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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송교인)

송교인암살사건: 음모는 어떻게 탄생했는가?

by 중은우시 2013. 4. 13.

글: 김만루(金滿樓) 

 

홍술조는 비밀리에 응계형을 매수한 후, 응계형은 원세개정부의 남방의 이목이 된다. 그는 혁명진영내에서 진면목이 아직 폭로되지 않았기 때문에, 응계형은 남북세력간의 이중간첩이 될 수 있었다. 새로운 주군을 찾은 후, 응계형은 힘써 일을 한다. 그는 혁명당 격렬분자들이 조직한 "환영국회단"을 화해시키는데 협조했을 뿐아니라, 전 국민당인이 만든 <민강보>를 매수한 후 원세게정부의 입이 되었다. 그후 응계형, 홍술조는 마침 떠오르던 송교인을 겨냥한다. 이로 인하여 놀라운 음모가 나타난다.

 

이번 밀모는 멀리 북경의 원세개와 조병균이 처음부터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중시한 것은 응계형이 밀전에 언급한 "손,황송열사"이다. 그 소위 열사(劣史)는 도대체 어떤 것일까?

 

모두 알다시피, 손중산, 황흥등은 청나라말기 혁명을 준비할 때 일본을 기지로 삼았다. 그동안 일부 일본낭인들과 밀접하게 교류했다. 혁명의 성공을 위하여, 많은 경우 목적을 추구하고, 수단을 가리지 않았고, 그동안 설명하기 어렵고 말하기 어려운 협력과 계모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손중산, 황흥은 남경국민정부가 해산된 후 이미 점차 정치권에서 물러났다. 응계형등이 주로 공격대상으로 삼은 것은 북상하여 조각하고자 준비하는 송교인이었다. 돌파구는 소위 "간도문제"였다.

 

이 일을 얘기하자면, 1907년부터 얘기해야 한다. 그해 3월, 송교인은 일본에서 동북으로 간다. 이번 여행의 목적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현지의 반청무장세력과 연락하여 대사를 도모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간도문제"를 조사하는 것이다.

 

소위 "간도"는 원래 길림 연변 도문강 북안의 탄지(灘地)를 가리킨다. 1860-1870년대 일부 조선농민이 도문강을 넘어가 개간하기 시작한다. 이로 인하여 영토와 관할의 분쟁이 있었다. 청일전쟁후, 일본은 중국동북을 엿보는 동시에 조선을 합병하기전에 대거 여론조작을 하고 있었다. '간도'는 '조선속지'라고 주장한 것이다. 심지어 현지에 경찰을 파견하여 개간민들을 관리하였다. 목적은 '간도'를 이용하여 이를 발판으로 삼아 동북에 침략할 핑계로 삼기 위한 것이다.

 

바로 이 때, 두명의 일본낭인과 군인이 서로 결탁한 간첩조직이 동북지구에서 활약하고 있었다. 하나는 사람들이 잘 아는 "흑룡회"이고 다른 하나는 "장백산회"였다. 후자는 전문적으로 가짜 증거를 조작하여 '간도'가 중국영토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했다. 일본인의 음모임을 안 후에, 송교인은 '정촌(貞村)'으로 개명하고, 일본혁명당인 편산잠(片山潛)의 도움으로 비밀리에 "장백산회"에 들어간다. 그는 현지에서 간도지구를 시찰한 후 대량의 1차자료를 수집한다. 그리고 '장백산회'가 만든 가짜증거사신을 회수하는 모험을 한다. 그후 송교인은 한성도서관, 동경제국대학도서관으로 가서, 자료를 열ㄹ마하고 동경에서 <간도문제>를 출간한다. 책에서 일본의 음모를 적나라하게 폭로한다. 이것은 나중에 오록정등이 변방업무를 진행할 때 일본과의 담판에서 유력한 증거로 쓰인다.

