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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송교인)

송교인암살사건: 기괴한 사건해결

by 중은우시 2013. 4. 13.

글: 김만루(金滿樓) 

 

윗 글에서 언급한 것처럼, 국민당이 제1차 국회선거에서 대승을 거둔 후, 당수인 송교인은 초대 내각총리를 맡을 예정이었다. 그러나 그는 북상하여 조각하려 준비할 때, 무정한 총알에 젊은 생명을 잃고 만다. 의문의 여지없이 이것은 전형적인 정치적 모살이다. 그렇다면 반드시 생각할 것이다. 배후의 흉수는 도대체 누구인가?

 

송교안암살사건이 발생한 후 온 나라는 진동한다. 임시대총통인 원세개는 송교인이 암살당했다는 전보를 받은 후 즉시 전보를 보내어 강소도독(江蘇都督) 정덕전(程德全), 민정관(民政官) 응덕굉(應德宏) 및 상해방면으로 거금의 현상금을 내걸며, "기한내에 해결하여, 법에 따라 중벌을 내려라"고 한다. 다음 날, 송교인은 치료의 보람도 없이 사망한다. 상해의 각 신문에는 흉수를 잡는데 현상금을 보도한다.그중 진기미, 황흥은 공공조계 총순포방에 서신을 보내어 1만대양을 걸고 흉수를 체포해달라고 한다; 강소도독 정덕전은 이렇게 선포한다. 만일 흉수를 체포하는 자가 있으면 1만은원을 상으로 내리겠고, 정보를 제공하는데 공로가 있는 자는 5천대양을 상으로 내리겠다고 한다. 갑북순경국, 상해현지사, 상해지방검찰청, 호녕철로국도 5천에서 1만위안의 상금을 내걸었다.

 

중상지하 필유용부(重賞之下 必有勇夫). 송교인의 장례식 당일 저녁, 두명의 행색이 형편없는 사천(四川)학생이 국민당 상해교통부로 온다. 그리고 고할 말이 있다고 한다. 교제처 주임인 주남해(周南陔)는 즉시 접견한다. 두 학생은 이렇게 보고한다: 그들은 상해로 시험을 치러 왔는데, 당시 사마로 녹명여관에 있었다. 옆방에 무사영(武士英)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평소에 의관이 올바르지 않아서, 좋은 사람같지 않았다. 이 사람은 자칭 고화를 가지고 상해로 와서 팔고자 한다고 했는데, 매일 아침 일찍 나가서 저녁 늦게 들어왔다. 그리고 자주 그들의 방에 와서 얘기를 나누었다. 하루는, 무사영이 그들에게 2대양을 빌려달라고 한다. 누군가 그를 끌어주려 하고, 가서 일을 하나 하면, 성공한 후 부귀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때가 되면 반드시 20대양으로 갚아주겠다고 하였다. 이어서, 무사영은 그들에게 사진 하나를 보여주면서, 이 사람이 우리의 적인데, 나쁜 사람이어서 죽여야 한다고 했다. 말을 마치고 그는 다시 명함을 꺼냈는데, 그가 바로 자신을 끌어주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는 상해탄에서 유명한 인물이었다.

 

두 학생은 그의 말을 듣고 반신반의했다. 그리고 무사영에게 2원을 빌려준다. 그리고 전날 밤에, 무사영은 과연 돈을 갚았다. 그러나 그날 저녁 정신이 황망해 보였고, 그러나 득의양양해서 말한다. "잘되었다." 그리고 현금 한 다발을 그들의 앞에서 자랑한다. 분명히 상금으로 받은 것일 것이다. 다음 날, 신문에 송교인선생이 암살당했다는 소식이 실렸고, 두 학생은 그제서야 발견한다. 무사영이 그들에게 보여준 사진이 바로 송교인이라는 것을. 그래서 신고하러 온 것이다.

