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황보기(黃普基)
모두 알고 있다시피 "꺼우리빵즈"는 중국인들이 조선인(한국인)을 비교적 멸시하여 부르는 칭호이다. 그러나 이 칭호의 유래에 대하여는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다. 현재 유행하고 있는 몇 가지 견해를 보더라도 생각이 서로 다름을 알 수 있다. 일부 해석은 확실히 문제가 있다. 예를 들어, 이런 견해도 있다. "꺼우리빵즈"는 조선인들이 옥수수를 심는 것과 관련있다. 조선인들은 옥수수를 잘 먹으므로, 자주 가을 겨울이 되면 수확한 옥수수를 방문앞에 가득 걸어둔다. 옥수수를 중국북방에서는 "빵즈(棒子)"라고 부른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조선인을 경멸하여 "꺼우리빵즈"라고 하게 된 것이라는 것이다. 이런 견해는 그럴 듯해 보이지만, 기실 말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조선인들을 기본적으로 옥수수를 많이 심지 않는다. 조선반도의 남부에는 사람들이 벼를 심는다; 조선반도 북부에는 사람들이 보리와 벼를 심는다. 옥수수가 한반도에 전래된 역사는 아주 짧다. 심는 것도 그다지 널리 퍼지지 않았다. 설사 중국경내로 이주해온 조선인이라 하더라도, 옥수수를 심는 경우는 많지 않다. "옥수수를 집문앞에 가득 걸어둔다"는 풍경이 조선인가정에서 나타나기는 쉽지 않다. 그리고 또 이런 견해도 있다. "만주국"때, 일본인들이 중국동북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기 위하여, 한반도에서 대량의 조선인을 이주시켰다. 이들 조선인들은 일본의 세력을 등에 없고, 자주 중국인들을 괴롭혔다. 걸핏하면 조선부녀들이 빨래방망이를 들고 중국인을 구타했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조선인을 "꺼우리빵즈"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런 주장도 성립될 수 없다. 왜냐하면 많은 자료를 보면, "꺼우리빵즈"라는 칭호는 청나라때 이미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 단어의 형성이 '만주국'까지 늦어질 수가 없다.
문헌을 읽어보다가 필자는 청나라때 사람인 왕일원(王一元)의 <요좌견문록(遼左見聞錄)>을 보게 되었다 거기에는 이런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조선 공사(貢使)의 종자(從者) 이외에, 오가면서 일을 하는 자들이 있었는데, 이들을 "빵즈(棒子)"라고 불렀다. 그 나라(조선)에서 부녀가 음행을 저지르면 관기로 만드는데, 관기가 자식을 낳으면 "방자"라고 했고, 일반 백성들이 멸시했다. 머리는 봉두난발이며 망건을 할 수 없었고; 만리를 걸어가고 말을 탈 수 없었으며; 풀을 깔고 땅바닥에 누워서 잠을 자고, 구들이 있는 곳에서 잠을 잘 수 없었다. 그 나라안에서 천한 일을 하는 자들이다.
왕일원 선생은 청나라 강희제때 사람이다. 그의 "빵즈"에 대한 기술은 필자가 본 것중 가장 시대가 앞선 자료이다. 그래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왕일원의 글에 따르면, "빵즈(방자)"는 조선국의 천민이다. 그들은 출신이 천하고, 보통 관아에서 잡일을 했다. 매년 북경으로 오는 조선 사신일행에는 상당한 수량의 "빵즈(방자)"들이 일을 했다. <요좌견문록>의 이 기록에 대하여, 나계조(羅繼祖) 선생이 가장 먼저 주목하였고, 그는 왕일원이 언급한 "빵즈(방자)"가 나중에 유행한 "꺼우리빵즈"와 관련이 있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나계조 선생의 추측이 성립된다고 할 수 있을까? 필자의 생각으로 나게조 선생의 추측을 검증하려면 먼저, 왕일원이 쓴 조선 "빵즈"가 도대체 어떤 류의 사람인지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런 류의 사람이 중국인의 마음 속에 또 어떤 이미지로 비추어졌는지도 살펴보아야 한다. 필자는 최근 들어 조선왕조시대의 "연행록" 문헌을 정리하고 연구해왔다. 조선사절단의 인원구성 및 그들이 중국경내에서 한 활동에 대하여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다. 그래서, "연행록" 사료를 중심으로 왕일원의 주장을 검증해보기로 한다. 만일 <요좌견문록>에 기훌한 내용을 확실히 알게 되면, 우리는 "꺼우리빵즈"라는 단어의 유래에 대하여도 분명한 인식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왕일원의 글에 따르면, "빵즈(방자)"는 조선공사단의 일꾼이다. 우리는 명청시대 조선공사단의 인원구성을 보기로 하자.
