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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수양제)

수양제의 최후

by 중은우시 2013. 11. 27.

글: 김만루(金滿樓)

 

2013년 4월, 양주 한장구(邗江區) 서호진 사도촌 조장(曹莊)에서 수양제의 능침으로 추정되는 고묘를 발견했다. 반년여의 반복논증을 거쳐, 국가문물국과 중국고고학회의 권위있는 전문가는 11월 16일 소집된 감정결과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묘장의 형제, 묘내의 고급부장품, 이빨 및 인골유해의 감정에 근거하고, 문헌기록을 결합하여 현지 일치하여 이 묘장은 수양제묘라고 확인했다. 수양제 양광과 소후가 마지막에 매장된 곳이다. 그리하여, 수양제의 사후의 수수께끼는 결국 풀어졌다. 그렇다면, 옛날 불가일세의 '천고폭군'으로서 수양제는 어떻게 죽었고, 어떻게 양주에 안장되었는가?

 

수양제 양광은 수문제 양견의 차남이다. 수나라의 두번째이자 마지막 황제이다. 재위기간은 약 14년이다. <수서>의 기재에 따르면, 양광은 "미자의(美姿儀), 소민혜(少敏慧)"했다. 현재의 말로 하자면 잘 생겼고 총명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형제중 둘째여서 태자가 될 수 없었다. 나중에 그의 큰형이자 태자인 양광이 음란사치하여 폐출되었고, 위장에 능한 양광은 태자의 자리를 이어받는다. 누가 알았으랴 수문제가 죽자, 양광은 즉시 본성을 드러내서, 양용보다 더 하면 더 했지 덜하지 않을 줄은.

 

대업원년(즉 양광이 황제위에 등극한 해)을 예로 들면, 그해 정월, 수양제는 임읍(林邑,.지금의 베트남 중남부)에 기이한 보물이 많다는 말을 듣고, 수만의 군대를 파견하여 공격한다; 이월, 궁중에 금은보화, 기물, 비단, 차마등을 진열하여 군신들이 감상하게 한다; 삼월, 동도 낙양을 건설하도록 명령하고, 매월 노역꾼 백만이상을 보내어 궁전을 짓게 한다; 같은 달, 다시 백만의 민공을 소집하도록 명령하여 운하를 판다; 오월 낙양에 서원을 지어 호화사치의 극을 달린다; 팔월, 후비, 군신, 수행원, 호위병, 뱃사공 수십만명을 데리고 강도(江都, 지금의 양주)로 남순간다.

 

수양제는 가만히 있지 못하는 사람이다. 토목공사를 대거 벌이는 동시에, 그는 수시로 사방에 순유를 떠난다. 매번 행열의 규모는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할 정도이다. 백성들을 힘들게 하고 재물을 낭비하는 것이 손가락질을 받을 지경에 이른다. 예를 들어, 제1차 남순때 수양제가 탄 용주(龍舟)는 상하4층이고, 높이가 45척, 너비가 50척, 길이가 이백척에 이른다. 그 안에는 금은을 장식하여 인테리어가 호화찬란했다. 나머지 사람들 황후, 비빈, 대신들도 각각 배를 가졌고, 수행선이 천척을 넘는다. 전후로 백리나 이어졌다. 안전을 보장하기 위하여, 선대가 지나는 곳에는 대량의 기병을 파견하여 호송하게 했다. 지나가는 주,현은 도로를 닦아야 할 뿐아니라, 가장 맛있는 음식까지 바쳐야 했다. 다 못먹은 것은 그 자리에서 묻었다. 이렇게 하여 지나가는 곳에 위치한 주,현은 운이 나빴다. "군,현의 관료들은 앞다투어 먹을 것을 바쳤다. 풍성하게 바친 자는 승진하고, 약소하게 바친 자는 벌을 받았다." 수양제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지방관리들은 백성을 수탈하여 많은 민간의 재물은 짓밟히기게 된다.

