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송교인)

송교인암살사건: 황흥이 사건에 휘말리다.

중은우시 2013. 4. 13. 21:20

글: 김만루(金滿樓) 

 

 

 

살수 무사영이 프랑스조계 순포방에서 상해지방검찰청으로 이송되고, 다시 응계형이 구금된 강소해운국으로 이송된 후, 호군 진기울의 부대인 61단에서 감시한다. 1주일도 되지 않아, 무사영은 돌연 군영에 구금된 상태에서 급사한다. 괜찮았던 사람이 그리고 아주 중요한 살인혐의자가 어찌이렇게 쉽게 죽는단 말인가. 그 배후에는 무슨 말못할 음모가 숨어 있지 않을까?

 

무사영의 죽음을 얘기하면, 먼저 범인의 이송부터 얘기해야 한다. 그것은 "송교인암살사건"의 관할문제이다. 알다시피, 송교인이 암살당한 곳은 상해기차역이다. 사건범인 응계형의 소재지는 프랑스조계지이다. 전자는 중국측 관할이고, 후자는 조계당국이 관할한다; 혐의자의 구금체포와 심문이 최초에는 조계당국에서 처리한다. 그러나 '송교인암살사건'의 영향이 크고, 민감한 정치문제에 관련된다. 그래서 혁명당인과 여론계에서는 강력하게 중국측에 넘겨서 심리하도록 요구했다.

 

여러측의 협상을 거쳐, 조계영사단은 제7차예심이 끝난 후, "송교인사건"을 중국법정에 넘겨서 처리하기로 한다. 이 소식을 들은 후, 국민당측에서는 신속히 반응을 보인다. 그리고 상해에 특별법정을 조직하여 심리를 진행하도록 건의한다. 그후, '송교인암살사건'을 책임진 강소도독 정덕전은 이 건의를 원세개와 북경내무부, 사법부로 보낸다. 원세개는 그날로 답전을 보내 특별법정을 설립하는 것을 동의한다. 다만 법정의 조직과 소재지문제에서, 북경측과 국민당인간에는 의견차이가 나타난다.

 

사법총장 허세영은  송교인암살사건은 영향이 중대하여, 당연히 북경대리원에서 공개재판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국민당인은 그러나 사건이 상해에서 발생했으니, 당연히 상해에 특별법정을 설립하여 심리해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국민당인들은 먼저 황부를 재판장, 왕총혜, 오정방을 재판관으로 하는 특별법정을 앞서서 조직한다. 그리고 중앙에 비준을 요청한다. 이에 대하여 북경측에서는 불만이 컸다. 왜냐하면 오정방은 남경임시정부의 사법총장이고, 황부와 왕총혜는 모두 혁명당인이다. 허세영은 재삼 고려한 후, 상해지방검찰청이 책임지고 심리하도록 제안한다.

 

이 비복에 대하여, 국민당인은 이치를 들어 다툰다. 정덕전은 골치가 아파지자, 다시 원세개에게 전보를 보낸다. 특별법정을 조직하는 것의 중요성을 말한다. 원세개는 전보를 받은 후 답을 보낸다. 사법총장이 부서를 거절하여 그도 반박할 수 없고, 국민당인의 의견대로 명령을 반포할 수 없다. 그후 허세영은 다시 양보한다. 그는 오정방이 서리상해지방심판장이 되어 이 사건을 심리하도록 건의한다. 그러나 국민당에서는 원안을 고집한다. 이 남북다툼에서 범인 무사영은 4월 24일 돌연 급사해버린다.

 

"송교인사건"이 발생한 후, 강소도독 정덕전과 민정장 응덕굉은 남경에서 상해로 와서 업무를 처리했다. 그러나 그들의 눈아래에서, 가장 중요한 범인이 기이하게 사망한다. 이것은 여론계의 큰 불만을 산다. 이런 압력하에, 정덕전, 응덕굉은 4월 26일 공개통전의 형식으로 '송교인암살사건"의 관련증거 즉 응계형, 홍술조의 밀전을 모조리 발표해버린다.

