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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수양제)

수양제 양광(楊廣)은 어떻게 태자의 지위를 빼앗았는가?

by 중은우시 2013. 4. 2.

글: 소가노대(蕭家老大)

 

진왕(晋王) 양광은 수문제(隋文帝) 양견(楊堅)의 차남이다. 남방의 진(陳)을 멸하고, 북방의 돌궐에 항거하는 전쟁에서, 그는 큰 공을 세웠다. 정치적인 자본이 계속 증가하면서 영준하고 총명하며, 문장이 뛰어나고, 겉으로는 심침엄근(沈沈嚴謹)한 그는 실은 허부궤사(虛浮詭詐)한 인물이다. 그는 갈수록 대권을 차지할 수 있는 태자의 자리를 노리기 시작한다. 중국의 전통적인 적장자승계제도에 따르면, 차남은 황위를 승계할 수 없다. 그래서 태자 양용(楊勇)은 그의 공격목표가 된다. 태자의 자리를 차지하는 어려운 길에서 양광은 온갖 머리를 짜내어 양면삼도(兩面三刀)의 태자쟁취전을 벌인다.

 

당초, 장남 양용을 태자로 세울 때, 수문제 양견은 자주 양용으로 하여금 군정대사에 참가하게 했다. 양용이 제출하는 건의를 수문제는 거의 받아들였다. 양용은 성격이 관후하고, 솔직하며 감정에 충실했다. 가식을 부리거나 허위로 행동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사치와 여색을 좋아했다. 수문제와 독고황후는 모두 근검절약을 주창한 사람들이다. 특히 독고황후는 대신과 제왕들이 애첩을 두고 총애하는 것을 극도로 미워한 인물이다.

 

한번은 수문제 양견은 태자 양용이 화려한 갑옷을 입고 있는 것을 보고 마음 속으로 불쾌했다. 그래서 혼을 냈다: "자고이래로 제왕이 사치하면 오래갈 수 없다. 너는 태자로서, 반드시 절약을 우선해야만 종묘를 계승할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이 예전에 입던 옷과 갑옷을 각각 하나씩 남기고, 양용으로 하여금 집을 드나들 때마다 반복해서 보도록 했다. 이렇게 경고한 것이다. 양용은 호화사치를 좋아했을 뿐아니라, 여색에 빠져 있었다. 동궁내에 그가 좋아하는 여인들이 아주 많았다. 그는 특히 소훈(昭訓, 동궁내 후궁비빈의 직위중 하나) 운씨(雲氏)를 좋아했다. 그렇게 하여 독고황후가 정해준 태자비 원씨(元氏)를 멀리하게 된다. 원씨가 급사하자, 황후는 운씨가 해친 것이라고 의심한다. 그리하여 황후는 태자에 대하여 불만이 더욱 커진다.

 

이 모든 것은에 대하여 원래 음모를 잘 꾸미고, 양면삼도의 진왕 양광이 알게 되자, 그는 기회가 왔다고 느낀다. 그리하여 태자위를 탈취하는 발걸음을 더욱 서두른다. 부모의 환심을 얻기 이하여, 양광은 온갖 심사를 모두 가식적으로 꾸미는데 쓴다. 평소에 조정신하들을 접대하면서, 진왕 양광은 항상 극도로 예의를 다하며 자신을 낮추었다. 교만하고 발호하는 태자와는 비교가 될만했다. 더구나 "군계일학"이라는 점을 더욱 드러냈다. 한번은 사냥을 보고 있을 때, 돌연 큰 비가 내린다. 좌우에서 우의를 보내오자, 그는 당당하게 말한다: "병사들이 모두 비에 젖고 있는데, 나 혼자서 비옷을 입어서야 되겠느냐?" 듣는 사람들이 모두 감동한다. 매번 황궁에 들어갈 때면, 그는 가벼운 가마를 타고 간소하게 들어갔다. 아주 소박했다: 매번 궁중의 사신이 진왕부로 오면 그는 항상 소비와 함께 문밖까지 맞이하고 마중했다. 그리고 안색을 살펴서 좋은 음식을 차려주었다. 또한 두터운 선물도 보낸다. 매번 부모의 곁에서 모시지 못한다는 말을 할 때면 얼굴에 눈물이 가득하였다. 진왕과 소비로부터 이런 예우를 받은 궁중의 궁녀들과 환관들은 궁으로 돌아간 후 모두 진왕을 칭찬했다. 양광은 이로 인하여 인효(仁孝)하다는 명성을 얻는다.