 

순유, 건축, 운하공사의 사치로 백성들을 힘들게 하고 재물이 소비된 것은 부차적인 문제이다. 수양제의 최대문제는 고구려를 정벌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패하면 다시 싸우고, 다시 패하고 또 다시 싸웠다는 것이다. 고구려는 당시 동북아 최강의 이웃나라였고, 수문제때도 병력을 파병하여 토벌하였으나, 실패한 후 다시는 병력을 일으키지 않았다. 수양제는 달랐다. 그는 화풀이식으로 연속 3번이나 병력을 일으킨다. 그 결과 백성의 원성이 자자했고, 국력은 바닥을 드러냈다. 노역과 병역을 피하기 위하여, 많은 청장년들은 고의로 자신의 손발을 망가뜨리고, "복수(福手)", "복족(福足)"이라고 불렀다. 마지막에는 남자가 부족하니, 여자들까지 징용한다.

 

"아아정요동(我兒征遼東), 아사청산하(餓死靑山下), 금아만룡주(今我挽龍舟), 우곤수제도(又困隋堤道)"

 

끊임없는 징발과 세금, 병역과 요역부담은 수왕조를 붕괴로 몰아갔을 뿐아니라, 수양제 자신을 사지로 몰아넣었다. 수나라 말기에 이르러, "황하의 북쪽에는 천리가 가도록 연기(사람사는 흔적)가 없었다; 강회(장강과 회수)의 사이에는 풀만 무성하다." 백성들은 배고품과 추위를 견디지 못하여 죽을 때가 멀지 않았고, 약탈은 계속되었다." 백성들은 더 이상 참지 못할 상황이 되자, 각지에서 속속 반기를 들고 일어났다. 의군은 바로 곳곳에서 호응한다. 수양제가 중견지주역량이라고 여겼던 관농(섬서,감숙) 귀족집단도 속속 독립을 선언하여 수왕조는 비바람에 흔들리는 막다른 위기에 내몰린다.

 

대업13년(618년), 각지의 의군, 관농귀족군웅이 나란리 들고 일어난 상황하에서, 수양제가 지배하는 지역은 동도 낙양의 몇개 성밖에 나지 않는다. 이때, 여전히 강도를 순유하고 있던 수양제는 북으로 돌아가는 것이 어려워지자, 강도성에 쓸쓸히 갇혀 있게 된다. 망국망신(亡國亡身)의 공포 가운데, 수양제는 하루종일 술로 쓸쓸함을 달랬고, 그저 하루하루를 지낸다. 소황후는 그에게 기운을 내라고 권했지만, 그는 술취한 눈으로 말한다: "통쾌하게 술이나 마시자, 왜 스스로 골치거리를 만드는가. 어찌되었건 짐은 기껏해야 장성공이 그대도 기껏해야 심후가 되지 않겠는가?"

 

"장성공"은 남조의 망국지군 진후주가 수나라에 투항한 후에 받은 봉호이고, 심후는 진후주의 황후이다. 확실히 이때의 수양제는 자신에게 남은 날이 얼마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던 것같다. 언젠가, 수양제는 거울을 끌어당겨 스스로를 보며 말한다: "좋은 머리로다. 누가 벨 것인가?" 소황후는 어찌 그런 말을 하느냐고 놀라서 말하자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한다. "귀천과 고락은 서로 뒤바뀌는 것이다. 뭐 가슴아플 일이 있는가?"

