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 주법고(周法高)
2001년초, 필자는<하상주단대공정 1996-2000년 단계적 성과보고서>를 자세히 읽어보고 연구했다. 당시에 이 책의 여러 곳에 내린 결론은 지나치게 무단(武斷)했고, 논쟁이 있을만한 곳에 더 이상 추가로 설명하지 않았다. 그래서 읽는 사람에게는 1046년을 뜯어맞추기 위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당시에는 일이 바쁜 바람에 언급하지 않고 지나갔다. 이제 다시 그 글을 읽어보니 반박을 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1. 주려왕(周厲王)의 재위년수
<사기.주본기>에는 주려왕이 37년간 재위했다고 명시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후인들이 전후의 글 내용에 근거하여 37년이라는 시간을 잡은 것이다. 이 37년이 주려왕의 재위연수인가? 답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미 여러 학자들이 <사기.위세가>, <진기세가>에 근거하여 주려왕의 재위연수는 13-25년이라는 점을 증명했다(흥미있는 독자는 스스로 계산해보기 바란다). <주본기>이 이곳 기록은 다른 여러 곳의 기재로 볼 때 사실이 아니다. 그래서 이 것만을 가지고도 단대공정의 주왕조의 연대결론을 뒤집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명문(銘文)에 기록된 25년이상인 것은 분명히 주려왕의 것이 아니다!
2. 주성왕(周成王), 주강왕(周康王)의 재위년수
지금 볼 수 있는 모든 사서(<금본죽서기년>포함)에는 주성왕(주공이 섭정한 것을 포함하여 합계 37년), 주강왕(26년)의 재위연수에 대하여 놀랄 정도의 일치성을 보인다. 단대공정은 소위 "역보(曆譜)"에 영합하기 위하여, 억지로 2왕의 재위연수를 고쳐버렸다. 성왕 22년, 강왕 25년. <사기.주본기>에 이런 말이 있다: "성강지제(成康之際), 천하안녕(天下安寧)", 형조사십여년불용(刑措四十餘年不用)" 단대공정에 따르면, 성왕, 강왕의 재위년수합계는 47년이다. 주공이 섭정한 7년간의 사방정복전쟁에 형조를 썼다. 기껏해야 40년간 형조를 쓰지 않았는데, 어디서 '사십여년'이 나오겠는가?"
3. 주목왕(周穆王)의 재위연수
<사기. 주본기>를 살펴보면 공화전 11대 주왕은 모두 재위연수를 명확히 기재하고 있다. 오직 주목왕에 대하여는 "목왕립55년붕(穆王立55年崩)"이라고 적었고, "목왕즉위(穆王卽位), 춘추이오십의(春秋已五十矣)"라고 되어 있다. 나이를 적었을 뿐아니라, 재위연수도 적었다. 기실 우리가 <사기>의 내용을 미신적으로 믿지 않고, 조금만 머리를 굴린다면, <사기>의 이곳 기재는 분명 잘못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과학기술, 의료가 상당히 발달한 오늘날, 백세를 넘기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는가? 하물며 3000년전의 서주시대에? 단대공정에서는 주목왕의 재위연수를 55년이라고 단정했다. 주여왕의 연수와 마찬가지로, 모두 <서본기>를 너무 미신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간단히 추산해보자: 주성왕의 직위시 나이가 얼마인가? "강보에 있다가(在襁褓之中)" 십삼세까지 모두 있고, 기껏해야 20살이다. 단대공정에서는 재위22년이라고 했으니, 죽을 때 기껏해야 42살이다. 그 아들 강왕도 최대한 24살이다. 단대공정의 재위기간 25년으로 계산하면 죽었을 때 최대 49세이다. 그 아들 소왕은 최대한 31세이다. 단대공정에 따르면 재위 19년이니, 죽을 때 최대 50살이다. 소왕이 죽고 그 아들 "목왕이 즉위했는데, 춘추가 이미 오십이다." 부친과 아들이 어찌 같은 나이일 수 있는가?(그리고 위의 추산도 모두 각 왕이 18살때 아들을 낳고, 성왕이 즉위한 것이 20살이라는 최대한도를 전제로 했을 때의 것이다)
그외에 현재까지, 우리는 명문으로 37년이상의 기간이 적힌 동기(銅器)를 본 적이 없다. 만일 주목왕이 55년간 재위했다면 나머지 18년간 하나의 동기도 남기지 않았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그래서 <사기>에 기록된 주목왕의 재위55년은 분명히 오류이다.
