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논쟁/하상주단대공정

하상주단대공정(夏商周斷代工程)에 대하여

중은우시 2008. 2. 22. 11:26

글: 진명원(陳明遠) 외

 

어느 인물(이학근 중국과학원 역사연구소 소장 겸 청화대학 국제한학연구소 소장)이 앞장서서, 국가에서 수천만위안을 자금지원하며, 요란스럽게 5년간 진행한 "하상주단대공정"을 중국대륙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어떤 매체는 심지어 "중국문화사의 가장 위대한 사건"이라고 떠벌이기까지 하며, 명나라때의 <<영락대전>>과 청나라의 <<사고전서>>의 편찬을 뛰어넘는 위대한 업적이라고 칭송하기도 한다.

 

1996년 5월 16일 "공정"을 정식으로 개시하는 회의상에서, <<초월의고, 주출미망(超越疑古, 走出迷茫)>>이라는 관방발언고를 읽었고, "공정"은 "응집력공정"으로 성격이 규정되었다. 이로부터 어떤 사람이 1992년에 대담하게 제출한 '주출의고시대(走出疑古時代)"라는 구호가 개인적 구호에서 정부의 공식구호로 승격되었다. 외국학자들은 '주출의고시대'가 국가의 구호로 변모되었다고 평가했다. ("疑古"는 중국에서 고대자료를 대하는 태도중의 하나로, 풍우란은 信古, 疑古, 釋古로 구분했다. 신고는 고대자료를 모두 그대로 믿는 것이고, 의고는 고대자료를 검토해서 의심하고 부정하는 것이며, 석고는 자료를 융회통관하여 해석하는 것을 말함)

 

제창자들은 기회를 잡은 듯이 미디어를 통하여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공정'이 '앞으로 중국문명의 근원을 탐색하고 중화민족의 자존심을 드높이는데 도움이 되며, 중국민족의 응집력을 증강시킬 것이다'라고 하였다. '공정'이 끝난 후에는 다시 400여만위안을 투입하여 '중화문명근원탐색예비연구'를 시작했다. '주출의고'의 제창자는 지금도 국가지도자이다.

 

2000년 10월, '공정'은 <<하상대단대공정 1996-2000년단계성과보고(簡本)>>을 발표했고, 국가과기부가 검수했으며, '전국10대과학진보상"을 획득했다.

 

이 <<간본>>(요약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임)이 발표되자, 해외학술계에서는 이를 공박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스탠포드대학의 David Nivison교수는 <<뉴욕타임즈>>에서 "국제학술계는 이 공정보고서를 조각조각 찢어버렸다"는 극언을 하여 널리 유행할 정도가 되었다. 2003년 4월 "공정"의 전문가조 조장인 이학근(李學勤), 수석과학자 구세화(仇世華)등은 미국측의 초청을 받아 "공정"에 대한 토론의 학술회의에 참석하였다. 해외학자들은 "공정"의 방법과 결론에 대하여 아주 날카로운 비평을 했고,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중국인들은 모두 중화민족은 5천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는 말을 들어왔을 것이다. 이것은 고대문헌에서 하, 상, 주의 최초왕조를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정식기록된 연대로 따지자면, 사마천의 <<사기>>에서는 그저 서주(西周) 말기의 공화원년(共和元年) 즉, 기원전841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뿐이다. 더 앞쪽의 서주초,중기와 하, 상 양대는 제왕의 세계가 기록되어 있을 뿐 연대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는 곧, 중화5천년문명이라는 것이 겨우 3쳔년만 기록상 근거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중화5천년'이라는 문명사는 중국과 외국의 학계에서는 아직도 공인받지 못하고 있다.

 

중국문명사의 공백을 메우기 위하여, "하상주단대공정"이 1996년에 정식으로 설정되고, 중국의 '제9차5개년계획"의 중점과학기술프로젝트로 지정되었다. 국무원은 이철영, 송건의 두 사람을 특별고문으로 하고, 국가과학위원회 부주임 등남을 조장으로 하고, 7개부,위원회의 고위직으로 영도소조를 구성했다. 역사학자인 이학근, 탄소동위원소전문가 구사화, 고고학자 이백겸(李伯謙), 천문학자 석택종(席澤宗)등이 공정의 "수석과학자"로 되고, 21명의 서로 다른 학과의 전문가로 구성된 전문가소위가 구성되었다. 이 프로젝트는 역사학, 고고학, 천문학, 과기연대측정등 학과가 9개 과제, 44개 주제로 나누었다. 직접 참가한 전문가만도 200명에 이른다.