 

이전에 이밀의 와강군이 <토수양제격문>을 써서, "남산의 대나무를 잘라서 죄를 적어도 다 적을 수 없고, 동해의 물결을 열어서 죄를 흘려보내도 다 흘려보낼 수 없다."고 한다. 수양제는 만인의 손가락질을 받고, 사람들이 이를 가는 독부민적(獨夫民賊)이 되었다. 각지의 의군으로 북으로 돌아가는 길이 막히고, 강도에 보관된 양식도 날로 줄어들었다. 관농에서 온 어가를 호위하는 친위병들은 모두 위기감을 느낀다. 수시로 도망병이 생겼다. 그러면 수양제는 더욱 주륙했고, 결국은 그해 삼월의 피비린내나는 정변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정변의 주모자는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수양제의 총신 우문술(宇文述)의 두 아들 우문지급(宇文智及)과 우문화급(宇文化及) 그리고 금위군의 두령인 사마덕감(司馬德勘)이다. 금위군의 지지를 얻어내기 위하여, 그들 몇몇은 유언비어를 퍼트린다. 수양제가 독주를 만들어 반란을 기도하는 친병을 모조리 죽이고, 남방병사를 중용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북으로 돌아갈 희망을 끊어버리겠다는 것이다. 금위군은 그 소문을 듣고 깜짝 놀란다. 그래서 서로 연락하여 반란을 일으키기로 결심한다. 정변 당일, 금위군은 안팎에허 호응하여, 수양제는 저항할 틈도 없이 계하지수(階下之囚)로 전락한다.

 

생포된 후, 수양제는 인상을 쓰고 묻는다: "나에게 무슨 죄가 있길래 오늘날 이런 지경에 처하게 되었는가!" 반장 마문거(馬文擧)는 그 말을 듣고 엄중하게 질책했다: "폐하는 종묘를 버리고, 사방으로 순유하기를 그치지 않앗으며, 대외적으로 빈번하게 정벌전쟁을 일으켰으며, 안으로는 사치하고 황음했습니다. 수천수만의 장정들이 칼날아래 목숨을 잃었고, 노약자와 부녀자들은 도탄에 빠졌습니다. 사방의 백성들이 살아갈 수가 없어, 도적들이 벌떼처럼 일어났는데도, 여전히 아부하는 자들을 중용했습니다. 문신은 그 잘못을 가리는데 급급했고, 충신은 간언하다가 죽었습니다. 어찌 감히 스스로 죄가 없다고 하십니까?"

 

수양제는 그 반박에 대꾸할 말이 없었다. 그저 탄식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 나는 천하 백성에게 미안하다. 그러나 너희들은 나를 따라 부귀영화를 누리지 않았느냐 무슨 자격으로 나에게 훈계하는 것이냐? 물어보자, 오늘의 일은 누가 우두머리인가?" 사마덕감이 코웃음을 치며 대답한다: "폐하는 불의한 짓을 많이 지절러, 하늘과 땅에 모두 원성이 자자합니다. 당신에게 반대하는 사람이 어찌 한 사람뿐이겠습니까. 지금 천하는 대란에 빠졌고, 폐하는 돌아갈 곳이 없으며, 신등도 살고자 하나 방법이 없습니다. 오로지 폐하의 수급으로 천하에 사죄해야 합니다."

 

긴장한 분위기하에서, 수양제의 어린 아들 13살된 조왕(趙王) 양고(楊杲)는 놀라서 대성통곡한다. 반란병은 시끄럽게 울자 한 칼에 죽여버린다. 선혈이 수양제의 몸에까지 뿌려진다. 이 광경을 보고, 수양제는 자신도 죽음을 면하기 어렵겠다고 생각한다. 할 수 없이 반란군장수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천자는 천자의 죽는 법이 있다. 칼끝이나 칼날을 써서는 안된다. 독수를 가져와라." 여러 장수들이 허락하지 않았다. 수양제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이 차고 있던 흰색 비단수건을 반란군장병에게 건네주고, 목이 졸려 죽는다. 그러나, 수양제의 순장품이 되고자 하지 않았던 우문화급도 좋은 최후를 맞이하지는 못했다. 부대가 산동으로 돌아갈 때, 하북의 의군 두건덕에게 궤멸당하고 우문화급과 두 아들은 모두 참수된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수양제가 피살된 후, "소후와 궁인들은 칠상판(漆床板)으로 작은 관을 만들어, 서원(西院) 유주당(流珠堂)내에 빈소(殯所)를 차린다. 그후, 소후는 어린 손자와 황실의 여러 여인을 데리고 우문화급을 따라 북상한다. 얼마후 다시 두건덕에게 포로로 잡힌다. 무슨 원인에서인지, 두건덕은 그녀를 죽이지 않는다. 그리고 의성공주가 그녀를 맞이하여 동돌궐로 간다. 정관4년(630년), 동돌궐은 당군에 멸망한다. 소후는 장안으로 되돌아와, 선종(善終)한다.

