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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언어

왜 진한(秦漢)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미(眉)"를 "미(麋)"라고 적었는가?

by 중은우시 2013. 5. 18.

글: 양혜왕(梁惠王)

 

글자를 쓸 때는 간편한 것이 최고이다. 그래서 천백년이래 글을 쓰는 사람은 줄여서 편하게 쓸려고 한다. 다만, 예외도 있다.

예를 들어, "미(眉)"를 "미(麋)"로 쓰는 경우가 있는데, 진한때 사람들이 자주 그렇게 했다.

수호지진간이건, 마왕퇴백서이건, 아니면 방마탄진간이건, 윤만한간이건, 아니면 부양한간이건, 무위한간이건. 그의 모든 "眉"는 "麋"로 쓰여 있다. 예를 들어, <수호지진간.밥률답문>에는 이런 말이 있다: "혹은 사람과 싸우면 ,묶어서 그의 수염과 눈썹을 모조리 뽑는다(縛而盡拔其鬚麋)". 심지어 문자를 간략화하는 것이 심해서 어떤 글자는 거의 알아볼 수가 없는 동경명문(銅鏡銘文)도 예외는 아니다. 예를 들어, 동한의 <석인경>에는 이런 말이 있다: "진수아미(螓首蛾麋)". 모두 알고 있다. 여기서 "麋"는 "眉"라는 것을.

 

이것은 약간 기이한 일이다. 아마도 성격이 불같은 사람이라면 고인의 옷자락을 붙잡고 묻고 싶을 것이다: "이것은 도대체 무엇때문입니까? 왜 골치아픈 일을 마다하지 않는 것입니까?"

 

그러나 아쉽게도 고인은 말을 할 수 없다. 나는 그저 월조대포(越俎代庖)하여 대답을 시도해보고자 한다.

 

먼저 "麋"자의 기원부터 얘기해보자.

 

"미(麋)"는 일종의 사슴(鹿)과 동물이다. 갑골문에서, '"鹿"자는 한마리 사슴 모양이고, 두 개의 뿔이 아주 선명하다; "麋"는 다르다. 비록 그것도 두개의 뿔이 자라고 있지만, 문화인들은 그것을 그릴 때 뿔을 그리지 않고(<월령> <설문>에서 麋가 동지때의 뿔이 풀린 것이라고, 그래서 아마도 그 뿔이 분명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짙은 눈썹(眉)은 강조했다. 이것은 문자학에서 자성(字聲)부호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麋"와 "眉"의 고음은 아주 유사하다. 그래서 갑골문의 "미"자는 형성(形聲)자이다.  비록 그림과 유사하지만, 그것은 그림식 형성자라고 할 수 있다.

 

문자는 점차 그것의 동년기를 지나고, 청춘기로 접어든다. 그림식의 조자(造字)방식은 버려지고, 각종 기관(器官)이 표준적으로 배치되게 된다. '鹿'의 눈에 진하게 눈썹을 그리는 것은 표준화 조작을 하기에 좋지 않다. 그래서 그림 식의 "麋"자는 오늘날의 모습으로 바뀐다. "鹿"에 "米"의 성(聲)을 더하여 형성(形聲)자가 되었다.

 

주제로 돌아가자. "麋"는 그저 "眉"의 음부이다. 뜻에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왜 진,한 시대의 사람들이 '눈썹'을 얘기하면서, 기본적으로 "眉"를 쓰지 않고 "麋"를 쓰게 되었을까?

말이 나온 김에 얘기하자면, 문자를 얼마나 존중하든지 간에, 창힐이 글자를 만들 때, "천우속(天雨粟), 귀야곡(鬼夜哭)"했든지 간에, 당시 만국의 의관배면류(衣冠拜冕旒)의 금문은 청바지에 짧은 티셔츠의 전국문자로 바뀌었고, 이어서 다시 라운드티에 짧은 바지의 초예(草隸)로 바귀었다. 이 기간동안 쉽고 편하게 쓰는 것이 국가의 기본법칙이었다. 필획을 줄이는 것이 그 핵심이다. 일부 특수한 상황을 제외하고, 문자는 기본적으로 복잡한 것에서 간단한 것으로 바뀐다. 글자를 쓰는 것도 그러했다. 그런데, "眉"를 "麋"로 바꾸는 것은 이를 역행하는 것이다. 도대체 거기에 무슨 말못할 목적이 있단 말인가?