 

주남해는 그 말을 듣고 느긋할 수 없었다. 무사영이 그들에게 보여준 것이 어떤 명함이었는지 자세히 물어본다. 명함에 있는 그 상해유명인사는 성이 무엇이고, 이름이 무엇인지. 두 학생은 말한다. 당시에 특별히 주의하지 않아서, 지금은 기억이 약간 모호하고, 바로 생각이 나지 않는다고. 주남해는 일이 중대한 것을 보고 그들에게 다시 잘 생각해보라고 말한다. 단서를 더 제공해줄 수 있는지, 두 학생은 한참을 생각히보고, 명함의 성은 보통이라면 보통이고 보통이 아니라면 아니고, 벽성이라면 벽성이고 벽성이 아니라면 아니다. 그저 길다란 삐침이 있는 것만 기억한다. 나머지는 기억하지 못하겠다.

 

주남해는 그들의 말을 듣고, 즉시 국민당 상해의 주요 수뇌에게 보고한다. 전호군도독 진기미는 사람을 보내어 학생들과 함께 여관으로 가서 무사영을 지킨다. 그가 돌아오면 체포할 준비를 했다. 사람이 잠복하고 있을 때, 진기미, 주남해등은 같이 추측한다. 이 일을 지시한 원흉은 성에 '길다란 삐침'이 있다는데 도대체 성이 우(虞)일까, 당(唐)일까. 아니면 요(廖)일까. 염(廉)일까? 주(周)일까. 모두 논쟁을 벌였지만, 결론을 낼 수가 없었다. 진기미는 말한다. "상해에서 유명한 사람"이라면 우씨일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최종결과는 "응(應)"씨성이었다. 이것은 뒷얘기이다.

 

이상은 국민당 상해교통부 교제처 주임 주남해의 말이다. 이 회고록은 최초에 1939년 8월의 <석보>에 연재되었다. 송교인암살사건과 6년이 떨어져 있으므로 시간, 세부사항에서 당시의 보도와 약간 차이가 있었다. 실제로 두 학생은 먼저 영국조계 순포방에 사건보고를 한다. 시간은 송교인이 암살당한 다음 날이었다. 그러나 순포인 카를로스는 그 말을 들은 후, 그들의 얘기를 중시하지 않았다. 사람을 보내어 무사영을 체포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뒤에는 다시 골동품상인 왕아발(王阿發)도 신고했다.

 

3월 23일, 즉 송교인이 암살당한 3일째 되는 날, 골동품 서화를 판매하는 하남인 왕아발이 사마로 공공조계 순포방에 신고를 한다. 10일전 그는 문원방 응계형(應桂馨)의 집에서 골동품을 팔았는데, 응계형은 그의 오랜 고객이고, 평소에 잘 알았다. 응계형은 그날 사진 한장을 꺼내서 보여주면서 그를 언제 어디에서 이 사람을 암살하라고 말했다. 그리고 일이 완성되면 그에게 1천원의 보수를 주겠다고 한다. 그러나 왕아발은 단지 골동품매매만 할 줄알지, 살인은 저지른 적이 없다. 그래서 그 일을 맡지 않았다. 왕아발이 하는 말에 따르면, 당시 그는 사진상의 인물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오늘 신문에서 송교인의 사진을 보니 바로 응계형이 그에게 암살하라고 했던 그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이 응계형은 어떤 사람인가? 그는 왜 사람을 고용해서 송교인을 죽이려 했는가? 얘기하자면 이 사람은 상해탄에서 유명한 사람이다. 그는 청방(靑幇)의 거물이면서, 혁명당인들과 교분이 깊었다. 혁명을 할 때, 혁명당인들에게 많은 편리를 제공해 주었다. 진기미가 상해도독이 되는데도 그의 공로가 있었다.  다른 것은 그만두고라도, 손중산이 남경으로 가서 임시대총통에 취임할 때, 응계형의 조직이 호위하여 호송했다. 남경임시정부가 취소된 후, 응계형은 혁명당인들과의 관계가 한때 소원해 진다. 그러나 누가 생각했으랴. 그가 송교인암살의 주요혐의자가 될 줄은.