 

우문화급은 군대를 이끌고 북상한 후, 수왕조의 구신, 강도태수 진릉(陳棱)은 옛주인을 잊지 못하고, 무리를 모아서 소복을 입고, 의위(儀衛)를 준비하여, 수양제를 강도성 서쪽의 오공대(吳公臺) 아래에 묻어준다. 정관5년(631년), 수양제의 묘는 다시 한번 뇌당(雷塘)으로 이전한다. 당나라때 시인인 나은(羅隱)은 일찌기 이렇게 시를 지어 탄식했다: "입곽등교출곽선(入郭等橋出郭船), 홍루일일류년년(紅樓日日柳年年), 군왕인파평진업(君王忍把平陳業), 지박뇌당수무전(只博雷塘數畝田)".이 시는 <양제릉>이라고 한다. "뇌당수무전"은 바로 수양제묘를 가리킨다. 정관21년(647년), 소후는 장안에서 사망한다. 당태종은 황후의 예로 그녀를 수양제와 함께 양주에 합장해주고 시호를 민(愍)이라 한다.

 

민간의 전설에 따르면, 수양제는 나쁜 짓을 많이 하여, 그를 묻으면 그 곳에 번개가 쳤다고 한다. 그의 묘는 나중에 점점 황량해졌다. 송나라애후, 뇌당 일대는 홍수로 여러번 잠기게 된다. 겨우 한 무더기의 외딴 무덤만 남아서 겨우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청나라 가경12년(1807년), 일찌기 절강순무를 역임한 학자 완원(阮元)은 뇌당에서 수양제묘를 찾아낸다. 그후 친히 비석을 세우고 양주지부 이병(伊秉)으로 하여금 "수양제릉"이라는 네 글자를 쓰도록 부탁했다.

 

시대가 오래 지나서, 완원이 발견한 묘의 유적지가 반드시 수양제의 묘라고 볼 수는 없다. 이번에 사도촌 조장에서 발견된 고묘는 아마도 수양제와 소황후가 합장된 곳일 것이다. 고고전문가의 감정결과가 나온 후, 많은 사람들도 이 묘장의 규모가 이렇게 작고, 제왕릉이 갖추어야할 규모와 기세에 미치지 못하고, 더더구나 수양제가 큰 공사를 벌이기 좋아하는 성격과도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런 의문은 확실히 일정한 합리성이 있다. 다만 수양제의 급사 및 망국지군의 신분을 고려하면, 당왕조가 상징적으로 '왕묘'를 하나 만들어 주었다고 하더라도, 그에게 잘 대해준 것이라고 할 것이다.

 

남조 진후주가 죽을 때가 바로 수양제가 즉위한 해이다. 이 웅심발발한 새로운 군왕은 전조의 황제에게 "양(煬)"이라는 시호를 내린다. <시법(諡法)>에 따르면, '호내원례(好內遠禮)를 '양(煬)'이라 하고, 거례원중(去禮遠衆)을 '양'이라 하고, 역천학민(逆天虐民)을 '양'이라 한다" 누가 알았으랴, 14년후, 수양제의 사촌형이자, 당나라 개국황제인 당고조 이연은 그에게 역시 "양"이라는 시호를 내린다. 다른 사람을 비웃는 자는 결국 다른 사람에게 비웃음을 당한다. 이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