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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문혁전)

2차대전승리후 댜오위다오(센카쿠열도)를 중국이 회수하지 못한 이유는?

by 중은우시 2013. 8. 5.

작자: 미상

 

 

 

 

현재 알려진 중국과 일본의 역사자료를 보면, 중국이 댜오위다오(釣魚島)를 발견하고 명명했다. 그러나, 현재 댜오위다오는 일본이 점령하고 있다. 비록 중국측이 이를 인정하고 싶지 않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처음 댜오위다오를 발견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600년전의 일이다. 중국은 여러번 이 섬을 장악할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매번 기회를 놓쳤다. 그중 가장 좋은 기회는 1945년 8월 2차대전이 끝난 후부터 1년가량이 기간동안이다.

 

그때 중국은 동맹군의 주요구성원으로, 전승국이었다. 유엔의 주요 창시국중 하나이며, 상임이사국이다. 일본은 패전국이고, 무조선투항후 징벌과 분할을 당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당시 장개석이 이끄는 중화민국정부(명목상으로는 중공등 기타 당파를 포함함)는 중천에 뜬 해와 같았다. 국내에서는 표면적으로 통일적인 국면이 유지되고 잇었다. <카이로선언> <포츠담공고>등 기타 일련의 문건에서, 일본은 침범하고 약탈한 타국영토를 반환하여야 했다. 1945년 10월 대만, 팽호 및 대만부속도서의 정식반환 및 인수인계의식이 행해진다. 중화민국정부에서 새로 임명한 대만지구정부주석인 진의(陳儀)가 이 의식에 참가한다. 그후 중화민국정부는 이들 영토를 하나하나 접수한다.

 

다만 당시 귀환된 영토에 댜오위다오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중국측은 접수과정에서 댜오위다오문제를 제기하지 않았고, 내놓으라고 하지도 않았다. 심지어 중국과 일본간에 아직 반환되지 않은 영토문제가 존재한다는 것도 제기하지 않았다.

 

당시 중일양국이 국력, 지위의 차이가 컸기 때문에, 그리고 중국,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의 동맹국관계가 비교적 공고하였기 때문에(당시는 냉전이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중국은 이 기세를 이용하여 댜오위다오를 회수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었다. 그리고 댜오위다오뿐아니라 류구군도까지도 함께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러가지 원인으로, 이 기회를 잃어버리고 만다. 이 시기는 1백여년동안 중국이 댜오위다오를 회수하는데 가장 근접한 기회였다(중국이 현재 댜오위다오의 역사를 논의할 때면 왕왕 이 스스로의 원인으로 잃어버린 기회를 잘 언급하지 않는 편이다). 이후 국민당정부는 국제적인 발언권이 점점 약화되고, 대륙정권이 교체된 후에는 냉전이 시작된다. 댜오위다오의 회귀는 점점 어려워졌다. 역사의 기회를 쉽기 지나갔고, 깊은 유감을 남기게 된다.

 

왜 오늘날 보기에 이렇게 좋았던 기회를 놓쳐버렸던 것일까? 장개석을 우두머리로 한 중국정객들과 역사학자들 및 여러 기타 당파인사들이 이 정도로 멍청했던가? 이것은 당시의 역사배경에서 분석하고 보아야 한다. 필자는 그중에 주요한 원인이 아래와 같은 몇 가지라고 생각한다.

 

1. 시모노세키조약에서 규정한 할양대상인 대만, 팽호등 부속도서의 명단에(당시 중국측은 할양대상이 많아질까봐 우려하여 조약에 상세한 도면을 첨부했다) 댜오위다오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댜오위다오는 시모노세키조약이 체결하기 3개월전에 일본정부에 의하여 일방적으로 일본영토로 확정된 바 있다. 2차대전후에 할양영토는 주로 시모노세키조약에 근거했고, 시모노세키조약의 할양영토에 열거되지 아니한 것이, 댜오위다오를 회수하지 못한 원인중 하나이다.