 

이를 위하여, 당시 외무부상서인 원세개는 이 서적을 아주 중시했다. 그리고 주일공사 이가구에게 전보를 보내어 송교인을 북경으로 한번 보내어 당시의 담판을 돕게 해달라고 한다. 이 소식을 들은 후, 송교인은 국가를 위하여 일할 생각이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혁명당인 신분때문에, 당시 감히 북경으로 들어가지는 못했다. 그래서 완곡하게 자신은 경제적으로 빈곤하니, 청나라조정이 일정한 경제적 도움을 주거나 돈을 주어 일본인에게 조작한 증거를 매입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하였다. 이 일은 외부에 누설된다. 중국과 일본의 신문에서 이를 공개한다. 일부 혁명당인과 일본낭인은 송교인을 대거 공격하고, 그가 혁명을 배반했고, 청나라조정에 의탁하려 한다고 말했다. 난감해진 송교인은 할 수 없이 북경으로 갈 생각을 포기하고, 자신이 이렇게 한 것은 혁명을 위하여 경비모집을 한 것일 뿐이라고 말한다.

 

이 역사에 대하여, 응계형은 다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전보에서 말한 "송교인사기사건"은 또 다른 사건이다. 나중에 송교인은 일본에서 <간도문제>라는 책을 재판하는데 판권분쟁이 일어난다. 원래, <간도문제>의 서적원고는 최초에 유학생편역사가 200위안의 돈을 내서 구매하여 출판한다. 다만 당시 판권을 매입하지는 않았다. 나중에 송교인은 경제적 곤란으로, 그리고 원서에는 착오가 너무 많아서, 스스로 다시 돈을 모아 재인쇄한다. 유학생편역사의 사장은 이를 들은 후 일본경찰청에 소송을 제기한다. 다만 최종적으로 '판권은 원래 매입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흐지부지 끝난다. 응계형이 전보에서 말한 '경찰송교인사기사건형사기록공술'이란느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소위 '사기사건'은 근본적으로 성립되지 않는 것이었다. 응계형은 그저 사실을 날조하여 허장성세를 부린 것이다. 그의 목적이야말로 진정한 사기였다. 원세개정부로부터 돈을 뜯어내려는 것이었다.

 

홍술조는 소위 "송교인사기사건" 소식을 들은 후, 마찬가지로 기화가거(奇貨可居)라고 여긴다. 그는 두번이나 밀전을 보내어 응계형에게 조병균의 비서 정모를 거치지 말고 자신과 단선으로 연락하라고 얘기한다. 주로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몫을 나눠먹을 것을 우려해서였다. 사실상 홍술조와 응계형 두 사람의 연락상황을 보면, 배후에는 모두 경제적 이익이 있다. 예를 들어, 홍술조가 2월 5일 응계형에게 보낸 밀전을 보면, 그중에 "송교인사기사건"의 증거를 손에 넣으면, 바로 중앙에 돈을 요구하겠다고 한다. 그러나 뒤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홍술조는 "예전과 같이 3분의 1을 깍는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응계형이 원세개정부로부터 공진회해산비, 업무비로 3만원을 받았을 때, 홍술조가 아래위를 연결시켜준데 감사하기 위하여 응계형은 아마도 홍술조에게 1만원을 주었을 것이다. 이번의 소위 "송교인사기사건'이 성공한다면 원세개가 30만을 상으로 내렸을 때 홍술조는 10만을 나눠받을 수 있다. 설사 그렇게 많지 않더라도, 상당한 수입이 될 것이다. 그래서 응계형, 홍술조는 당연히 이 돈벌 기회를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문제의 관건은 원세개측에서도 토끼를 보지 않으면 매를 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가볍게 응계형의 일방적인 말을 믿지 않았다. 이를 위하여 홍술조는 응계형보다 더 조급해 했다. 그는 그후 며칠동안 계속 응계형에게 전보를 보낸다. "송교인사기사건"의 진전이 어떤지 물어보는 것이다. 그중에 특별히 한 사람을 언급한다. 바로 "오난영(吳蘭英)"이다. 2월 2일의 밀전에서, 홍술조는 "오난영이 이미 방법이 있는지"를 물어본다. 2월 8일의 밀전에서도 다시 묻는다: "오난영이 이미 갔는가?" 얼마나 마음이 급박했는지를 알 수 있는 일이다.