 

"송교인암살사건"이 발생한 후, 사건이 중대하여, 여론도 계속 추적했다. 이것은 조계 순포방에도 적지 않은 압력이 되었다. 왕아발의 신고를 받은 후, 순포방의 이번 반응은 신속했다. 그리고 체포하기로 결정한다. 탐원이 제공한 단서에 근거하여, 응계형은 자주 살림을 차려준 기녀 호비운(胡翡雲)의 집에서 아편을 피운다는 것을 알았다. 그날 밤 10시, 국민당사람인 주남해, 육혜생(陸惠生)등이 안내해주어, 총순 카를로스는 친히 여러명의 중외 순포를 이끌고 호비운의 집으로 간다. 그러나 이번에는 응게형이 없어서 붙잡지 못한다. 응계형은 호비운의 집에 머물지 않고 영국조계 호북로 삼농 영춘방에 있는 모 기원에서 손님을 접대하고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후, 카를로스등은 즉시 영춘방으로 간다. 그리고 골목입구를 지키게 하여, 응계형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조치한다. 그후, 먼저 주남해가 기원으로 가서 응계형을 아랫층으로 내려오게 한다. 상의할 일이 있다고 하면서, 주남해와 응계형은 원래 잘 아는 사이이다. 응계형은 주남해의 말을 듣고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고, 아래층으로 내려와 주남해를 데리고 함께 위층으로 올라가 식사를 한다. 오늘은 손님이 많지 않은데, 마침 당신이 잘왔다. 사양하지 말고 들라고 한다. 주남해는 식사는 급하지 않고, 급한 일이 있어 상의하러 왔으니, 문밖으로 나가서 잠시 얘기하면 어떻겠느냐고 말한다. 응계형은 그 말을 듣고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곧 주남해를 따라 기원밖으로 나온다. 응계형이 대문을 나오자마자 순포들이 달려들어 응계형을 미리 준비해놓았던 자동차로 밀어넣는다. 그후 바람처럼 남경로 순포방으로 달려간다. 전체 과정에서 전혀 저항은 없었다.

 

살인혐의자인 무사영의 행방이 아직 묘연했기 때문에, 증인, 물증이 모두 없었다. 응계형은 또한 능력있고 수완있는 흑도의 인물이었다. 순포방은 그를 어떻게 할지 모르고 있었다. 하루빨리 살인범을 붙잡기 위하여, 조계순포는 그후 응계형의 집으로 가서 증거를 수색한다. 당시 응씨집은 모두 3층집이었는데, 진열해놓은 것이 아주 호화로웠다. 집안에는 처첩 3명외에 일하는 사람, 손님, 잡인등 1,2십명이 있었다. 순포들은 즉시 집의 앞뒤를 막은 후, 모든 사람을 잠시 구금한다. 여자들은 위층의 방안에 가두고, 남자들은 아래층에 남겨두었다. 임의로 행동하지 못하게 막았다. 그후, 순포들이 융단식으로 수색한다.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응씨집을 모조리 뒤졌지마 송교인 암살에 관한 여하한 물증도 발견할 수 없었다. 이때는 시간이 이미 밤12시를 지나고 있었다. 수색활동은 아무 성과없이 끝나게 되었다.

 

사람들이 초조해하고 있을 때, 주남해는 이마를 찌푸렸다.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그는 건물위층으로 올라가서, 자신은 응계형을 순포방에서 돌봐주는 사람이라고 하며, 아주 기밀인 듯한 모양으로 응계형의 몇몇 첩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당신집의 어르신은 나에게 여러분을 안심시켜주라고 했다. 조급해하지 않아도 된다. 사실은 밝혀질 것이다. 내일이 되면 모두 분명해질 것이다. 그러나 하나 비밀문서가 있는 곳은 응대인이 신경쓰고 있다. 문서를 빨리 꺼내서 비밀리에 나에게 건네달라. 그러면 처리하기 좋다. 빨리빨리 움직여라."

 

주남해는 이전에 응계형과 교분이 있었다. 응계형의 가족들도 그를 알고 있었다. 한 첩이 과연 그의 계책에 말려들었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말한다: "제가 압니다. 그러나 이곳은 엄밀한데 어떤 방법이 있겠습니까?" 주남해가 말한다. "제가 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빨리 가져오면 됩니다." 응계형의 첩은 그 말을 들은 후, 상방의 바닥에서 움직이는 판을 들어내고는 작은 상자를 끄집어 낸다. 그리고 거기에는 아편등의 물건도 있었다. 주남해는 보물을 얻은 것처럼 상자등을 꺼낸다. 그리고 아래층으로 와서 순포들과 살펴본다.

