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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한국/한중관계

"꺼우리빵즈(高麗棒子)" : 이미지는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by 중은우시 2013. 5. 18.

위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조선사절단의 노비들은 중국경내에서 법과 기율을 어기는 일이 잦았다. 심지어 연도의 중국백성들을 괴롭히기도 했다. 중국인이 보기에, 조선사절단의 "방자"는 반갑지 않은 무리들이다. 중국인은 "방자"라는 말에 호감을 갖지 못했다. 오랫동안 사용하고 전해지는 과정에서 중국인은 "빵즈(방자)"라는 단어에 각양각색의 폄하하는 의미를 추가하게 된다. "빵즈(방자)"의 의미는 이렇게 하여 폄하하는 말로 자리잡게 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이어서 나타나는 문제는 원래 조선이 저층계층을 부르는 칭호인 "빵즈"가 어떻게 하여 전체 조선인에 대한 멸칭으로 자리잡았느냐는 것이다.

 

고대에, 중국과 조선왕국간에는 민간교류가 제한적이었다. 변경지역이라 하더라도, 양국정부는 여러가지 조치를 취하여 변민의 상호교류를 막았다. 절대다수의 중국인은 조선인에 대한 인상이 모두 매년 양국을 왕래하는 조선사절단에서 얻게 된다. 그리고 조선사절단 중에서 양호한 교육을 받고, 예의를 아는 양반사대부와 중인의 수량은 아주 적었다. 일반 중국인은 그들과 접촉할 기회가 없었다. 연도의 중국인들이 조선사절단과 교류하는 것은 주로 사절단의 노비계층이다. 이들 노비들은 행동이 올바르지 않았고, 중국인들은 그들을 싫어하게 된다. 오랫동안 이렇게 하다보니, 중국인들은 "빵즈(방자)"에 대하여 계층의 특정칭호에서 모든 조선인에 대한 호칭으로 변화하게 된다. "빵즈(방자)"는 그래서 특정계층의 칭호에서 전체조선인의 칭호로 바뀌는 것이다. 여기서 특별히 지적하고 싶은 것은, 명청시대 중국정부의 사절단에 대한 접대정책이 왕왕 조선사절단과 중국백성간의 갈등을 낳았다는 것이다. 이런 갈등은 "까오리빵즈"에 대한 나쁜 인상을 구축하는데 추파조란(推波助瀾)의 역할을 한다.

 

명청시기, 중앙왕조는 주변번속국에 대하여 회유정책을 취했다. 주변번국에서 사절단을 보내어 중국에 조공하면, 조정에서는 연도지방정부 및 역참에서 사절단에 각종 편의를 돌봐주도록 명령했다. 그리하여 "회유원인(懷柔遠人)"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고자 했다. 이런 정책이 구체적으로 집행될 때는, 불가피하게 조선사절단과 연도백성간의 갈등을 초래하게 된다. 명나라 만력2년의 조선사절단의 입공을 예로 들어보자.

 

명나라때, 조정에서는 요동역참에 조선사절단이 올때 마차를 제공하여 사절단이 쓸 수 있게 해야 했다. 그러나, 융경, 만력때의 요동은 매년 홍수가 져서 흉년이 들었고, 게다가 몽골,여진이 매년 침입하여 살륙을 자행했다. 그래서 현지의 역참은 열에 아홉이 비었다. 남아있는 역참의 사람들도 겨우겨우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사절단이 지나가면, 조정이 정책을 집행하기 위하여, 위소의 관리들은 역인들에게 마차를 내놓게 하고 이를 위하여 혹형도 마다하지 않는다. 현지 역인들은 자녀를 팔아서, 사절단의 마차를 제공한다. 그리고 어떤 역인은 이를 견디지 못하여 목매어 자살한다. 그 처참한 광경을 조선인들도 보았다. 그래서 모두 차마 보지 못할 정도로 참혹하다고 말했고, 현지의 역인들은 이 모든 것은 조선사절단이 오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그리하여 "우리나라 사람(조선인)이 지나가는 곳마다 사람들의 원성이 자자했고, 우리를 원수보듯이 했다."

