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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건륭제)

건륭제의 모친은 누구인가?

by 중은우시 2013. 5. 5.

작자: 미상

 

건륭의 모친은 누구인가? 청나라의 황제 12명중에서 건륭제의 모친만 문제가 있다. 다른 황제들은 없다. 다른 황제들의 모친이 누구인지는 아주 명확하다. 건륭의 모친에 대하여만 의문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몇 가지 견해가 있는가? 주로 4가지이다.

 

첫째 전설은 이렇다. 즉 건륭은 절강 해녕 진각로(陳閣老)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이 전설은 아주 오래되었다. 청나라중기부터 있었다. 이 진가는 청나라때 재상 3명을 배출한다. 순치제때 재상 진지린(陳之遴)이 있고, 강희제때도 재상을 배출하고, 옹정제때도 재상을 배출했다. 건륭의 부친이 해녕의 이 진가라는 것, 즉 진세관(陳世倌)이라는 전설은 이렇다. 김용(金庸) 선생은 절강 해녕 사람이다. 그가 쓴 소설 <서검은구록>에는 이 전설을 소설로 끌어들이고, 살을 덧붙였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중국내에서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이 되었다. 다만, 맹삼(孟森) 선생은 고증한 글을 썼는데, <해녕진가>라는 것이다. 그는 건륭의 남순을 고증하였다. 건륭의 남순은 친부모를 만나러 간 것이라는 설도 있으니까. 그는 건륭의 제1차 남순때 강남으로 갈 때 해녕에 들르지 않았고, 제2차 남순때도 해녕에 들르지 않았으며, 제3차 남순때 해녕에서 지낸다. 이 때 진세관은 이미 죽었다. 그래서 건륭이 강남으로 간 것이 그의 친부모를 만나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은 성립될 수 없다.

 

건륭이 강남으로 갔을 때, 해녕에 머물며 진가의 한 집에 머문다. 이 집은 "우원(隅園)"이라는 이름을 가졌다. 성의 한쪽 귀퉁이에 있기 때문이다. 건륭이 그 곳에 머물 때, 이름을 바꾸는데, "안란원(安瀾園)"이라고 고쳤다. 건륭이 그 곳에 간 것은 주로 절강의 해당공정(海塘工程)을 위한 것이었으므로, "안란원"이라 한 것이다. 그것은 제3차, 제4차 남순 때도 이 곳에 머물렀는데, 그것은 절강 해당공정때문임을 알 수 있다. 그의 친부모를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전설은 갈수록 신비스러워졌다. 진가와 옹정은 같은 해, 같은 달, 같은 날 태어난 자식이 있었는데, 진가는 사내아이를, 옹정은 딸을 낳았다는 것이다. 옹정은 그 사내아이를 보자고 했고, 보고나서는 바꿔쳤다. 진가에서는 사내아이를 보내고 딸을 받은 것이다. 이렇게 바뀐 사내아이가 바로 건륭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전설은 고증을 해보면 근거가 없고, 그저 순수한 날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첫번재 전설이다.

 

둘째 전설은 이렇다. 청나라말기에 왕개운(王闓運)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저명한 학자, 작가이며 영향력이 컸다. 그는 책에서 한가지 이야기를 했다. 건륭의 모친의 친정은 승덕(承德)에 있는데, 집안이 가난하여 일꾼을 쓸 수 없었다. 7,8세때 집안사람들을 따라  시장에 가서 작은 식당을 열어 술을 팔고, 음식을 팔았다. 그녀는 아주 친절했으며 경영은 잘 되었다. 그래서장사는 괜찮은 편이었다. 13,4세가 되었을 대, 그녀는 북경으로 갔고, 수녀(秀女) 선발에 참가하게 되는데, 그녀는 선발되어 옹정제의 왕부로 보내어진다. 그녀는 옹정왕부에서 잡일을 했다. 마침 옹정이 병들었는데, 병이 아주 심했다. 그녀는 밤낮으로 시중을 들었고, 몇달 후 옹정의 병세가 호전된다. 병이 호전된 후 이 여자와 같이 지냈으며, 나중에 임신을 한다. 그리고 아이를 낳았다. 이 아이가 바로 건륭이다. 이것은 왕개운이 책에서 한 이야기이다. 다른 사람이 이어서 말한다. 장채전(張采田)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는 장이전(張爾田)이라고도 부른다. 그는 <청열조후비전고>라는 책을 썼다. 그는 영화(英和)라는 사람을 이끌어낸다. 영화는 <은복당필기>라는 책을 쓴다. 나중에 청왕조의 유로인 김량(金梁)등은 책과 글을 쓴다. 이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청나라궁정의 법도에 따라 수녀를 선발하는 것은 아주 엄격하다. 승덕에서 여자아이가 수녀선발에 끼어들어간다는 것은 잇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학자들은 날조로 본다. 그럴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다.

 

셋째 견해를 이야기해보자. 모학정(冒鶴亭)은 열하도통의 막료를 지낸 바 있는데, 그는 여기서 한 가지 전설을 듣는다. 그것은 바로 건륭의 모친이 열하행궁의 한 궁녀라는 것이다. 이가씨(李佳氏)라는 궁녀이다. 대만에 장련(莊練)이라는 학자가 있고 또 한명의 유명한 인물 즉 고양(高陽)이 있다. 그들은 모두 이 설에 찬동한다. 그리고 고증을 거쳐 말한다. 이 이가씨의 이름은 이금계(李金桂)라고 한다. 이름도 고증해 냈으니 그들은 이 설을 믿는다는 것이다.