 

총리 조병균, 내무부 비서 홍술조가 "송교인암살사건"의 밀모에 가담했다는 것을 알고난 후, 국민당인들은 격분한다. 황흥은 그후 원세개에게 전보를 보내어 직접 '국무원총리 조병균이 암살주모범'이라고 말한다. 지금 도독 정덕전이 상해에서 특별법정을 만드른넫, 사법총장 허세영이 극력반대하면서 북경 대리원에서 심리하자고 하는데, 만일 그렇다면, 법원은 정부의 틀 아래 있으므로, 사건이 공정하게 재판될 수 있는가? 죄인이 당연히 받아야할 처벌을 받을 수 있는가, 정부가 사법공정을 방해하지 않을 수 있는가 이런 모든 것이 우려된다. 다시 말해서, '송교인사건'은 정부에 관련되고, 사법총장은 원래 국무원의 일원이고, 그의 상사인 조병균이 사건의 주점이다. 어찌 사람들이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전보의 끝에, 황흥은 원세개에게 "영단을 내리고 방해받지 마십시오" "대국을 유지하고 인심을 안정시키십시오"라고 말한다.

 

이틀후, 원세개가 회신한다. 총리 조병균은 응계형과 단지 1번 서신교환을 했을 뿐이다. 즉 1월 14일으 ㅣ서신에서 비밀코드책 1권을 주었다. 만일 이 서신 하나를 가지고 조병균이 주범이라고 말한다는 것은 법률과 증거법칙에서 성립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최근 들어 2차혁명, 3차혁명을 얘기하는데, 만일 모두 이를 근거로 한다면 모두 위험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조병균, 홍술조, 응계형 3인간의 오고간 일은 갑, 을이 정을 도모하고, 갑이 을에게 정이 이미 시켰다고 속인 것과 가다. 병은 실제로 사정을 몰랐다. 만일 이것을 가지고 병의 죄를 묻는다면, 그것은 불공정하다. 현재의 긴요한 문제는 법률무서에서 각종 증거를 상세히 연구해서, 증언이 모두 나온 다음에 재판을 공개하는 것이다. 그러면 진상이 자연스럽게 드러날 것이다.

 

황흥이 직접 특별법정 설립의 일을 명령하도록 요구한 것에 대하여 원세개는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는 답신에서 말한다. 민국은 입헌국가이다. 사법독립원칙은 쉽게 무너뜨려서 안된다. 사법총장 허세영은 법률을 보장하기 위하여 부서를 거절한 것이다. 이것은 그의 직분이다. 편견이나 사적인 감정때문이 아니다. 만일 그를 사직하게 하면, 법관계에서 반발이 일 것이다. 현재 국사가 아주 어려운데, 황흥이 이해해주기 바란다.

 

원세개의 이 말은 당당하고 약간의 헛점도 없다. 일거에 황흥의 질의를 막아버렸다. 사적으로 원세개는 정덕전, 황흥등의 방식에 불만이 컸다. 그는 일찌기 이렇게 의문을 표했다. 황흥은 직무가 없는 사람인데, 무슨 권력으로 '송교인암살사건'의 증거문건에 날인하는가? 정부관리로, 정덕전은 또 무슨 권력으로 원래 법원이 공포할 증거를 공표하는가? 황흥이 자신에게 독단전제하여, 특별법정을 설립하라는 요구에 대하여, 이것은 사람을 곤란하게 하고 자신에게 사법독립을 해쳤다는 오명을 쓰게 하려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했다.

 

사법절차로 보면, 황흥의 방식은 확실히 타당하지 않았다. 재판을 거치기도 전에, 황흥은 '총리가 사건주범'이라고 못박았다. 만일 국가원수에게 사법에 간섭하라고 요구하면, 이것은 모두 법치원칙에 위반하는 것이다. 이때, 부총통 여원홍도 통전을 낸다. 공화국가는 사법을 중시해야 한다. 행정기관이 불법적으로 간섭해서는 안된다. 입법기관이 임의로 침범해서도 안된다. 송교인암살사건은 순수한 법률문제이다. 정덕전등이 증거를 공표한 것은 법정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군정부에서 나온 것이어서, 위법의 혐의가 있다.

