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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논쟁/하상주단대공정

하왕조(夏王朝)의 건국연도와 관련한 연구

by 중은우시 2013. 7. 12.

글: 이백겸(李伯謙) 

 

하왕조의 건립은 중국고대문명연구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한다. 이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다만 하왕조가 건립된 연대에 대하여는 설이 분분하여 하나로 모아지지 않는다. 지금까지도 모두가 받아들일만한 통일된 견해가 없다. "하상주단대공정"에서는 하왕조의 건립연대에 대하여 기본틀을 제시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했고,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초기하문화연구", "이리두문화분기와 하,상문화분계연구", "<상서>중강일식재연구"와 <하소정>성상과 연대연구"의 4가지 주제를 두었다. 그외에 이와 관련한 문헌학분야의 관련문헌기록의 신뢰성연구와 역사학분야의 문헌에서 하왕조 적년 및 각왕연대연구등 주제가 있다. 자연과학과 인문,사회과학이 서로 결합하여, 그리고 고고학과 현대과학기술수단을 겸용하여, 다학과교차연구를 진행하여 과학적이고 근거있는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결론을 도출해내기를 기대한다.

 

하왕조연대학의 기본틀을 건립하고, 하왕조의 건립연도를 추정하는데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고고학적으로 하문화를 찾아내고, 하, 상문화의 분계와 어떤 고고학적 유적이 초기하문화인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왕조의 연대문제를 해결하는 전제이다.

 

고고학자들의 수십년의 노력으로, 특히 "하상주단대공정"의 시작이래 이리두등 관련유적지를 새로이 발굴하고 연구하면서, 이리두문화 1,2,3,4기는 모두 하문화이다. 정주상성(鄭州商城)과 언사상성(偃師商城)의 건립시기는 하, 상문화의 분계점의 표지이다라는 것은 이미 학술계에서 기본적으로 컨센서스를 이루었다. 다만, 어느 고고학유적지가 초기하문화인지는 여전히 의견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 필자는 일찌기 이리두문화는 "후예대하(後羿代夏)", "소강중흥(少康中興)"후 형성된 하문화라는 견해를 내놓은 바 있다. 그리고 하남 용산문화말기유적지가 초기하문화라는 의견에 찬동했다. 필자는 등봉왕성강 말기유적지를 대표로 하는 하남 용산문화는 초기하문화이고 이리두문화는 '후예대하", '소강중흥'후 형성된 하문화라고 본다. 정주상성, 언사상성의 건립시기는 하,상의 분계점이고 하왕조의 개시연도를 추정하는 고고학적 기초가 된다.

 

당연히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고고학은 그저 상대적인 연대만을 해결한다. 현대의 연대측정기술과 기타학과가 있어서 비로소 절대연대를 제출할 수 있게 되었다. 아주 기쁜 일은 연대측정학자들은 정주상성, 언사상성, 이리두유적지 및 등봉왕성강유적지에서 채집한 탄소화합물에 대한 판정을 통하여, 하왕조연대연구에 중요한 참고가치가 있는 데이타를 제출해주었다는 것이다. 이들 데이타와 문헌학 및 천문학연구성과를 결합시켜, 하왕조의 개시연도에 대하여 경향성이 있는 의견을 제출하는 것은 완전히 가능하게 되었다.

 

하왕조는 우(禹)에서 시작하여 모두 14세 17왕이 있었다. 이는 <죽서기년>과 <사기.하본기>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의가 없었다. 하왕조의 총년도에 대하여 고대문헌에는 기록이 있는데, 주로 두 가지 설이다; 일설은 <고본죽서기년>을 대표로 하는데, "유왕과 무왕. 471년(혹은 472년)"이라는 것이고, 또 다른 설은 <역위.계람도>를 대표로 하는 "우사백삼십일년"(혹은 사백삼십이년)이다. 양설의 차이는 40년이다. 그 원인을 따져보면, 연구자들은 <고본죽서기년>은 아마도 소강이 재야에 망명하여 왕위가 비어있던 소위 "무왕'시기를 포함하였고, <역위.계람도>는 이 시기를 포함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우임금이 선양을 받은 때로부터 걸왕의 망국까지 하왕조의 총연도는 471년이라는 설을 기준으로 하왕조의 건국연도를 추정하는데 중요한 참고자료가 된다.