 

계획상으로 "공정"은 다음의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

1. 서주공화원년(기원전841년)이전, 서주초기, 중기와 말기의 전후 각단계, 각왕의 정확한 연대;

2. 상대후기(상왕무정에서 제신-즉 주-까지)의 비교적 정확한 연대;

3. 상대전기, 비교적 상세한 연대프레임웍

4. 하나라, 기본적인 연대프레임웍

 

"공정"은 주로 두 가지 경로를 통하여 하상주 3대의 연대계통을 건립했다. 하나는 전해내려오는 고대문헌과 출토된 갑골문, 금석문등 고문자자료를 수집, 정리, 감정 및 연구하는 것인데, 그중 천문, 역법에 관한 기록에 대하여는 현대천문학의 방법으로 계산하여 연대를 추정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전형적인 의미의 고고유적지와 묘장 자료에 대한 정리와 시대구분연구이다. 필요하면 발굴을 하여, 샘플을 얻어 탄소동위원소측정을 하는 것이다.

 

4년여의 노력을 거쳐, "공정"은 마침내 <<하상주연표>>를 발표했다. 이 연표에 따르면, 하나라는 개략 기원전 2070년에 시작하였고, 하나라와 상나라의 교체기는 개략 기원전 1600년이며, 상나라와 주나라의 교체기는 기원전 1046년이다. 구체적인 제왕연대는 기원전 841년부터 기원전1250년 즉 무정원년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무정(武丁)은 상나라후기의 왕이다. 그 이후의 각왕에게도 구체적인 재위연대가 부여되었다. 이외에 서주는 무왕(武王)부터 유왕(幽王)까지의 모든 연대가 구체적으로 구분되었다. 서주의 각왕의 연표가 건립되고, 상왕 무정이래의 연표가 완성되었다. 이는 주로 무왕이 주왕을 토벌한 해(즉, 서주원년)과 의왕원년에 기초하여 확립된 것이다. 다른 연대는 이 두 연대에 의거하여 차례로 조정되고 안배되었다.

 

"공정"의 <<간본>>이 공포되자, 해외학자들은 이에 대하여 세번에 걸친 대규모의 토론을 벌였다. 거기에서는 희의적이고 비판적인 태도를 지닌 사람들이 '공정'을 옹호하는 사람들보다 많았다.

 

제1차토론은 2000년 11월에 시작된다. 이는 인터넷을 통하여 진행된다. 학술성격의 토론으로 하(夏)나라의 존재여부가 관건이었다. 공정에서는 하나라의 존재를 인정할 뿐아니라, 하나라 각왕의 세계표까지 만들ㅇㅆ다. 이에 대하여 적지 않은 서방학자들은 회의적인 태도를 나타냈다. 서방의 중국고대사에 대한 교과서에서는 하나라는 그저 전설상의 왕조이지 믿을만한 역사기록으로는 보지 않는다. 상나라는 중국의 첫번째 왕조로 인정받고 있다. 이는 갑골문으로 상나라의 존재가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어떤 서방학자들은 "공정"이 당연히 하나라를 상나라의 이전왕조로 보고, 이리두(二里頭)를 하나라의 수도로 본 것에 대하여 증거가 아직 불충분하다고 보고 비판하는 것이다.

 

종합적으로 보면, '공정'을 지지하는 학자들이 내세우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남서부와 산서남부는 주나라 문헌에서 하나라사람들의 중심지구로 언급되고 있고, 이 지구의 이리두문화는 하나라문화를 대표할 가능성이 높다. 둘째, 이리두유적지에서는 궁전유적지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국가가 존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셋째, 탄소동위원소측정결과, 이리두문화의 시간은 상나라이전이다. 넷째, 사마천이 언급한 상나라의 존재가 확인되었으므로, 그가 말한 하나라도 당연히 믿을만�.

 

일부학자들은 주나라문헌중에 하나라사라들의 활동을 언급한 것은 아마도 주나라사람들이 정치목적상 만들어낸 것이므로 믿을 수 없다고 본다. 여기에, 이리두문화수준은 '문명'이라고 할만한 것이 못된다는 것이다. 문명이라고 하려면, 문자, 도시, 정부, 빈부격차있는 사회등의 특징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가 이리두에서 문자, 청동기와 차를 볼 수 있는 이이에 다른 문명의 표지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전과 역사시기의 구분은 상나라를 기준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마천의 <<사기>>의 신뢰도에 대하여는 한 해외학자가 이렇게 반박했다: "<<사기>>에는 상나라의 첫번째 왕은 그의 모친이 큰 새의 발자국을 밟고 회임하여 낳았다고 되어 있으며, 황제, 요, 순, 우등의 초자연적인 행위에 대하여도 언급하고 있는데, 이런 내용까지 모두 신뢰할만한 역사로 본단 말인가?"