 

오난영은 도대체 누구인가? 지금은 알 수가 없다. 그는 아마도 응계형의 부하이거나, 아예 없는 사람일 것이다. 응계형이 혼자서 만들어낸 사람일 수도 있다. 응계형, 홍술조간에 오고간 밀전을 보면, 오난영은 마치 '송교인사기사건'의 증거수집책임자인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아마도 친히 일본으로 가서 송교인이 관련된 소송의 일부 문건을 가지고 귀국했을 것이다. 그러나 괴이한 점은 2월 22일, 홍술조가 응계형에게 보낸 밀전에서 이런 말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오난영이 떠나간 후, 다른 사람으로 대체해주기를 바란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 아마도 응계형이 사기사건증거를 수집하려는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을 것이다. 아니면 거짓말을 계쏙 해나갈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오난영이라는 사람이 실종되었다는 말로 변명했을 것이다. 그러나 홍술조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보내라고 독촉하는 것이다. 반드시 '송교인사기사건'의 진실한 증거를 확보하라는 것이다.

 

이 기간동안, 홀술조는 다시 응계형과 또 다른 거래를 한다. 그것은 바로 강소관찰사의 건이다. 아마도 응계형이 강소주호순사장의 직을 얻은데서 아이디어를 얻었는지 홍술조는 강소각로관찰사의 인선이 아직 확정되지 않은 것을 알고는 상주인인 그도 욕심을 냈다. 상주 혹은 회양의 여하한 1로의 관찰사를 얻고자 했다. 민국초기, 관찰사는 대체로 임시관직이었다. 돈만 받고 일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방직무이므로 각성도독이 추천해서 중앙이 임명하면 그만이었다. 중앙은 홍술조 자신이 처리할 수 있다. 그러나 강소는 정덕전이 도독이고, 홍술조의 손은 미치지 못한다. 그래서 2월 11일 밀전에서 응계형에게 도와달라고 한다. 그가 정덕전에게 좋은 말을 좀 해달라는 것이다. 응계형이 진심으로 일을 하게 만들기 위해, 홍술조는 전문에서 이런 말을 추가한다: "송교인사건을 손에 넣으면 즉시 돈을 받아낼 수 있다." 그뜻은 두 가지 일을 엮어서 서로 이익을 나누어 먹자는 것이다.

 

십일이 지났다. 응계형쪽은 여전히 아무런 동정이 없다. 홍술조는 아마 조급해진 것같다. 그는 그후에 응계형에게 긴 서신을 보낸다. 서신에서 3가지 문제를 언급한다: 하나는 국민당에서 최근 누군가 북경으로 와서 투항했다는 것이다. 스스로 '환영국회단'을 취소하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그의 추측에 따르면 이것은 이익을 얻으려는 것이고 우리와 같은 유형이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송교인사기사건'의 증거를 손에 넣은 후, 돈을 받아내는 것은 국회성립시가 좋다는 것이다. 너무 빨라도 안되고 너무 늦어도 안된다는 것이다. 금액은 삼십만을 넘으면 안된다고 했다. 왜냐하면 북경정부의 재정도 넉넉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지막 하나는, 관찰사건은 장온관이 이미 정덕전에게 두번 얘기했다. 그러나 누군가 방해하고 있다. 응계형이 그 원인을 조사해봐 달라. 소식이 있으면 빨리 알려달라.

 

홍술조가 말한 앞의 두 가지 일은 그 뜻이 여전히 응계형으로 하여금 하루빨리 "송교인사기사건"의 일을 잘 처리하게 하려는 것이다. 특히 국민당측면에서 이미 누군가 투항하려 하는 상황이므로 빨리 손을 쓰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경쟁상대방이 나타날 것이고, 만일 다른 사람이 채어가면 아마도 공로가 모두 물거품이 될 것이다.