 

상왕조는 탕임금으로부터 모두 17세 30왕이다. 만일 미립이졸(未立而卒)한 탕의 아들 대정을 합하면 31왕이다. <사기.은본기> 및 <죽서기년>에 기록된 상왕조의 세계는 이미 기본적으로 갑골복사로 확인되었다. 상왕조의 총연도는 고문헌에서 명확히 기록된 연수는 3가지 설이 있다: <한서.율력표>는 <세경>을 인용하여: "걸왕을 토벌한 때로부터 무왕이 주왕을 토벌할 때까지, 육백이십구년이다" <죽자>: "탕의 천하를 다스림이다...합계오백칠십육년만에 주에 이른다." <사기.은본기>는 <급총기년>을 인용하여: "탕이 하를 멸하고 이십구왕에 이르러 사백구십육년이다." 그리고 육백년에 가깝다는 설로는 <좌전> 선공3년: "걸은 혼덕하여, 정(鼎)이 상으로 옮겨갔다. 해가 육백에 이르렀다." 오백여년에 가깝다는 것으로는 <맹자.진심하>에서 "탕에서 문왕까지 오백여년이다."

 

<세경>의 629년설은 유흠이 <삼통력>에 근거하여 추산해 얻은 것이다. 선진의 문헌에는 나오지 않고 믿을만한 근거가 없다. 그래서 믿기 어렵다.

 

496년설은 <고본죽서기년>에 나온다. 신뢰도는 비교적 크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거기에서는 29왕이라고 분명히 얘기했다. 이것은 이미 지하에서 출토된 갑골문으로 확인된 상에는 30왕(탕의 아들 대정을 합치면 31왕)이라는 것과 모순된다. 하물며, 마찬가지로 <고본죽서기년>에 의하면, 상의 후기 8대 273년이므로 전기 9대는 겨우 223년(496년에서 273년을 빼면)이 되어야 해서 차이가 너무 크다. 그래서 진실성에 의문이 든다.

 

<죽자>는 <한서.예문지>에 소설가류로 언급되어 있지만, 비교하자면 그가 기록은 576년은 아마도 사실에 근접할 것이다. 이것은 <맹자.진심하>의 "오백여년"이라는 것으로도 방증이 된다. 그리고 576년은 17세로 나누어서 얻은 1세당 평균연수와 하나라의 적년 471년이 14세라는 것에서 나오는 평균연수, 그리고 상후기의 273년을 8세로 나누어 얻은 평균연수와 비교적 접근한다.

 

상나라연대를 연구하는 학자는 상나라의 총햇수를 550년가량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견해를 지니고 있다. 진몽가 선생은 <상은과 하주의 연대문제>라는 글에서, "탕이 하를 멸하고 이십구왕을 내려오며, 사백구십육년"이라는 것에서 탕이 하를 별하고 나서."라는 부분은 아마도 <기년>을 인용한 자가 부가한 설명일 것이라고 본다. 그는 <기년>의 원문은 아마도 <통감외기>의 주석에서 인용한 "이십구왕 사백구십육년"일 것으로 본다. "탕에서 문정까지 이십구왕으로 제을, 제신은 없다" 하상주단대공정에서 상나라말기 3왕의 연대를 추정하면 제을이 약 26년, 제신이 약 30년이다. 이렇게 보면 상왕조의 총햇수는 496년에서 56년을 더하여 얻은 552년이다. 이는 <죽자>의 576년과 겨우 24년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만일 하왕조의 총햇수를 471년으로 본다면, 여기에 상왕조의 576년 혹은 552년을 더했을 때, 하,상 두 왕조의 총햇수는 1047년 혹은 1023년이다.

 

현재, "하상주단대공정"은 이미 기원전1046년이 무왕벌주의 가장 타당성이 있는 연도라고 보고 있다. 이를 통해서 추단해보면 하왕조의 건립연도는 1046년에 1047년을 더한 기원전2093년 혹은 1046에 1023년을 더한 기원전 2069년이 된다.

