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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문혁전)

장위국(張緯國): 평생을 괴롭힌 출생의 수수께끼

by 중은우시 2013. 6. 26.

글: 녕녕(寧寧)

 

 

 

장위국이 처음으로 자신의 신세내력수수께끼를 접한 것은 1940년말 독일유학에서 돌아온 때였다. 이때 그의 나이는 24살이었다.

 

하루는, 그가 장개석의 마수실에서 존 건터의 <인사이드 아시아>라는 책을 보게 되는데, 거기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 "장개석 원수의 둘째아들 장위국 소위는 국민당 원로 대전현(戴傳賢, 즉 戴季陶) 선생의 아들이다."

 

장위국은 감히 이를 떠들지 못했고, 부친에게 물어볼 생각도 못했다. 그저 묵묵히 이 일을 가슴 속에 담아둘 뿐이었다. 설마 자신은 정말 부친의 친아들이 아니란 말인가?

 

그는 책에 쓴 내용을 믿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부친에게서 그는 부자간의 정을 너무나 많이 느꼈었기 때문이다.

 

장위국이 기억하고 있는 때로부터, 용모가 잘생기고, 천진하고 활발한 장위국은 장개석의 사랑을 듬뿍 받는다. 특히 계구(溪口)로 간 후, 장씨집안의 아래위는 모두 그를 잘 보호해주었고, 아껴주었다. 장개석이 매번 외지에서 집으로 돌아오면, 멀리서 장위국이 보이면 바로 "건건(囝囝, 건은 아들이라는 뜻)"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위국에게 뛰어와서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평상시에 장위국이 부친을 얘기하면 장개석은 장위국을 자신의 곁으로 불렀다. 사람들은 자주 장개석이 장위국을 품에 안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어떤 때는 장개석이 그를 자신의 어깨위에 태워주기도 했다. 둘은 아주 친했다.

 

8살 되는 해, 장위국과 장경국은 상해 만죽소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한다. 부친의 새로운 부인인 진결여와 함께 생활하게 된다. 그때 부친을 자주 볼 수 있었다. 1923년, 총통부공격때, 손중산은 친히 장개석에게 전문을 보낸다: "영파, 강북안, 인선교, 십호: 장위국 선생. 일이 긴급하니, 급히 오라" 장위국의 이름은 손중산이 장개석과 전보를 보낼 때의 별명으로 쓰였다. 이를 보면 장위국이 장개석의 마음 속에 얼마나 차지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9살때, 장위국은 진결여를 따라 멀리 광주황포군관학교로 가서 장개석의 곁을 지킨다. 10살때, 장개석은 북벌을 시작한다. 장위국과 진결여는 장개석의 곁에 남아 있었다. 이를 보면, 장개석은 장위국을 아주 사랑했음을 알 수 있다.

 

장위국이 11살 되던 해, 장개석은 진결여와 헤어지고, 장위국은 오충신(吳忠信)에게 맡긴다. 오충신 부부가 '양부' '양모'가 된다. 1936년, 20살이 된 장위국은 독일유학을 떠난다. 독일에서 정통의 프로이센신 군인교육을 받아, 유럽의 우아한 풍도를 익힌다. 

 

20년의 기억속은 친정(親情)과 애정이 넘였다. 그는 자신이 존경하고 깊이 사랑하는 분이 자신의 친부가 아니라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그는 고민하고, 고통스러워하고, 스스로를 추스릴 수 없었다. 그래서 몰래 대계도를 찾아가서 물어본다: "대숙부. 나는 도대체 누구의 친아들입니까?"

 

대계도는 그에게 직접 대답하지 않는다. 장개석이 그에게 보내준 12촌짜리 사진과 거울을 놓고, 장위국을 마주하고 앉는다. 그리고 거울을 중간에 놓는다. 장개석의 사진을 왼쪽에 놓고 자신은 오른쪽에 앉는다. 장위국의 머리를 만지면서 묻는다: "위국, 네 스스로 봐라. 이쪽을 닮았느냐 아니면 저쪽을 닮았느냐?" 장위국은 오른쪽과 왼쪽을 보다가 말한다: "왼쪽을 더 많이 닮은 것같습니다." 대계도는 웃으면서 말한다: "그럼 해결되지 않았느냐?"

 

1940년말 귀국하여 서북군 호종남의 휘하에 소위 소대장을 맡았다. 항전이 끝나기 전날 청년군으로 옮겨 소령 중대장을 맡는다. 1948년 32살의 장위국은 소장의 계급으로 장갑병 부사령관 겸 참모장이 된다. 8년동안 8단계나 계급이 오른다. 이런 승진은 장개석이 그를 배양하겠다는 마음과 사랑하는 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개석이 살아있을 때 장위국을 자신의 권력중심으로 불러들이지는 않는다. 계속 그가 두각을 나타내는 것을 막아왔다. 송미령이 "소경친위(疎經親緯)"(장경국은 부친이 송미령과 결혼한데 불만을 품고 있어, 송미령과의 관계는 계속 좋지 않았다. 그러나 송미령은 장위국을 자신이 낳은 것처럼 아꼈다)했지만. 1975년 장개석이 사망할 때까지, 장위국은 27년간 단지 계급이 1단계만 오른다. 그리고 직무도 그저 "삼군대학" 부교장 겸 전쟁학원 원장이었다.

