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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정치/중국의 정치

리커창(李克强)의 7명의 스승

by 중은우시 2013. 5. 3.

글: 담천하(談天下)

 

리커창의 인생도로에서 그에게 오늘날의 성취를 이루게 한 7명의 은사가 있다: 리청(李誠), 공샹뤼(龔祥瑞), 마스장(馬石江), 지센린(季羨林), 왕자오화(王照華), 샤오쭤지(蕭灼基), 리이닝(勵以寧)....

 

리커창이 중학에 들어간지 얼마 지나지 않아, '문화대혁명'이 발발한다. 어려서부터 공부를 좋아했던 리커창은 할 수 없이 공부를 포기하고 집에 머무르게 된다. 부친 리펑산(李奉三)은 자주 리커창을 데리고 안후이성 문사관에서 일하고 있던 국학대사 리청에게 가서 학문을 논하곤 했다.

 

소년 리커창은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했으며, 천부적인 재능이 남달랐다. 그리하여 리청은 그를 문하생으로 받아들이고 가르쳐 준다. 그에게 중국의 고전문학, 치학방법 및 고금일사를 전수한다. 어떤 때는 열심히 그에게 설문해자, 독서목록을 만들어준다. 그는 리커창에게 <사기>, <한서>, <후한서>, <자치통감>등 국사를 읽게 했고, 리커창에게 <소명문선>, <고문사류찬>등 고문선을 통채로 외우게 한다.

 

리커창은 매번 이해가 되지 않거나 잘 모르는 점이 있으면 리청이 부드럽고 온화한 말투로 해석해 주었다. 리청을 스승으로 모신 5년의 시간동안 리커창은 "수업을 그만두고 혁명에 종사했던" 시기에 학업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학문이 날로 성장했다.

 

1997년 5월 15일, 당시 공청단중앙서기처의 제일서기로 있던 리커창은 <안휘일보>에 <리청선생을 추억하며>라는 제목의 글을 싣는다. 그는 글에서 은사와의 추억을 하나하나 추억했고, 리청에 대하여 높이 평가했다.

 

1977년 대학입시가 회복되면서 리커창은 북경대학 법률학과에 합격한다.

 

북경대학 법률학과는 좋은 스승과 설비를 보유하고 있다. 명사중 가장 유명한 분은 당시 중국과 서양의 헌법행정법에 능통한 공상뤼였다. 공상뤼는 처음에 정치학을 공부하다가 영국으로 가서 공부하여 서방의 정치제도와 법치를 친히 겪는다. 그리하여 정치학과 법학의 소양을 겸비한다. 총명하고 근면했던 리커창은 금방 공상뤼의 득의문생이 된다.

문혁기간동안, 공검법(공안, 검찰, 법원)의 체계가 완전히 무너진다. 헌법은 완전히 휴지조각이 된다. 수업중에도 헌법의 이슈에 대하여는 그냥 흐지부지 넘겨버린다. 그러나, 공상뤼는 과목수업때 민주헌정의 진정한 의미를 충분히 설명했다. 이는 리커창에게는 하늘에서 내리는 감로와 같았다.

 

공샹뤼에게서 리커창은 진정한 자유주의와 헌법정신을 배웠다. 공샹뤼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헌법은 최고성을 지닌다. 즉 최고권력기관도 반드시 준수해야 한다. 공샹뤼는 리커창등에게 말했다. 헌정의 도로는 바로 법치의 도로이다. 법치는 민주를 향한 첫걸음이다. 공샹뤼의 인도하에, 리커창은 점점 외국헌법과 비교정치를 배우게 된다.

 

재학기간동안, 리커창은 임 학술적으로 두각을 드러낸다. 일찌기 <법치기기와 사회의 계통, 정보 및 통제>라는 논문을 제출한다. 이를 통하여 현대통제론과 시스템론으로 법학학과문제를 해석하고자 시도한다. 학교에서는 우수논문으로 선발하고, 동시에 공샹뤼로부터도 호평을 받는다: "이는 시스템론, 통제론과 정보론등 신형과학방법을 법학연구에 운용하려는 하나의 시도이다."

 

이와 동시에, 리커창이 번역한 <영국헌법사강>은 법률학과에서 인쇄하여 수업참고바료로 삼는다. 리커창은 강개하여 썼더: "북대에서 학생과 선생은 모종의 평등관계이다. 이는 지식에 대한 존중에 기하여, 진리에 대한 숭상에 대하여, 지식과 진리의 앞에는개인의 체면과 존엄은 없다. 이것도 일종의 사도(師道)이다."

 

77학번을 가르친 바 있는 북대 법학원 교수 양둔센(楊敦先)은 친절하게 그해 82명의 학생을 '황포1기"라고 표현한다. 양둔센은 '황포1기'는 사상이 활발하여 일반학생들에 비견할 바가 아니었다고 한다. 양둔센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사람은 리커창이었다.

