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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문혁전)

보이보(薄一波)가 남긴 부정적 유산

by 중은우시 2012. 3. 27.

글: 여이위(余以爲)

 

어떤 조직이건 성문(成文), 불문(不文)의 원칙이 있다. 중국공산당의 성문조항은 무시해도 된다. 대부분은 고의로 애매하게 표현하였기때문에 아무렇게나 해석할 수 있기때문이다. 진정 역할을 하는 것은 불문의 원칙이다. 잠규칙(潛規則)이라 부를 수도 있다. 그중의 하나를 필자는 "적도파성(適度派性)" 원칙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바로 결집하지만 너무 지나치지 않고, 충성하지만 너무 지나치지 않는 것이다.

 

유방, 유수, 유비, 이연, 이세민, 조광윤, 주원장. 그들은 천하를 얻을 때 모두 긴밀하게 결집된 소규모집단에 의존했다. 소규모집단의 내부는 피라미드구조이고, 대사회의 피라미드와 같은 구조이다. 마르크스주의는 인류를 개조하는데 그 뜻을 두고 있고, 조직측면에서도 일부터 이전과는 다르게 하였다. 그들의 이상은 민주이다. 비록 대사회환경하에서 그것은 유토피아이거나 거짓말이 될지언정. 그러나, 소규모단체내부에서 그들은 이 두 가지를 실현하고자 애썼다.

 

당내민주는 항상 존중되는 신조이다. 비록 한번도 실현해본 적은 없지만. 그렇지만 부분적으로 소수가 다수에 복종하고, 특정시기, 특정부분, 특정정도상으로는 해냈다. "당소조민주" 혹은 "생활회민주"라고 부를 수는 있겠다. 동시에 파성(波性, 당파성)은 대립면으로 하여 항상 배척받아왔다. 그러나, 당파를 만드는 근성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뿌리박혀 있다. 완전히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적도파성"은 당성과 인성을 절충한 것이다.

 

당사에서 모택동이 개인숭배를 추진했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것은 바로 당내민주원칙을 가지고 모택동을 비판하는 것이다. 만일 횡적으로 비교하자면, 모택동의 당내민주는 사실 괜찮게 한 편이었다. 모택동이 다른 사람과 투쟁할 때는 두 파를 모아서 한 파를 치고, 소수는 다수에 따른다는 원칙을 준수했다. 이 게임을 영원히 진행하기 위하여, 일반적으로 한파의 인마를 모조리 없애지는 않았다. 모택동은 '적도파성'의 발명자이고, 실천자이다. 그는 코치, 선수 겸 심판의 3가지 신분을 혼자서 가졌다. 그래서 그는 매번 이겼다. 결과로 보면, 그는 독재자와 다를 바 없다. 그러나, 과정을 무시할 수는 없다.

 

습관적으로 모택동의 기본기반을 홍구파(紅區派)라 부르고, 유소기는 백구파(白區派), 주은래는 국제파(國際派)라 부른다. 나는 이들을 농운파(農運派), 공운파(工運派), 병운파(兵運派)라고 부른다. 이렇게 해야 초기의 당사와 쉽게 결합될 수 있다. 어쨌든 유소기는 상대적으로 많이 늦게 굴기했으니까. 유소기는 아무런 근거없이 굴기한 것이 아니다. 그는 제6기 4중전회 이전에 탄압받았던 진독수, 이대쇠, 향충발, 이입삼, 장국도등이 남긴 잔여세력을 규합하고 부흥시켰다. 3파는 각자 특징이 있다. 농운파는 사람이 가장 많고, 공운파는 엘리트이며, 병운파는 정통이다. 농운파는 '경좌정우(經左政右)', 공운파는 '경우정좌(經右政左)', 병운파는 그 중간이다. 농운파는 계급투쟁경험이 풍부하고, 공운파는 정치투쟁경험이 풍부하며, 병운파는 당내투쟁경험이 풍부하다. 농운파는 근거지를 점거하는데 뛰어나고, 공운파는 후방을 교란시키는데 능하며, 병운파는 정보를 취득하는데 뛰어나다.

 

제6기 4중전회와 5중전회에서 병운파는 독보적으로 커진다. 파벌이 커지면 쉽게 분화된다. 중앙홍군이 섬북에 도착한 후, 모택동은 한편으로 병운파를 분화시키고, 다른 한편으로 유소기를 보내어 북방국을 개조하고 사람을 끌어들인다. 북경정부는 반공태도가 명확했기 때문에, 북방국이 계속 파괴되었다. 유소기가 넘겨받기 전에 북방국의 두 지도자인 가경시(柯慶施)는 진독수의 비서이고, 이보화(李葆華)는 이대쇠의 아들이다. 유소기는 비서방, 태자당을 버리고, 팽진(彭眞), 진백달(陳伯達), 임풍(林楓)을 기본성원으로 하여 천진조계를 거점으로 업무를 전개한다. 그중 영향이 컸던 사건은 1936년, 박일파(薄一波), 유란도(劉瀾濤), 안자문(安子文)등 61명을 출옥시킨 일이다. 역사에서 "61인반도집단"이라고 부르는 이들이다. 이들 집단이 가담하면서, 공운파는 다른 양파와 힘을 겨룰만한 역량을 가지게 된다.