 

관찰사건은 홍술조가 완전히 잘못 생각한 것이다. 사실상 정덕전은 응계형, 홍술조 두 사람을 믿지 않았다. 일찌기 1912년말, 정덕전은 원세개에게 보낸 밀전에서 이렇게 말한다: "응계형이 투항하여 일한 이래, 힘을 다하여 일하려고 노력하나, 힘이 부족하다" 홍술조가 응계형을 데리고 남경으로 와서 정덕전을 만난 후, 정덕전이 다음날 원세개에게 밀전을 보낸다. 응계형의 말은 '터무니 없고 번지르르하다" 그와 중앙간에 오간 전문을 본 후에는 '더욱 지리멸렬하며' 진위를 분간할 수 없다고 말한다. 한마디로 이 자는 믿을만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전에 대총통에게 사면을 건의하고, 그의 대죄입공(戴罪立功)을 건의한 것은 당시의 일종의 정책이고, 최근 들어 응계형이 떠들고 다니며 참칭하는 일이 많다. 그가 이미 감사하도록 지시했으니 중앙에서도 주의하기 바란다는 등의 내용이다. 이를 보면 정덕전은 응계형을 신뢰하지 않았다. 홍술조가 그에게 부탁해봐야 좋은 결과가 나올 수가 없다.

 

3월 6일이 되어, 홍술조는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게 된다. 그는 그날 응계형에게 서신을 보내어 원망한다. "송교인사기사건"의 사정은 이미 한 달이나 되었는데, 지금 원본도 없고, 복사본도 없다. 당신은 총명한 사람이니 반드시 방법을 강구하여 증거를 얻어야 한다. 아니면 격렬한 행동이 있어야 비로소 돈을 달라고 할 수가 있다. 이를 위하여 홍술조는 특별히 서신에서 절강도독 주서가 죽여서 병변이 일어난 등량재의 예를 든다. 등을 제거하기 위하여 먼저 여론을 고취시키고, 마지막에 신문에 사망소식을 싣는다. 이것이야말로 증거를 찾을 수 있는 일처리방식이다. 그렇지 않으면 무슨 증거도 없다. 어찌 원세개정부에 돈을 받아낼 수 있단 말인가.

 

이때 큰 사업거리가 생겼다. 3월 10일, 응계형은 홍술조에게 밀전을 보낸다. 육육이절로 '팔리공채' 삼백오십만원을 사도록 도와달라는 것이다. 그리고 상해지정은행에 현금을 내겠다고 약속한다. 돌연 생긴 일이어서, 홍술조는 응계형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다음 날 답신에서 무슨 뜻인지 모르겠으니 상세히 설명해달라고 한다. 아마도 다시 한번 응계형의 밀전을 받았을 것이다. 홍술조는 3월 13일 답전에서 이렇게 말한다. 응계형의 전보는 이미 재정총장에게 보내어 검토하도록 했다. 그러나 채표는 "팔리공채'가 아니라 '육리공채'이다. 그리고 응계형이 말한 할인율은 너무 지나쳐서 통과되기 어렵다. 전문은 마지막에, 홍술조는 응게형에게 '송교인사기사건'을 빨리 처리하라고 독촉한다. 그리고 "훼송수훈위(毁宋酬勳位)"를 제기하며 일을 급히 처리하라고 했다.