여기서 필자는 <노가재연행일기>를 주요토론자료로 하고자 한다. <노가재연행일기>의 작자는 김창업(金昌業)이다. 그는 일기에서 강희51년(1712년) 자신이 조선조공사절단을 따라 중국을 왕복한 견문을 적었다. 왕일원이 쓴 <요좌견문록>은 개략 강희 50년을 전후한 시기이므로, <노가재연행일기>에 기록된 조선사절단의 상황을 <요좌견문록>과 대조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노가재연행일기>는 강희51년 조선공사단의 구성원명단을 완전하게 기록하고 있다. 일부 내용을 발췌하면 아래와 같다:
정사(正使): 김창업.......
타각(打角): 진사 김창업. 역마부: 상운역자 김업엽, 복쇄마(卜刷馬) 1필......노자(奴子): 무득(無得). 건량고직(乾糧庫直): 덕세(德世): 억손(億孫), 임국충(任國忠) 구인의 가명. 상기마 1필, 마부: 수성역자 배영만. 중기마 3필, 마부: 성환역자 김수현, 송라역자 정잡노미(鄭自卩老味), 금정역자 이학룡 마두: 선천관노 준원. 인로: 서흥관노 일상, 가산관노 재봉. 교자부촉: 용천관노 득량, 선천관노 홍세, 가산관노 이수, 정중. 일산봉지: 서흥관노 만춘. 좌견마: 용천관노 득방. 농마두: 서흥관노 사원. 주자(廚子): 곽산관노 준석
군관: 절충 최덕중. 건량역마부: 수성역자 사학. 복쇄마 1필, 구인 1명. 노자 태산. 교자부촉: 선천관노 홍건잡달(洪建者卩達), 정주관노 일만, 선천관노 무적금.
역관: 가의 박동화. 역마부: 어천역자 강해창, 노자 선일. 마두: 선천노자 시영. 복쇄마 1필, 구인 1명
절충: 이유량. 역마부: 제원역자 김기종. 노자 중남. 복쇄마 1필, 구인 1명.
어의: 전정 김덕삼. 역마부: 대동역자 망선. 복쇄마 1필, 구인 1명. 노자 선흥. 표자문마두: 순안관노 엇복
명청시대 조선공사단은 기본적으로 3개 계층으로 구성되었다. 즉 양반사대부, 중인, 복역(僕役). 조선왕국은 신분등급이 아주 엄격한 국가였다. 관청의 서로 다른 직무는 신분지위가 서로 다른 사람이 맡았다. 구체적으로 중국으로 오는 조선공사단을 보면 그 구성원의 등급구분은 명확하다. 강희51년의 조선공사단중 정사, 군관, 절충, 타각은 양반사대부계층이다. 역관, 어의는 중인계층이다. 나머지 마부, 인로, 교자꾼등의 잡역부는 모두 노비계층이다. 노비도 둘고 나뉜다. 관노와 사노. 사절단의 노비는 대부분 관노이다. 그들은 중앙관청, 지방관아 혹은 각지방의 역참에 소속되어 있다.
