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정치/중국과 일본

근대중일교섭: 시기, 교훈 및 보완

중은우시 2013. 4. 16. 00:07

글: 마용(馬勇)

 

중일관계는 당금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양국관계이다. 더구나 아시아의 가장 중요한 양국관계이다. 중일협력, 아주단결, 안정은 바로 세계의 안정이다. 중일충돌, 아주혼란은 바로 세계의 불안정이다. 이는 과거 근 이백년역사가 이미 증명한 사실이다.

 

상호불신의 연유

 

만일 역사연원으로 얘기하면, 중일은 동아시아의 가장 중요한 이웃이다. 세계시장은 갈수록 일체화되고, 중일양국은 모두 서방의 도전에 직면한다. 중국은 기나긴 유예를 거친 후 자신의 방식으로 서방에 대응한다. 초이(剿夷)에서 무이(撫夷)까지, 다시 서방을 학습하기까지. 중국은 기 과정에서 최소한 이백년을 늦었다. 중국은 원래 서방에 담담하게 대응하여야 했고 서방을 따라잡아야 했다. 농업문명에서 공업문명으로 전환 혹은 농업문명의 기초위에서 공업문명의 성분을 증가하는 것, 전통에서 현대까지. 그러나 중국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중국은 적시에 서방의 도전에 대응하지 못했다. 혹은 자신의 오래된 전통과 관련이 있는지, 풍성한 문화의 축적은 중국이 짧은 시간내에 서방과 동일시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다만, 중국의 상황은 아주 달랐다. 일본은 과거 천년간 어쨌든 중국문명의 학생이었다. 그들은 중국문명에서 적지 않은 것을 배웠다. 다만 그들은 어쨌든 중국이 아니고, 스승이 아니다. 여전히 학생이었다. 그래서, 서방의 도전에 직면하여, 일본은 또 다른 방식으로 대응한다. 몸을 돌려 서방을 향하고, 탈아입구(脫亞入歐)한다. 그리고 극동에 '서방식'국가를 건설하겠다고 맹세한다. 인정해야할 것은 수십년의 노력을 거쳐, 일본은 해냈다. 1867년부터 1990년 의화단의난까지, 일본은 세계대국클럽의 중요한 구성원이 된다. 이때의 중국은 대국클럽이 처분대상으로 전락한다.

 

이본이 짧은 수십년만에 엄청난 발전을 이룬 것은 일본이 서쪽으로 몽을 돌린 것외에, 세계일류대국과 세계주류가치를 공유하는 외에, 일본은 중국문명의 지혜를 가장 잘 계승했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 세월동안, 일본은 중국문명에 대하여 진지하게 연구하였고, 중국에 대하여 주도면밀하게 고찰했다. 특히 중국인들의 그 별 것아닌 지혜, 예를 들어, <손자병법>, 예를 들어, 삼국지의 지혜, 예를 들어, 권모술수, 예를 들어 사기술등, 중국인을 그저 일반적으로 말하면, 이런 것들을 믿지 않는다. 중국은 공자의 가르침을 따라, 군자는 당당하고, 음모를 꾸미지 않으며, 궤계를 멸시하며 더구나 사술을 멀리한다. 그러나 일본은 달랐다. 아마도 섬나라에서 생존하는 특수한 우환의식때문인지, 일본은 이들을 철저히 익히고, 골수까지 스며들었다.

 

중국은 지나간 기나긴 역사기간동안 왕도주의입장에서 세계를 보았다. 주변을 보았다. 중국은 유가문명의 "이하화이(以夏化夷)"하고 왕도주의의 주류가치관을 주변에 영향주며, 문명의 소프트파워로 사방이 조공을 오도록 만들었으며, 문명의 강역과 정치의 강역이 이 과정에서 모두 확충되었다. 그리하여 과거 이천년간 중국인은 조충소기(雕蟲小技)를 노는 것을 무시하고, 음모를 무시하고, 권모술수를 무시했다. 이것은 중국이 이처년간 계속 확창하고 계속 강대해진 원인이다. 그리고 중국은 근대에 서방에 대하여 전환하기 어려웠고, 외적에 대하여 계속하여 못난 모습을 보였다. 마치 송양공처럼.

 

솔직히 인정하였으므로, 자본주의발전초기, 자본원시축적단계에, 세계는 엄복이 인식한 것과 마찬가지로 양육강식의 밀림상태였따. 만일 약육강식의 밀림에서 살아남으려면, 부강을 추구하고, 인류문명의 대도를 통하면서 인류문명의 방향과 미래를 알아야 하고 밀림법칙도 알아야 했고. 소계(小計)도 알아야 했다. 중국문명의 유가정신이 법술세로 전환해야 하고, 음모,사술을 알아야 하고, 세를 빌려 힘을 발할 줄 알아야 했다.

