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의 역사논쟁/하상주단대공정

하상주단대공정에 대한 이견

by 중은우시 2013. 7. 12.

작자: 미상 

 

하상주단대공정이 일단락되고, 단계적인 연구보고서가 제출되었다. 무왕벌주(武王伐紂)는 기원전1046년 1월 20일에 발생하였다고 결론내렸다. 그러나, 이 결론에 대하여 필자는 이견이 있다.

 

먼저 필자는 단대공정에서 사용된 방법은 과학적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기본점은 믿을만한 이미 알고 있는 자료를 역사사건이 발생한 일자에 대하여 약간의 제한을 가하고, 제한조건이 많을수록, 얻어내는 답안은 적어질 것이다. 역사사건의 발생의 실제일자는 반드시 모든 유효한 제한조건을 만족시켜야 한다. 무왕벌주의 목야지전을 예로 들자면, 단대공정의 전문가들이 취한 것은 탄소동위원소연도측정을 첫번째 제한조건으로 하였다(동위원소측정년도), 고고학적으로 결전이 발생한 것은 갑자일(甲子日)이라는 것을 두번쩨 제한조건으로 하였다(고고학), 그리고 영주구(伶州鳩)의 "세재순화(歲在鶉火).."라는 서술을 세번째 제한조건으로 하였다(천문학).

 

비록 방법은 과학적이지만, 실제응용에는 많은 문제점이 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자료가 진실하냐는 것이다. 위의 3가지 제한조건중 앞의 2개는 일반적으로 이견이 없다. 단대공정의 전문가들이 인정한 영주구의 서술이 믿을만한지는 따져보아야 한다. 사실상 이처럼 회의적인 입장을 취하는 사람이 나 혼자만은 아니다.

 

필자가 현재 하고자 하는 것은 두 가지 제한조건을 추가하자는 것이다. 그러면 목야지전이 1월 20일에 발생할 수 없다. 그러므로, 영주구의 서술(혹은 거의 서술에 대한 이해)의 신뢰성은 부저될 수 있다. 나아가 무왕벌주가 기원전1046년에 발생했다는 것도 뒤집을 수 있다.

 

추가되는 첫번째 제한조건은 군사적인 실현가능성이다. 목야지전은 중국역사상 저명한 전투이다. 그것은 반드시 기본적인 군사원칙에 들어맞아야 한다. 이 군사원칙은 바로: 만일 만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총사령관은 절대로 물이 꽁꽁 언 때에 대규모 전투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는 물자조달의 곤란을 가져오고, 비전투적 인력손실을 감내해야 하기 때문이다.

 

모두 알고 있다시피, 24절기의 제정은 지구의 공전에 근거한다. 그러므로 절기의 전환은 기본적으로 양력 매월 5일과 20일 가량에 고정되어 있다. 1월 20일은 24절기중 대한(大寒)에 해당한다. 동지(冬至)가 지난 후 꼬박 한달째이다. 즉 사구(四九)의 제3일가량이다. 안양(安陽)은 중국이 북방이다. 북방에는 이런 말이 있다: "삼구사구동사구(三九四九凍死狗)" 생각해보라. 무왕이 어찌 손을 뻗기도 힘든 삼구,사구에 병력을 몰고 천리를 행군하여 안양까지 가서 가만히 앉아서 적이 오기를 기다리는 주왕의 대군과 결전을 벌이겠는가? 군사의 ABC도 모르는 무왕(군사 강태공 포함)이 그 경천동지할 혈전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상상이나 할 수 있는가?

 