 

이상의 두 가지 결과는 주로 관련문헌기록연구에서 추산해낸 것이다. 합리적인지 아닌지 어느 것이 더욱 역사적으로 진실한 연도에 접근하는 것인지는 관련 탄소측정데이타를 더하여 확인해봐야 한다.

 

북경대학 가속기측정연도에 따르면 등봉왕성강유적지의 측정은 아래와 같은 데이타를 얻었다:

 

왕성강2기의 고서T157전기갱6은 BC2124-2088 

왕성강2기의  고서T179전기갱8은 BC2013-2087

왕성강3기의 고서T31H92는 BC2092-2044

왕성강3기의 고서T179H470은 BC2086-2044

 

주로 문헌연구로 추정한 결과와 탄소동위원소로 측정한 결과를 대조하면 기원전2093년은 왕성강2기연대범위내에 들어간다. 기원전2069년은 왕성강3기연대범위내에 들어간다. 2기는 왕성강고성이 건조되기 시작하고, 3기는 주로 사용한 시기이다. 3기이후, 고성은 버려지고 쓰지 않게 된다. 필자는 김괴 선생의 왕성강고성은 아마도 문헌중의 우도양성(禹都陽城)일 것이라는 양성유적지의견에 찬동한다. 왕성강고성의 건축개시를 하왕조건립의 표지로 본다. 그렇다면 상왕조의 적년은 576년이고 하왕조의 적년은 471년이다. 무왕벌주의 연도인 기원전1046년의 이전으로 추정해서 얻은 2093년은 하왕조의 개시연도라고 볼 수 있다. 필자가 일찌기 추측한 왕성강고성의 사용기의 말기유적지를 최초의 하문화로 보면 상나라는 552년이 되고 하나라는 471년이 된다. 무왕벌주로부터 추정하여 얻은 2069년이 하왕조의 개시연도가 된다.

 

문헌연구로 추정한 결과와 탄소동위원소측정수치를 통합하여 보면, 양자는 비교적 접근한다. 이를 보면 문헌의 관련기재와 고고학의 추정은 전혀 근거없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하왕조의 건립은 기원전21세기에 시작했다는 것이 믿을 만하다. 현재의 문제는 기원전2093년과 기원전2069년의 두 결과에 대하여 다시 한번 선택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하왕조의 개시연도를 추정하는 것은 하,상의 분계연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우리는 이 각도에서 앞의 추정을 다시 점검해보기로 하자.

 

문헌연구결과에 따르면, 무왕벌주의 연도인 기원전1046년을 기점으로 하여, 상나라 576년으로 하면 하상분계점은 기원전1622년이 되고, 상나라 552년으로 보면, 하상분계점은 기원전1598년이 된다.

 

고고학적으로, 다수의 학자는 이미 정주상성과 언사상성이 기본적으로 동시라고 인정하고, 양자의 건축개시연도를 하,상분계점으로 삼는다. 북경대학 가속기 측정연대의 두 상성에서 채집한 표본에 대하여 측정한 수치는 다음과 같다:

 

정주이리강 하층1기의 C1H9:25(복골)은 BC1616-1546

정주이리강 하층1기의 98T232 궁토VII(목탄)은 BC1618-1537

언사상성1기2단의 98YSJ1D2T1009G3(목탄)은 BC1621-1524

 

이 세 개의 수치는 기본적으로 일치한다. 이를 근거로 문헌기재에서 추정해낸 하상분계의 두개결과 즉 기원전1622년과 기원전 1598년을 비교하면, 확실히 그것은 무왕벌주의 기원전1046년, 상나라 6=52년으로 추정해낸 하,상분계점을 기원전1598년으로 보는 것을 더욱 지지해준다. 기원전1598년에 하왕조의 적년 471년을 더하면 기원전2069년이 된다.

