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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언어

광동어(粤語)가 중국고대의 표준말인가?

by 중은우시 2015. 1. 13.

글: 정자녕(鄭子寧)


권총 한자루, 총알 한상자를 가지고 냉병기시대로 돌아가서 공을 세우는 것이 왕왕 네티즌들의 꿈이고, 이를 제재로 한 인터넷소설은 넘쳐 난다.


그러나, 진정 시공을 초월하려면 아주 높은 기술수준이 있어야 한다. 황제가 손목시계를 차고 있다던지, 한나라때 의자가 나타난다든지, 당나라때 토마토가 나타난다든지 하는 세부적인 부분들 외에 시공초월작품의 더욱 큰 문제는 언어이다. 서로 상대방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다.


잔혹한 사실은, 청나라로 가서 거거, 패륵, 귀비가 되고자 한다면 겨우겨우 꿈을 이룰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원나라로 돌아가면, 고대인들은 대부분 주인공의 말이 괴이하다고 여길 것이다. 그래도 겨우겨우 알아들을 수는 있을 것이다; 당나라이전으로 돌아가면 골치아프다. 운이 좋아서 동쪽 나라에서 온 손님취급을 받는다면 홍려시(鴻臚寺)에서 접대를 받은 후 한어를 공부시켜줄 것이다. 운이 나쁘면 아마도 직접 외국간첩취급을 받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생각할지 모른다. 문언문(文言文)을 쓰면 해결되지 않을까?


그것도 방법이기는 하다. 그러나 실제로 하기는 어렵다. 제대로 된 문언학과 현재의 초등,중등,고등학교의 수업은 차이가 클 뿐아니라, 평상시에 고인들도 문언문으로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완벽하게 문언의 어법과 단어를 익힌다고 하더라도, 겨우 일부 사람들과 필담을 나눌 수 있을 뿐일 것이다. 외국인과 마찬가지로.


그렇다면, 고대의 독음은 도대체 어떠할까? 어떻게 그들 고음(古音)을 확정할까? 광동어로 말하면 고인들과 아무런 문제없이 소통할 수 있을까?


이 문제를 설명하려면, 먼저 한어의 독특한 성질부터 얘기해야 한다.


병음문자와는 달리, 한자는 많은 정도로 어음(語音)에서 독립되어 있다. 즉, 어음의 변화는 문자에서 반영되지 않는다. 


이 특징은 일반인들이 어음의 변화에 대한 의식이 결핍되게 만들어 시공을 초월하는데 어렵게 만들 뿐아니라, 역사상 음의 변화를 연구하는 전문가에게도 골치거리를 더해주고 있다.


고인들은 어떤 녹음이나 동영상을 남겨놓지 않았다. 현대독음은 복잡한 역사의 변천과 간여를 겪었다. 어언학자들이 어떻게 어떤게 고음인지 알 수 있을까?


첫째, 운서(韵書)에 의존한다.


운서는 대체로 고대의 사전이다. 자연히 독음을 주석으로 표기해 두었다. 한어 운서는 보편적으로 반절법(反切法)을 채택했다: 한 글자의 성모와 운모의 성조를 분리하여 각각 다른 글자로 표기한 것이다.


예를 들어 말하자면, <대송중수광운>에 "東"자를 "德紅切"이라고 했다. 즉 "德"의 성모, "紅"의 운모와 성조라는 것이다. 


당연히, 반절법을 이해하려면 반드시 쓰는 글자의 독음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반절주음의 정리는 비록 직접 독음을 확정하지는 못하지만, 당시 어음체계의 틀은 알아낼 수 있다.


둘째, 한자자체에 의존한다.


한자는 완전히 어음에서 독립된 것은 아니고, 대량의 형성자(形聲字)가 있다. 고금성방(古今聲旁)의 대비를 통하여 단서를 얻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로(路)의 성방은 '각(各)'이다. 보통화에서 두 글자의 독음은 전혀 관련이 없다.그러나, 고인은 "각(各)'을 "로(路)'의 성방으로 삼았다. 이는 고대에 두 글자의 독음이 가까웠다는 것을 설명한다.


셋째, 시문압운(詩文押韵)


조조의 <관창해(觀滄海)>라는 시에는 "해(海)", "치(峙)", "무(茂)", "기(起)", "리(裏)", "지(志)"의 여섯자 압운이 있다. 현대에는 거의 어느 종류의 한어방언도 압운으로 삼을 수 없을 것이다. 시사압운의 변화를 정리하는 것도 연구의 중요한 방향이다.