 

청나라대가 되어 요동지구에 비록 전란은 없고, 현지백성의 생활도 명나라때에 비하여 좋아졌지만, 조선사절단이 오면, 역시 현지백성들로서는 여러가지 불편했다. 조선인인 박사호(朴思浩)는 <심전고(心田稿)>에서 이런 이야기를 적었다. 건륭연간에 발생한 조선사절단과 현지백성간의 분쟁이다.

 

사절단이 고교보의 왕씨성의 사람집에 머물렀다. 이때 천냥의 돈을 분실했다. 호송관은 영원부에 고발한다. 왕씨 일가는 모조리 붙잡혀가서 혹형을 당한다. 이때부터 조선사절단이 고교보를 지나면 현지백성들은 아무도 접대하려 하지 않았다.

 

<계산기정>에는 건륭연간에 발생한 또 다른 일을 적고 있다: 주류하의 물은 깊고 빠르다. 자주 배가 침몰하는 사고가 발생한다. 조선사절단이 걸핏하면 수백명이 되고 공물도 많아서, 매번 건널 때면 주변의 뱃사공들이 무척 힘들었다. 그래서 그 일을 서로 미루는 일이 허다했다. 건륭황제는 그 말을 듣고 뱃사공 9명을 참하게 한다. 그리고 케이블(長纜)을 놓고 땅에 쇠못으로 박아둔다. 이후 배가 침몰하는 일은 피할 수 있었지만, 이 일이 현지인들에게 가져다준 부정적인 영향은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사례에서 우리는 충분히 알 수가 있다. 연도의 중국백성들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조선사절단을 대했을지. 사절단이 오면, 연도백성들의 경제적 부담이 가중된다. 그리고 사절단의 "빵즈(방자)"들은 절도, 강탈행위를 벌여서 중국백성들이 힘들어한다. "빵즈(방자)"는 점차 중국인의 마음 속에 역겨운 조선인의 이미지를 형성한다. 그리고 결국은 모든 조선인에 대한 경멸하는 말로 된다. "빵즈(방자)"능 이렇게 하여 계층을 지칭하는 칭호에서, 전체 조선인에 대한 멸칭으로 바뀌게 된다.

 

"연행록"의 문헌으로 보면, 건륭때부터 "꺼우리빵즈(高麗幇子, 高麗棒子)"는 중국인의 조선인에 대한 칭호로 자리잡았다. 홍대용이 쓴 건륭31년의 조공견문인 <담헌연기>를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이곳을 지나면서 한 가마에 젊은 부인이 타고 있었는데, 주렴을 걷고 쳐다보았다. 아주 예뻤다. 평중이 똑바로 보며 눈길을 피하지 않았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기이하다고 말했다. 그 방자간거자(幇子看車者)가 주렴앞에 앉아서 중얼거리며 욕을 했다. 평중은 느끼지 못한 것같았다. 그런데 어린아이 수십명이 "까오리빵즈"라고 소리쳤다. 소리를 지르며 쫓아왔다. 나는 평중에게 빨리 달리라고 재촉했다. 그 자리를 피하기 위해서.

 

이 기록은 아주 재미있다. 홍대용은 조선의 습관대로 중국의 차부(車夫)를 '방자'라고 불렀다. 그는 아마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이때 '빵즈(방자)"는 이미 중국인의 모든 조선인에 대한 칭호가 되어버렸을 줄. 그래서 중국이 아이들은 그들을 둘러싸고, "꺼우리빵즈"라고 소리친 것이다. 홍대용은 아마도 전혀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꺼우리빵즈"라는 칭호가 수백년후까지 지속될 줄은.