 

워싱턴에서 벌어진 제2차토론회의에서, 일부 해외학자는 "공정"의 학술도덕에 대하여 의문을 표시했다. 시카고대학의 Edward Shaughnessy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기원전 899년에 발생한 주의왕(周懿王)때의 "천재단어정(天再旦於鄭)"의 일식은 <<간본>>의 연대확정의 핵심중 하나이다. 중국국내의 신문, 티비에서도 널리 보도한 바 있다. 그러나, 국외에서는 일찌감치 이 일식 및 서주의 연대확정상의 의미에 대하여 지적한 바가 있다. 그리하여, 해외학자들 중에는 <<간본>>에서 국외학자들의 학술성과에 대하여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은 것은 학술도덕에 위배되는 일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외에, 천문학연구를 통하여 무왕이 주왕을 정벌한 연대를 기원전 1046년으로 잡은 것은 미국학자인 David Pankenier가 1980년대에 제기한 것이다. 그런데도, <<간본>>에서는 이에 대하여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Shaughnessy의 비평은 이치에 맞는다. 우리는 갑골문 전문가인 동작빈(董作賓)이 일찌기 "천재단"이라는 것은 날이 밝을 때 발생한 일식현상이라는 것을 주장하였다는 것을 알고 있고, 이 천문현상이 발생한 연대를 기원전 966년으로 비정했으며, 나중에 한국학자인 방선주(方善柱)가 1975년에 발표한 논문에서 기원전966년은 잘못이고, 정확한 연대는 기원전 899년이라고 밝혔다.

 

시카고대학에서 거행된 제3차토론회의에서 스탠포드대학의 교수인 David Nivision가 <<뉴욕타임즈>>에 쓴 글에서 "국제학술계는 이 공정보고서를 조각조각 찢어버렸다"는 극언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스탠포드대학 종교문화센터의 겸직리서처인 장조예(蔣祖隸)는 <<서주연대연구의 의문 - 하상주단대공정 방법론에 대한 비평>>이라는 글을 제출했다. 이 글에서 그는 '공정'에서 사용한 OxCal계열샘플프로세스에 주의했고, 옥스포드대학에 이 프로세스를 특히 구하여 '공정'에서 발표한 몇 안되는 탄소-14데이터를 검산해보았다. 그랬더니 계산해낸 연대의 신뢰도가 <<간본>>에서 공포한 '끼워맞춘' 데이터보다 훨씬 컸다. OxCal프로세스시리즈샘플계산법은 겨우 68.2%의 신뢰도밖에 나타내지 않는 것이다. 그리하여 계산의 정확도에 대하여 국제적인 탄소-14학자들의 비난을 들었다. '공정'은 왜 이렇게 신뢰도가 낮은 방법을 사용하고 다른 신뢰도 95.4%, 99.7%의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을까? 그에 따르면 그 원인은 신뢰도가 높은 방법으로 하게 되면, 연대추정범위가 100-200년 더 많아지기 때문에, '공정'의 지도자들이 요구한 "플러스마이너스20년"이라는 요구조건을 맞출 수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다른 방식은 모두 배제하고 신뢰도가 낮은 방법을 채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공정'의 연대확정의 근거로 삼은 것 중의 하나인 '풍서'의 고고보고서를 예로 들어, 보고서에서는 제1기를 '무왕이 풍으로 이전한 때로부터 무왕이 주를 토벌한 때까지'라는 등으로 왕의 이름을 들어 시기를 명시하고 있는데, 이처럼 매 문화층을 서로 구분하는 '간격법'을 쓰고 있는데, 장조예는 동일한 고고발굴에 참여하였지만, 제1기는 선주시기 등으로 쓰는 '점진법'을 쓰고 있다. 전자의 경우는 각 문화층이 명확히 구분된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인데, 다음 왕의 관도 그 이전왕때 미리 준비한 것일 수도 있고, 왕이 바뀌었다고, 기물이나 모든 사항이 갑자기 변하는 것도 아니니, 연대측정에 있어서 이렇게 잘라서 볼 수 없다는 것이 장조예의 주장이다.

 

회의석상에서 장조예가 참여자들에게 내용을 설명하고(이학근은 결석했음. 워싱턴회의를 마친 후 귀국함), 그 자리에서 컴퓨터와 OxCal 프로세스로 현장에서 '공정'에서 공포한 탄소-14의 몇개 수치에 대하여 다시 검산해보자 결과는 분명히 '공정'에서 제시한 것과 차이가 있었다. 그러자, 구사화는 장조예가 제기한 문제에 대하여 동의하며, 그 자신도 <<간본>>의 탄소-14수치에 대하여 의문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장장수도 그 개인적으로는 장조예의 풍서고고학 시기구분에 대한 의견에 동의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현장에 있던 Shauhnessy교수는 깜짝 놀라면서 물었다: "그렇다면 탄소-14와 풍서고고보고서에 근거하여 이루어진 서주연대표는 아무런 근거도 없지 않으냐?"