사절단내에서 서로 다른 계층의 사람들은 서로 다른 대우를 누린다. 예를 들어, 출행에서, 각 계층의 사람들은 차이가 있다. 양반사대부는 가마를 타거나 말을 탄다. 그래서 수행인원으로 마부와 교자꾼이 따르는 것이다. 중인은 말을 탈 수 있다. 그래서 수행인원으로 마부가 있다. 노비는 말을 탈 수 없다. 그저 걸어가야 한다. 조선사절단은 노비가 말을 타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들이 걷고 다니는데는 엄격한 규정이 있었다. 그리하여 중국사람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김창업은 자신과 중국인 이가(二哥)의 대화를 기록해 놓았다:
이가가 여전히 나에게 말하기를: 조선인은 모두 노비를 가엽게 여기지 않는가? 나는 답했다: 왜 그렇게 말하는가? 이가가 말한다: 이곳에서는 음식의 달고 씀. 의복의 아름다움과 추함에 노비와 주인의 구분이 없다. 그래서 주인이 말을 타고, 노비도 말을 탄다. 그런데 조선은 어찌 이렇게 하는가? 나는 말했다: 조선의 노비는 이곳과 차이가 있다. 기자(箕子)가 법을 정하여, 다른 사람의 재물을 훔친자는 대대로 노비가 되도록 했다. 그 조상이 모두 다른 사람의 재물을 훔친 자이다. 어찌 그 주인과 같겠는가. 이가는 그럴 수 있다고 하였다.
이가는 조선사절단이 "노비를 가엽게 여기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김창업은 "기자의 법"을 가지고 대답한다. 김창업의 주장은 납득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기자가 생활하던 시대는 조선왕조와 이미 수천년이나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수천년전이 기자가 만든 법을 조선왕조시대에도 사람들마다 구속받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두 사람의 대화에서 우리는 알 수 있다. 조선왕국의 신분등급은 청나라보다 엄격했다. 청나라는 "주인도 말을 타고, 노비도 말을 탄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다.
조선왕국의 신분등급제도가 엄격하였으므로, 사절단이 중국으로 가는데, 각 계층의 대우는 완전히 달랐던 것이다. 사절단이 유숙하고 머물 때, 마찬가지로 이런 신분차별은 나타난다. 김창업은 사절단이 요동 봉성의 야외에서 숙영하는 장면을 기록했다:
(십일월 이십팔일) 봉성에서 숙박하다. 저녁에 천막에서 나와보니, 역졸들이 불을 둘러싸고, 혹은 앉아서 자고, 혹은 발을 불로 향하여 눕고, 서로 베고 있었다
야외에서 숙영할 때도 양반사대부와 중인은 천막안에서 자고, 노비들은 야외에서 그냥 자야 했다. 이때는 요동이 한겨울이다. 노비들이 야숙할 때 얼마나 힘들지는 충분히 알 수 있다. 사절단이 북경의 관사에 들어갈 때도 조선노비들의 숙박조건은 여전히 개선되지 않는다.
나가서 노비들이 들어간 곳을 보니, 3칸의 방에 남북으로 구들(炕)이 있었다. 김중화, 유봉산, 김덕삼은 북쪽구들에 들어가고, 창엽, 홍만운, 최수창은 남쪽구들에 들어갔다....구들은 적고 사람은 많다. 그래서 답답했다. 만상군관, 약방서원, 승문원서원, 상인들은 모두 방이 없어서 후원에 대나무집을 만들어 들어갔다. 벽돌을 사서 구들을 만들었다. 역졸, 쇄마, 구인은 모두 담벼락에 모여서, 부서진 벽돌로 바람을 막았다. 돈이 있는 자는 대나무집을 만들었다.
양반사대부와 중인들은 관사의 정방, 상방에 들어가고 각각 남북 구들로 나누어 거주했다. 그러나 노비들은 방안에 들어오지 못하고, 정원에서 담장에 기대어 깨진 벽돌로 바람을 막고 지냈다. 계속 노숙생활을 한 것이다.
