '역습'효과는 어떠할까? 시진핑의 '오늘'은 보시라이가 결코 도달할 '내일'이다. 보시라이의 '오늘'은 시진핑의 마지막이 될 '내일'이다. 보시라이가 패배했을 때 이는 그에게 최대의 좌절이다. 그러나 좋은 점도 있다. 즉, '지질(止跌)'. 계속 악을 행하지 않을 수 있고, 더욱 큰 악을 행하지 않을 수 있다. 이것도 악과를 적게 쌓는 길이다.
이쪽에서 보시라이사건의 하이라이트는 이미 지나갔다. 저쪽에서 저우용캉 혹은 기타 '호랑이'에 관한 소문이 흘러나오고 있다. 시진핑이 만일 마오쩌둥, 덩샤오핑과 어깨를 나란히 하려고 뜻을 세웠다면, 분명히 정치적 강자가 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것이다. 대외적으로 전쟁을 하고, 대내적으로 호랑이를 잡는다. 강호를 돌파할 때의 소위 관례이다. '형벌은 정치국 상임위원에게는 가하지 않는다"는 것은 최근 2,3십년간의 일이다.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에 있어서 건드릴 수 없는 사람은 없다. 만일 보시라이가 정권을 잡았다면, 역시 '호랑이'의 머리를 빌려서 쓸 것이다. 풀뿌리 출신의 탐관오리가 아마도 민의를 막는 희생물이 될 것이다. 이것도 태자당들의 컨센서스이다.
'궁정투쟁'은 재미있다. 중국인들을 즐겨 본다(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TV드라마에 궁중투쟁드라마가 가득한 것을). 그러나 그렇게 싸워서는 신중국을 만들 수 없다. 어떤 사람은 궁중내전은 아마도 중국공산당의 분열을 가져올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필자는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중공의 고위직관리일수록, '판을 뒤집을' 용기는 갈수록 작아진다. 왕리쥔이 야반도주하고, 사면초가인 보시라이는 일찌기 쿤밍으로 가서 우회적인 '열병'으로 시위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속수무책으로 붙잡히지 않았는가? 그와 같은 웅심이 없는 자라면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전체 판을 갈아업지는 않는 내부투쟁은 아무리 흉맹하더라도, 실질은 사람들이 보는 것처럼 참혹하지 않다. 오히려 인체의 신진대사와 비슷하고, 중공이라는 기체를 유지보호하는데 도움이 된다.
'중국의 정치 > 보시라이-왕리쥔사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보시라이 2심재판: 중공고위층의 혈투 (0) | 2013.09.26 |
---|---|
보시라이 무기징역의 두 가지 정치적 신호 (0) | 2013.09.26 |
구카이라이가 왕리쥔의 사무실을 압수수색하였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0) | 2013.09.14 |
보시라이가 혐의를 부인하는 4가지 이유 (0) | 2013.08.24 |
보시라이와 저우용캉: 누가 더 약세인가? (0) | 2013.08.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