 

송교인과 여러해동안 친구인 황흥의 격동은 이해할 만하다. 하물며 중국은 법치관념이 없었다. 민주공화가 막 확립되고, 소위 '삼권분립, 사법독립'운운은 대부분 개념측면에 머물렀다. 일단 운용단계에 들어가면, 개인의 호오 혹은 집단이익으로 이념이 왜곡되곤 했다.

 

혁명당인측에서 원세개에 대하여 강격한 태도를 취한 사람은 황흥만이 아니다. 또 다른 혁명영수 손중산도 그러했다. 손중산은 송교인과 관계가 계속 좋지 않았었다. 많은 문제에서, 두 사람의 관점차이는 아주 컸다. 예를 들어, 송교인은 손중산의 독단적인 스타일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리고 신해혁명때, 송교인은 내각제를 주장했고, 손중산은 총통제를 주장한다. 원세개가 정권을 빼앗은 후, 손중산은 정치적으로 소극적이었지만, 송교인은 진취적이었다. 국민당인은 제1차국회선거에서 대승을 거두었는데 그 공은 송교인이 가장 컸다.

 

1913년 2월 15일, 송교인은 무한에서 상해로 온다. 바로 5일전에, 손중산은 상해로 떠나 일본을 방문한다. 통상적인 이치대로라면, 명의상의 지도자인 손중산과 실제지도자인 송교인의 두 사람은 원래 상해에서 만나고 국민당선거승리후의 시정방침을 협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모든 것은 발생하지 않는다.  

 

송교인암살후, 손중산은 다음 날 즉시 소식을 듣자마자 귀국을 결정한다. 4일후, 손중산 일행은 상해로 돌아온다. 그후에 회의를 열어 '송교인사건'의 처리방법을 토론한다. 황흥등이 법률로 해결할 것을 주장하는 것과 달리, 손중산은 처음부터 원세개가 배후에서 모든 것을 기획했다고 생각한다. 상해로 돌아온 다음 날, 손중산은 일본주상해총영사 유길명을 만났을 때, "송교인암살사건은 중대하다. 어제 아침 상해로 돌아온 이래, 받은 보도에 근거하면 그 수는 비록 적지만, 원세개가 교사한 증거가 드러난다."

 

국민당인의 대책을 논의할 때, 손중산은 명확히 표시한다. 한 발자욱도 양보할 수 없다. 다만 당내의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은 정당한 수단으로 법률에 넘겨 해결하자고 주장한다. 국회가 곧 개최될 것이므로, 만일 국민당인의 '정당내각'이 실현된다면, 원세개에 대항할 방법은 있다는 것이다.

 

4월 13일, 국민당인은 장원(張園)에서 송교인을 위한 성대한 추도회를 개최한다. 그날 현장에 모인 사람은 근 2만명이다. 여러 사람들의 만련(挽聯)중에, 황흥이 쓴 것이 특히 눈에 띄었다:

 

"전년살오녹정(前年殺吳祿貞), 거년살장진무(去年殺張振武), 금년우살송교인(今年又殺宋敎仁); 니설시응계형(你說是應桂馨), 타설시홍술조(他說是洪述祖), 아설확시원세개(我說確是袁世凱)"

 

그날, 황흥은 병으로 출석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출석하지 않은 손중산도 만련을 하나 보낸다: "작민권보장(作民權保障), 수비후사자(誰非後事者); 위헌법유혈(爲憲法有血), 공직제일인(公直第一人)"

 