 

리커창은 공샹뤼의 지도하에 양바이쿠이(楊百揆), 류용안(劉庸安)과 영국의 저명한 법관 알프레드 톰슨 대닝 남작이 쓴 <법률의 적법절차>를 번역한다. 이 번역책은 군중출판사에서 출판하고, 지금도 여전히 재판되고 있으며, 리커창이 제1역자이다. 이 책을 번역하면서 지센린과 만나게 된다.

 

하루는 리커창이 한 단어를 번역하는데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마침 교외회의에 참석하였는데, 국학대사 지센린과 같이 시위안호텔에 머물게 되었다. 그래서 지센린에게 물어본다. 지센린은 그 자리에서 대답한다. 그리고 동시에 말을 덧붙인다: "일단은 이렇게 할 수 있겠다." 리커창은 당시에 그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날 저녁에 지센린이 호텔에 머물지 않는 것을 알게 되고, 다음날 지센린은 다시 돌아온다. 그리고는 리커창에게 그 단어의 유래와 여러가지 의미를 상세히 해석해준다.

 

"나는 지센린 선생이 이 일로 학교에 돌아갔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러나 나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지센린 선생은 그날 밤에 진지하게 이 단어를 찾아보았다고. 아마도 지센린 선생은 나에게 어떤 지식을 전수해주려고 한 것이 아닐 것이다. 그의 모든 행동은 '나는 나의 스승을 사랑한다. 나는 진리를 더욱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몸소 보여준 것이다."

 

리커창이 보기에, 지센린은 그에게 어떻게 학문을 하고 처세해야하는지를 가르쳐 준 사람이다.

 

1982년 1월 졸업하기 전날, 리커창은 미국유학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다만, 북경대학 당위 부서기인 마스장은 그의 지도력 및 진중한 성격을 좋게 보았다. 그래서 십여차례 그와 얘기를 나눈다. 그에게 학교에 남아서 공청단 북경대학위원회 서기를 맡아달라고 한 것이다. 마스장의 권유로 리커창은 학교에 남게 된다.

북경대학 단위서기를 맡은 후, 리커창은 여전히 학문을 공부할 때의 예기를 유지했다. 그는 자주 일부 중대한 정치, 사회의제를 발표할 때 상당해 해방된 독립된 견해를 낸호았다. 그리하여 다른 분야 공청단간부의 비난도 받는다.

 

1982년 북경시 공청단제7차대회에서 전국공청단11차대회대표를 선발할 때, 이 북경대학 단위서기는 낙선한다. 다만, 당시 중앙조직부 부부장을 맡고 있던 왕자오화가 그를 지명하여 리커창은 여전히 공청단 11차대회에 대표로 참석하고, 중앙상임위원에 선발된다. 이때부터 그는 간부의 길을 간다.

 

어떤 사람은 리커창이 항상 다른 사람보다 반박자 앞서간다고 말한다. 공청단중앙에서 일할 때, 그는 북경대학 경제학원에서 석사, 박사과정을 공부한다. 북경대학의 대학원에 있을 때, 그는 중국농촌경제에 관심을 가진다. 1988년, 그는 <농촌공업화: 구조전환중이 선택>이라는 글로 경제학석사를 받는다. 지도교수는 경제학자인 샤오쭤지이다. 나중에 경제학자 리이팅에게 1995년 박사학위를 받는다.

 

북경대학 광화관리학원 2층전시실에는 전원장 리이닝의 여러 저작을 전시한다. 그중 <번영의 전략선택을 향하여>라는 책이 있는데, 리이닝과 그의 3명의 제자 리커창, 리위안차오(李源朝), 멍샤오쑤(孟曉蘇)의 공저이다. 이 세 명은 지금 대명이 자자한 인물들이다. 리커창은 중앙정치국 상임위원, 국무원 부총리이다(현재는 국무원 총리). 마찬가지로 공청단 출신인 리위안차오는 중앙정치국위원, 중앙조직부부장(현 국가부주석)이다. 1982년 북경대학을 졸업한 후, 직접 중앙정치국위원 국무원부총리인 완리(萬里)의 비서로 간 멍샤오쑤는 지금 중국부동산업게츼 최대기업집단인 중국부동산개발집단의 이사장이다.

 

그것은 1991년 8월, 리이닝이 리커창, 리위안차오, 멍샤오쑤의 3명의 재직박사생의 이전의 석사논문을 정리하여 책으로 만든 것이다. 그리고 책의 다른 장절을 보충한다. 여기에 주식제의 내용을 부가하여 <번영이 전략선택을 향하여>라는 제목을 붙인다. 당시 경제일보출판사에서 출판된 후 경제학계의 관심을 끈다. 믿기 어려운 점은 이 책의 모든 논점은 나중에 모두 인정받아서 점점 실행되는 정책으로 변해갔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