 

"꺼우리빵즈"라는 단어에 대하여 또 한가지 검토할 것이 있다. 앞에서 논술한 바에서 알 수 있듯이, "빵즈(방자)"라는 단어는 명나라말기이후 중국인들 사이에서 유행한다. 그런데 당시는 한반도가 이미 조선왕국시대였다. 통상적인 이치대로라면, 중국인은 조선사절단의 노비를 "차오센빵즈(朝鮮棒子)"라고 불러야 옳다. "꺼우리빵즈"가 아니라. 기실 우리가 명청시대의 중국사회를 자세히 분석해보면, 당시의 중국인들이 "조선"을 "고려"로 부르는 경우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

 

함풍5년(1855년), 서경순(徐慶淳)은 중국에 사신으로 오면서 주목한다. 요동인들은 왕왕 조선인을 '고려인'으로 부른다. "요녕사람들은 우리 일행을 보면 반드시 "가오리(嘉吾離)"라고 부른다. 중국어에서 '고려'를 '가오리'라고 한다. 고를 '가오'라고 하고, 려는 '리'라고 한다." 요동사람뿐아니라, 북경인도 조선인을 고려인이라고 불렀다. 강희59년(1720년)의 조선사신 이의현(李宜顯)이 쓴 내용을 보자: "우리나라사람들이 말을 탈 때면, 사람을 시켜 고삐를 끌게 한다. 연중(燕中)의 사람들은 이를 보고 크게 웃는다. 매번 아동이 말을 탈 때면 사람을 시켜 끌게 하고, 말다루는 소리를 내는데, '고려고려'하면서 간다." 건륭31년 홍대용이 북경으로 갔을 때 극장에서 극을 본다. 마찬가지로 중국인들은 그를 "고려노야(高麗老爺)"라고 부른다. 만일 중국의 일반잭성의 견식에 한계가 있다면 조선을 고려라고 부르는 것이 이해된다. 그렇다면 중국관리들은 어떤지 보자. 홍대용은 <담헌연기>에서 자신과 중국관리 희원외(希員外)와의 대화를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세관(稅官)이 문밖테 서 있다. 한참을 쳐다본 후에 손을 들어 부른다. 나는 들어가서 읍을 했고, 그가 어디에 사는지와 직위를 물었다. 그는 답하기를 "만주인이고, 집은 북경안에 있다. 심양호부원외랑을 맡고 있다"고 한다. 희원외는 물었다: "국왕의 성씨는 무엇인가?" 내가 대답하자 희원외가 말한다: "이전에는 김씨, 왕씨였는데, 지금은 왜 이씨인가?" 나는 말했다: "신라는 김씨였고, 고려는 왕씨였다. 본국은 이씨이다." 희원외가 말한다: "그러면 고려를 혁세(革世)하여 조선이 되었는가?" 나는 "그렇다"고 답했다.

 

이 대화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당시의 중국하층관리들도 한반도의 정권교체에 대하여 기본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한반도의 정권이 여전히 왕씨고려로 알고 있는 것이다. 이때는 이미 건륭31년이어서 왕씨고려가 멸망한지 이미 400년에 가까웠다. 중국하층관리들의 조선에 관한 상식이 이정도로 부족했던 것이다. 이를 보면 대부분의 중국관리들은 조선에 대한 이해정도가 일반백성들과 그다지 차이없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글을 많이 읽은 유생들을 보자:

 

아침에 장안문으로 가서 통정문을 들어갔다. 문안에 앉아서 날이 새기를 기다리는데, 관리 염 사람이 와서 얘기를 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말이 통하지 않았다. 다시 유생 네명이 와서 말한다. '이 사람은 고려인이다." 나는 말했다: "어찌 매번 고려라고 하는가. 고려는 우리의 전왕조 이름이다. 지금은 조선이라고 바꿔 부른다. 이것은 명나라가 정해준 국명이다."