 

넷째 견해는 민국시대에 국무총리를 지낸 웅희령(熊希齡)이 있는데, 그가 궁중에서 일했던 늙은 사람에게 들었다는 것이다. 궁정에서 일한 적이 있는 사람으로부터 말을 듣고, 이 일을 다시 호적(胡適)에게 말한다. 호적은 이 이야기를 책에 인용한다. 이야기는 어떤가? 강남에 한 사람이 있는데, 이 집에는 여자아이가 있었다. 승덕에 갔는데, 이 여자아이의 이름은 "사대저(傻大姐)"라고 한다는 것이다. 나중에 이 여자아이가 아들을 하나 낳는데, 이 사내아이가 바로 건륭이라는 것이다. 호적은 그것을 <호직지일기>에 썼다.

 

그래서 건륭의 모친에 대하여는 4가지 전설이 있다. 첫째는 해녕 진가의 아들이라는 것이고, 둘째는 열하, 즉 승덕성의 한 여인이 궁으로 들어갔고, 왕부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승덕의 여자아이가 수녀에 참가하여 옹왕부로 가서 건륭을 낳았다는 것이다. 셋째는 바로 승덕의 이가씨라는 여자가 건륭을 낳았다는 것이다. 넷째는 이 여자가 남방인이고 북방인이 아니며, 북방으로 갔고, 승덕으로 갔고, 나중에 건륭을 낳았다. 즉 건륭의 생모에 관해서는 최소한 4가지 전설이 있다. 이 네가지는 모두 전설이다. 모두 역사적 진실이 아니다. 어떤 TV드라마, 소설은 이 일에 살을 붙여서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만주족에 대한 불만을 이것을 통하여 배설했다. 그래서 위에서 말한 4가지는 모두 전설이다.

 

그렇다면 건륭의 생모에 대하여는 의문이 없는 것인가? 그래도 여전히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우리는 연구할 가치가 있다. 하나는 문헌기재이고, 하나는 자료기재이다.

 

먼저 문헌기록을 보자. 청나라에 소석(蕭奭)이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영헌록>이라는 책을 썼다. 소석이 <영헌록>을 쓸 때, 최후의 시간은 건륭17년이었다. 즉, 건륭초기에 이 책을 다 쓴 것이다. 이 책에서는 옹정원년의 한 가지 사건을 써놓았다. "옹정원년 나라씨(那羅氏)를 황후로 책봉한다. 그리고 측푸진(側福晋) 연씨(年氏)는 귀비(貴妃)가 된다. 측푸진 이씨(李氏)는 제비(齊妃)가 되고, 측푸진 전씨(錢氏)를 희비(熹妃)가 되었다" 최근 어떤 학자는 청나라궁정의 옹정 자료에서 자료를 하나 찾아낸다. 즉 옹정원년 이월 십사일의 자료이다. 이 자료는 옹정이 측푸진 전씨를 희비로 삼았다고 한다. 옹정자료의 이 희비와 소석의 <영헌록>에 나오는 그 희비는 당연히 같은 사람일 것이다.

 

옹정이 사망한 후, 건륭은 <옹정실록>을 쓴다. <옹정실록>에는 이 일을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 측푸진 연씨를 귀비로 하였다는 데는 아무런 이론이 없다. 측푸진 이가씨를 제비로 하였다는데  대하여도 큰 차이가 없다. 세번째는 이견이 크다. 측푸진 뉴후루씨(鈕祜魯氏)를 희비로 책봉했다고 하였다. 이 희비는 소석의 <영헌록>에서는 성이 전씨이고, 옹정원년 이월 십사일에 책봉할 때도 아직 성이 전씨인데, <옹정실록>에서는 희비의 성이 전씨가 아니라, 뉴후루씨로 바뀌었다. 현재 정사의 기록에 건륭의 모친은 뉴후루씨이지 전씨가 아니다. 정사는 이렇게 기록했다: 전 사품전의관(四品典儀官) 능주(凌柱)의 딸이라고. 즉, 건륭의 모친은 사품전의관 능주의 딸이다. 그렇다면 능주의 성은 무엇인가? 뉴후루씨이다. 여기에도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옹정원년 이월 십사일 책봉할 때는 아직 옹정이 비밀입저를 하기 전이다. 팔월 옹정이 비로소 비밀입저를 하고 건륭이 황태자가 된다. 건륭이 <옹정실록>을 편찬할 때는 이미 황제가 되었다. 그렇다면 그의 모친의 성이 무엇인가? 전씨인가, 뉴후루씨인가? 전씨라면 아마도 한족일 것이다. 뉴후루씨라면 만주족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희비는 건륭의 생모이다. 이 희비는 전씨인가 뉴후루씨인가. 그것은 역사의 수수께끼이다.

 

이 수수께끼는 아주 중요하다. 모두 알고 있듯이, 청말민초에 반만(反滿) 풍조가 있었다. 건륭의 모친이 한족인가 아니면 만주족인가. 당시에는 민족문제가 되었고, 정치문제가 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이 것을 확대하여 떠들었고, 각 분야의 주목을 받았으며 그래서 이렇게 많은 전설과 야사가 나타난 것이다. 오늘날 정사의 기록은 바로 <옹정실록>의 기록에 따른 것으로, 옹정의 생모는 사품전의관 능주의 딸이며 성은 뉴후루씨이다. 이것은 정사의 기록이다. 그러나 소석의 <영헌록>의 기록과 옹정원년의 그 자료의 기록과는 성씨에 차이가 있으며, 연구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바로 건륭생모의 수수께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