만련으로 보면, 황흥의 태도는 격렬하고 손중산은 오히려 평화롭다. 그러나 배후의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손중산은 귀국후 진기미, 거정등과 황흥의 거소에서 대책을 논의할 때, 황흥은 국사를 중시여기고 법률을 정당한 해결방법으로 얘기했다. 그러나 급진파인 대계도등의 강렬한 반대에 부닥친다. 손중산은 후자의 편에 선다. 그리고 거병하여 원세개를 토벌할 것을 주장한다. 그의 이유는 이렇다: 원세개는 총통이고, 총통이 암살을 지시하면, 이것은 절대 법률로 해결할 수 없다. 해결할 수 있는 것은 무력뿐이다. 황흥이 이어서 제기한다. 남방혁명당인은 무력이 부족한데, 함부로 일을 벌이면, 대국이 어지러워져서 수습이 곤란하게 될 것이다. 이에 대하여 손중산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극력 송교인의 피살은 그 한 사람의 일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빨리 거병하여 무력으로 해결하는 외에 다른 방법을 절대 없다고 말한다. 다만, 회의에서 다수의 사람은 황흥의 견해에 동의한다. 거병반원의 제안은 결국 흐지부지된다.

 

국민당인이 무력반원을 포기한 또 다른 원인이 있다. 그것은 바로 국회가 곧 개최된다는 것이다. 의원의 우세를 점하고 있으므로, 일부 국민당인은 국회를 통하여 원세개를 제약할 수 있다고 보았다. "송교인사건'도 마찬가지로 공정하게 법률로 해결할 수 있다고 보았다. 1913년 4월 8일, 중화민국의 초대국회가 북경에서 개최된다. 국민당의원이 몰려와서 원세개에게 기세를 보인다. 총통부에서 축하하기 위하여 파견한 대표 양사이는 국회를 염탐하러 온것이라고 쫓아낸다. 4월 25일, 즉 정덕전이 "송교인사건"의 증거문건을 공표하기 하루전날, 국민당인 장계, 왕정정은 참의원 정,부의장에 선출된다. 이들이 승리에 도취해 있을 때, 원세개는 빨리 그들에게 한 방 먹인다.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장계, 왕정정이 정부의장에 선출된 그날 저녁, 국무총리 조병균, 재정총장 주학희, 외교총장 육징상은 북경회풍은행빌딩에서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일본의 5국은행단대표와 어려운 협상을 진행하고 있었다. 쌍방대표는 다음 날 새벽까지 논의하여 각종 조항이 최종 합의된다. 이것이 바로 역사상 "선후대차관(善候對差款)"이다.

 

이 대차관계약에서, 오국은행단은 원세개정부이 2500만파운드를 빌려주기로 약속한다. 연리5%이고 기한은 47년이다. 2500만파운드는 금액이 큰 것같지만 커미션과 이전의 차관, 선급금, 배상금을 제하고 나면, 실제로 손에 들어온 것이 1000만파운드도 되지 않았다.(약1억은원) 그리고 기한도래후 갚아야할 원리금은 6785만파운드에 달했다.

 

"선후대차관"의 협상과정에서 중국측대표는 고생을 많이 겪으면서 손에 넣은 돈은 많지 않았다. 보증절차도 아주 가혹했다. 염세등 세금을 담보로 냈을 뿐아니라, 은행단이 각종 우선권, 감독권, 심사권, 채용권등등을 행사했다.

 

소식이 전해지자, 온건파이건 급진파이건 국민당인들은 모두 분개했다. 이에 참의원 정,부의장인 장계, 왕정정은 전국에 통전을 날려 정부가 국회의 비준을 받지 않고 '선우대차관'을 서명했는데, 이는 국회를 무시하는 것이며 원세개는 국회를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보고 있다. 국회는 대차관을 승인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국회의 항의전보가 나간 후, 이열균, 호한민등 국민당적의 도독들도 속속 통전을 보내 원세개의 위법한 차관과 국회무시를 질타했다. 일시에 기세가 대단했다. 이에 대하여 원세개는 그다지 개의치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혁명당인들과 패를 내놓는 것은 결국 시간문제인 것이다. "선후대차관"은 주로 그에게 전쟁경비를 조달해 주었다. 충분한 자금으로 싸울 수 있게 해준 것이다. 즉 '미우주무(未雨綢繆)'인 셈이다.