 

부모가 근검절약을 숭상하고, 견마성색의 성격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는 양광이 온갖 머리를 짜낸다. 하루는 황제와 황후가 함께 진왕부로 왔다. 사전에 양광은 궁중의 심복으로부터 그 내용을 들었다. 사마광은 <자치통감.수기>에서 이렇게 양광이 어떻게 양면삼도를 놀았는지 쓰고 있다: "상(수문제)과 후(독고황후)가 그의 집으로 갔다. 광(양광)은 미리 알고, 여자들은 별실에 가두어 숨겨두었다. 오직 늙고 추한 여인들만 남겨두었다. 의복은 소박하게 입게 해서 좌우에서 일을 하도록 했다. 병풍과 장막도 색깔이 없는 것으로 바꾼다. 일부러 악기의 현을 끊어버린다. 그리고 먼지를 털지 않는다. 황상이 이를 보고 성색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여긴다....그리하여 그를 더욱 아끼게 된다."

 

양광은 황제가 황후의 말이라면 다 듣는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리하여 독고황후를 공략하는데 신경쓴다. 황후가 가장 미워하는 짓은 축첩을 하는 것이었다. 양광은 사람들의 앞에서는 오로지 소비와 함께 했다. 후원의 여인들이 자식을 낳으면 몰래 죽여버리곤 했다. 이렇게 처를 높이고 첩을 멀리했고, '여색을 좋아하지 않는' 행위를 보인다. 이는 독고황후의 마음에 쏙 들었다. 그리하여 양광이 현덕하다고 크게 칭찬한다. 황후의 태도는 황제와 대신들에게 미묘한 영향을 미친다.

 

양광이 양주총관으로 있을 때, 조정에 들어가서 자신의 업무를 보고한 후, 양주로 돌아가기 전에, 입궁하여 황후에게 사직인사들 드린다. "자식으로서 변방을 지키다보니 곧 이별해야 합니다. 모자의 정이 마음에 걸립니다. 이제 헤어지면 모실 수가 없으니, 다시 만날 날이 언제인지도 기약하지 못하겠습니다." 말을 마치고 바닥에 엎드려 눈물을 흘린다. 황후는 더욱 상심하여 같이 눈물을 흘렸다. 양광은 곧이어 은근히 태자를 모함한다: "저는 원래 우매하여, 형제의 정을 지키려고 하는데, 어찌된 일인지, 동궁께서는 나를 미워합니다. 태자는 저에게 분노하고 항상 해치려 합니다. 저는 자주 암살을 당할까 두려워하고, 독약을 넣었을까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밤낮으로 걱정을 하고 생명을 잃을까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황후는 분노하여 말한다. "예지벌(睨地伐. 양용의 아명)이 갈수록 더 참기 어렵게 하는구나. 나는 그에게 원씨여자를 취하게 해주었는데 그는 부부의 예로 대하지 않고, 아운(阿雲)만을 총애하고 견자(犬子)를 낳았다. 전에 원비는 아마도 해를 입어서 죽었을 것이다. 나는 추궁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무슨 이유로 너에게도 그렇게 악의를 가진단 말인가. 내가 살아있어도 이러할진대, 내가 죽고나면 설마 너희 형제를 죽여야 하겠단 말인가. 매번 동궁에 정비가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황제께서 돌아가신 후에 너희등 형제들이 아운의 앞에서 문후를 드릴텐데, 그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이냐." 양광은 다시 절을 하고 오열을 멈추지 않았다. 황후는 슬픔이 넘쳐서 어쩔 줄을 몰랐다. 이때부터 독고황후는 양용을 폐위시키고 양광을 태자로 올리려고 생각하게 된다.