 

아마도 한가지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眉"와 "麋"의 혈관 속에는 같은 혈액이 흐르고 있다. 그 당시의 사람들은 "눈썹(眉)"을 보기만 하면 머리 속에서 "큰사슴(麋)"이 떠올랐다. 당나라때의 안사고(顔師古)는 아마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급취편(急就篇)>의 주석에서 이렇게 말했다: "미(麋)는 사슴(鹿)과 비슷하나 크다. 동지에는 뿔이 풀리고, 눈위에 눈썹이 있다. 그래서 그렇게 이름했다."  그 의미는 "麋:"라는 이름을 얻은 것은 바로 그것이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눈썹을 가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확실히 황당하다. 미록(麋鹿)은 온 몸이 털투성이다. 어디에 현저한 눈썹이 있단 말인가? 동물학을 다 뒤져보아도, 그런 기록은 찾을 수 없다. 사대부들이 매일 서재에 앉아 있어서 동물, 식물을 말할 때는 그냥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 것일까? 그래도 나는 믿기지 않는다.

 

중국에 있는 사슴(鹿)과의 동물은 모두 19종이다. '미(麋)'는 이미 멸종되었다. 그러나 선진(先秦)시대에 그것은 어디서나 보였다. <좌전>에 이런 기록이 있다. 진(晋), 초(楚)가 양당(兩棠)에서 결전을 벌이는데, 시시때때로 몇 마리의 미(麋)가 나타나서 교란시켰다. <좌전>에는 이런 말도 있다: "봉택유개미언(逢澤有介麋焉)"(늪이 있는 곳에 무리에서 떨어진 큰사슴(麋)이 있다). 큰사슴(麋) 한 마리가 무리에서 떨어져 있는 것까지 기록에 남기다니, 이를 보면 큰사슴(麋)은 항상 무리를 지어서 많이 모여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노(魯)나라에는 '麋'가 아주 많았다. 일찌기 농업을 망치는 일이 발생하곤 했다. 공영달(孔潁達)은 이렇게 해석한다: "큰사슴(麋)는 택수(澤獸, 못에 사는 동물)이고, 노(魯)나라에는 곳곳에 있다. 그 해에 많이 늘어났고, 많아지면 피해를 끼친다." <초사.상부인>에는 이런 말이 있다: "미하식혜정중(麋何食兮庭中), 교하위혜수예(蛟何爲兮水裔)". 이를 보면 굴원도 큰사슴(麋)를 자주 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맹자가 양혜왕을 만났을 때, 양혜왕은 "입어소상(立於沼上), 고홍안미록(顧鴻雁麋鹿)"하고 있었다.

 