노비들의 미천한 신분은 출행, 주숙과 같은 구체적인 데서 나타날 뿐아니라, 그들의 이름에서도 나타난다. 예를 들어, 강희 51년의 조선공사단의 구성원 명단에서 노비들은 기본적으로 성이 없다. 단지 이름만 가진다. 그러나 어떤 노비의 이름에서 보면 그들은 한자이름조차 없다. 예를 들어, 표자문마두 '엇복(旕福)'의 경우 '엇'은 진정한 의미의 한자가 아니다. 이 글자는 기실 한국어 발음을 그대로 표시한 것이다. 또한 건량고직 "억손"은 명단에서 특별이 이것이 가명(假名)이라고 썼다. 왜 가명을 썼을까? 내 생각에 그의 이름은 한자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어의 이름에 맞게 대응되는 한자를 찾지 못하여서일 것이다. 그래서 가명을 썼다. 그리고 마부 '송라역자 정잡노미"를 보면 그는 송라역참의 역노이다. 그는 비록 '정'이라는 성을 가졌지만 이름은 '잡노미'이다. '잡노미'라는 것은 한국어의 잡종이라는 뜻이다. 이 이름으로 보면 그는 혼인외의 자라는 것을 알 수 있고, 그의 성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인의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상의 분석을 보면, 조선사절단의 노비들은 출신이 미천하고, 그들은 사절단에서 최하층이다. 대우도 극히 낮았다. 사절단의 노비는 상황이 왕일원이 묘사한대호, "발로 만리를 가도 말을 탈 수 없다" "풀을 깔고 땅에서 자고, 구들위에서 잘 수가 없다"는 '조선공사 종자'와 뫈전히 일치한다. 사절단의 그들 노비들은 확실히 잡놈이고 이들 노비는 확실히 왕일원이 묘사한 '빵즈(棒子)"이다.
조선사절단의 노비는 한국어에서 어떤 명칭이었을가. 문헌을 살펴보면 필자는 "방자"라고 불렀다는 것을 알아낼 수 있었다. 한국의 한적문헌에서는 이를 "방자(幇子)", "방자(榜子)" 혹은 "방자(房子)"라고 불렀다. 한국어에서 '방자'는 고대 지방관아에서 일하던 남자종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누구나 아는 <춘향전>에 나오는 방자는 바로 관아에서 일하는 남자종을 가리킨다.
<연행록>의 문헌기록과 한국어발음을 종합해서 살펴보면, 우리는 왕일원이 쓴 "빵즈"가 바로 조선사절단의 노비임을 알 수 있다. 이들 노비는 "까오리빵즈"의 최초의 형상이다.
조선사절단에는 방대한 노비계층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 노비들은 신분이 미천하고, 사절단내에서 최하층의 지위를 차지했다. 그들은 한국어에서 "방자"라고 칭해진다. 왕일원이 말한 "빵즈"는 바로 이런 류의 사람이다. 다만, 조선사절단의 노비를 지칭하는 "빵즈"가 어떻게 하여 조선인에 대한 멸칭으로 되었을까? 우리는 먼저 "방자"들이 중국에서 어떤 행동을 했는지 살펴보자. 그리고 중국인들이 그들에게 어떤 인상을 가졌는지 살펴보자.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방자'는 조선사회에서 최하층이다. 조선사회의 빈곤계층이다. 조선사절단이 중국에 사신으로 오는 것은 그들이 이익을 취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그래서 사절단을 따라나설 때 방자들은 각종 기회를 노려 이익을 보려 한다. 그래서 중국법률이나 사절단의 금기를 어기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김창업은 아래와 같이 썼다:
밤, 역관의 우두머리(首譯)가 와서 보고하기를 심양에서 소식을 들었는데, 단련사가 초십일에 나갔는데, 쇄마, 구인들이 금지물품을 많이 사서 책문을 나설 때 반드시 일이 벌어질 것이니 심히 우려된다...그후 봉성에서 쇄마, 구인은 사잇길로 빠져나가서 의주로 달려갔다.
'쇄마,구인'은 사절단의 노비들의 주요 구성부분이다. 이들은 심양에서 청나라가 금지한느 휴대물품을 가지고 출국하였다. 그 목적은 밀수를 통해서 폭리를 취하기 위함니다. 과연 사절단이 봉성에 도착한 후, 방자들은 청나라의 변경관리의 검사를 피하기 위하여 사절단을 벗어나서 몰래 국내로 밀수뮬품을 가져 갔고, 사절단원은 이로 인하여 징벌을 받았다.
요동의 심양에서뿐아니라, 북경성내에서도 방자들은 기회만 되면 불법거래를 했다.
사절단이 북경에 머물 때, 군관 최덕중이 성을 나가 물을 길어왔는데, 따르던 역노가 이 기회를 틈타서 위법물품을 거래했다. 그것이 청나라관병에 발견되어, 역노는 붙잡혀 죄를 추궁당했고, 이때부터 사절단이 성을 나가 물을 긷는 것이 더욱 힘들어진다.