넷째, 외국어와 현대방언


외국어는 주로 대량의 번역이 한어로 들어온 언어를 말한다. 예를 들어, 불교용어의 산스크리트어와 팔리어가 있다. 모두 알고 있는 "야차(夜叉)/약차(藥叉)"는 산스크리트어 यक्ष(yakṣa)에서 왔다. 이는 당시 야(夜)와 약(藥)의 발음이 아마도 ya 혹은 yak에 접근했을 것이고, 오늘날과 다르다는 것을 말해준다(현대중국어로 夜는 ye, 藥은 yao임).


마지막으로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문헌에서 계통적이지 않은 묘사가 있다.


<여씨춘추>에는 동곽아(東郭牙)는 제환공의 입이 "열려있고 닫히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제환공이 말한 것이 "거(莒)"라는 것을 알아냈고, 제환공과 관중이 거국을 치려고 계획하는 것은 누설되고 만다. 오늘날의 보통화로 하면 "거(莒, 현대중국어 발음은 '쥐')"의 입모양은 너무 좁다. 이를 통하여 사람들이 고음을 찾아내는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이상의 방법을 종합적으로 분석하여, 학자들은 고대한어의 독음체계를 찾아내고 있다.


예를 들어 말하자면, "탑(塔, 현대발음은 '타', ta)"은 팔리어 थुप(thūpa 에서 왔다. <광운>에는 "토개절(吐蓋切)"이라고 되어 있다. 이를 정리해보면 '개'운에 속한다는 것을 알 수 있고, 현대방언에서는 광동어의 "taap' 한국어의 'tap'이 있다. 이를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탑'과 그의 운모인 모든 개(蓋)운의 글자 예를 들어 '개(闓)', '蓋'등은 모두 고대의 운모가 아마도 'ap(압)'일 가능성이 크다.


현재 학계에서는 보편적으로 <절운>, <광운>등의 책에 나오는 어음을 중고한어의 기준으로 삼는다. 복원신뢰도는 이미 상당히 높다.


그렇다면 이를 가지고 대조해보면, 광동어는 고대의 독음에 부합하는가? 광동인들은 쉽게 당나라로 과거여행을 하며 언어장애없이 교류할 수 있을까? 


유감스럽게도, 이것은 철두철미한 환상이다. 그렇게 되리라고는 전혀 믿을 수 없다.


현대와 마찬가지로, 고대의 지구간에도 어음의 차이가 존재했다. 당나라때, 광동은 아직 중원인의 눈에는 오랑캐의 땅이었다. 한유가 조주로 유배를 갈 때 절망하여 "지여원래응유의(知汝遠來應有意), 호수오골장강변(好收吾骨瘴江邊)"이라는 싯구를 썼다. 그곳과 다른 지방 특히 중원 방언을 지닌 지역과는 차이가 존재했다.


가장 직관적으로 이런 차이를 설명하는 것은 불교선종육조이다. 혜능은 신주(광동 신흥)에서 태어났다.그가 처음 오조 홍인을 만났을 때 홍인이 이렇게 질책한다: "너는 영남인이고, 오랑캐인데, 어찌 부처가 되려고 하느냐?" 나중에 혜능이 홍인을 떠날 때 이렇게 말한다: "혜능은 변방에서 태어나, 발음이 정확하지 않은데 스승의 은혜를 입어 법을 전수받아 오늘날 이미 깨달았으니 자성자도(自性自度)할 수밖에 없다." 기실 혜능의 본적은 하북 범양이다. 집이 영남으로 이사간 것은 1,2대이다. 그러나 이미 '말이 정확하지 않았다(語音不正). 이는 최소한 당나라사람들은 영남인들이 말을 올바르게 하지 않는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진정으로 숭고한 어음은 계속하여 중원 독서인들의 말투이다. 특히 낙양일대.


동진의 영가남도후, 사대부가 읽은 말투를 '낙생영(洛生詠)"이라고 하며, 추앙을 받았다. <안씨가훈>에는 어음에 대하여 말하면서, "오로지 금릉과 낙양뿐이다"라고 한다. 당송시기, 낙양의 독서인들의 발음은 여전히 높은 지위를 누린다. 북송의 구준과 정위가 한번은 발음에 대하여 얘기하면서, 천하의 어느 곳의 발음이 올바른지를 말한다. 구준이 말하기를 "오로지 서락인들이 천하의 가운데이다" 그러나 정위는 말한다. "아니다. 사방은 모두 방언이다. 오로지 독서인이 된 후에야 바르다."


남송 육유의 <노학암필기>에는 "중원에서 오직 낙양이 천하의 가운데로, 어음이 가장 바르다."고 하였다.


다만, 광동어가 당나라의 관화는 아니지만, 북방관화와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광동어가 중원의 옛 발음을 적지 않게 보류하고 있다.