당연히 추운 날씨에 병력을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 불변의 법칙은 아니다. 모든 일에 만부득이한 경우가 있기 마련이다. 중국의 고대군사사상 추운 날씨에 장거리를 행군하여 적을 급습하여 승리를 거둔 전례도 있다. 그것은 바로 당나라말기 이소(李愬)가 눈오는 밤에 채주를 습격한 것이다. 다만 이건 전투는 목야지전과 아주 다르다. 첫째, 이소가 채주를 습격한 것은 만명의 소부대를 이끌고 가볍게 130리를 행군한 것이다. 눈이 크게 오는 날씨를 이용하여 상대방의 의표를 찌르는 기습에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무왕은 십여만의 전차와 물자를 실은 대군이다(서주의 부대만도 4만5천명에 이른다), 1300여리를 행군하여 적의 주력부대와 결전을 벌이는 것은 기습이라고 할 수가없다; 둘째, 이소는 채주를 습격하기 전에 여러가지 밑밥을 깔아놓았다. 예를 들어, 약한 모습을 보인다거나, 성동격서한다거나, 적에게 착각을 일으키게 하여 직접 채주를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다.그러나 무왕은 직접 천하에 격문을 날려 주왕의 죄행을 성토했고, 공격하겠다고 공언했다. 기습을 할 생각은 아예 없었다. 그래서 무왕은 만부득이한 이유로 추운 겨울에 병력을 움직일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그외에, 채주는 오늘날의 하남 여양현과 여주시 일대이다. 안양은 북으로 위도가 2도정도 위이다. 날씨가 더욱 춥다. 비록 이소가 채주를 습격한 것이 거대한 성공을 거두었지만, 우리는 사서에 이 행군을 어떻게 기록했는지 볼 수 있다: "당시 큰 바람과 눈이 내렸다. 군기가 찢어지고, 사람과 말이 얼어죽어서 길거리에 마주할 정도였다." 이들 문자를 읽는다면, 설사 집안의 따스한 방에 앉아있는 고고학자나 천문학자라 하더라도 추운 겨울의 행군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무왕벌주의 그 해는 따스한 겨울이었다고 말할지 모르겠다. 설사 따스한 겨울이라 하더라도, 날씨는 언제든지 추워질 수 있다. 당시의 날씨예보수준에 비추어보면, 우수한 군사가라면 절대로 십여만 장병의 생명을 가지고 날씨가 추워지지 않을 것이라는데 도박을 걸 수 없을 것이다. 설사 따스한 겨울이라 하더라도, 야외는 비교적 춥다. 통상적인 이치대로라면, 무왕은 온도가 비교적 높은 오후에 공격을 감행했을 것이다. 그러나 주서(周書)나 사기(史記)를 보면 모두 공격을 "매상(昧爽)"에 했다고 한다.(매는 새벽에 아직 어두울 때를 가리킨다). 즉 결전의 공격은 하루중 가장 추운 여명때 일으킨 것이다. 무왕이 무슨 이유로 1년중 가장 추운 날에 하루중 가장 추운 시각을 골라서 공격했을까?

 

추가할 두번째 제한조건은 한자(漢字)가 반영하는 역사적 진실이다. 어쨌든 천문학자와 고고학자는 군사학자가 아니다. 아마도 전술한 군사원칙에 동의하지 않을지 모르겠다. 다만 중국인으로서 한자에 대한 이해는 사람마다 다를 수가 없을 것이다. 사서에는 목야지전을 서술할 때 이전이고 이후이고 없는 유일무이한 말을 사용했다: "혈류표저(血流漂杵)"(저는고대의 몽둥이형의 병기이다. 형태가 공이와 같다). 이 단어를 쓴 것은 전쟁터에서 실제로 관찰했기 때문이다. 즉 정말로 "피가 흐르고 몽둥이가 떠다닌다"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쓴 "류(流)"는 전쟁터에서의 혈액이 액체라는 것을 말해준다. "표(漂)"라는 것은 혈액의 위에 떠다닌다는 말이다. 이것이 어찌 "삼구사구동사구"의 때란 말인가? 따스한 겨울이라면 당연히 "적혈몰저(積血沒杵, 피가 쌓여 몽둥이를 덮었다)"가 되어야지, "혈류표저"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를 통해서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무왕벌주는 1월 20일에 일어난 것이 아니다. 나아가 기원전 1046년이라는 판단도 믿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연도와 월일은 함께 계산했기 때문이다. 사실상, 사마천은 사기에서 이미 직접적으로 목야지전은 "이월갑자매상(二月甲子昧爽)"에 일어났다고 밝혔다. 즉, 양력으로 하여 3월 4월 사이이다. 이런 합리적인 기록은 주관적으로 무시했다. 전문가들의 이 문제에서의 실수는 주로 천문학적 연대판단방법의 과학적 매력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방법을 하상주단대에 너무나 쓰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영주구의 서술(혹은 그의 서술에 대한 이해)의 신뢰성에 대한 고찰을 하지 않았다. 필자가 보기에, 단대공정에 군사학자와 언어학자가 참가하지는 않았지만, 왜 전문가들에게 물어보지 않았을까? 어쨌든 그것은 국가에서 거액을 투자한 문화공정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