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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수양제)

수양제는 왜 세번이나 고구려정벌에 나섰는가?

by 중은우시 2013. 5. 18.

글: 불요이분법(不要二分法) 

 

수문제 양견은 관농(關隴)(지금의 섬서성과 감숙성)귀족의 힘을 빌어 북주(北周)의 강산을 탈취하여, 관농귀족에게 큰 권력을 부여한다. 그러나 그들을 제한할 생각도 한다. 개황6년, 수문제 양견은 북위이래의 가병제(家兵制)를 폐지하고, 각 대문벌의 수만에 이르는 가병을 모두 해산하도록 명령한다. 가병제는 이로 인하여 점점 소멸된다. 그러나 옛날의 습관은 여전히 남아서 관농귀족은 '가자(假子)'관계를 맺는 것이 성행한다. 적으면 몇백, 많으면 천명이 넘는 '가자'를 두었다. 이렇게 집안에 가자를 두니 이전 가병제의 변형에 해당했다. 단지 수량에 예전만큼 맍지 않을 뿐이다. 그리고 가병처럼 갑옷을 입고 무장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양견도 그저 모른척 했고, 관여하지 않았다. 다만 이들 가자는 문벌에 거두어져 집안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많은 경우는 모두 군대에 깊이 들어가서 군권을 장악했다. 이것이 바로 관농귀족의 기반이었고, 그들을 건드리는 것은 쉽지 않았다. 양견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관농귀족이 수왕조때 전성기를 누리는 것과 상대적으로 산동사족(山東士族)의 중앙조정에서의 세력은 상대적으로 약화되었다. 원인은 몇 가지이다. 한편으로 수왕조는 유학을 경시했고, 산동사족이 생존을 의존하던 구품중정제가 폐지된다. 그리하여 산동사족들은 보편적으로 마음 속으로 불만을 품게 된다. 대부분은 교육에 주력하고 관직에 나가고자 하지 않았다.

 

또 다른 한편으로, 수십년간의 하음지변(河陰之變)으로 이주영(爾朱榮)은 북위조정에서 산동사족을 거의 모조리 죽여버린다. 산동사족의 각 명망세가는 모두 큰 타격을 입는다. 수십년동안 원기를 회복하지 못하였다.

 

다만, 관건적인 원인은 수왕조가 북주의 연속이었다는 것이다. 우문태의 관농세력이 건립하였다. 산동사족은 주로 고환의 북제(北齊)에서 관직을 지냈다. 양견은 부정당 수단으로 황위를 얻었으므로, 관농귀족의 지지가 필요했다. 그러므로, 중앙조정의 90%이상의 관리는 모두 관농세력에 속했다. 특히 군대는 거의 관농세력이 장악하고 있었다.

 

황제 양견의 불신임, 관농귀족의 배척으로 산동사족은 조정에서 설 자리가 없었다. 양광은 즉위한 후, 산동사족을 대거 지원하여 관농세력을 견제하고자 한다. 그래서 내각재상에 두 명의 문희 배씨(聞喜 裴氏)가 나타나도록 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양광은 등극한지 몇년밖에 되지 않아, 산동사족의 세력은 조정내에서 아직 미약했다. 태원 왕씨(太原 王氏), 범양 노씨(范陽 盧氏), 박릉 최씨(博陵 崔氏)는 기본적으로 조정으ㅔ서 고관을 차지하지 못한다.

 

역사상 수양제 양광이 세번이나 고구려를 정벌한 것은 간접적으로 수왕조의 멸망을 가져왔다. 이전에 수양제 양광은 돌궐을 치고, 토곡혼을 쳤는데, 모두 잘 싸웠다. 그러나 작은 나라인 고구려를 치는데는 연이어 실패한다. 강대한 돌궐, 토곡혼을 칠 때도 전국의 병력을 동원하지는 않았었다. 인구 수백만, 병력 십여만의 고구려에 군대 120만을 동원할 필요는 없다. 이것은 거의 전국의 모든 역량을 동원한 것이다. 그리고 무수한 후방의 민부(民夫)들도 있다. 여기에 얼마나 많은 양식과 재력이 들어갈 것인가?

 

제1차고구려정벌때 이미 산동에서 반란이 일어난다. 아마도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양광은 이들 자잘한 반란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제2차고구려정벌때, 양현감(楊玄感)이 반란을 일으킨다. 그를 따라 반란에 가담한 중신과 고관이 부지기수였다. 심지어 황족도 참가한다. 전체 통치계층의 기반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전국에 반란의 불길이 갈수록 크게 번졌고, 돌궐 수십만대군도 변경에 머무르며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수나라는 아주 엄중한 내우외환에 시달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런 내우와환이 심각한 국면하에서도 양광은 제3차고구려정버릉ㄹ 하고자 한다. 수왕조의 핵심이익과 전혀 관계없는 동북의 작은 나라를 위하여 부친이 창건한 제국을 망친 것이다. 이 어찌 아깝지 않은 일인가?