중당이후, 북방은 장기간 전란과 이민족통치를 겪으면서, 한어가 중고한어에서 근고한어로 변한다.


당의종때, 호증(胡曾)의 <희처족어부정(戱妻族語不正)>이라는 시가 있는데 이는 생동감있게 당시의 발음변화를 보여준다.


호십각위석(呼十却爲石)

환침장작진(喚針將作眞)

홀연운우지(忽然雲雨至)

총도시천인(總道是天因)


호증의 처족은 '십'과 '석'을 똑같이 발음하고, '침'과 '진'도 같은 발음이다. 그리고 '음(陰)'은 '인(因)'으로 발음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때, 구석진 영남은 북방에서 발생한 음변화의 영향을 적게 받는다. 그리하여 중원의 지식인들의 관심을 받는다.


남송 주희는 <주자어류>에서 이렇게 평가한다. "사방의 성조와 발음이 잘못 바뀐 것이 많다. 그러나 광중인(廣中人)들의 성음이 아직 괜찮다. 그곳에는 아직도 바른 편이다. 낙양에서 변방의 남쪽으로 많이 옮겨갔는데, 복건, 절강도 동남 귀퉁이이지만, 복건, 절강의 성음은 특히 정확하지 않다." 이를 보면, 독서인들은 그들이 중원낙양지구의 어음을 계성하여, '아직 괜찮다'고 한 것이다.


송,원,명,청의 네 왕조때 북방의 언어는 더욱 많이 변한다. 상대적으로 말해서, 영남지구는 더욱 안정되었고, 언어의 보수성도 더욱 두드러졌다. 


경제적인 발전은 일찌기 오랑캐의 땅이라고 불리웠던 곳의 사람들이 허리를 펼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특히 광주는 발전수준이 중원지역을 초월한다. 영남인들의 문화자신감도 제고되고, 스스로를 고중원의 계승자라고 여기게 된다.


광주인 진풍은 <광주음설>에서 명확히 지적한다: "광주방언은 수당운서의 절어와 부합한다. 다른 곳에서는 따를 수 없는 것이 여럿이 있다." 그리고 예를 들어 논증한다; 광주어는 음상,양상,음거,양거가 있고, m받침이 있다. '굉공(觥公)", "궁경(窮瓊)"의 발음이 다르다는 것등이 좋은 예이다. (그러나 광주는 구구(九狗)의 구분이 없고, 호부(呼夫)가 분리되지 않는등 고음과 맞지 않는 부분은 선택적으로 무시했다)


그후에 다시 이렇게 쓴다: "광중인들의 성음이 좋은 것은 천여년이래 중원사람들이 광중으로 옮겨와서 살았기 때문이다. 지금의 광동 발음은 실로 수,당시기 중원의 발음이다.그래서 수당운서의 절어가 이렇게 들어맞는다." 진풍은 월어가 당나라때의 관화라는 주장의 남상(濫觴)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북방한어가 정말 오랑캐화되었는가?


많은 사람들은 진정으로 오랑캐화하한 언어가 어떤 모양인지 알지 못한다. 금,원시기에 일종의 기괴한 한어가 유행한 적이 있다: "한아언어(漢兒言語)". 말의 순서는 몽골어와 유사하고, 어법은 알타이의 영향을 받았다. 예를 들어 복수에 '매(每)'를 추가하는 특징등이 있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원나라때 비석중에 "장생천기리(長生天氣里), 대복음호조리황제성지(大福蔭護助里皇帝聖旨)"같이 현대에 보면 이상한 문구가 바로 한아언어이고, 명나라이후에는 기본적으로 사라진다.


실제로, 어음변화는 원래 통상적인 일이다. 비록 북방어가 사회혼란등의 원인으로 변화에 있어서 남방어보다 빨랐지만, 이들 변화를 오랑캐언어의 영향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예를 들어, 입성이 중원에서 약화되는 것은 늦어도 북송때부터 시작되었는데, 그때는 아직 '금,원'의 오랑캐어와 시기가 멀리 떨어져 있다.


권설음도 많은 사람들이 '북방오랑캐화설'의 가장 중요한 증거중 하나로 얘기한다. 기실, 많은 남방어에도 최근에 들어서야 권설음이 없어졌다.


소주, 장사, 성도, 남경등지의 옛날방언에는 모두 권설음이 있었다. 광주어도 백년전에는 권설음이 있었다. 운서 <분운촬요>이건 초기 전도사이건 아니면 홍콩의 인명, 지명이건 모두 권설음을 구분하고 있다.


그래서, 당나라로 제대로 시간여행하려면, 광동어를 잘 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토박이 광동인이라고 하더라도 음운학 지식을 더 쌓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