 

2. 댜오위다오의 영토인식에 있어서 모호함이 있었다. 댜오위다오는 무인도였다. 대륙과 대만에서 각각 400킬로미터, 200킬로미터 떨어져 있고, 중국과 일본(유구군도)간이 중간지대였다. 수백년동안, 댜오위다오는 실제상 중,일(유구군도)에서 유리되어 있었다. 근년들어, 중일쌍방은 각자 대량의 상대방 역사문건을 찾아보았다(서로 다른 역사시기의 문서, 지도, 기록등). 그리고 자신에게 유리한 '증거'를 찾았다. 상대방 역사자료에서의 '증거'로 댜오위다오는 자신의 것이라는 점을 증명하고자 한 것이다. 객관적으로 보아서, 현존하는 대량의 문서중, 어떤 것은 댜오위다오를 자신의 것이라고 하였고, 어떤 것은 상대방의 것이라고 표시하였다. 이것은 쌍방의 역사문건에서 모두 존재한다. 이것은 바로 설명한다. 당시의 중국정부는 댜오위다오가 일본에게 빼앗긴 중국영토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 문제에서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다. 이런 영토인식상의 모호함은 심지어 이후에도 25년간이나 지속되었다. 1970년이전에, 중국대만지구와 중화인민공화국은 모두 일본과 일찌기 유구를 점령한 바 있는 미국에 댜오위다오를 돌려달라고 요청한 바 없었다. 1970년이전에, 양안(대륙과 대만)이 매년 출판하는 지도집에서 댜오위다오를 일본(유구)영토로 표시해왔다. 이들 지도집은 모두 정식춮판되고 공개발행된 것이다. 찾기도 그다지 어렵지 않다. 1970년이후에야 현재의 입장으로 바뀌었다. 양안은 1970년이후 매년 출판하는 각종 지도에서 모두 명확하게 댜오위다오를 중국영토로 표시하기 시작한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3가지 요소가 이 영토인식의 변화를 가져왔다는 점이다. 하나는 1968년경 댜오위다오 부근에서 풍부한 석유천연가스자원이 발견되었다; 둘은 미국이 1972년 유구(오키나와)군도를 일본에 돌려주는데 댜오위다오가 포함되었다. 영토자원이 새로운 획정과 안배는 더 많은 관심을 끌기 마련이다; 셋은 해협양안의 정권이 상대적으로 안정된 후, 역사학자들이 정력을 쏟아 역사에 대하여 더욱 깊이있는 연구를 할 수있게 되었고, 점차 댜오위다오가 역사상 중국에 속한다는 기록을 더 많이 발견하게 된다.

 

3. 댜오위다오의 가치가 당시에는 실로 너무 적었다. 상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 댜오위다오는 다 합쳐야 7평방킬로미터 가량이다. 자연생존조건도 열악하고 대만과 대륙에서 비교적 멀리 떨어져 있다. 당시의 생산력조건하에서, 어선은 풍범(風帆)을 동력으로 하였고 배에 냉동설비도 없었다. 먼 바다로 나가서 물고기를 잡는 것이 비교적 어려웠다. 당시 근해어업자원이 아직도 남획되지 않았다. 중국해양어업의 주요분포는 아직도 근해구역이었다; 그외에 당시 누구도 댜오위다오부근에 그렇게 많은 석유와 천연가스자원이 매장되어 있을 줄 몰랐다. 나중에 유엔해양법공약에 "200해리 배타적경제수역"이라는 규정이 탄생할 줄도 몰랐다; 그리고, 당시의 장개석정부는 절대로 5년이후 대만으로 패주하는 정치판도가 형성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석유와 천연가스자원의 발견과 유엔해양법공약의 "200해리 배타적경제수역"규정이 실행은 댜오위다오의 몸값을 엄청나게 끌어올린다. 현대과학기술과 생산력발전으로 원래는 비교적 멀리 있던 해양이 크게 가까워지게 된 것이다. 신에너지발전기술, 해수담수화기술과 인공매립기술이 진보로 무인도도 유인도로 바꿀 수 있게 되었고, 소도도 대도로 바꿀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제일도련(第一島鏈)"의 정치, 군사작용으로 댜오위다오의 오늘날 가치는 옛날과 같지 않게 된다.

 

4. 중국의 국내정치분쟁의 영향이다. 항전후, 국내 각정당은 모두 생존, 정권, 정치투쟁을 가장 중요한 일로 꼽았다. 해외의 자그마한 섬까지 신경쓸 여지가 없었다.(통계에 따르면 중국연해의 도서는 만개가 넘는다고 한다). 유한한 역사, 지리학자들이 국내정치투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불가피하게 주요한 관심을 국내정치분쟁의 관련포인트레 쏟는다. 이때 설사 개벌적인 학자가 댜오위다오영토문제를 제기했다고 하더라도, 권력자가 중시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권의 위기가 사방에 매복되어 있는데, 어찌 수백킬로미터 떨어진 몇 개의 무인도까지 신경쓴단 말인가? 

 

이상이 원인을 분석하면, 당시의 중국정부가 댜오위다오 반환의 가장 좋은 역사적 기회를 놓친 것도 이상하지 않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