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고월(高月)
많은 사서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양광은 인수궁에서 선화부인을 집적대었다고. 그리고 그와 양소가 주고받은 사신이 양견의 수중에 잘못 전달되어, 양견이 진노하여 다시 양용을 태자로 세우려 하자, 양광이 시부간모(弑父奸母)하였다. 그러나 이는 모두 헛소리이다.
사직과 국가의 근본에 관련되는 일에 대하여 양견이 아무리 멍청하다고 하더라도, 죽기 전에 여자의 한마디 말을 듣고, 사건의 진상도 제대로 모르는 상황하에서, 다시 태자를 바꾸려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양견은 이미 대신들과 작별을 하였다. 양광이 쪽지를 써서 양소에게 후사를 안배하고, 조정을 안정시키는 것은 아주 정상적인 일이다. 양견이 진노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정사를 쓸 때는 모두 당시 사관의 기록에 따라 쓰게 된다. 설마 양광이 그렇게 멍청하단 말인가. 황제가 된 후에 자신이 시부간모한 궁중기록을 후세인들에게 남겨서 역사에 쓰게 했단 말인가? 하물며 그렇게 은밀한 일이 나중에 인수궁의 변으로 사람에 의하여 생생하게 그려진단 말인가. 궁녀의 표정, 선화부인의 표정까지 마치 직접 목격한 것처럼.
35세가 되었고, 이미 할아버지인 일국의 태자가 등극하기 전에, 이미 궁에 들어온지 16년이 된 나이든 여인을 집적댄단 말인가? 그 여인이 자신의 명의상의 모친임에도?
만일 양광이 정말 황음무도한 사람이라면 아마도 가능할 수 있겠다. 그러나 양광이 정말 그런 사람인가? 우리는 증거로 말해보자. 가장 좋은 증거난 황음무도의 부산품이다. 즉 낳은 자식이다. 이것이 가장 직접적이고 가장 유력한 증거일 것이다.
만일 양광이 황음무도했다면 왜 일생동안 단지 삼남이녀만을 두었을까? 그중 이남일녀는 그가 등극하기 전에 정처인 소비가 낳았다. 이를 보면 그들 부부는 사이가 좋았고, 양광은 한여인을 계속 사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마도 누군가 양광에게 이미 생육능력이 없어졌기 때문이라고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양광이 등극전에 막내딸을 낳고, 대업6년에 다시 조왕 양고(楊杲)를 낳았다. 이것은 또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리고 사서에는 이런 말이 있다. 양광이 독고황후에게 잘보이기 위하여, 부부간에 사랑하는 것처럼 가장하였다고. 그러나 양광은 개황4년에 장자 양소(楊昭)를 낳고, 개황5년에 차남 양간(楊暕)을 낳았고, 개황6년에 장녀를 낳았다. 이것은 모두 그녀의 정처인 소비가 낳았다. 이를 보면 부부간의 사랑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설사 그가 개황4년 15세때부터 이미 야심을 지니고, 형을 대체하려 생각했단 말인가?
그리고 그가 결혼하고나서 등극할 때까지 이십여년동안, 처인 소씨와의 사이에 낳은 이남일녀 이외에 그는 다른 자녀가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양광이 다른 여인과는 관계를 아예 맺지 않았다고 의심한다.
전태자 양용은 십여명의 아들이 있었고, 이세민은 14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러나, 양광은 단지 3명의 아들만 있고, 그중 2명은 정처 소씨 소생이다. 도대체 누가 호색한인지는 일목요연할 것이다.
부친 양견의 병이 위중해지자, 양광은 당연히 천하에서 가장 마음이 긴장되고, 가장 복잡한 사람일 것이다. 내심으로 야사 소설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노황제가 하루빨리 죽기를 바랐는지여부는 알 수 없지만, 최소한 황제가 백관들과 결별하고, 전제국이 모두 황제가 며칠을 못버틸 것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는 부친을 모살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이 며칠동안, 그는 몸과 마음을 다하여 가장 완벽하게 효자의 역할을 하려고 했다. 가능한한 노황제의 곁에서, 친히 물을 따르고 약을 바치고, 옷을 입고 허리띠도 풀지 않았다. 그 외에, 그가 해야할 일은 더욱 많았다.
한편으로 그는 노황제를 대리하여 국가대사를 처리해야 했다. 다른 한편으로 노황제의 의료 및 규모가 거대하고 복잡한 국장의 일도 준비, 계획, 결정해야 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는 또한 각파 대신의 내부투쟁상황 및 심리까지 분석하고 파악해야 했다. 특별히 각지방에서의 무장세력의 배치상황은 확실히 장악해야 했다. 이를 통하여 국상기간동안 무슨 사건이나 변란이 일어나는 것을 막아야 했다.