위에서 인용한 진한의 고문에서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큰사슴(麋)은 아주 중요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일종의 '택수(澤獸)'이다. 물가의 진흙속에서 놀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주례>의 가공언소(賈公彦疏)에는 이렇게 해석한다: 택수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 기름은 부드럽고 잘 풀어져서 여름에 군왕에게 바쳐서 더위를 풀기에 좋다. 그래서 비수유역에 큰사슴(麋)이 아주 많았다. 심지어 사람들의 전쟁까지도 방해했다. 굴원도 그렇기 때문에 이상하게 생각한 것이다. 큰사슴(麋)이 왜 정원으로 와서 먹을 거리를 찾는지, 그것은 당연히 물가에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교룡이 왜 물가에 있는가? 그것은 당연히 못의 바닥에 숨어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양혜왕은 늪가에 서 있었다(立於沼上). 여기서 '상(上)'은 가(邊)를 의미한다. 늪의 가에서 귀여운 미록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택(澤)"과 "미(湄, 물가)"이다. 고대인의 마음 속에는 의미가 겹친다. <시경.진풍.택피>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피택지피(彼澤之陂), 유포여하(有蒲與荷)." <모전>에는 이런 말이 있다: "수초교착(水草交厝), 명지위택(名之爲澤)". 그러나, <이아.석수>에는 이런 말이 있다: "수초교위미(水草交爲湄)," 소에서는 이순의 주석을 인용하였는데: "물과 풀이 만나는 곳을 미(湄)라고 한다." 이 "미(湄)'는 고대인들이 자주 "미(麋)'라고 썼다. 고대인들이 물가를 칭할 때, 자주 "미(麋)"자를 쓰고, "미(湄)"자를 쓰지 않았다. 예를 들어, <좌전>에는 초성왕이 꿈에 하백(河伯)이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는다. 너이 멋있는 모자를 나에게 달라. 나는 너에게 "맹저지미(孟渚之麋)"를 주겠다.(<청화간>에도 '麋'로 썼다) 이 '맹저지미'는 맹저라는 물가에 사는 큰사슴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맹저라는 물가(湄)이다. 즉, 유명한 맹저택(孟渚澤)이다. "미(麋)"와 "택(澤)"도 하나이다. 그리고 또 예를 들어, <시경.소아.교언>에 이런 내용이 있다: "피하인사(彼何人斯)> 거하지미(居河之麋)". 그자는 누구인가? 그 자는 황하의 가(湄)에 사는 자이다. (당연히 <시경.진풍>에는 비교적 직접적으로 이렇게 적었다: '겸가처처(蒹葭凄凄), 백로미희(白露未晞), 소위이인(所謂伊人).재수지미(在水之湄)" 여기서는 "麋"를 쓰지 않고, "湄"를 썼다. 그러나, 아마도 후인들이 고친 것일 것이다.) ,시경.소아.교언>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거하지미(居河之麋)". 모전에서는 "수초교위지미(水草交謂之麋)"(물과 풀이 만나는 곳을 麋라고 한다. 이를 보면, "澤", "湄", "麋"는 혼용되었다.

 

여기까지 썼으니 알아차렸을 것이다. 왜 진,한 사람들이 불편한 것을 감수하고, 반드시 '麋'를 가지고 '眉'를 나타냈는지? 왜냐하면 "麋'는 확실히 '眉'와 친척관계에 있다. 미(麋)가 이름을 얻은 것은 아마도 그 눈썹이 아름답고 길어서가 아니라, 물가에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필자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아마도 너무나 근거없는 단정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치는 아주 명확하다. 눈가에 있는 것이 미(眉)이고 물가에 있는 것이 미(湄, 麋)이다. 물가에 있기를 좋아하는 사슴이기 때문에 "麋"라고 부른 것이다.

 

물가를 "湄"라고 부르고, 눈가를 "미(眉)"라고 부르며, 물가에서 생활하는 사슴을 "麋"라고 부른다. 이것은 같은 사고의 산물이다. 전문용어로 말하자면, 그것은 '동원어(同源語)'이다.

 

구건상(瞿乾祥)은 자신의 이모부인 저명한 언어학자 정성수(丁聲樹)를 회고하면서, 정성수가 그에게 <현대한어사전>의 잘못을 골라내라고 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는 "미(麋)"의 해석이 맞지 않다고 지적했다. 고대에 미(麋)라는 동물은 남과 북에 모두 아주 많았다. 그들은 특히 물가에 사는 것을 좋아했는데, 나중에 사람에 의하여 물가가 파괴되어, 늪지가 대폭 감소하자, 미(麋)는 갈 곳이 없어졌다. 거기에 사람들이 사냥을 하여 갈수록 적어지고 나중에는 멸종된다. 미(麋)와 물가는 마치 여교사칠(如膠似漆)이다.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하나가 망하면 같이 망하고, 하나가 흥하면 같이 흥한다.

 

그러므로, 진,한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눈썹의 '眉'를 '麋'로 썼다. 이것은 통가자(通假字)로 쓴 것이 아니다. 그들의 사고에서는 물가에서 생활하여 이름을 얻은 '麋'와 눈가에 있어서 이름을 얻은 '眉'는 같은 점이 있다고 보았고, '麋'가 더욱 구체적이다. 그래서 그들은 차라리 17획의 '麋'를 쓰지, 9획의 '眉'를 쓰지 않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