4. 역보(曆譜)에 관하여.
서주의 진실한 역법(曆法)을 복원해낼 수 있는가? 현재 분명히 완벽하고 정확하게 복원했다고 할 수 있는가? <보고서>에서는 "서주 역법의 약간의 세부적인 점은 아직 파악하지 못하는 점이 있다"고 인정했다. 주로 3가지이다: 첫째는 서주역법의 세수(歲首)가 건자(建子)인가? 아니면 건축(建丑)인가? 둘째는 어떻게 윤(閏)달을 처리했는가? 셋째는 당시에 쓰는 역법은 연속되고 정확한가? 앞의 두 가지는 이미 여러 사람들이 평론했고 의문을 나타냈다. 그러나 뒤의 한 가지에 대하여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서주의 역법은 아직 관천수시(觀天授時)의 단계이다. 서주의 근 300년의 시간동안, 우리는 어떻게 당시의 명문에 기록된 모든 역일이 모두 연속적이고 정확하다고 단정할 수 있는가? 만일 아니라면, 설사 오늘날 편제한 역보가 정확하다고 하더라도, 3000년전의 동기명문의 역일과 오늘날의 정확한 역보는 일치하는 것으로 볼 수가 없다.
그외에, <보고서>에서는 자신이 제정한 역보에 영합하기 위하여, 서주10왕을 모두 즉위 다음해에 개원(開元, 연호를 시작하다)하는 것으로 하면서, 오로지 공왕화(共王和)의 공화는 즉위 당년을 개원하는 것으로 하였다. 이는 당대공정의 패필(敗筆)이다.
5. 동기(銅器) 명문(銘文)에 관하여
근대의 금문연구자들은 동기의 연대를 정하는 것을 좋아한다. 역보와 금문에 근거하여 왕년을 추정해보면 결과는 가지각색이다. 그렇다면 출토된 청동기는 정확하게 연대를 정할 수 있을까? 당연히 대다수는 정확하게 연대를 확정할 수 없다고 할 것이다. 우리는 동기로 연대를 확정하는 것은 주로 출토상황, 형제, 문양, 내용등에 근거한다. 그중 내용은 결정적 요소이다. 만일 명문에 "목왕오우오년육월초길무인(穆王五又五年六月初吉戊寅), 왕재주(王在周)"라고 되어 있으면, 주목왕은 55년이상 재위했다고 단정할 수 있다. 다만 유감스럽게도, 서주의 그 어느 동기도 이런 기재가 없다. 그러면 형제와 문양으로 연대를 확정하여야 하는가? 답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설사 오늘날 우리가 진후소종과 똑같은 형태 문양에 내용만 다른 편종을 만든다고 하더라도. 그래서 동기로 연대를 확정하는 것은 주요방식이 되어서는 안된다. 하물며 서주의 역보를 우리가 정확하게 복원할 수도 없는데....
6.소결론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서주의 단대공정(斷代工程)의 출발점은 역보가 되어서는 안되었다. 고적의 기록에서 거짓을 버리고 진실을 취하는 방식이어야 했다. 여기에 다시 천문, 고고연구성과를 더해야 했던 것이다. 거짓으로 증명될 수 있는 자료는 더 이상 믿어서는 안된다. 예를 들어, 주여왕, 주목왕의 재위연수가 그것이다; 거짓으로 증명할 수 없는 자료는 함부로 버려서도 안된다. 예를 들어, 주성왕, 주강왕의 재위연수 및 "자주수명지목왕백년(自周受命至穆王百年)"등의 문구이다. 아마도 더 많은 자료를 확보하기 전에는 우리가 정확한 서주의 연대를 추정해낼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우리는 합리적이고 추고(推鼓)를 견딜 수 있는 주왕재위연수를 내놓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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