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조염(趙炎)
가지고 있는 자료를 보면, 중국최초의 작은마누라는 아마도 두 가지 지위가 차이나는 족군에서 왔을 것이다. 하나는 스스로 사람으로 볼 수 없는 죄를 범한 여노(女奴)이다. 동한 허신(許愼)의 <설문해자>를 보면, "여자중 죄가 있는 자는 다른 사람의 첩이 된다"는 말이 있다. 또 다른 경우는 비교적 존귀한 경우로 주희(朱熹)의 집주에서 언급한 "귀매(歸妹)"이다. 이것이 가리키는 것은 은상(殷商) 혹은 그 이전에 귀족간에 나타난 잉혼제(媵婚制)이다. 언니가 시집가면, 여동생 혹은 다른 가까운 친척여자가 따라서 시집가는 것이다. 이때 언니가 정처(正妻)외에 나머지 여성은 작은마누라의 범주에 속한다.
모두 잘 알고 있는 아황(娥皇) 여영(女英)이 순(舜)임금에게 시집간 전설은 지금으로서는 대소를 구분하였는지 여부를 알 수가 없다. 다만 분명히 잉혼의 근원이다. 잉홍제는 춘추시대에는 여전히 성행했다. 예를 들어, <좌전>, <공양전>등의 책에 모두 기재가 있다. 기괴한 것은 전국시대가 되면서, 잉혼의 문자기재는 소리없이 사라진 것이다. 우리는 그 원인을 따져보는 것은 잠시 미루도록 하자. 우선 작은마누라의 칭호변천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자.
가장 통속적인 칭호
정처 이외의 작은마누라를 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첩(妾)'이라 통칭했다. 첩이라는 칭호는 서면문자에서 자주 보이고, 역사가 가장 길다. 그리고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보급정도에서는 오늘날의 '얼나이(二奶)'에 비교할 만하다. 여기서 설명해야 할 점은 고대인들의 일상구어에서 작은마누라에 대하여 왕왕 첩이라고 부르지 않고, "소처(小妻)", "소처(少妻)", "소부(小婦)"라고도 불렀다(<한서>). 이렇게 하여 대처(大妻), 주처(主妻)와 구분했다. 문화가 있는 사람은 작은마누라를 "측실(側室)", "외실(外室)", "외택(外宅)", "외부(外婦)", "편방(偏房)"등등으로 불리웠다. 이것들은 모두 비교적 통속적인 호칭이다. 청나라말기 민국시대에 자주 보던 말이다.
고대여인들은 통상적으로 '첩'이라고 자신을 겸칭하기도 했다. 이것은 본문의 토론주제는 아니다. 그래서 그냥 지나가기로 한다. 민간에서는 습속이 변화하여 작은마누라에 대하여, "신변이(身邊人)", "본사인(本事人)", "공과인(供過人)", "당전인(堂前人)", "접각부인(接脚夫人)"과 "양두대(兩頭大)등 여러 속칭이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아주 재미있는 말들이다.
가장 생경한 칭호
문화보급의 각도에서 보자면, 어떤 작은마누라에 대한 칭호는 실로 보급되었다고 말할 수조차 없다. 예를 들어, "추실(簉室, 추는 側이라는 의미임)"이 있고, "연침(燕寢)"이라는 말도 있다. 연침은 정침(正寖)에 상대되는 말이다. 만일 정처가 정침에 거주하지 않는다면 연침의 양측에 소침(小寖)을 두고, 처는 연침에 거주하고, 첩은 소침에 거주한다.
이들 생경한 칭호를 만일 꺼내서 얘기한다면 많은 사람들은 무슨 소리인가 할 것이고, 무슨 뜻인지 모를 것이다.