 

이것들에 대하여 반드시 인정해야 한다. 중국문명의 학생인 일본은 스승보다 훨씬 잘해냈다.

 

스승과 학생

 

대도를 통하면서 소계에 정통하다. 이것은 일본이 근대에 성공한 관건이다. 백년 중일교섭사를 회고해보면, 우리는 분명히 볼 수 있다. 일본은 항상 중국을 가지고 시험했다. 중국의 지혜로 중국을 상대하고, 특히 매번 중대한 교섭의 시간을 선택함에 있어서, 일본은 절대로 바람부는대로 물결흘러가는대로 가지 않았다. 항상 주도권을 장악하고 심지어 자잘한 게책을 써서 괴롭히고 힘들게 만들기도 했다.

 

중일근대교섭에서 처음 문제가 터진 것은 1876년의<강화조약(江華條約)>이다.

 

조선은 중국이 번방이다. 중국과의 종번관계는 이미 수백년의 역사가 있다. 중국이 서방을 배우는 길로 부득이하게 들어선 후, 자본은 계속 조선의 대문을 열고, 동북아로 진입하려는 충동이 있었다. 어떻게 번방의 국문을 열고 세계로 나가게 할 것인지는 중국에 있어서 확실히 문제였다. 미국자본이 진입하고자 준비할 때, 중국은 확실히 도우고자 하지 않았다. 이것도 사실이다. 다만 중국은 일단 자신의 내부통합을 완성하면, 반드시 조선을 포함한 여러 번방에 통일규칙을 적용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 때, 일본은 청정부가 양부신정으로 다른 일을 돌볼 틈이 없을 때, 외교적으로 고립주의를 선택할 때, 청정부의 '번국자주'원칙을 곡해하여 미국이 일본을 대한 것처럼 한번의 간단한 사건을 이용하여 강온양면으로 <강화조약>을 체결한다. 그리고 조선과 또 다른 일종의 관계를 구축한다. 중국의 동아시아에서의 맹주지위에 도전한 것이다. 반드시 인정할 것은, 일본이 이번 교섭에서 아주 잘 처리했다는 것이다. 중조종번관계는 일본의 교란으로 전환에 직면했다.

 

중국은 제일류의 인재와 지혜를 보유하고 있다. 일본의 도전은 중국인으로 하여금 이전의 종번관계를 지속할 수 없음을 느끼게 했다. 중국의 진보와 발전은 단병돌파할 수 없다. 중국은 반드시 주변의 그렇게 많은 번방의 이익을 고려해야 한다. 이들 번방은 수백년동안 중국을 따랐고, 보호를 요청했다. 다만 서방이 동방에 도전하고, 전통이 근대로 전환될 때, 중국은 반드시 힘껏 이들 번방들과 함께 나가야 했다. 이렇게 하여야만, 중국은 동북아에서 일본을 막을 수 있었다. 그리고 러시아는 지리적 우세를 이용하여 중국을 잠식했고, 동북아를 노렸다.

 

그후, 이홍장등 중국외교가들은 공고한 동북아환경을 구축하기 위하여 힘을 써서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등을 조선에 끌어들인다. '대국균세'를 통하여 <강화조약>이후 발전하기 시작한 조일특수관계를 견제하기 시작해싸. 일본의 조선에 대한 독점을 방지하고자 했다. 이 방면에서 중국은 종주국의 존엄과 체면을 보호하고, 주변의 기타 번방에 대한 시범작용을 보일 필요가 있었다. 또 다른 방면으로 일본의 야심을 비교적 효과적으로 제어하고, 동북아의 평화를 유지해야 했다. 만일 만청이 수십년간 조선에 대한 정책에서 큰 실수를 했다면, 반드시 이 기간동안 '대국균세'의 구상 및 그 실천이 가장 합리적이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1882년 5월 22일, 중국의 도움하에 <조미통상수호조약>을 체결한다. 미국을 조선에 끌어들인 것은 윈윈의 방안이다. 만일 누가 어느 정도 손실을 보았다면 일본이 더 이상 지연우세를 이용하여 조선을 독점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후 2달도 되지 않아, 조선은 각각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이탈리아와 동일한 조약을 체결한다. 완전한 "대국균세(大國均勢)"가 기본적으로 형성되었다. 일본의 조선에 대한 독점은 완전히 무너진다.