 

이 밀전을 받은 후, 응계형은 마음 속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후 응계형은 다시 밀함을 보낸다. 북경정부는 지난해 9월에 '팔리공채'를 발행했는데 바깥에 돌면서 매각되었다. 매백만이 단지 육십오만에 거래되었다. 그는 친척 유, 호, 설의 삼가와 함께 662절(66.2%)로 사기를 원한다. 즉 매 백만당 육십육만이천원으로 삼백오십만을 매입하고자 한다. 상해지정은행에서 지급한다. 응계형은 그럴듯하게 말한다. 그가 이렇게 하는 것은 주로 북경정부의 재정곤란을 해소해주려는 것이다. 국가의 걱정을 나눠지려는 것이고, 다른 뜻이 없다는 것이다. 그는 홍술조가 재정부장에게 이 말을 전해달라고 했다. 왜냐하면 '밤이 길면 꿈도 많아지고 날이 길어지면 변수가 생길까 우려된다"는 것이다. 서신의 마지막에 응계형이 특별히 강조한다. 나는 반달이나 들여서 '이 건을 얻었다. 중앙재정을 도와주려는 계책이다" 홍술조가 반드시 전해주기 바란다고 했다. 여기까지 얘기하니 응계형의 여우꼬리가 드러난 셈이다.

 

민국초기, 국면이 안정되지 않아서, 지방의 각종 세금은 제대로 납부되지 않았다. 중앙재정은 극도로 긴장되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북경정부는 1912년 5월말 '육리공채'를 발행한다. 채권은 저당이 있고 이자도 높았으며, 할인도 커서 매입후 시장에서 판매하면 큰 이익을 얻었다. 일시에 이를 찾는 사람이 많아진다. 그외에 남경임시정부는 1912년 군수공채를 발행하는데 연리 팔리였다. 그러나 저당이 없어서 신용이 없었다. 공채는 1억원을 발행하려 했으나, 실제로는 칠백여만만 팔렸다. 시장의 반응이 냉담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응계형이 말한 '팔리공채'는 홍술조가 말한 '육리공채'이지 남경임시정부의 '팔리군수공채'는 아닐 것이다. 이치는 아주 간단하다. 응계형은 온갖 방법을 써서 350만원을 마련했고, 목적은 바로 이 돈으로 투기하려는 것이다. 만일 돈벌 거리가 없다면 왜 이렇게 힘들게 하려고 하겠는가?

 

이 밀전에서 응계형은 몇 가지 중요한 정보를 털어놓는다. 첫째는 북경에 송교인, 황흥등의 행적을 보고한다. 최근 송교인은 상해 동부로 황흥의 집에 거주한다. 그중 황흥이 사적으로 가지고 있던 공채 육십만을 그에게 주어 의풍은행에 저당잡혔고, 이를 통해서 오십만을 얻어서 송교인의 운동비로 쓴다는 것이다. 그가 여기에서 십만원을 받았다. 어제 이미 이만오천을 인출했다. "강소 절강의 두 부 및 서주 안휘의 군마의 수요에 쓴다" 이외에 황흥은 각종 주식 40여만이 있다. 황흥, 송교인의 일처리에 관한 것에서 응계형은 홍술조가 즉시 원세개와 조병균에게 보고해주기를 바랐다. 표면적으로는 사후에 문제될 것을 피하려는 것이고 그 때가 되어서 제대로 해명할 수 없을 것을 우려한 것이지만, 실제로는 이를 공로로 하여 상을 받으려는 것이었다. 홍술조가 말한 '훼송수훈위'에 대하여 응계형은 말한다. 그는 '공로와 상을 받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그러나 대계에 관련되니 부저추신법으로 송을 제거하지 않으면 반드시 시비가 계속 일어날 것이고, 대국은 필히 교란될 것이다"라고 한다.

 

응계형이 한 이 말의 진위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이 밀전의 가장 중요한 점은 응계형이 처음으로 '송교인제거"의 결심을 나타냈다는 것이다. 전체 사건의 논리를 보면, 응게형은 이때 아주 난감한 처지에 처해 있었다. 그는 잘 모르는 상황하에서 '송교인사기사건'을 날조했고, 원세개측에서 아주 중시하고, 홍술조가 계속 재촉하자, 그는 1달여동안 아무런 진짜 증거를 내놓지 못했다. 이는 공포(空砲)를 날린 것이고, 원세개, 조병균의 그에 대한 인상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는 내놓을 것이 없게 되고, 특히 공채구매라는 경제적이익이 끼어들고 난 이후, 응계형은 최종적으로 위험을 감수하기로 한다. "송교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에서 직접 "송교인의 육체를 소멸시키는 것"으로 바꾼다.