 

정풍운동을 통하여, 농운파와 공운파가 손을 잡고 성공적으로 병운파를 타격한다. 건국전날 삼족정립의 추세를 형성한다. 모택동은 당시 이 태세에 만족했다. 민주, 자유, 공화등등의 큰소리를 마음껏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건국후에는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느낌을 가진다. 말위에서 나라를 얻고, 말위에서 나라를 다스리고자 했는데, 나라를 다스리는데는 지식인이 필요하다. 그의 수하에는 지식인이 많지 않았다. 심복들은 대부분 무인이었고, 지식인들은 모조리 유소기와 주은래의 아래에 있었다. 그는 고강을 내세워서 유소기와 주은래를 견제하고자 하나 성공하지 못한다. 오히려 공운파가 8차당대회에서 독보적으로 커진다. 모택동과 주은래의 세력은 모두 군대내로 축소되었다. 얼마후 팽덕회가 후원에서 불을 지르는 바람에 군내내가 불안정해지고, 모택동은 더욱 세력이 쇠퇴한다.

 

1960년에서 문혁까지의 기간동안 박일파는 계위(計委)를 주재하고, 안자문(安子文)은 중앙조직부(中央組織部)를 주재한다. 오대 중앙국중에서 서북국은 유란도가 주재하고, 중남은 도주, 왕임중이 주재하며, 서남은 이정천 이대장이 주재하고, 화동은 가경시가 주재한다. 단지 동북국만이 송임궁으로 공운파가 아니었다. 모택동은 위기의식을 가지고 유소기에 반격할 기회를 노린다. 이때 공운파는 한가지 치명적인 착오를 범한다. 모택동과 주은래의 기층세력을 참초제근하고, 자신들 세력일색으로 만들려 한 것이다.

 

서남지구의 유소기파세력은 가장 공고했다. 진기로예(晋冀魯豫)의 군인들이 서남당정군의 각 핵심직위를 장악하고 있었다. 유일한 예외라면 귀주성위 서기인 주림(周林)이다. 그는 원남방국이 서남에 남긴 유일한 씨였다. 그러나 유소기파가 보기에는 그가 서남에서 유일한 눈엣가시였다. 그를 급히 제거하고자 했다. 사청운동가운데 주림과 귀주간부에 대하여 잔혹한 타격이 가해진다. 같은 시기에, 유란도는 서북국에서 팽덕회노선의 간부를 탄압한다. 1964년말 호요방은 중앙정부에서 섬서성 제일서기, 서북제2서기로 임명된다. 그는 분위기를 완화시키는'간부4조(幹部四條)'를 내놓는데, 유란도가 중앙에 보고하여, 호요방이 수정하도록 만든다.

 

이렇게 계속되면 모택동이 위기를 느낄 뿐아니라, 모든 원로들이 위기를 느끼게 되었다. 유소기는 여러 사람들이 분노하는 것을 보고는 팽진을 포기함으로써 사태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모택동은 한번 시작했으면 끝을 보는 사람이다. 그래서 문화대혁명을 발동한다. 유소기를 죽였을 뿐아니라, 전체 공운파를 쓸어버린다. 사부치는 서남의 진영에서 반기를 들었기 때문에 문혁대 중용된다.

 

문혁을 거쳐, 팽진은 공운파에서 빠져나온다. 그러나, "61인반도집단"에서는 한명도 배반한 사람이 없다. 이처럼 개인에 충성하는 것은 조직에 있어서 절대로 미덕이 아니다. 문혁후, 특히 섭검영이 죽은 후, "61인반도집단"에 북방국, 진기노예는 박일파의 영도하에, 다른 파벌을 미친듯이 탄압했다. 처음 공격한 것은 그들을 명예회복시켜준 은인인 호요방이다. 옛날 서북국에서 일어났던 일이 당중앙생활회에서 재연된 것이다. 곧이어 조자양, 양상곤, 교석이 타격을 받는다. 최근에야 비로소 호금도가 귀주로 보내어진 것도 박일파의 의견이었다고 알려졌다.

 

박일파는 '적도파성'의 원칙에 위배되게 공개적으로 파당을 결성했다. 이것은 보시라이에게 부정적인 유샨으로 남겨졌다. 이전에 많은 사람들이 보시라이를 높이 띄워주었던 것은 그가 떨어졌을 때 크게 다치기 바랐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일찌감치 위험한 지경에 처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등소평집안, 섭검영집안이 후손들이 고위직을 승계하지 않도록 했다. 이는 그런 여건이 되지 않아서도 아니고, 후인들이 총명하지 않아서도 아니다. 그저 불문율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