 

그러나,바로 이 시기에, 조선사무를 주관하던 북양대신 이홍장은 친상으로 고향으로 돌아가서 수묘를 한다. 일본인은 조선에서 쿠데타를 계획하고, 대국균세를 주도하던 조선의 실질적인 지도자 민비를 살해하고, 막 형성된 동북아의 대국균세국면을 파괴한다. 마침 이홍장이 부재한 틈을 타서, 이홍장의 후임자인 장수성, 엣부하 마건충은 '대국균세'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고, 어떻게 해야 한반도에서 일본인과 투쟁할 수 있을지를 몰랐다. 마건충은 일본인의 음모를 알아차렸고, 일본인의 목적을 보았다.다만 마건충은 아주 잘못된 결단을 내린다. 그는 상국의 신분으로 대원군을 납치한다. 대원군은 확실히 죄가 커싸. 그러나 그는 어쨌든 조선국왕의 생부이다. 마건충의 조치는 중국의 조선에 대한 통제권을 되가져 왔다. 그러나 이후 이홍장이 고심하여 경영했던 대국균세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동북아의 군웅축록은 중일대치로 바뀌게 된다.

 

일천년의 사제관계는 이제 바뀌었다. 이때 12년후의 청일전쟁은 씨가 뿌려졌다.

 

일본의 소계

 

일본은 이홍장의 친상이라는 정확한 시기에 정확한 목표를 달성한다. 일본이라는 중국문명의 학생은 확실히 이를 통해 중국과의 관계를 뒤집는다. 중국은 이때부터 일본에 대하여 신뢰감도 없고, 겸손할 것도 없었다. 일본이 명치유신시대에 얼마나 발전하였건 중국인이 보기에는 별 성적이 아니었다. 중일관계는 이때부터 리스크가 충만한 길을 걷는다. 중일간에는 조만간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이것이 그 시대 많은 사람의 생각이었다.

 

이년후, 1884년, 중국이 월남문제로 남부변방에서 몸을 뺄 수 없을 때, 전쟁에서 프랑스를 이겼지만, 월남은 부득이 포기해야 했다. 중국이 이런 선택을 한데는 여러가지 원인이 있다. 그중 가장 중요한 원인은 북경에서 더욱 가까운 거리의 조선에 문제가 생겼기때문이다.

 

이해 12월, 일본은 정변을 계획한다. 그 목적은 중국이 남부의 전쟁에 빠져 있을 때 조선을 중국에서 분리시키고 독립하게 하려는 것이다. 현대민주국가를 건립하는 것이 이번 정변의 기치였다. 그러나 진실한 목적은 조선을 일본에 향하게 하고, 일본의 세력범위에 들어가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번 충돌을 해결하기 위하여, 이홍장과 이등박문은 1884년 천진에서 제1차회담을 진행한다. 이번 회담은 근본적으로 조선의 발전방향을 바꾼다. 중국의 번방이 졸지에 중일의 공동관리국가로 된다. 이것은 십년후의 청일전쟁에 씨를 뿌린 것이다.

 

1888년, 서태후는 어린 황제 광서제를 즉위시킨다. 몇년의 기간이 지나면서, 서태후는 60세에 철저히 은회하기고 말년을 편안히 지내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광서제가 친정하도록 한다.

 

서태후는 과거 삼십여년간 중국의 실제적인 최고지도자였다. 그의 은퇴는 국가명예 및 한 시대의 종말이다. 서태후는 아마도 크게 드러내기를 원하지 않았는지 모른다. 그러나, 국가, 조정의 입장에서, 서태후의 60세 생일은 대청왕조의 정치생활에서 가장 큰 사건이다. 그러므로, 1894년에 접어들자, '서태후 육십세 생신'이 있는 해가 되고, 중국의 모든 사정이 이를 중심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러나, 바로 이런 시간에, 일본은 조선내부에 출현한 작은 문제를 가지고 크게 문제삼는다. 청나러정부는 명예와 내부안정을 위하여, 정보, 의사결정, 병력을 배치하고, 군수물자조달을 보장하며, 심지어 다른 나라와 의사소통에서 모두 따라갈 수가 없었다. 중국은 일본에 대응하기 위하여 서태후의 60세 생일행사를 중단하거나 연기할 수 없었다. 그랬다면 중국에서는 내란이 났을 것이다. 중국은 바로 그런 어려운 조건하에서 좌우로 응대해야 했다. 일본은 이런 기회를 이용하여 맹공한다. 전쟁의 결말은 처음부터 결정되어 있었다.