 

이는 명나라 만력2년(1574년) 조선사신 조헌이 북경에서 친히 겪은 일이다. 중국유생이 자신을 '고려인'이라고 하자, 조헌은 아주 화를 냈다. '조선'이야말로 명나라가 내린 정식국호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어찌 매번 고려라고 하는가'에서 알 수 있듯이 중국에 와서 '고려인'이라는 말을 한두번 들은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를 종합하면, 명청시대의 중국은 아래로는 일반백성부터 위로는 정부관리, 유생까지 조선의 상황을 잘 모르고 있었다. 습관적으로 조선을 '고려'라 칭했다. 조선인을 '고려인'이라 칭했다. 조선인은 이에 대하여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방법이 없었다. 중국전체 사회의 인식을 바꿀 수는 없는 것이다. 중국인은 조선과 관련된 모든 사물을 '고려'라고 칭했다. 이것은 왕일원의 <요좌견문록>에서도 명확히 나타난다. 이 책에서는 이렇게 언급한다: "조선이 조공가는 길은 압록강, 봉황성에서 요심(遼瀋)으로 가는 길을 간다. 산해관을 들어와 경사에 도착한다. 성경에는 고려관(高麗館)이 있어 공사가 숙박하는 곳이다." 여기서 말하는 성경 고려관은 기실 '조선관'이라고 해야 한다. 조선사신 김익(金熤)에 따르면, "조선관. 심양성안에 있다." 김창업도 말했다. 성경 조선관의 문앞에는 "조선관"이라는 편액이 있다고. 그러므로 조선관이 바로 성경 조선사신이 유숙하는 관사의 정식명칭이다. <요좌견문록>에서 조선왕국의 기본개황을 설명하는데 이렇게 썼다: 조선국은 옛날에 여덟 포정사를 두었다. 듣기로 나중에 남고려, 북고려로 나누어 각각 4명의 포정사를 두었다고 한다. 언제 나누었는지는 모르겠다." 여기서 8 포정사는 조선왕국의 '팔도'를 가리키는 것일 것이다. 남고려, 북고려라는 칭호는 어디에서 왔는지 모르겠다. 확실히 왕일원이 그다지 신뢰할 수 없는 경로를 통하여 얻은 정보일 것이다. 이외에, <요좌견문록>에서는 '고려포자(高麗包子)', '고려삼'과 같은 말이 자주 나온다. 이것은 당시의 중국사회에서 조선을 '고려'라고 칭하는 현상이 보편적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중국인이 '차오센빵즈"를 '꺼우리빵즈"라고 불렀다고 하여 이상할 것도 없다.

 

이에 추가로 "빵즈"에 대하여 보자. 조선이 한문전적에서는 노비계층을 "幇子" "榜子" "房子"라 부른다. 그러나 '봉자(棒子)"라고 부른 경우는 없다. 그렇다면, 중국인은 아마도 이들 조선문헌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왜 "방자"를 "棒子"라고 불렀을까?

 

노비들의 비위행위를 조선사절단은 그냥 들어넘기지만은 않았다. 상응한 징벌을 내렸다. 노비를 징벌하는 방식은 곤장을 치는 것이다. 이것은 조선문헌에서 '결곤(決棍)'이라고 한다. 앞에서 언급한 순치13년의 수관점에서 음식과 설탕을 빼앗아간 쇄마인은 중국인의 고발로 적발되어, '80대의 곤장을 공개적으로 맞았다" 도광12년 사절단은 중국여관주인의 분노를 삭히기 위하여, 돈을 지급하지 않은 간량마두를 "결곤"했다. 경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조선의 중국사신은 심지어 전체 사절단의 앞에서 공개적으로 형을 집행하곤 했다. 부근의 중국인들도 와서 보았다. 김창업은 행형현장에 대하여도 기록했다:

 

수성역졸 이귀는 이번달 초하루, 쇄나 김낙걸에게 쫓겨나며 왼쪽눈이 실명되었다. 오늘 보고를 한다. 문을 닫은 후, 세 사신이 앞계단에 앉아서 낙걸을 붙잡아와서 심문했다. 같이 싸운 쇄마 최가인과 함께 결곤10번에 처했다. 곤장을 칠 때 여러 역졸들이 나란히 서고, 일시에 소리를 내며 때렸다. 몽골인들은 담장을 두고 구경했다. 그리고 놀라는 기색이었다.