 

양광의 웅재대략으로 보면, 그의 마음 속으로 누구보다도 확실히 알았다.  그리고 수나라군대가 고구려를 정벌하기 전에 백전백승이었다. 친정하여 토혼곡을 멸망시키고, 돌궐도 거의 멸망시켰다. 그러나 고구려정벌에서는 백만대군이 사상당한다. 결국 이 작은 나라의 기반에 상처를 주지도 못한다. 양광이 군사를 몰라서인가? 평남지전은 그가 지휘했다. 개황20년의 돌궐지전도 그가 지휘했다. 토혼곡을 멸한 것도 모두 그가 지휘했다. 그가 어찌 군사를 모른다고 할 수 있겠는가?

 

원래, 양광은 관농귀족이 통제하는 전체 북방군대를 모조리 죽이고 싶었던 것이다. 그 후에 남방의 군대를 북상시켜, 관농귀족세력을 철저히 망치려 한 것이다. 그외에 고구려도 없앰으로써 두 가지 위협을 한꺼번에 해결하려 한 것이다. 사실은 증명한다. 양광은 3차에 걸친 고구려정벌을 통하여, 관농귀족의 역량을 크게 약화시킨다. 수당의 변화가운데, 어느 영수도 원래의 세가대족이 아니다. 이당이 황위를 빼앗은 후, 오성(五姓)과 혼인하고자 하나 성공하지 못한다. 이것만 보더라도 이당은 근본적으로 대족이 못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3차에 걸친 고구려정벌의 피해를 입지 않을 수 있었다.

 

양광은 왜 급히 관농귀족을 없애야 했을까? 당시 양광이 처한 국면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밖으로는 관농귀족이 조정을 장악하고 있고, 안으로는 종실이 약했다. 양광의 자손은 많지 않았다. 3명의 아들중 큰아들 양소는 일찍 죽었다. 둘째아들 양간(楊暕)은 멍청했고, 셋째아들 양고(楊杲)는 아직 너무 어렸다. 손자도 마찬가지로 너무 어렸다. 그는 자손들이 나이어리고 유약하여, 관농귀족을 제압하지 못하여 나라를 관농귀족에 찬탈당할까봐 우려했다. 그래서 그는 급히 자신의 수중에서 철저히 관농귀족을 없앨 필요가 있었다. 그가 고구려와의 전쟁을 진행한 것은 도박이었다. 대수제국을 걸고 도박을 한 것이다. 이를 통하여 대수의 최대위협인 관농귀족을 철저히 제거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향후 관농귀족, 산동사족과 남방사족이 균형을 이루는 것을 바랐다. 그렇게 하면 수나라의 3대이익집단은 그의 수중에 완정히 장악당하게 된다. 수왕조는 장치구안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한편으로 관농귀족에 타격을 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관농귀족을 기용하며, 그들중 세력이 강하거나 말을 듣지 않는 자들을 타격했다. 예를 들어 원씨(元氏)같은 류이다. 동시에 그들중 온건파와 세력이 약한 자들을 기용했는데, 예를 들면 이연과 같은 경우이다.

 

다만 이번에 관농귀족에 타격을 가하는 도박에서 양광은 결국 패한다. 그가 발탁한 겉으로 보기에는 온화하고 유약한 이연 즉, 관농귀족중 하나인 이연이 관농세력의 지지하에, 거병하여 관중을 점령한다. 원래 관농은 역대이래로 수나라군대의 주요 병원지이다. 그 자체로 병력이 강대하고, 여기에 고려지전과 양주지전을 더하여 대량으로 사병이 관농으로 돌아간다. 당군은 극히 우량한 병원을 보유하고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관농귀족이 대량의 돈과 식량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천하재물을 10이라 하면 5는 관농에 있었다. 바로 그들이 적극적으로 지지하여 당군은 전량이 충분했고, 장병들도 목숨을 바쳐 싸웠다. 인(人), 재(財), 물(物)에 민심의 방향까지 추가하면 이것이 바로 역사상 당군이 신속히 각로세력을 격파한 근본원인이다. 절대로 이세민 개인의 영웅적 재능때문이 아니다.

 

역사상 강도(江都)의 효과군(驍果軍)에 변고가 발생한 것은 실제로 이연이 돌궐에 동의했기 때문이다. 관중자녀를 모두 돌궐에 귀속시키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이연이 관중을 점령했다는 소식이 강도에 전해진 후, 효과군은 놀라서 도망을 간다. 최종적으로 관농귀족자제에 의하여 이용되어 변란이 발생한다. 관농귀족은 결국 이 도박에서 승리한다.

 

수나라의 은환(隱患)은 관농귀족만이 아니다. 반수 의거는 가장 먼저 제군, 청하군, 평원군등지에서 발발한다. 이것은 절대로 간단한 농민의 난이 아니다. 여기에는 극히 심각한 역사적 배경이 있다. 이들 지역은 북제의 핵심통치지역이다. 민풍이 용맹하고 사나웠다. 북제의 유민이 아주 많았고, 수왕조에 대하여 불만이 컸다. 유패도, 맹랑등이 모두 그런 사람들이었다. 소위 농민의거에서 농민은 그저 앞세운 것일 뿐이다. 이것이 바로 양광의 두번째 위협 즉 북제의 유민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