 

이를 위하여, 응계형은 밀전에서 마지막으로 말한다. 비록 '송교인제거' 건이 쉽지는 않겠지만, 그는 방법을 강구하여 이십여만위안을 준비하여 전력을 다하여 이 계획을 실시하겠다고 말한다. "급히 진행하고 언젠가 복명하겠다" 이 밀함이 보내어진 다음 날, 응계형이 홍술조에게 연속 2통의 밀전을 보낸다. 첫째 밀전에서는 공채350만원을 구매하는 일은 변함없다고 강조하고, 둘째 밀전에서는 자신의 "송교인제거' 결심을 표시하기 위하여, 전보에서 "양산비적(梁山匪賊)은 사방으로 다니면서 교란시키고 있다. 위험이 실로 심하다. 이미 긴급명령을 발송했고 설법초포(設法剿捕)하도록 했다. 전해주시고 지시를 기다린다."

 

"양산비적"은 원래 송강(宋江)을 말한다. 여기서는 당연히 송교인을 가리킨다. 소위 '설법초포'는 행동을 취한다는 것이다. 응계형계획의 돌연한 변화에 대하여, 홍술조는 어떻게 반응하였는가? 3일후 홍술조가 답전을 보낸다: "채표는 특별승인을 받았음. 언제 현금을 가지고 채표를 받아갈지는 별도로 전보를 보내겠음. 나에게 약간의 수수료를 달라. 오늘 회신바람.", 그리고 하루가 지나서, 홍술조는 다시 응계형에게 답전을 보낸다: "한전(寒電)은 말대로 처리하라. 헛소리이면 더욱 꺼리는 자들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홀술조의 두 전보는 마찬가지로 의미심장하다. 먼저 채표이다. 그는 응계형이 말하는 채표구매건이 이미 비준나왔다고 한다. 그리고 그에게 수수료를 달라고 했다. 그리고 응계형이 이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말해주기를 기다렸다. 이런 때에도 개인이익을 잊지 않았다. 정말 이익에 눈이 멀었다고 할 수 있다. 이어서 영계형의 경제적요구를 들어준 후, 홍술조는 다음 나라 응계형이 말한대도 처리할 것을 지시한다. 이뿐 아니라, 그는 친히 부추긴다. 이번에는 저번처럼 헛말이 되지 않도록 하라는 것이다.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웃음거리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설명이 필요한 것은 홍술조가 이전에 말한 "훼송수훈위"의 "훼"자는 여전히 명예훼손이라는 의미이지 죽이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응계형이 '송교인제거'를 제안한 후 홍술조는 거기에서 살기를 느끼지 못했을 리 없다. 그는 3월 18일의 답신에서 실제로 명확히 응계형의 송교인암살계획에 동의한 것이다. 이 점은 반박할 수 없다.

 

이뿐아니라, 홍술조는 다시 3월 19일의 전보에서 응계형에게 3글자를 보낸다: "일을 빨리 하라(事速行)". 이는 이미 송교인암살의 하루전이다. 3월 20일, 즉 송교인의 암살 당일, 응계형은 홍술조에게 밀전을 보낸다. 명령은 이미 내렸으니, 위에 보고해달라고. 3월 21일, 응계형은 홀술조에게 마지막 밀전을 보낸다. "비괴(匪魁)를 이미 없앴다. 우리군은 한 명의 사상자도 없다. 안위할 일이다. 보고해주기 바란다."

 

전체 암살과정은 여기서 끝난다. 오고간 밀전, 밀함에서 분명히 볼 수 있다. 송교인암살사건의 막후지시자는 응계형과 홍술조 두 사람이다. 그렇다면, 독자들은 물을 것이다. 직접 송교인을 암살한 자객은 누구인가. 응계형은 도 어떻게 그 사람을 찾아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