가장 불분명한 칭호
예를 들어, "희(姬)" 혹은 "미인희(美人姬)"는 원래 고대인들이 모든 부녀에 대하여 부르는 미칭이다. 우리가 오늘날 부녀를 부를 때 '미녀'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뜻이다. 한 여자를 찬미할 때, 너는 아마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 여자는 정말 아름답다. 대미인이다." 만일 고애인들이라면 그것은 아주 간단하다 3글자이다. '미인희'
다만, 고대인들은 왕왕 작은마누라를 '희'라고 불렀다. 혹은 '미인희'라고 불렀다. 예를 들어, '동평왕이 정군(政君)을 희(姬)로 맞이했다." 여기서 왕정군은 바로 작은마누라라는 말이다. <사기>에는 "평원군의 미인이 건물위층에 살았다."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 '미인'은 작은마누라라는 말이다. 당송이후, 사대부는 집안에 가희(歌姬), 가희(家姬)를 두었다. 이들도 작은마누라의 성격이 있다. 나중의 여러 항제, 태자들은 아예 후궁의 여러 작은마누라를 '미인'이라고 불러버렸다. 그리고 일종의 신분으로 고정시킨다.
이들 문자기재는 필자가 보기에 만일 주어와 수식어가 없어진다면, 쉽게 사람들에게 혼란을 준다. 도대체 여인이 아름답다고 찬미하는 것인지, 작은마누라를 칭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약간만 조심스러운 역사학자라면 작은마누라를 '희인(姬人)' '희시(姬侍)'와 같이 칭한다.
가장 문인화된 칭호
고대인들은 큰마누라를 '부인(夫人)'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독서인들은 작은마누라에 대한 존칭을 생각해낸다: "여부인(如夫人)". 부인과 비슷하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좌전>에서는 제환공이 "호내(好內), 다내총(多內寵), 내폐여부인자육인(內嬖如夫人者六人)".여기서 말하는 것이 바로 지위, 대우가 부인과 비슷한 6명의 지위가 높은 작은마누라가 있었다는 말이다. <유림외사> 제23회에도 "그는 제7여부인이 병이 있어." 라는 문구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대상인 만설제의 일곱째 작은마누라를 말한다.
이 세 글자는 수준이 있다. '기능'에서 비슷하다는 것이며, 찬미하고 잘보이려는 뜻이 있다. 문화가 없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머리를 두드려도 생각해낼 수 없는 말이다.
가장 아부하는 칭호
당신은 누군가 작은마누라를 '군(君)'이라고 부르는 것을 들은 적이 있는가? '군'이 무엇인가? 군주, 군왕, 군상 모두 제왕의 전용단어이다. 군자(君子)는 전통문화에서 도덕이 고상한 남자를 가리킨다. 여인을 군자라고 칭하는 경우는 드물다. 하물며 작은마누라임에야.
춘추시기에 확실히 아부를 잘하는 사람이 제후의 큰마누라를 "여군(如君)"이라 칭한 바 있다. 작은 마누라는 "소군(小君)"이라 칭했다. 한나라가 되자 다시 귀족의 부녀에게 '군'이라는 봉호를 붙이는 제도가 생긴다. 그리하여 작은마누라들은 일시에 더욱 대단해진다. 위진시대를 지나면서 더 이상 작은마누라를 '군'이라 칭하는 예는 없어졌다.
가장 우아한 칭호
<시경>과 <예기>를 종합한 칭호이다. <시경.소남,소성>은 원래 비관소리(卑官小吏) '숙야재공(夙夜在公)'의 힘든 생활을 쓴 것이다. 그러나, <시서>에서는 이 시를 국군부인의 투기심없는 마음을 칭송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혜급중첩(惠及衆妾)"; <예기>에는 다시 부부를 일월(日月)에 비유한 말이 나온다. 그리하여, 후세에 아치(雅致)를 추구하는 문인들이, 양자를 연결시켜 작은마누라를 "소성(小星)"이라 부른다. 이는 여러 별들이 달을 둘러싸고 있 하나의 해를 같이 모시는 일부일처다첩제를 비유했다.
종합적으로 말하자면, 고대의 작은마누라들이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단어는 역시 '여부인', '소군'등의 칭호이다. 왜냐하면, '미인희'와 같은 류의 단어는 너무 대중화되었고, 여인들이 모두 이렇게 불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성'과 같은 칭호는 얻기가 어렵다. 일평생 한번도 불리지 않을 것이다. 외실, 편방등등은 신분에서 명백히 폄하하는 뜻이 담겨 있다. 작은마누라들이 듣기 좋아할 말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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