 

조사해보지 않았더라면 몰랐겠지만, 조사해보니 깜짝 놀란다. 작은 상자을 열고나니, 안에는 비밀전보와 서신이 적지 않았다. 주남해등은 급히 서신을 조사한다. 그리고 비밀전보본과 전보에 대하여 검열하고 번역한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 과연 응계형과 북경 국무원 비서 홍술조(洪述祖)가 빈번하게 서신왕래하고, "훼송수훈(毁宋殊勳)"등의 글자를 발견한다. 이로서 초보적으로 판단한다. 송교인의 암살은 응계형, 홍술조와 직접적인 관게가 있다.

 

문건과 물증을 손에 넣은 후, 사람들은 마음 속의 짐을 던 것같았다. 이때 더욱 극적인 일이 벌어진다. 여러 사람들이 물러나고자 할 때, 누군가 돌연 범인인 무사영이 아직 체포되지 않은 것을 생각해낸다. 그래서, 장난기를 담고 응씨집 아랫층에 연금된 잡인들을 향해서 "누가 무사영이냐, 그는 여기에 있느냐?"고 묻는다. 이건 그냥 해본 말이다. 그저 한번 꺼낸 말이다. 통상적인 이치대로라면 정말 무사영이 범행을 저질렀다면, 분명히 응계형의 집에 있지 않을 것이고, 설사 응계형의 집에 숨어있다고 하더라도, 절대로 자신이 무사영이라고 인정하고 일어서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가사의하게도,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한 하급노동자모양을 한 키작은 사람이 급히 일어나서 인정한다: "내가 바로 무사영인데, 무슨 일로 그러시오." 더 물을게 뭐가 있겠는가? 찾는게 바로 너인데. 딴 말하지 않고 순포들이 달려들어서 즉시 무사영을 체포하고 프랑스조계 순포방으로 데려간다. 그후, 순포방에서 다시 사람을 보내여 신고한 두 사천학생들을 불러 그 자리에서 확인시킨다. 결과 바로 그 여관에서 돈을 빌렸다가 갚은 그 사람이라는 것이다.

 

사후에 조사를 거쳐 밝혀졌다. 원래 응계형은 영춘방 기원에서 손님을 접대할 때, 무사영도 그 자리에 있었다; 응계형이 체포된 후, 기원의 누군가가 그에게 응씨집에 알려주라고 말한다. 그 결과 응씨집안에서 붙잡혀 몸을 빼내지 못한 것이다. 이번에 귀신이 그렇게 한 것인지 송교인 선생의 영령이 이끈 거인지, 무사영을 체포하는데 아무런 힘도 들이지 않을 수 있었다.

 

<민립보>의 보도에 따르면, 무사영이 체포된 다음 날 오후, 프랑스조계의 순포는 다시 응씨집으로 가서 자세히 수색한다. 더 많은 공문과 증거를 찾아낸 외에, 가장 중요한 발견은 '육향수창(六響手槍)"이었다. 총안에는 3개의 총알이 아직 사격되지 않고 남아있었다. 기술검사를 거쳐, 송교인의 몸에서 꺼낸 총알과 같은 모델이라는 것을 밝혀낸다. 남은 숫자도 기차역에서 3발을 쏜 것과 완전히 일치했다.

 

이제 송교인암살사건은 거의 해결된 것처럼 보인다. 흉수는 무사영이고, 배후에서 지시한 인물은 응계형과 홍술조이다. 다만, 사건은 이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상해조계내에서 암살사건이 발생하는 것은 그리 새로울 것도 없다. 이들 사건은 대부분 미결이었다. 진정 해결된 것은 극히 적었다. 수개월전에 발생한 광복회 수령 도성장(陶成章) 암살사건도 전혀 해결되지 못하고 있었다. 31년후에 장개석이 일기에서 인정한다. 이 일은 그의 의형이자 당시 상해도독 진기미가 그로 하여금 하게 한 것이라고. 도성장이 암살당한 것과 같은 암살사건은 아주 많았다. 왜 송교인 암살사건만 3일내에 해결될 수 있었을까? 이 사건해결속도가 빠른 것과 경위가 기이한 것과 과정이 극적인 것은 이해가 잘 되지 않을 정도였다.