 

청일전쟁은 중국역사의 근본적인 전환점이다. 이 전환점은 근본적으로 중국의 발전발걸음을 교란시킨다. 중국은 원래 양무신정의 기초위에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물질적인 것, 기계적인 완벽함을 해결한 후 한걸음 한걸음 입헌군주주의의 길로 걸어갈 수 있었다. 중국은 바뀌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중국은 외부자극으로 변화해서는 절대로 안되었다. 중국은 이때부터 급진주의의 길을 걷게 된다.

 

1914년, 제1차세게대전이 발발한다. 중국은 '이차혁명'을 거친 후, 국내가 심각하게 분열된다. 참전할 것인지 참전하지 않을 것인지의 문제로 논쟁이 끊이지 않았다. 이 혼란한 시기이, 일본은 망설임없이 참전을 선포한다. 그러나 즉시 유럽에 출병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중국에 출병한다. 산동을 점령하여 독일인의손에서 모든 권익을 빼앗는다. 이 사건은 현대중국의 거대한 전환점이다. 이후의 외교실패, 오사운동은 모두 이와 관련이 있다. 당연히, 일본이 산동에 병력을 출동시킨 것은 우리가 지금 검토해야할 점이 많다. 중국은 어찌되었건 내분을 국가이익보다 위에 놓아서는 안되었다. 이것이 아마도 중국이 현대국가를 구축하는데 가장 주의해야할 점일 것이다.

 

다음 해(1915년), 일본은 중국정부가 그들의 독일의 산동에서의 모든 권익을 승게하는 것을 인정하게 하기 위하여, 원세개의 칭제야심을 이용한다. 그리고 중국을 멸망시키는 '21조'를 내놓는다. 이것은 중일간에 서로 가면을 완전히 벗어버린 것을 의미한다. "21조"의 핵심은 산동에 있지 않고, 일본의 만주, 몽골에 대한 권익추구이다. 이때의 중국은 내정이 분열되어 컨센서스를 이룰 수가 없었다. 공동으로 저항할 역량을 모을 수가 없었다.

 

십여년의 혼란과 구조조정을 거쳐, 장개석은 1928년 관내를 통일한다. 그러나 바로 이 시기에 일본은 황고둔사건을 계획하여 장작림을 폭사시킨다. 그 목적에 대하여는 여러가지 주장이 있다. 그러나 대역사의 관점에서 관찰하면, 중국에 대한 영향이 아주 분명하다. 그후 수십년 중일간의 은원정구는 모두 이 중대한 사변에서 그림자를 찾을 수 있다. 중일간의 싸움은 1945년 제2차세계대전이 끝나야 끝이 난다.

 

백년간의 중일교섭사를 되돌아보면, 일본은 항상 교묘하게 시간을 이용하여 자신의 목표를 실현했다. 이들 시간은 아마도 중국발전의 관건시기이거나 혹은 중국이 곤란한 때, 혹은 중국이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시기였다. 국가입장에서 보면, 일본의 이런 방식은 중국에 대하여 큰 상처를 준다. 이는 군자가 할 짓이 아니다. 그러나 역사의 교훈으로 보면, 중국은 자신의 정치일정을 조정하여 내정때문에 외교를 압박하지 말고, 내정과 외교가 선순환할 수 있도록 해야 했다. 악순환이 아니라. 자신의 약점을 항상 바깥에 드러내지 말아야 했다. 상대방이 공격할 목표를 남겨놓지 말아야 했다. 더더구나 당파분쟁으로 인하여 정치적의견차이를 더 중시하고, 심지어 외교위기를 이용하여 당쟁의 목적을 실현하려 하지 말았어야 한다.

 

외교적으로, 중국은 당당한 동시에 당연히 '소계'도 신경써야 했다. 남을 해치려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되지만 방비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을 수는 없다. 이것은 아마도 중국인이 경계해야할 일이다. "왜인'으로 일본을 봐서도 안된다. 더더구나 아Q의 심리상태로 '소일본'을 능멸하려 해서도 안된다. 일본은 '대화민족'이다. 아시아의 위대한 국가이다. 중국은 옮겨갈 수 없는 이웃이다. 중일은 반드시 우호관계가 되어야 한다. 중일간에는 정상적인 국가관계를 재건해야 한다. 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이 그래야 올 수 있도, 중국은 새로 휘황을 재건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