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문회독서주보
1793년, 영국의 매카트니사절단이 중국을 방문한다. 건륭제와 신하들은 이번원상서(理藩院尙書) 화신(和珅), 대학사 송균(松筠)부터 신임 양광총독(兩廣總督) 장린(長麟), 그리고 전체 여정을 함께 한 천진도대(天津道臺) 교인걸(喬人傑)과 통주협장(通州協將) 왕문유(王文維)까지 모두 매카트니 사절단에 대하여 아주 우호적이었다. 중국방문기간동안, 청나라관리들은 특별히 보살펴주었고, 많은 조치들은 현대의 외교관례에 부합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영국사신이 속옷이 필요한 것을 알고는 곁에 있던 청나라관리는 이를 알고는 구입하여 그에게 주었고, 돈을 받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은 황상의 "관이(款夷)" 경비에서 썼다. 이른 지엽적인 문제에서 청나라정부는 "이대사소(以大事小, 큰나라가 작은 나라를 보살펴주는 것)" 의 거고임하(居高臨下)의 허교(虛驕)를 부렸다. 건륭제의 유지에 따르면 :속히 영길리(英吉利) 공사(貢使)를 보내라 엄절(嚴切)한 가운데 회유(懷柔)를 품어라."
영국인과 관계가 가장 나쁜 사람은 "매파"인물로 전임 양광총독인 복강안(福康安)이었다. 그가 광주에 있을 때, 외국상인에 대하여 엄격히 제한하는 조치를 취한다. 1793년 사절단이 북경과 열하(熱河)에 올 때, 복강안은 강경하게 영국사신에게 삼궤구고(三跪九叩)의 알현대례를 올리게 하도록 고집했다. 그러나, 영국인이 남하하여 광주로 갈 때 사신에 접근한 북경관리는 그들에게 말해준다. 현임 절강순무(浙江巡撫) 장린은 정직하고 인자하며 이미 전임명령을 받았다. 광주로 가서 복강안과 교체되어 양광총독의 위치를 차지할 것이다. 그는 외국인들에게 비교적 우호적이니 반드시 잘 대접할 것이다.
과연, 사신들이 광주에 도착하자, 장린니 나와서 사신들에게 연회를 베풀어준다. 그들을 자신의 저택으로 불러서 접대하고, 그들에게 극공연을 보여준다. <대청제국성시인상>에는 영국인의 동판화가 하나 있는데, <관부연청(官府宴請)>이다. 고증에 따르면 순무 장린의 가정연회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장린은 일정을 앞당겨 부임하여 영국인을 따라 항주를 출발하여 산과 물을 건너 광주로 가서 부임한다. 총독은 광동북부의 도시 소주(韶州)에 가서야 사신들과 헤어진다. 왜 더 이상 남하하여 광주까지 환담하며 가지 않았을까? 사신들의 추측에 따르면, 이것은 광동인들에게 그가 너무 영국인들과 친근하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중국행의 후반단에 매카트니와 가장 관계가 밀접한 3명은 양광총독 장린, 교인걸과 왕문유의 세 관리이다. 중국전통정치의 사신접견원칙은 국가, 정부와 개인을 구분하지 않고, 담화를 할 때도 공사를 나누지 않는다. 관청이외의 사적인 접촉으로 관리들은 영국사신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여, 개별적으로 대화를 했다. 조정에서는 이를 나무라지도 않았다. 교, 왕 두 사람은 1793년 7월 31일 천진에서 매카트니를 영접한 때로부터 12월 31일 광주에서 영국인들과 함께 새해를 같이 맞으며 헤어진다. 5개월동안, 영국인들과 조석으로 함께 있었다. 장린은 11월 9일 항주에서 처음 보고, 광주에서 이별할 때까지 2개월간 같이 있었다. 그들과 사신들간의 관계는 아주 우호적이었다. 북경관료사회를 떠나서 중국방문의 하반기 일정에 중국인과 외국인은 의기투합한다. 부담없고 가벼운 분위기에 장린과 교인걸, 왕문유는 영국인들에게 많은 조정의 이야기들을 전해준다. 말해야하지 않아야할 것들까지 털어놓았다.