중국경내에서 위법물품을 거래하는 것 외에, 사절단내에서 공물도 방자들이 절취하는 대상이었다. 강희51년 십이월 초육일 김창업은 아래와 같이 기술한다:
세폐목(歲幣木)를 계산해보니 이십사필이 부족했다. 쇄마 구인들이 훔쳐간 것이다. 이전에도 이런 일이 많았다고 한다.
조선사절단이 북경에 도착했는데, 세폐목이 24필이나 모자랐다. 김창업은 잘 알았다. 이들 부족한 공물은 방자들이 훔쳐간 것이다. 왜냐하면 이전에도 사절단에서 이런 일이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금지물품을 밀수하고, 공품을 훔치는 것은 몰래 하는 것이다. 방자들은 사절단이 물자를 구매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사절단경비를 편취하기도 한다. 이것은 반공개적인 행위이다:
대직 건량마두로 이름이 대직(大直)인데, 용천역노이다. 건량마두는 사절단의 식품을 구매하는 업무를 한다. 그는 이 일에 이익이 큰 것을 알고, 역관을 매수하여, 이 임무를 계속하여 맡았다. 강희51년에 사절단이 올 대, 사절단원 백씨가 멧돼지고기를 먹고 싶어했는데, 대직은 집돼지고기를 가지고 멧돼지고기라고 속여서 몇 배의 이윤을 남겼다.
사절단의 물자구매를 책임진 대직은 계속하여 식품경비를 빼돌렸고, 사절단이 조선으로 돌아오기도 전에, 식품구매경비는 바닥이 난다. 그리하여 관원 창엽이 부득이 청나라조정에서 하사한 돈을 가지고 부족분을 메꾸었다.
이상의 행위는 방자들이 가공제사(假公濟私)한 행위이다. 방자들은 대대로 노비였기 때문에, 보편적으로 자질이 낮았고, 여기에 일년내내 사회최하층에서 생활하다보니, 여러가지 나쁜 습관이 있었다. 중국경내에서, 조선사절단 중에서 방자들은 자주 문제를 일으켰다. 물건을 훔치거나 강탈하는 등 중국백성들의 원성이 컸다.
저녁에 수관점에 투숙했다. 오는 길에 쇄마인등이 시장의 떡과 면을 빼앗았다고 들었다. 매번 이를 치죄하려 했으나 범인을 찾지 못했다. 오후의 도중에 한인이 와서 무릎을 꿇고 호소한다. 쇄마인이 음식과 설탕을 빼앗아갔다는 것이다. 크게 놀랐다. 범인을 색출하여, 배액을 배상하게 하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곤장 팔십대를 때렸다.
이것은 순치13년(1656년) 인평대군이 중국에 사신으로 왔을 때의 기록이다. 방자들은 중국의 시장에서 물품을 빼앗아 중국인이 사절단의 관리에게 호소했다. 나중에 조선사절단이 배상을 해주고 관련인을 처벌하는 것을 끝낸다. 다시 김창업의 기술을 보자.
저녁, 앞 계단에 앉아 있었다. 한 오랑캐아이가 오더니 울면서 호소한다. 그래서 원건에게 물으니, 그가 쓰고 있던 모자를 쇄마인이 빼앗아 갔다는 것이다. 원건으로 하여금 그 아이를 데리고 도처에 찾아보게 했으나, 찾아내지 못했다.
중국 어린아이의 물건까지도 방자들이 빼앗아갔다.
심지어 방자들은 중국여관의 투숙비까지 떼어먹었다. 그리하여 사절단의 일정이 지연되는 일도 벌어진다. 도광12년(1832년) 조선사절단이 귀국하는 도중에 이런 일이 발생한다:
도로가 진흙탕이 되어서, 논의한 후 길이 얼었을 때 출발하기 위하여 아침일찍 떠나기로 한다. 그런데 여관주인이 방값을 내지 않았다는 이유로 문을 걸어잠그고 열어주지 않았다. 정사는 간량마두를 붙잡아와서 확인하고 곤장을 친 후에 주인에게 돈을 주고 문을 열라고 했지만, 주인이 문을 열어주지 않으려 했다. 그래서 문짝을 부수라고 명령하니, 주인이 두려워하며 문을 열어주었다. 날이 이미 어두워졌다.