 

독고황후와 이별한 후, 양광은 모후가 페립하려는 뜻을 굳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태자 양용을 대체하려는 발걸음을 더욱 빠르게 한다. 당시 월국공(越國公) 양소(楊素)가 수문제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양소는 그의 동생인 양약(楊約)을 아주 깊이 믿었다. 양광은 그래서 먼저 심복 우문술(宇文述)로 하여금 금은재보를 가지고 양약에게 가게 해서 사이를 가깝게 유지한다. 다시 양약으로 하여금 황후가 태자를 바꿀 뜻을 가졌다는 말을 양소에게 전하게 한다. 그리고 양소로 하여금 진왕 양광을 도와 태자의 지위를 차지하게 할 것을 권한다. 양소는 원래 능력도 없지 자리만 차지하고 있던 인물이다. 그는 그 말을 듣고는 이렇게 말한다: "우문술이 말한 것과 같다. 내가 하지 않을 이유가 있겠는가?" 며칠 후 양소는 궁내의 연회에 참가한다. 황후의 앞에서 양광을 칭찬하면서 황후의 뜻을 탐색한다. 양광이 효제공검하여 황제와 극히 닮았다고 말한다. 이를 통하여 황후의 뜻을 헤아리려 한 것이다. 독고황후는 그 말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일찌기 양광에게 했던 말을 다시 한번 더 한다. 양소는 황후의 뜻을 알았다. 그 자리에서 태자 양용에 대하여 좋지 않은 이야기를 몇 가지 더 한다. 독고황후는 그 후에 양소에게 많은 금은을 내린다. 그리고 그로 하여금 황제의 앞에서 태자폐립에 대하여 말하도록 한다.

 

태자 양용은 진왕양광의 음모를 알고 난 후, 걱정하면서도 두려웠다. 그러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리하여 사람을 시켜서 무고(巫蠱)를 하게 한다. 후원에 누추한 서인촌을 만들어 놓고, 자신은 자주 베옷을 입고 그곳에서 침식을 하며,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하였다. 황후는 이미 태자를 교체할 결심을 굳혔다. 그리하여 자주 동궁에 사람을 보내어 상황을 알아보게 한다. 자잘한 일들까지도 모두 과장되게 보고하여 죄상으로 되고 황제에게 보고된다. 그리하여 황제도 태자를 멀리하게 된다. 그리하여 양용의 행위는 스스로를 지키지 못했을 뿐아니라, 오히려 독고황후와 양소등에게 더욱 그를 공격할 구실을 주게 된다.

 

양광은 다시 심복을 통하여 동궁의 총신에게 뇌물을 바친다. 그리하여 태자의 동정을 모조리 양소에게 밀고하게 한다. 양소는 다시 황후와 양광을 도와서 각처에서 태자에 관한 자료를 수집한다. 그리고 태자를 모함한다. 그리하여 태자 양용은 안팎에서 모두 공격을 받게 되고, 그가 잘못한 일들이 매일 얘기되어 진다. 개황20년(600년) 십월, 수문제는 독고황후의 주장을 받아들여 태자를 "정에 빠져 첩을 총애하여 이치를 잃었고, 어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으며 소인을 가까이 했다"는 죄명을 들어 그의 태자위를 폐하고 서인으로 만든다. 1개월후에, 독고황후의 극력추천하에 진왕 양광이 태자의 자리를 차지한다. 교묘하게 '효제공검'한 것처럼 꾸몄지만, 실은 '마음이 독랄한' 양면삼도의 음모가 양광이 성공을 거둔다. 그러나 그후 대수왕조에게는 이것이 하나의 회복할 수 없는 재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