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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건륭제)

건륭제(乾隆帝)의 후계자선정: 아들을 보지 않고 모친을 보다

by 중은우시 2013. 4. 13.

글: 자일(子逸)

 

옹정은 비밀건저(秘密建儲)제의 창시자이다. 건륭은 제도의 첫번째 수익자이다. 그는 즉위한 이후, 여전히 이 제도에 따라 후계자를 지정했다. 건륭은 일생동안 3번 후계자를 선정했다. 이전 두 번은 모두 후계자의 요절로 실패했고, 마지막에 건륭은 황위를 황십오자 영염(永琰)(즉, 가경제)에게 넘겨주었다.

 

모두 알다시피, 가경제는 평범한 천자이다. 청왕조가 흥성에서 쇠락으로 바뀌는 전환점이다. 건륭은 일대명군으로 17명의 황자중에서 왜 자질이 평범한 영염을 후계자로 선택했을까? 그가 3번 후계자선정한 배후에는 도대체 무엇을 숨기고 있을가?

 

건륭은 즉위할 때 이미 3명의 황자가 있었다. 각각 7살의 황장자 영황, 5살의 황이자 영련, 그리고 태어난지 얼마안된 황삼자 영장. 그중 영련은 건륭의 황후 부찰씨(富察氏)의 소생이다. 다른 둘은 모두 비의 소생이다. 건륭이 막 즉위했을 때, 서둘러 후계자문제를 처리했다. 건륭원년 칠월, 그는 총리사무왕대신, 구경등을 소집하여, 친히 쓴 황태자의 이름을 밀봉한 후, 건청궁의 가장 높은 곳 "정대광명(正大光明)" 편액 뒤에 숨겼다.

 

건륭3년 십월, 황이자 영련이 감기로 요절한다. 사랑하는 아들의 요절은 건륭으로 하여금 비통에 빠지게 한다. 그는 사람을 시켜, "정대광명" 편액의 뒤에 있던 밀지를 꺼내게 하고, 상유를 발표한다. 그리고 정식으로 영련을 황태자에 봉한다. 상유에서, 건륭은 영련을 황태자로 한 두 가지 원인을 말했다: 첫째, 영련은 황후 소생이다. 둘째,영련은 옹정제가 좋아했다.

 

건륭11년 사월, 황후 부찰씨가 다시 황자를 낳는다. 일곱째이고, 건륭은 "영종(永琮)"이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이는 종사를 승계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그러나, 건륭12년 납월, 이 두 살밖에 안된 황자는 천연두로 사망한다.

 

황칠자의 요절은 건륭제에게 침중한 타격을 준다. 그는 위문하러 온 대신들에게 심중의 비밀을 털어놓는다: 황칠자는 황후 소생으로, 아주 총명했다. 단지 강보에 쌓여 있어서, 밀조를 쓰지 않았었다.

 

그래서, 대신들은 알았다. 황상이 영련 영종을 후계자로 세운 것은 그들이 총명하기 그지없어서가 아니다. 이것은 그저 핑계이다. 그 심층적인 원인은 건륭 본인이 중원문화의 적장자계승제를 숭상하기 때문이었다. 두 적자(嫡子)의 요절은 건륭이 속으로 걱정하게 만들었다. 이때의 그는 황후가 다시 아들을 하나 더 낳아주기를 얼마나 기다렸을까? 그리하여 그의 적장자계승의 꿈을 실현할 수 있도록. 그러나 이 꿈은 건륭13년 남순도중 부찰씨의 사망으로 깨어지고 만다.

 

많은 사람들은 생각한다: 건륭이 앞에 두 번 태자를 세운 것은 전왕조의 적장자계승제를 본뜬 것이다. 효현황후가 죽은 후, 건륭은 적장자계승제의 비현실성을 보고, 할 수 없이 책략을 바꾼다. 청나라계승제의 원칙에 따라 현명한 아들을 선택하여 세운다. 그러나 필자는 생각한다. 건륭이 후계자를 선택할 때, 그 본인이 현명한지 아닌지를 본 것이 아니라, 그의 모친을 보았다.