사절단의 간량마두가 방값을 주지 않아서, 주인이 화를 내며 사절단을 점포안에 가두고 문을 잠궜다. 비록 사절단의 정사가 돈을 지급하지 않은 노비를 곤장때리고, 방값을 내주었지만, 그래도 주인은 문을 열어주려 하지 않았다. 결국 쌍방은 무력을 쓰게 되고 외교사건으로 비화한다.
조선사절단 중의 노비들이 중국경내에서 자주 절도, 강탈등의 일을 저질러, 매번 조선사절단이 지나가면 연도의 주민들은 방비를 강화했고 손실을 보지 않도록 애썼다. 강희51년 김창업등이 요동 봉성에 도착했을 때, 어떤 농민집에 머물렀는데, 이런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주인집 여인은 쇄마인이 말을 닭장 근처에 묶으려 하니 허락하지 않았다. 아마도 자주 절취한 일이 벌어졌었기 때문일 것이다." 여주인은 조선사절단의 노비가 말을 닭장 근처에 묶지 못하게 했다. 그것은 자주 사절단의 노비들이 닭을 훔치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방자들의 중국인민의 마음 속에서 차지하는 이미지가 어떤지 알 수 있다.
조선사절단중의 노비는 중국경내에서 계속하여 연도의 백성들을 괴롭히는 일을 벌였다. 한편으로 방자들 자신의 자질이 높지 않은 것과 작은 이익을 탐하는 본성과도 관련이 있다. 그리고 사절단 관리들이 감독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도 중요한 원인이다. 조선은 예의지국이다. 대외적으로 본국이 이미지를 아주 중시했다. 그런데, 왜 사절단의 노비들이 저지르는 불법행위를 제대로 단속하지 못했을까? 필자가 보기에 이는 조선사절단의 인원구성비율이 불합리한 것과 관련있다.
조선사절단의 규모는 명나라때는 비교적 소규모엿따. 약 30명가량이다. 양반사대부가 전체 사절단을 통제하기 비교적 쉬웠다. 다만 청나라때가 되면서 조선사절단의 규모는 계속 늘어난다. 김창업이 참가한 강희 51년의 조선공사단은 541명으로 구성된 방대한 사절단이었다. 양반사대부와 중인은 모두 43명에 불과했다. 노비계층 즉 '방자'의 인원수가 498명에 이른다. 사절단의 전체 인원수의 8%에 불과한 관리가 나머지 92%의 인원을 단속한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다. 그외에 명나라말기이래 조선왕국이 계층구성에도 변화가 발생한다. 이는 명말청초 조선이 겪은 2차례의 전란(1592년에서 1598년의 왜란과 1636년의 호란)과 직접 관련있다. 두 차례의 대규모 전란을 겪은 후, 조선의 원래 삼엄한 사회등급은 흔들린다. 계층간의 인구이동이 늘어나고 그 직접적인 결과는 원래 사회의 상층부였던 양반사대부가 전체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점점 높아지게 된 것이다.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조선왕국의 절대다수 사람들은 양반사대부로 된다. 신분등급개념이 이로 인하여 많이 약화된다. 신분등급으로 방자들을 구속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졌다. 그래서 조선사절단이 매번 출행할 때면 사절단관리가 법과 기율을 어긴 방자들은 처벌했다. 그러나 효과는 그다지 나타나지 않았다. 방자들이 중국에서 벌이는 사건은 아무리 저지해도 멈춰지지 않았다.
'중국과 한국 > 한중관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북한은 중국의 '완충지대'로서 전략적 가치가 있는가? (0) | 2013.08.08 |
---|---|
"꺼우리빵즈(高麗棒子)" : 이미지는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0) | 2013.05.18 |
중국-북한관계의 역사진상 (0) | 2013.04.27 |
중국인이 말하는 북한투자시 유의사항 (0) | 2013.03.13 |
방정비(幇艇費): 중국-북한 중간해역의 관례 (0) | 2012.05.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