 

하나라의 개시연도를 기원전 2069년으로 보는 것과 "하상주단대공정"에서 "중강일식연구"에서의 연구결과는 모순되지 않는다. <좌전> 소공십칠년에서 인용한 <하서>의 관련내용과 <사기.하본기>에서 기록한 "제중강시(帝仲康時), 희화면음(羲和湎淫), 폐시난일(廢時亂日)"이 있는데, 학자들은 다수가 하나라 중강원년 가을에 발생한 대식분일식으로 보고, 국내외 천문학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중강일식연구"의 학자들은 '가을'의 범위를 약간 확대하면, 낙양지구에서 기원전2273년에서 기원전1850년까지 423년간 일식에 대하여 연구한 결과 "가을'의 대일식은 모두 11번 있었다. <고본죽서기년>에는 우45년, 계39년(혹은29년)이라고 되어 있고, <금본죽서기년>에는 태강4년, 삼왕합계88년이라고 되어 있다. 2068년에서 88년을 빼면 기원전1981년이다. 다음해, 즉 기원전1980년이 중강원년이다. 이것은 낙양지구에서 '가을'의 11번 대식분일식중 기원전 2019년12월 6일과 39년 차이가 나고, 기원전1970년 11월 5일과는 겨우 10년 차이가 난다. 후자의 가능성이 더욱 크다. 비록 문헌에서 우, 계, 태강의 재위연도에 대한 기록이 확실히 있는지는 우리가 확인할 수 없다. 다만 기원전1970년 1월 5일의 1차일식을 하왕조개시연도를 구하는 데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최소한 양자는 해석할 수 없는 모순이 발생하지 않는다.

 

그외에, <묵자.비공하>에는 순임금이 우에게 명하여 삼묘(三苗)를 정벌할 때, "일요소출(日妖宵出)"이라는 말이 나온다. 어떤 학자들은 "일요소출"은 아마도 "천재혼(天再昏)"이나 "천재단(天再旦)"의 일식현상으로 본다. "하상주단대공정"의 "우벌삼묘"를 현대천문학방법으로 계산하여 원고의 일식을 살펴보면, 기원전21세기에 발생한 대식분일식은 4번이다. 즉 2097년 8월 31일의 "천재단"과 기원전2075년 6월 30일의 "천재혼", 기원전2072년 4월 20일의 "천재혼"과 기원전2029년 7월 1일의 "천재단"이다. 이 4번 가운데, 기원전2029년 7월 1일의 한번이 너무 늦은 것을 제외하면 나머지 3번은 모두 가능성이 있다. 그들이 발생한 시간은 모두 우임금이 선양을 받기 전이다. 이 결과는 하나라의 개시연도를 추정하는데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하왕조의 개시연도를 추정하는 것과 관련하여 위서(緯書)에는 "오성연주(五星聯珠)"이 기록이 있다. <태평어람>권7ㅇ서는 <효경구명결>의 "우시오성루루여관주(禹時五星累累如貫珠), 병병약연벽(炳炳若連璧)"등의 말이 있다. '하상주단대공정'에서 "오성취합과 하상주연대연구"라는 주제의 연구에서 이 '오성연주"는 천문학상 엄격한 정의는 없다. 만일 '오성취(五星聚)'로 해석한다면, 기원전1953년 2월중순에서 3월초에 발생한 것과 아주 유사하다. 오대행성의 거리가 가장 가까웠을 때 각도거리가 4도가 되지 않았다. 또 한번 발생한 것은 기원전1973년 4월말에서 5월초이다. 다만 다섯 별간의 거리가 비교적 컸다. 가장 가까웠을 때가 21도이다. 다만 지속기간은 겨우 며칠이었다. 둘을 합하여 보면, 이전의 것이 더욱 가능성이 크다.  이 결과는 확실히 앞의 "중강일식"등 계산결과와 모순된다. 그러나, 어떤 연구자는 이미 지적한 바 있다. 이 기재는 위서에서 나온 것이고 위서는 자주 "하우시(夏禹時)'라는 말을 하왕조때라는 말로 쓰고 있다. 그렇다면 하왕조때 발생한 '오성취'라고 해석하는 것이 더욱 합리적이다. 반드시 우임금때 나타난 하늘의 모습이라고 볼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이상의 연구성과를 종합해보면, 필자는 우임금이 선양을 받아 하왕조를 시작한 것은 기원전21세기 전기일 것이다. 대체로 기원전 2069년전후일 것이고, 기원전22세기보다 이르지 않을 것이며, 기원전20세기보다 늦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