 

건륭이 영련, 영종을 태자로 삼은 것은, 그들의 모친 부찰씨를 좋아해서이다. 부찰씨는 건륭의 본부인이다. 건륭과 애정이 깊었다. 그녀는 성격이 근검절약하고, 금은주보를 차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저 융화로 악세사리를 삼았다. 그녀는 매년 건륭에게 바치는 하포(荷包)는 모두 녹미융으로 만든 것이다. 이를 통하여 근본을 영원히 잊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냈다. 그녀의 현숙함은 건륭의 존경을 받았다.

 

부찰씨의 사후, 건륭의 살아있는 아들은 영황, 영장, 영성, 영기, 영용, 영선이 있다. 그중 영황과 영장은 모두 성년이었다. 그리고 영황은 건륭이 좋아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모두 적모의 사망때 비통함을 그다지 표현하지 않아서, 건륭에 의하여 배제된다. 그리하여 그들은 황태자의 자리와 인연이 없어진다.

 

두 태자가 죽었을 떄 건륭은 오랜 기간동안 태자를 세우지 않았다. 건륭38년, 그는 영염이라는 이름을 밀조에 쓴다. 그리고 정대광명의 편액 뒤에 넣어둔다.

 

건륭은 일생동안 17명의 아들이 있고, 모두 건륭31년이전에 태어났다. 그중 5명은 요절했고, 두 사람은 양자로 갔다. 건륭38년, 아직 살아있던 황자는 영선, 영성, 영기, 영염, 영린이다. 이 다섯 명의 아들중 건륭은 왜 영염을 후계자로 선택했는가> 이것은 영염의 모친이 영황귀비(令皇貴妃) 위가씨(魏佳氏)(즉, 효의순황후)이다.

 

영황귀비 위가씨는 건륭의 세번째 황후이다. 그리고 그가 가장 사랑했던 비빈중 하나이다.

 

위가씨는 원래 정황기 포의이고, 건륭4년에 입궁했다. 위상재(魏常在)로 봉해진다. 나중에 계속 승진하여, 건륭19년에 위가씨는 영비(令妃)에 봉해진다. 그녀는 건륭21년에서 건륭31년까지의 10년간 선후로 4남2녀를 낳는다. 청나라때 자녀를 가장 많이 낳은 후비이다. 이를 보면 건륭이 그녀를 많이 총애했음을 알 수 있다. 건륭30년, 건륭의 두번재 황후 우라나라씨가 냉궁에 들어간다. 건륭은 즉시 귀비였던 위가씨를 영황귀비로 삼고, 그녀로 하여금 육궁을 통령하게 한다. 그녀는 유실무명의 사실상 황후가 된 것이다. 황귀비의 보좌에 위가씨는 10년간 있었다. 자질이 평범했던 영염이 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모친의 덕을 본 것일 것이다.

 

건륭이 나이가 가장 많은 영황을 세우지 않고, 적장자인 영련을 세운 것이나; 박학다식하고 다재다능한 영기를 세우지 아니하고, 아직 강보에 쌓인 영종을 세운 것이나, 이는 모두 그들의 모친 부찰씨 때문이었다; 건륭이 두번째 황후의 아들인 영기를 세우지 않고, 서화에 뛰어난 영성을 세우지도 않고, 자질이 평범한 영염을 세운 것도 그의 모친 위가씨를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건륭의 후계자선정원칙은 현명한 사람을 골라서 세우는 것이 아니었다. 그 모친이 현명한지 여부를 보고 세우는 것이었다. 바로 이런 원칙때문에, 일대명군인 건륭은 인생을 끝낼 때, 대청황조에 평범한 천자를 물려준 것이다. 그리하여 청나라는 쇠락의 길로 들어서고 국면을 통제하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