 

관리가 노비를 징벌하는 행형현장은 융중했다. 결곤시 '여러 역족들이 나란히 서 있을 뿐"아니라, "일시에 소리를 치며 때렸다" 여기에 수형자는 고통에 비명을 질렀을 것이다. 이것만해도 '경심동백'할 일이다. 둘러싸고 있던 몽골인들이 모두 놀라는 기색을 보일 수밖에 없다. 조선인들이 몽둥이를 휘둘러 노비를 때리는 행형현장은 중국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을 것이다. 그래서 조선의 단어 '방자'를 "빵즈(棒子)'라고 했을 것이다. 아마도 중국인들의 잠재의식속에 조선인의 행형현장이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 있어서, 민간에서 "꺼우리빵즈"라는 말이 퍼져나간 것일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조선인들이 몽둥이를 들고 사람을 때리는 모습에서 유래한 것일 것이다.

 

본문은 주로 "연행록"문헌을 이용하여 왕일원의 조선 "빵즈(방자)"에 대한 기술이 맞는지 확인했다. 그리고 "꺼우리빵즈"라는 단어의 유래와 변화에 대하여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었다.

 

"빵즈"는 한국어인 "방자"에서 왔다. 이 단어는 조선왕국에서 국내의 노비계층을 가리키는 말이다. 조선조공사절단에서 절대다수의 구성원은 모두 "방자"게층에 속했다. 조선조공사절단이 중국으로 빈번하게 오게 되면서, "방자"라는 단어는 중국인들에게 익숙해진다. 그리고 조선의 "방자"들이 중국내에서 비위행위를 저지르고, 연도의 주민들을 괴롭히는 일이 벌어지게 되면서 중국인의 인상 속에 나쁜 모습을 남긴다. 그리하여 "방자"는 중국인들이 싫어하는 인물의 대명사로 된다. 조선사절단이 주로 "방자"로 구성되었고, 거기에 조선사절단의 사신은 연도백성들에게 많은 골치와 부담을 안겨주었으므로, "방자"라는 단어는 중국인들이 전체 조선인을 경멸하는 칭호로 바뀐다.

 

그리고, 명청시대에 중국인들은 조선을 보편적으로 '고려'라고 불렀다. 그리고 조선관리들은 방자에게 행형을 할 때 몽둥이로 때렸다. 이런 기억이 남아서 "꺼우리빵즈"라는 특정칭호가 생겨난다. 홍대용의 <담헌연기>에 따르면, 늦어도 청나라 건륭연간에는 "꺼우리빵즈"라는 칭호가 중국에서 유행했다. 지금까지도, "꺼우리빵즈"는 중국인이 조선인들을 경멸하는 의미로 가장 많이 쓰는 칭호이다.

 

조선왕국오백년은 조선국왕을 포함한 전체 조선의 상류게층이 조선왕국이 중국을 핵심으로 하는 동아시아국제체제에서의 지위와 이미지를 중시했다. 원해서이건 아니건 '책임을 다하고 있다" "예절을 지킨다"는 국가이미지를 심기 위하여 노력했다. 조선왕조는 매년 사절단을 중국으로 보냈다. 국내에 동란이 있고, 외적이 쳐들어오는 상황하에서도 중단된 적이 없다. 조선공사단의 사신들은 국가에서 맡긴 사명을 완수하고 조금의 차질도 없도록 애썼다. 지금은 이런 역사가 흘러갔다. 소수의 학자를 제외하고 절대다수의 중국인들은 이들 사절단의 존재조차 잊어버렸다. 그저 "꺼우리빵즈"라는 단어만이 중국인의 마음 속에 깊이 낙인찍혀 있고, 지금까지도 계속된다. 이것은 아마도 당시 조선왕국에서 생각지 못했던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