 

가장 불가사의한 점은 국민당인은 거의 응계형이 송교인암살의 주범이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같다는 것이다. 두번의 신고는 모두 응계형을 향하여 명확히 방향을 잡고 있다. 단지 자신은 법집행권한이 없어서, 조계의 순포방에 도움을 요청한 것일 뿐이다. 표면적으로 보면, 조계순포가 이 사건을 해결했고, 원흉을 체포하였지만, 실제로는 모두 국민당인들이 옆에서 협조했고, 전체 과정을 주도했다.

 

먼저 두 사천학생의 신고를 보자. 아마도 국민당 상해교통부 교제장 주남해에게 신고한 후, 즉시 공공조계 순포방에 신고하러 갔을 것이다. 그후의 왕아발의 신고는 아마도 무사영이 체포되지 않았을 때, 국민당인이 그의 방안에서 명함을 발견했고, 명함의 인물은 아마도 응계형이었을 것이다. 이때 여러 사람들은 확연히 깨달았다. 원래 '삐침'이 있는 성이라는 것은 '우'나 '당'이나 '요'가 아니라, 응계흥의 '응'이었던 것이다.

 

다른 것은 말할 것도 없디, 왕아발의 신고는 의미심장하다. <민립보> 3월 25일자 보도에 따르면, 왕아발은 글씨와 그림을 팔아서 살아가고 응계형의 집에 가본 적이 있다는 것이다. 어느 날인가, 응계형이 그에게 사람을 하나 죽여달라고 하며, 송교인의 사진을 내놓았다는 것이다. 왕아발은 처음에 거절했고, 응계형이 같은 고향사람을 찾아서 도와달라고 한다. 왕아발은 그래서 동북삼성에서 마적을 했던 고향사람 등모를 소개한다. 등모는 왕아발과 함께 응계형의 집에 간다. 그러나 응계형이 집에 없어서 만나지 못했다. 그날 저녁 등모는 마음을 바꾸어 안하겠다고 한다. "나는 지금 타향에 거주하는데, 어찌 아무런 이유없이 사람을 죽인단 말인가?" 이 말을 다른 사람이 듣고 국민당에 신고한다. 국민당인은 그래서 차례로 거슬러 올라가서, 왕아발을 모 회사로 보내고, 협박의 수단으로 왕아발로 하여금 전체 사건의 경위를 불게 한든다. 그후에 순포방으로 가서 신고하게 했다.

 

"송교인사건"의 심리기록을 보면, 응계형이 체로된 다음 날 오후, 공공조계 공개심문법정에서 그에 대한 제1차 개정예심을 진행한다. 거기에는 응계형과 왕아발의 대질신문이 있었다. 의외로, 응게형은 심문과정에서 태연자약했고, 오히려 왕아발의 진술에는 헛점이 많았다. 이것은 기괴하게 느낄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증인으로서 왕아발은 법정에서 이렇게 공술한다: 글씨와 그림을 팔기 때문에, 그는 일찌기 응계형의 집에 두번 가본 적이 있다. 순포방의 변호사인 간극(侃克)이 물어본다. 너는 응계형의 집에 두번이나 갔는데, 그렇다면 그가 사진을 꺼내서 사진의 사람을 처리해달라고 한 것은 도대체 첫번째 갔을 때인가 두번째 갔을 때인가? 왕아발은 두번째라고 말했다. 그후에는 다시 가지 않았다고 한다.

 

공개심리법정은 응계형과 왕아발을 그 자리에서 대질하게 한다. 응계형은 왕아발에게 묻는다. 네가 우리 집에 와서 글자와 그림을 팔 때, 제1차는 언제이고, 제2차는 제1차와 얼마나 떨어졌는가? 왕아발이 말한다. 제1차는 약 십일이고, 제이차는 제1차와 약 삼일이 떨어져 있다. 응계형이 다시 묻는다. 네가 글자와 그림을 판다면 어떤 글자와 그림이냐. 그림은 누가 그린 것인가 그린 것이 산수화인가, 인물화인가 송죽인가. 왕아발이 말한다. 자화는 수권(手卷)이고, 구영석(仇英石)이 그린 것이다. 그림은 산수도 있고 인물과 송죽도 있다.