 

이것은 상규에 부합하지 않는다. 왜 그랬을까? 이것은 장위국으로 하여금 결국 그 문제를 떠올리게 하였다: 자신은 분명 장개석의 친아들이 아닌 것이다.

 

장위국의 처지는 확실히 여러 사람들에게 의문을 품게 만들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의문을 품었다. 송미령이 장위국을 그렇게 사랑하는데, 장개석은 왜 장위국을 후사가 없는 송미령에게 주어 기르게 하지 않았을까? 거기에 무슨 깊은 뜻이 있지는 않은가?

 

장위국은 요야성(姚冶誠), 진결여와 오충신의 처인 왕유인등이 부양했다. 송미령이 부양하지 않았다. 장개석의 목적은 바로 장위국의 발전을 견제하는 것이다. 알아야 할 것은 송미령에게는 재물도 있고 세력도 잇다. 만일 그녀가 장위국을 부양하게 되면, 장래 아마도 심각한 형제간다툼이 벌어질 수도 있다. 우리는 <보보경심>에 나오는 "사야", "팔야"의 잔인하고 피비린내나는 후계자다툼을 기억하고 있다. 장개석의 이런 조치는 미연에 사고를 방지하는 것이고, 노모심산이라고 할 수 있다.

 

장개석이 사망한 후, 장위국은 더더욱 승진의 희망이 없어진다. 비록 당내원로와 송미령이 친히 장경국에게 말했지만, 장경국은 매번 거절한다. 마지막으로 "삼군대학"교장 여백천이 직접 장경국에게 진언한다. 스스로 조기에 '퇴역'하겠다고 하면서 부교장 장위국으로 하여금 승계하도록 강력히 추천했다. 그제서야 장위국은 '상장'의 계급을 얻게 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장경국은 장위국의 '삼군대학' 교장직을 면직시키고, '연근총사령관'으로 임명한다. 이때부터 중추의 의사결정에서는 멀어진다. 장위국이 각지를 돌아다니며 강연하려면 반드시 사전에 관련부서의 허가를 받아야만 했다. 장위국이 보기에, 이렇게 방비하는 것은 친형이 친동생에게 할 일은 아니었다.

 

1984년, 손담녕(필명은 농부)은 <장위국보도>(장위국의 승인을 받았다)에서 장위국의 신세내력을 폭로한다. 이 폭발적인 저작은 간행되기 전에 봉쇄된다. 장위국은 친구인 진영렬에게 말한 바 있다: "이런 자잘한 일까지도 미국에 있는 아낭(송미령)이 나서서 처리하게 하다니, 보기에 내 일생의 바램은 달성하기 어려울 것같다."

 

1989년 1월 11일 장위국은 <장경국총통서거 1년의 느낌>이라는 제목으로 타이페이에서 강연을 한다. 처음으로 공개적인 장소에서 자신의 신세내력을 언급한다. 장위국은 말했다: "장개석이든 대계도이든, 누구의 아들이든 나는 다 좋다."

 

7년후인 1996년, 장위국은 80세 생일을 맞이했을 떄, <연합보>기자 왕사순의 40번에 걸친 인터뷰를 하고, 나중에 <천리독행 - 장위국이 인생지려>라는 책으로 발간한다. 그는 여기서 명확히 인정했다. 자신은 대계도와 중송금자(重松金子) 사이의 아들이라고.

 

오늘날 우리가 알게된 장위국의 신세내력은 이렇다:

 

1919년, 대계도는 황급히 장개석을 찾아간다. 얼굴에 난감한 표정을 하고 말한다: "개석. 나는 일본에서 중송금자와의 사이에 아들이 있다. 지금 그녀가 아이를 안고 찾아왔다. 내가 강경책 유화책을 다 써서, 그녀는 돌아갔다. 그러나 아이는 데려가지 않으려 한다. 어떡하면 좋겠는가?"

 

장개석은 대계도의 처인 뉴우항이 '하동사(河東獅)'로 불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담량과 견식이 있을 뿐아니라, 말을 가리지 않고 행동도 과감했다. 대계도는 평소에도 그녀를 무서워했다. 그래서 그는 5살많은 뉴유항을 '누나'라고 불렀다. 만일 아이를 바깥에서 낳아서 데려간다면 집안에는 분명 난리가 날 것이다. 장개석은 대계도의 곤란함을 알고는 호쾌하게 말한다: "야성이 아직 자식을 낳지 못했으니, 그녀에게 기르게 하면 된다. 가모는 아들 하나가 늘어나는 것이니 분명 좋아하실 것이다.

 

그 아이가 바로 장위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