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심지화(沈志華), 후사명(侯思銘)
현재의 복잡다단한 현실국제정치에서, 북한의 행위과 변국은 중국이 맞이한 가장 중요한 주변문제의 하나이다. 중국이 현실문제를 잘 처리하려면, 먼저, 역사를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러시아, 동유럽, 미국의 기밀해제된 자료를 종합하여 1946-1969년까지의 중국-북한관계를 정리해보기로 한다.
제1단계: 1945-1949년. 각자 혁명정권을 탈취하고 건립하는 길에서, 중국공산당과 조선노동당은 상호 돕고, 손을 잡고 협력했다. 그리고 둘 다 소련을 우두머리로 하는 사회주의진영에 가담한다. 모스크바의 지지와 도움으로, 김일성은 한반도북방의 통치를 공고히 하고, 모택동은 중국대륙의 정권을 일거에 탈취한다. 중국과 북한간에는 '순망치한'의 관계가 성립되었다. 역사상 전통적인 지연요소에 혁명과 '형제'의 요소가 추가되었다.
제2단계: 1950-1956년. 한국전쟁시기에 중국과 북한의 지도자들간에는 충돌이 계속되었고, 관계는 긴장되었다. 중국-북한관계는 절대로 표면에서 보이는 것처럼 친밀하고 우호적이지 않았다. 실제로, 어떻게 한반도를 통일하느냐, 언제 중국의 원조가 필요한지, 지원군을 누가 지휘할 것인지, 중국북한연합군이 38선을 넘은 후 계속 남하할 것인지, 그리고 북한철도관리권의 귀속과 정전시기의 장악등 일련의 전략적 의사결정이나 중대한 문제에 있어서, 중국과 북한간에는 심각한 의견차이와 갈등이 존재했다. 비록 이전에 북한은 계속 소련의 지지와 도움에 의존했지만, 전쟁기간동안 중국이 처한 지위가 왕왕 주도적인 작용을 했다. 그러므로, 중국과 북한지도자 및 양국간에는 깊은 우의가 맺어진다. 모택동은 전후에 계속 북한문제에서의 발언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북한에 대규모의 경제원조를 주기로 결정한다. 북한의 전후재건사업은 주로 중국, 소련, 동구등 사회주의진영국가의 원조하에 완성된다. 중국은 비록 경제력에서 소련만 못했고, 자신도 전쟁에 참가하여 심각한 손실을 입었지만, 북한을 원조하는데 있어서는 소련보다 훨씬 많이 해주엇다. 김일성은 이것을 가슴에 담아두었다. 그러나 공개적인 장소에서는 '자력갱생'을 강조했고, 중국과 소련의 원조를 언급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일찌기 전쟁후기에, 김일성은 자신의 통치권위를 수립하기 시작한다. 조선노동당 제3차대표대회때 권력구조를 전면 개편한다. 그리하여 각파의 반대에 부닥친다. 소련공산당 20차대회이후, 김일성은 모스크바의 새 방침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연안파와 소련파는 연합하여, 소련공산당의 김일성에 대한 불만을 이용하여 김일성을 비판하고자 한다. 1956년 8월 중앙전체대회에서 갈등이 폭발한다. 김일성은 국면을 통제한 후, 반대파를 반당집단으로 몬다. 연안파의 일부는 중국으로 도망쳐 온다. 모택동은 소련공산당대표단과 상의한 후 미코얀과 팽덕회로 하여금 대표단을 이끌고 평양으로 보내어, 김일성에게 압박을 가하여 기존명령을 회수하게 한다. 김일성은 북경과 모스크바의 강력한 압박하에 과오를 인정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중국-북한관계는 심각한 위기에 빠진다.
제3단계: 1957-1965년. 이 기간동안, 한국정부는 거대한 내부압력에 직면하고, 정권이 여러번 바뀐다. 북한을 향하여 무력도전할 여력이 없었다. 미국은 한국경제부흥을 추진시키는데 주력했다. 이 모든 것은 객관적으로 북한경제,사회발전에 이상적이고 안전한 환경을 제공한다. 사회주의진영의 내부관계로 보면, 폴란드 헝가리사건이후, 중국과 소련의 주의력은 유럽으로 향한다. 그리고 중소 양국관계는 점차 악화된다. 북한은 중국과 소련의 사이에서 좌우봉원(左右逢源)한다. 김일성의 개인권위를 수립하는데 또 다른 중요한 요소는 중국의 입장변경이다. 소련공산당20차대회이후, 중공과 모택동의 사회주의진영에서의 지위와 위망이 날로 올라간다. 점차 국제공산주의운공에서 소련공산당과 맞먹는 지도자로 성장한다. 더 많은 지지자를 획득하기 위하여, 중국의 지리적우세를 건립하기 위하여, 1957년말 모택동은 김일성에 대한 태도를 바꾼다. 주도적으로 과오를 인정하고, 북한의 국내정책에 동의를 표시한다. 심지어 북한의 지원군을 모두 철수시키는데도 동의한다. 이렇게 하여 중국과 북한의 관계는 회복된다.