 

이후 중국학자들의 행동은 더욱 문제였다. 시카고회의가 끝난 후, 장입동(일찌기 '공정'의 비서를 지냈고, 시카고대학의 박사생이었음)이 회의내용을 소개하고, 공정의 중국학자들도 장조예의 견해에 동의하였다는 내용을 2002년 5월 24일 <<중국문물보>>에 소개했다. 이는 중국의 학계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킨다. 2달후, <<중국문물보>> 8월 16일자에 <<미국행 질의응답 - '하상주단대공정'에 관하여>>라는 글이 실렸는데, 이는 기자인 소휘가 관련전문가들을 인터뷰한 후에 쓴 것인데, 장입동의 글을 사실에 부합되지 않으며, 핵심내용에 있어서 오해가 있었다고 적었다. 예를 들면, 구사화에 따르면, "장조예가 현장에서 컴퓨터로 데이터를 검산하라고 요구하여, 내가 제공한 조건에 따라서 했는데, 결과는 1년 차이가 났다. 나는 웃으면서, '다시 계산해보면 아마도 2년이 차이날 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오차범위내이고 문제가 있다고 볼 수는 없다'라고 말했다" 둘중 어느 내용이 맞는지에 대하여 확인하기 위하여 전화로 당시 시카고 회의에 참석했던 해외학자들에게 물어본 결과는, 그들 모두 자기 귀로 구사화가 장조예의 의견에 동의하는 것을 들었고, 구세화의 이러한 학문태도에 대하여 깜짝 놀랐었다고 말했다.

 

문제는 이뿐이 아니었다. 장조예가 비판한 97년풍서발굴보고서의 작자인 서양고(徐良高)도 비슷하였다. 서양고는 <<중국문물보>>에 자기는 보고서에서 사용한 시기구분용어를 "연대가 ...에 상당하는"이라고 적었는데, 장조예는 그러한 문구를 모조리 삭제하고 연대를 단정한 것처럼 적었다고 변명하였다. 그리하여, 필자는 <<발굴보고서>>의 원본을 보았는데, 그 곳에는 "제1기: 우리가 추정하는 연대는 문왕이 풍으로 이전한 때로부터 무왕이 주를 토벌한 때까지" "제2기: 우리가 추정하는 연대는 서주초년 무왕때로부터 성왕전기까지". 이를 보면 장조예는 원문을 아주 충실하게 인용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구사화는 자기가 세미나에서 직접 발언한 것도 부인하고, 서양고는 자기가 이미 발표한 논문의 글도 부정하고 있다. '공정'에 참가한 학자들의 학자적인 양심을 의심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어떤 네티즌이 "그들은 최근에 발생한 사실도 정확히 말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하상주 삼대의 일을 정확히 얘기할 수 있겠는가"라고 비난한 점도 이해가 된다.

 

장조예의 글과 장입동의 보도는 국내학술계에 커다란 파문을 던졌다. 장조예의 글은 갈수록 많은 국내외학자들(공정참여학자 포함)의 지지를 받고 있다. 이 글은 현재 중국고고학회 회장겸 덕망이 있는 고고학작인 숙백 선생의 <<숙백선생팔순기념논문집>>에도 실리게 된다. 장조예가 제기한 질의에 대하여 어떻게 답변할 것인지를 놓고, 여러차례 회의를 개최하였지만, 효과적인 대응방안을 전혀 찾지 못하고 있다.

 

2003년 8월말 즉, 시카고회의가 끝난 후 4개월이 지나서 개최된 <<번본(繁本, 완정본)>>을 토론하는 전문가회의에서, 적지 않은 참석자들은 신중한 태도를 보이게 된다. 그들은 공개적으로 모든 학술상의 논쟁이 있는 이슈에는 서로 다른 의견을 열거하자고 하게 된다. 학자들의 이런 주장으로 인하여, 그중 한 학자가 자기의 의견대로 작성한 <<번본>>(초안)은 통과되지 못하고 만다. 이리하여, "공정"은 1996년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좌초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정부의 수천만위안의 돈을 쓰고 요란스럽게 5년간 문을 걸어잠근채 진행했던 공정은 국제학술계에서 근본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게 되었다. 게다가 <<간본>>은 이미 사회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고 있어, 여러 측면에서 중화자제들을 오도하고 있다.

 

2003년 12월, 중국사회과학원, 호북민족학원의 전문가들이 3년에 걸쳐 편찬한 논문집 <<고사고(古史考)>> 9권이 해남출판사에서 출판되었다. 이는 국내외의 논문을 집대성한 것이고, 1949년부터 2003년까지 반세기에 걸친 중국고전학의 진전과 성과를 모은 것이다. <<인민일보>> 2003년 12월 23일자 제11판에서는 이것을 소개하면서, "건국이래 중국고전학연구의 진전을 반영하여 집대성한 대작"이라고 평가했다. 그런데, 이 책의 제9권에서는 "하상주단대공정"의 결론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