그리고, 그의 막내동생인 양량(楊諒)은 이미 병마를 모아서 손을 쓸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한 사람의 정력이 아무리 대단해도 이렇게 많은 일들을 다 처리하기는 어렵다. 매일 수면은 부족하고, 얼굴은 갈수록 초췌해졌으며 두 눈에는 핏발이 섰다. 앞에 했던 말과 뒤에 했던 말이 잘 들어맞지 않는 것은 정상적인 상황이다. 이때, 양광이 어찌 말도안되게 부친의 후궁을 집적거리거나 강간사건을 벌일 생각을 했겠는가?
사마광이 <자치통감>을 편찬할 때, 양광이 인수궁에서 무고하다는 것을 알았다. 다만 당나라를 정통으로 삼아서 그는 수나라관련사건을 뒤집을 수 없었다. 동시에 그는 후세황제들에게 교육이 될만한 반면의 전형을 수립한다.
그러나, 사마광은 아주 원만하고 노련한 사람이다. 그는 일부 사료를 인용하는 동시에, 당시의 진실한 상황도 분명히 말했다: "칠월, 갑진, 황상의 병이 심해졌다. 누워서 백관들과 작별했고, 손을 잡으며 얘기를 나누었다. 태자에게 명하여 장구태익을 사면했다. 정미, 대보전에서 붕어했다."
뒤에 사마광은 소설가의 필치로 묘사한다: "황상이 화를 내며, 침상을 치고 말했다: '짐승같은 놈에게 어찌 대사를 맡길 것인가. 독고황후가 나를 망쳤다.' 그리고 유줄, 원암을 불러서 말한다: '내 아들을 불러오라' 유술등이 태자를 부르자, 황상이 말한다: '용을 불러라.', 유술, 원암이 각을 나와 칙서를 썼다. 양소가 이를 듣고, 태자에게 아뢴다. 조서를 허위로 만들어 유술, 원암을 대리사 감옥에 가둔다. 동궁병사를 숙위에 보내어 문의 출입을 막고, 우문술, 곽연 절도사를 취한다. 우서자 장형에게 명하여 침전에 들어가 병시중을 들게 한다. 그리고 후궁을 모조리 별실로 보낸다: 갑자기 황상이 붕어했다...."
두 건의 완전히 서로 모순되는 사장을 함께 써놓았다. 기실 이것은 모두에게 진상을 알려주는 것이다. 모두 스스로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그러나 약간의 머리가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사마광의 용심양고(用心良苦)를 잘 알 것이다. 그리고 사마광이 이 부분을 쓸 때, 고의로 헛점을 드러냈다. 양견이 유술, 원암을 불렀다고 했는데, 실제 원암은 개황13년에 이미 죽었다.
다만 당시 인수궁에서 확실히 사건이 벌어졌다. 그것은 양광이 동궁시위를 소집하고, 유술을 체포한 것이며, 긴급히 경성의 방어부대를 움직이고, 전태자 양용을 사사(賜死)한다.
우리는 또 다른 한 가지 일을 연결시킬 수 있다. 그것은 바로 한왕 양량이다. 양광이 막 등극하자, 양량이 반란을 일으켜 황위를 탈취하려 하나 나중에 평정된다. 당시 여러 신하들은 양량을 죽이자고 요구한다. 그러나 양광은 형제를 죽이지 않고 그를 서인으로 만들고 종신연금시킨다. 이는 양광이 여전히 형제간의 정을 고려하여 친동생을 죽이고 싶어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양광은 이미 4년간 합법적인 태자로 있었다. 그는 등극하자마자 전태자를 독살할 필요가 없었다.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약점이 잡히는 것이다. 그는 양량에 대한 것과 마찬가지로 양용을 연금시켜 죽을 때까지 기다리거나, 등극하고 1년후에 다시 죽여도 된다. 이렇게 하면 대외적으로 병사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황제의 정상적인 방식이다.
다만 양광이 아직 등극하기 전에 양용을 독살하고 일족을 몰살시킨다. 이것은 완전히 궁중정변의 방식이다. 현무문의 변과 같다. 양광이 이렇게 한 것은, 그저 양용이 그의 황위에 심각한 위협을 주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는 양용이 이미 행동에 나섰다는 것을 말해준다.
동시에 이십년간 태자로 있었으므로, 여전히 거대한 영향력과 중신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는 형제가 등극한 후의 자신의 운명을 너무나 잘 알았을 것이고, 양용도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으려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대담하게 추측해본다. 양견이 죽기 전에 분명 미수로 그친 궁중정변이 있었을 것이다. 양용과 그의 지지자들은 마지막 순간에 판을 뒤집으려 했을 것이다.
정변은 분명히 경성내에서 발생했고, 인수궁에서도 일어났다. 그래서 양광이 긴급히 동궁시위를 불러서 인수궁에 들어오게 하고, 양약(楊約)이 몰래 경성으로 들어와서 경성의 병권을 탈취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양광의 황음무도와 이건성의 음란후궁은 똑같은 것으로 실로 믿을 바가 못된다. 당연히 이는 개인적인 의견이고 믿지 말지는 여러분들에게 맡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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