중소간의 갈등이 갈수록 격화되고 쌍방은 모두 북한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자 한다. 중국은 극히 곤란한 상황하에서도 북한에 대량의 양식을 제공했다. 후르시쵸프는 김일성에게 모택동이 1956년 김일성을 심하게 비판한 담화기록을 공개한다. 김일성은 북경과 모스크바의 사이에서 외교적 줄타기를 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1961년 동시에 소련과 중국과 각각 동맹조약을 체결한 것이다. 후르시쵸프가 견지한 평화공존의 외교방침은 북한의 외교방향과 어긋나고, 소련이 대외원조를 크게 감소시키므로, 북한은 중소투쟁의 과정에서 모택동에 기울어지고, 적극적으로 수정주의에 대한 비판대열에 가담한다. 평양을 끌어들이기 위하여, 대량의 경제원조를 계속 제공할 수 없는 상황하에서도, 중국은 정치적 고려에서 출발하여, 북한교민과 동북 조선족의 국경출입문제를 처리함에 있어서, 왕왕 북한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심지어 중국은 북한과의 국경선문제에서도 크게 양보한다. 역사적으로 중국경내에 위치한 백두산 천지의 대부분을 북한에 넘겨준다. 그외에 모택동은 여러번 말했다. 중국동북은 조선의 후방이라고. 일단 전쟁이 발생하면 북한에게 관리를 넘기겠다고. 중국과 북한의 관계는 이렇게 점입가경이 되고, 최고조에 달한다.
제4단계: 1965-1969년. 브래즈네프가 정권을 장악한 후, 후르시쵸프의 대내,대외정책을 조정한다. 북한에 대한 경제 및 군사원조를 강화한다. 김일성의 소련에 대한 태도도 완화된다. 이어서 중국에 '문화대혁명'이 발발한다. 극좌의 외교노선은 북한노동당도 수정주의로 비판하게 된다. 홍위병은 중국과 북한의 구경선에서 일련의 사건을 일으킨다. 그리하여 김일성의 불만을 불러온다. 일찌기 소련에 대하여 절대로 '중국노선'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현하기도 한다. 북한은 신속히 소련으로 기울어지고, 반중국대열에 가담한다. 중국-북한관계는 이로 인하여 일락천장하고 금방 최고봉에서 나락으로 떨어진다.
오랫동안 중국의 북한에 대한 태도는 역사가 조성한 "예설성(預設性)" 전제의 제한을 받았다. 실제로, 중국은 북한을 보통국가로 대우했어야 한다. 전략적 담장을 애기할 것이 없다. 실제로, 2차대전이후부터 60년대까지, 정거리미사일의 발명과 보편적인 배치운용은 전통적인 지리적인 담장은 더 이상 군사적인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필자는 북한이 중국에 무슨 특수한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와 반대로, 장기간 중국-북한관계의 두가지 '신화'는 중국의 대북한관계 및 국제사무에서의 불필요한 속박을 조성한다. 첫째는 북한이 정통적인 사회주의국가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제도적으로 마르크스주의에 부합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둘째는 북한이 중국의 형제국가라고 보는 것이다. 중국과는 피로 맺어진 전통적 우의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런 인식의 기초위에서 중국은 북한에 무조건적으로 지지하고 우호적인 외교는 거의 불변의 국책이 되었다. 외부세계에서 보기에, 북한의 문제는 바로 중국의 문제이다. 마치 중극은 북한문제에 대한 책임을 당연히 떠맡아야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것은 중국외교정책의 하나의 곤경이다. 당연히 북한을 보통국가중 하나로 대우하여 우호적인 주변관계를 건립하는 것이 맞다. 다만 이 관계를 지나치게 중요하게 보아서는 안되고, 원조도 않고 지지도 않는 것도 안된다. 만일 완전히 상대방에게 끌려간다면 대국으로서의 책임은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대국의 위신은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
하나의 정상적인 국가로서, 외교는 최저선이 있어야 한다.
조선의 문제는 그가 계속하여 사회주의진영의 품속에서 보호하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계가 직접 개입하지 못했다. 지금은 냉전도 끝났고, 대립집단도 없다. 당연히 모두 독립,평등한 단계로 향해야 한다. 필자는 지금이 과도기라고 생각하며, 과도기는 그다지 길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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