 

응계형은 고래를 돌려 공개심리법정에 말한다: 법정에서는 주의해 주십시오. 구영석은 중국의 화가명인으로 인물만 그렸지,산수나 송죽은 장기가 있는 분야가 아닙니다. 왕아발의 공술을 주의해 주십시오. 이어서 응계형은 다시 왕아발에게 묻는다. 너는 어디서 이 그림을 샀는가? 왕아발은 말한다. 동청철로 각로생(覺魯生)에게서 샀다. 응계형은 다시 법정에 말한다. 동청철로에는 탁로생(拓魯生)이라는 한 사람만 있다. 왕아발이 말한 이름은 불명확하다 법정에서 주의해댤라.

 

그후 응계형은 다시 왕아발에게 묻는다. 너는 두번째 나의 집에 왔을 때 무슨 말을 했는가? 왕아발이 말한다. 두번때 당신 집에 갔을 때 당신은 없어서 만나지 못했다. 그후에도 만나지 못했다. 응계형은 그러자 법정에서 큰 소리로 항변한다: 금방 순포방 변호사가 물었을 때, 왕아발은 두번째 우리 집에 왔을 떄 내가 사진을 꺼내어 한 사람을 처리하라고 했다고 했습니다. 지금 그는 다시 두번째 우리 집에 와서는 만나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런 진술을 법정에서는 주의해 주십시오.

 

제1차예심이 끝난 후, 응계형은 순포방으로 다시 압송된다. 왕아발은 풀려나서 대질을 기다린다. 아마도 명확히 헛점이 있다고 느껴서인지, 왕아발은 제4차, 제5차 예심때 말을 바꾸어 응계형의 집에 3번 찾아갔다고 한다. 제1차는 그림을 팔러 갔고, 응계형은 부탁할 일이 있다고 했다. 제2차로 갔을 때, 부탁할 일이라는게 무엇인지 물어보아쏙, 응계형은 사진을 꺼내서 사람을 고용해서 살인하고자 한다고 했다. 여기까지 듣자, 응계형의 변호사인 애례사(愛禮士)는 큰 소리로 질문한다: 너는 전후에 도대체 몇번을 갔단 말이냐? 왕아발이 말한다. 세번. 변호사는 다시 힐문한다: 너는 제1차법정에서 2번 갔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지금 다시 3번이라고 한다. 도대체 2번이냐 3번이냐. 왕아발이 말한다. 나는 자신이 2번 갔다고 했고, 세번째는 등모와 같이 갔는데, 응계형이 집에 없어서 못만났다.

 

제6차 예심때, 응계형은 이런 말을 한다. 그가 처음 왕아발을 보았을 때, 왕은 말했다. 자신이 소객잔에 거주하고 있다고 그때 그는 서신을 가져 왔고, 무슨 일을 부탁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는 만나본 후 이 자는 그가 쓸 수도 없고, 다른 누구도 쓸 수 없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법정에서 사람됨을 보면 알 것이다.

 

전체 법정심리과정을 보면, 왕아발의 직업소질은 뛰어나지 않았고, 진술도 앞뒤가 맞지 않았다. 도대체 법정의 긴장된 분위기 때문인지 아니면, 응계형이 아예 그에게 고용살인을 부탁한 적이 없기 때문인지, 이것도 문제이다. 통상적인 이치로 추론하면, 송교인은 당시 아주 이슈가 되어 있던 정치명사이다. 암살은 보통 일이 아니다. 주범이라면 당연히 기밀을 유지해야 한다. 아무렇게나 다른 사람에게 알릴 수 없는 것이다. 하물며 왕아발과 응계형은 단지 일면식밖에 없다. 그리고, 응계형 자신은 흑도의 사람이다. 만일 고용살인하려면, 직접 부하인 직업살수에게 시키면 되는 것이지 왜 전혀 관계도 없는 골동상인 왕아발을 시킬 것인가, 그리고 왕아발로 하여금 다른 사람을 찾아오게 시켰을까?

 

사건신고에서 해결까지의 전체과정을 보면, 분명히 국민당인의 모습이 나타났다 사라지곤 하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것으로 추론하자면, 두 사천학생의 신고이건 골동상인 왕아발의 신고이건 배후에는 모두국민당인이 있었다. 그리고 송교인이 암살된 때로부터 목표는 바로 명확히 청방의 거두 응게형을 겨냥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응계형은 어떤 사람이고, 국민당인들과 어떤 갈등이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