 

국회의 항쟁은 아무런 결과도 얻지 못한다. 국민당은 할 수 없이 '송교인사건'으로 되돌아간다. 4월 29일, 황흥은 다시 원세개에게 전보를 보낸다. 전보에서 원세개가 말한 "이차혁명, 삼차혁명을 고취하는 자들이 대다수 위인의 이름을 내걸지만"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송교인암살건은 "확실한 증거가 있고, 만인이 같이 목격한 일이며 한 손으로 가릴 수 없는 것"이다. 조병균은 "대총통좌우의 근시로서 송교인사건과 관련이 있는지 여부"는 반드시 법관의 판단에 따라야 한다.

 

특별법정의 설립을 반대하였으므로, 사법총장 허세영은 각방의 압력하에 사임을 선언한다. "송교인사건"을 북경 대리원에서 심리하는 것은 흐지부지된다. 그후 "송교인암살사건"은 상해지방검찰청에서 전권을 쥐고 처리한다. 그리고 5월 5일부터 심리를 개시한다. 개정 삼일째, 상해지방검찰청은 경사검찰청에 전표 2장을 보낸다. 사건관련인 조병균 및 내무부 비서 정경세를 기한내에 상해로 보내라는 것이다. 동시에, 상해지방검찰청은 북경사법부에 전보를 보내어, 독일주교주총독과 엄중히 교섭하여, 청도조계로 도망친 혐의점 홍술조를 붙잡아서 데려와달라고 요청한다.

 

독일인 조계로 도망친 홍술조는 자연히 안심하고 있었다. 총리인 조병균과 비서 정경세는 난감했다. 비록 조병균은 이미 원세개에게 병가를 신청했고, 육군총장 단기서가 잠시 총리업무를 대리하고 있었지만. 법률은 법률이다. 경사검찰청도 법을 집행해야 했다. 상해에서 보내온 전표를 기한내에 조병균, 정경세에게 건넨다. 가든지 말든지 조병균과 정경세 두 사람이 모두 골치아팠고, 원세개측도 마찬가지로 신경쓰지 않을 수 없었다.

 

머리를 짜낸 후, 조병균은 경사검찰청에 이렇게 회신한다. 홍술조가 청도에서 보내온 전보에 따르면 홍술조가 "중앙의 명의를 허위로 빌리지 않으면, 목적을 달성할 수 없어서" 그렇게 했다고 한다. 이는 충분히 본인이 송교인사건과 무관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응계형에게 비밀코드책을 전해주고 공진회해산에 보조금을 지급한 일에 대하여는 원래 공무를 처리한 것이고 지금 충분히 설명되었다. 실로 상해까지 가서 증언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본인은 현재 옛 질병이 도져서, 북경프랑스병원에서 받은 진단서를 증거로 낸다. 지금 이미 대총통에게 15일간 병가를 신청했고, 외출하기 실로 불편하다. 이제 형사소송법 초안 제303조의 규정에 따라 본인소재지에서 신문을 받게 해달라.

 

비서 정경세도 마찬가지로 행동했다. 그는 경사검찰청에 낸 성명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송교인암살사건의 흉범은 무사영이다. 혐의범은 응계형이다 홍솔조는 사건에서 응계형과 무슨 관계인지 지금도 분명치 않다; 홍술조는 지금도 붙잡히지 않았다. 그가 상해로 가더라도 아무도 대질할 사람이 없다. 귀청에서 상해지방검찰청에 이를 잘 전해주시기 바란다.

 

흉범 무사영이 이미 죽었으므로, 홍술조, 조병균, 정경세 3인도 법정에 오지 않아서, 송교인암살사건의 심리는 진행이 되지 않는다. 이때, "송교인암살사건"에 또 하나의 사건이 터진다. 그것은 소위 "혈광암살단"이다. 남북쌍방의 싸움이 더욱 가열화되고 희극화된다.

