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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언어

장안화(長安話)는 왜 표준어가 되지 못했는가?

by 중은우시 2012. 8. 15.

글: 정계진(丁啓陣) 

 

중국역사상 하나의 아주 기괴한 현상이 있다. 오늘날 섬서성 서안과 함안일대의 고성 장안(長安)은 의문의 여지없이 중국역사상 건립된 왕조가 가장 많고(17개 왕조와 정권), 역사가 가장 유구하며(수도로 있던 총기간은 1200년이 넘는다), 영향이 가장 큰(두 개의 가장 위대한 왕조인 한나라와 동나라의 수도가 모두 장안이었다) 도시이다. 바꾸어 말하면, 장안은 중국에서 정치, 문화중심인 역사가 가장 긴 도성이다. 이 점에서, 낙양, 남경, 북경은 모두 장안에 미치지 못한다. 다만, 장안방언의 지위는 한번도 낙양, 남경, 북경같은 지위를 차지한 적이 없다. 즉, 장안화는 한번도 공동어인 표준어가 된 적이 없다. 이 현상은 아마도 예상밖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중국에서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기록상의 공동어인 표준어는 '아언(雅言)" 혹은 "하언(夏言)"이라고 불리는 언어이다. <논어.술이>의 기록을 보면, 공자는 이런 '아언'을 말할 줄 알았다. <시경> <상서>를 낭독할 때 아언을 썼다. 귀빈을 접대하거나, 전례를 주재할 때도 아언을 말했다. 어떤 언어학자의 고증에 의하면, 아언은 서주의 수도인 풍호(豊鎬, 지금의 서안시 장안구 서북)의 방언이 아니라, 서주말년에 동천한 후의 도성인 낙읍(洛邑), 즉 지금의 낙양일대의 방언이라고 한다.

 

진나라도성인 장안의 방언이 표준어가 아니었다는 것은 우리가 한가지 유력한 증거를 제시할 수 있다. 공자가 서쪽으로 갈 때 진나라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춘추시대의 진나라는 아마도 예의로 다스리는 나라가 아니었다. 인구중에 융적의 오랑캐가 많았다. 그래서 공자가 멸시한 것이다. 공자가 십여년간 주유열국하면서 사방에서 벽에 부닥쳤고, 상갓집개처럼 취급당했는데, 그는 한 가지는 시종 견지했다. 서쪽으로 갈 때 동관을 넘어 진나라경내로는 들어가지 않은 것이다.

 

육국을 합병하고 통일한 진나라제국은 15년밖에 정권을 유지하지 못했다. 거동궤(車同軌), 서동문(書同文)등은 해냈지만, 장안방언을 표준어로 확립하는 것은 아마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서에도 진시황이 "어동음(語同音)"을 시행했다는 기록은 없다.

 

한고조 유방이 건립한 서한왕조는 장안에 200여년간 도읍했다(기원전206년-기원후8년). 다만, 서한때 태어나서 동한때 죽은 양웅(기원전53년-기원후18년)이 편찬한 <유헌사자절대어석별국방언>이라는 책을 보면, 여러번 표준어(通語, 凡語, 凡通語등)와 다른 방언을 열거하면서 "진(秦)", "진진(秦晋)", "진진지간(秦晋之間)"등등의 말이 나온다. 이를 보면 서한시기의 장안화는 표준어와 다른 일종이 방언이었다. 양웅의 위 책에 열거한 방언이 지명으로 볼 때, 동남서북의 각 지방은 모두 방언으로 열거했다. 오로지 천하의 중앙에 위치한 하락(河洛)지구, 즉 낙양일대만이 표시되어 있지 않다. 이를 가지고 추측해보면, 당시의 낙양화가 표준어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낙양화가 전국유일의 한어표준어로서의 역사는 영가지란으로 서진이 동천할 때까지 지속된다. 양, 북제, 북주, 수나라에서 관료로 있었던 저명한 학자 안지추(顔之推, 531-약595)는 <안씨가훈. 음사편>에서 각지방의 음이 바르지 못한 점을 지적한다. 남방의 말은 "실재부천(失在浮淺)"하여 북방의 "질직(質直)"함만 같지 못하다고 하였다. 다만, 북방의 음에는 "북잡이로(北雜夷虜)"의 폐병이 있다고 하고, 남방의 음에는 "남염오월(南染吳越)"의 폐병이 있다고 했다. 안지추보다 약간 뒷시대의 사람인 육법언은 수나라 인수원년(601년)에 쓴 <절운.서>에서, 각지역 말의 바르지 못한 현상을 비판했다. "오월은 시상경천(時傷輕淺)하고, 연조(燕趙)는 다섭중탁(多涉重濁)하고, 진룡(秦龍)은 거성위입(去聲爲入)하고, 양익(梁益)은 평성사거(平聲似去)한다" 오로지 중원지역의 하락일대에 대하여만 별도로 언급하지 않았다.

 

연구결과에 따르면, 당나라사람들은 시를 지을 때, 기본적으로 육법언의 안지추등의 관점에 따라 편찬한 <절운>의 운부분류를 따랐다고 한다. 이를 보면 당나라의 표준어는 동도 낙양의 방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송원이후, 한어표준어는 하락방언에서 점점 북경화로 넘어간다. 그 동안 남경화가 표준어로서 역할을 했는지에 대하여는 연구자들마다 다른 견해를 보이고 있다.

 

종합하여 말하자면, 역사적으로 장안화는 표준어가 된 적이 없다.

 

원인은 무엇인가? 위에서 인용한 재료에 따르면, 알 수 있다. 원인은 주로 두 가지이다. 하나는 공자가 숭상한 것인 주나라의 예의치국의 사상이었다는 것이고, 둘째는 중국인의 지리관념상 중앙위치를 숭상하는 전통이 있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