놀라운 일은 총독과 두 대인이 영국인에게 당금황실의 궁중비화까지 털어놓은 것이다: 건륭과 화신은 동성애의 연인사이이다. 그들에 따르면, 건륭은 일생동안 3번에 걸쳐 사랑에 빠진다. 제1차는 부친인 옹정제의 비인 마가(馬佳)이다. 이것은 난륜이다. 황후가 몰래 비를 만나서, 백릉(白綾, 흰비단)을 내려 자진하게 했다. 제2차는 "회족향비(回族香妃)"이다. 건륭은 자신이 포로로 잡은 서역여자가 불굴, 견정, 그리고 아름다움에 매료된다. 그래서 그녀를 궁중으로 데려온다. 그러나 태후가 이를 막았고 향비도 사사된다. 마지막으로 건륭이 60살때 화신을 사랑하게 된다. 건륭이 보기에, 그는 바로 마가가 환생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건륭의 애인이 된다. 그는 천조의 법도에 위반되게 인민을 위하여 아무런 공적을 세운 바도 없는 애인을 최고위직에 올린다. 2년후에 사망하는 모후는 이 일에 간섭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는 여자들의 문제가 아니라, 남자들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영국인은 이런 비화에 크게 놀라지 않았다. 유럽궁중에도 이런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황제도 사람이다." 이것은 오히려 정상이다. 다만, 그들은 대신들에게 황제의 비화를 얘기한다는 자체는 아주 의외로 여겼다. "매카트니는 충실하게 교인걸, 왕문유 두 사람의 말을 기록했다. 왜냐하면 그는 두 사람이 상황을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황제의 실제연령은 다시 그로 하여금 교인걸, 왕문유 두 사람이 황제의 풍류염사에서의 능력에 대하여 과장하고 있다고 여기게 만들었다. 중국의 군신관계는 지나치게 의식에 구애되어, 그들을 따라다니는 두 중국관리가 자신의 군왕에 대하여 이런 평가밖에 할 수 없다는 점을 기괴하게 여긴다. 그저 화신의 "용모가 비범하고...황제가 유일하게 총애하는 사람"이라고 우회적으로 얘기했지만, 직접적으로 얘기하지는 않았다. 각종 원인으로, <매카트니일기>는 공개출판되지 못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이 이야기를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최근 들어서야 프랑스 역사학자인 Alain Peyrefitte(1925-1999)가 발굴해냈다.
이 비화들을 건륭시대 북경에서는 많은 사람이 알고 있었다. 교인걸, 왕문유가 항주에서 그들에게 얘기해준 외에, 매카트니가 막 북경에 도착했을 때, 건륭제와 가깝게 지내는 프랑서 신부 Nicolas-Joseph Raux, 1754-1801, 중국명 羅廣祥)도 영국인에게 그 이야기를 해준 바 있다. 왜 교인걸, 왕문유 두 사람은 항주에서 영국인들에게 황제의 비화를 확인해준 것일까? 한가지 해석은 장린과 그들은 모두 화신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장린은 몽골기인(旗人)인 귀족이다. 섬감총독(陝甘總督)으로 있을 때 정치적 업적과 전공이 있었다. 화신이 비천한 출신으로 황제의 총애를 받아 조정에서 전횡하는 것이 못마땅했다. 1792년, 억울한 사건에서 변호를 해주다가 화신의 배척을 받아 계속 순무의 지위에서 머물러 있었다. 이번에 양광총독이 되는 것은 다시 재기하는 기회이다. 조정에 대한 불만, 화신에 대한 원한은 교인걸, 왕문유 두 사람에게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들 3명은 항주에서 탐관 화신에 대한 의분을 발설한 것이다. 돌아가면 다시는 볼 일이 없는 외국인에게 불만을 털어놓은 것이다. 확실히 이해되는 측면이 있다.
영국사신의 회고록을 보면, 장린은 비교적 정직한 관리이다. 그는 영국정부와 협력하여 광주의 무역질서를 확립하기를 바랬다. 그는 영국인들이 중국어를 배우도록 허락하겠다고 말했다. 영국이 건륭이 퇴위한 후 신황제의 등극대전에 참석해주기를 요청했다. 광주에서 중국-영국무역에 편리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한다. 장린은 광주에서 화신이 규정한 것과는 "약간 다른" 신정책을 펼친다. 그러나 아쉽게도 장린이 광주에서 총독으로 있은 기간은 1년밖에 안된다. 아마도 그렇지 않았다면, 중국-영국간의 이러한 밀접한 개인관계는 서로 다른 미래를 불러왔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편전쟁도 아마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여기에서 하나의 역사편찬학상의 계시가 있다. 외국인의 여행기는 중국정사의 부족함을 메워줄 수 있다는 것이다. <청사고>에는 당연히 건륭과 화신의 동성애를 언급하지 않았다. 진강기 <낭잠기문>, 설복성 <용암필기>에는 화신의 각종 악행을 적었지만, 이 관계는 분명히 적지 않았다. 민국후의 청궁야사에서 가끔 노출되기도 했지만, 역사학자들은 이를 채택하지 않았다. 그외에, 진삼의 <품화보감>에서 우리는 건륭시기에 북경성내에 동성애가 유행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위 "남풍(男風)"이다. 이것이 윗사람을 아랫사람이 본받은 것인지 아니면 아랫사람들의 행동을 윗사람이 따라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황제도 동성애를 한다. 현재 당시 조정의 대신이 외국인에게 말한 것이니, 우리는 엄숙하게 이 사실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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