 

"혈광암살단"은 또 무엇인가? 원래 조병균이 경사검찰청에 답신을 제출한 3일째 되는 날, 돌연 주여경이라는 여자가 검찰청에 자수한다. 그녀는 자칭 "여자암살단 단장"이라고 하면서, "혈광단 당장" 황흥의 명령을 받는다고 했다. 북경으로 와서 정치암살을 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이 신고를 받은 후, 원세개는 즉시 북경군정집법처에 참의원 국민당적 의원 사지(謝持)를 체포하도록 한다. 그리고 그가 "혈광단" 단원이며 위법을 도모했다고 하였다.

 

당시의 신문도 무슨 도덕기준이 없었다. 할 일이 없다가 이런 뉴스를 잡으면 죽어라 써댔다. "혈광단"이라는 세글자는 이렇게 널리 알려진다. 사람들마다 전했고, 이 "단"은 사람을 죽이고서도 눈하나 깜짝않는 비밀기관이라고 했다. 마치 옛날 옹정제의 "혈적자"가 다시 나타난 것같다는 것이다. 정치인사들은 모두 위험을 느꼈다. 바로 이때, 경사검찰청도 이 불분명한 이야기에 근거하여, 마찬가지로 황흥에게 북경으로 와서 대질하라고 소환장을 보낸다. 이렇게 하여 원세개가 국면을 뒤집은 것이다. 국민당과는 비긴 셈이 된다.

 

"혈광단"의 암살활동을 얘기하자면, 송교인의 암살후 확실히 몇 건이 발생했다. 예를 들어, 의원 왕금당의 암살, 모여사 정모가 재정총장 주학희를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친 일; 의원 탕화룡, 곽동, 이국진등이 익명의 협박서신을 받은 일, 앞에 얘기한 주여경이 자수한 후, 그녀가 제공한 단서에 따라, 북경군경은 의원 사지의 집에서 '혈광단' 명단을 발견한다. 원래 이 단의 단장은 황복생이었다. 즉, 당시 왕정위와 함께 섭정왕 재풍을 암살하려 했던 사람중 하나이다. 그외에, 양주도독 서보산은 골동화병에 숨긴 폭약에 죽임을 당한다. 흉수도 자칭 '혈광단'이었다. 일시에 어느 것이 진짜이고 어느 것이 가짜인지 오리무중에 빠진다.

 

이 기간동안 쌍방의 여론전은 대단했다. 원세개측의 <북경국보>는 공공연히 큰 글자로 표제를 단다: "위인조반(偉人造反)". 호북 계우림 모반은 황흥이 뒤에서 시킨 것이고, 국민당인의 신문은 아예 큰 글자로 "총통살인"이라고 서서 보복했다.

 

원세개측의 반격에 대하여, 황흥의 태도는 담담했다. 나중에 상해조계의 회심공당은 북경지방검찰청에서 온 바에 따라 황흥을 소환한다. 예상외로 황흥은 소환을 받자마자 간다. 그리고 나중에도 부르면 언제든지 오겠다고 한다. 사후 황흥은 말한다. "사설이 횡행한다. 이는 홍수맹수(洪水猛獸)보다 심하다" "나 개인을 모멸하는 것은 안타까울 것이 없다. 중화민국에 해를 가하는 것은 크게 안타깝다." "시비는 자연히 공론이 있을 것이고, 변명해봐야 소용이 없다." 그가 얼마나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처해있는지는 이 말들로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송교인사건"이 이런 지경에 이르자, 실제로 더 이상 계속 할 수가 없게 된다. 누가 도대체 송교인암살사건의 막후진범인지, 법률상 판단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여론의 표적이 된 조병균은 도대체 얼마나 혐의가 있을까? 그리고 어떻게 스스로를 변명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