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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송교인)

송교인암살사건: 이중간첩 응계형

by 중은우시 2013. 4. 13.

글: 김만루(金滿樓)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송교인 암살사건의 해결과정에서, 마치 신비한 역량이 청방의 거두 응계형을 겨냥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신비역량의 배후에는 응계형과 관계가 밀접한 국민당사람들이 있다. 그렇다면 이 응계형은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응계형은 응기승(應夔丞)이라고도 부르며, 절강 진해(鎭海) 사람이다. 부친은 응문생(應文生)은 석장(石匠)이었다. 나중에 영파의 고향사람들과 함께 상해탄으로 오고 석기작방(石器作坊)을 연다. 나중에는 포공두(包工頭)가 되어 땅에 투기하여 큰 돈을 번다. 그리하여 일약 현지의 유명한 부자가 된다. 집안형편이 좋아지면서, 응계형은 젊어서부터 좋은 교육을 받았고, 그는 수재(秀才)에 합격하기도 하고, 영어도 배웠으며 한때는 교사로 있었다.

 

만일 이 길로 계속 갔다면 응계형은 아마도 글을 읽어 관리가 되는 길로 갔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과거가 폐지되고, 그 자신의 천성도 현상에 만족하지 못했다. 상해탄으로 돌아온 후, 응계형은 금방 삼교구류의 인사들과 어울리고, 다행히 상해 청방의 우두머리인 범고두(范高頭)를 알게 된다. 범고두가 이끌어주어, 응계형은 청방 "대(大)"자배의 구성원이 된다.

 

청방은 경항대운하 및 강소절강일대에서 활약했던 비밀회당이다. 당시에 이미 이백여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었다. 방내 구성원은 계속하여 스승과 제자로 승계되고, 당시의 "이십자(二十字)" 배분(즉, 청정도덕, 문성불법, 능인지혜, 본래자성, 원명행례)는 청나라말기에 이미 다 써버려서 다시 4글자 즉 '대통오각(大通悟覺)'을 추가했다. 응계형은 당시 '대'자배였다. 이는 방내에서 배분이 아주 높은 것이었다.

 

범고두는 원래 배를 몰던 선원이었다. 나중에 사업에 성공하여 염효(鹽梟)가 된다. 그가 싸우다 그랬는지 아니면 다른 원인인지 그의 머리에는 혹이 하나 나 있었다. 멀리서 보면 머리 위에 작은 머리가 하나 더 있는 것같았다. 그래서 그는 별명이 "범고두"였다. 그의 진짜 이름은 오히려 아무도 모른다. 청나라말기에 상해에서 가장 유명한 방회의 대두목인 범고두는 키카 컸다. 평소에 그는 불의를 보면 참지 못했고, 다른 사람들과의 싸움이 끼어들곤 했다. 한번은 한 서양여객선이 황푸강에서 중국선박과 충돌한다. 사건발생후 서양여객선은 나몰라라 하고 떠나버렸다. 범고두는 이를 보고 중국배를 끌어모아 포위하고는 서양인에게 배상과 사죄를 요구한다. 이 일을 퍼져나간 후 범고두는 유명해진다. 그리고 점차 상해 방회내에서 대명을 떨치는 거물급 인물이 된다. 그가 가장 잘나갈 때는 그의 부하가 수천명에 이르렀고, 상해탄에 명성을 크게 떨쳤다고 한다.

 

범고두는 조계내에 상원연관이라는 아편관을 연다. 응계형은 바로 상원연관의 단골고객이었다. 이렇게 하다보니, 범고두는 "혜안으로 영웅을 알아보았다" 응계형은 그의 문하로 들어가고, 그의 부하들중 두각을 나타낸다. 그러나 좋은 일이 오래가지는 않았다. 범고두는 나중에 야심이 팽창하여 자신의 역량을 잘 모르고, 방내 무리를 이끌고 강소해문에서 관군과 전투를 벌인다. 결과적으로 유격대는 정규군을 이길 수 없었다. 대패한 후 범고두는 관청에서 체포령이 내려 강호에서 목숨을 잃는다.

 

나무가 쓰러지면 원숭이는 흩어지는 법이다. 큰 난리가 다가오면 새들은 각자 날아간다. 범고두가 죽자, 수하의 일당들은 곳곳으로 흩어진다. 응계형도 부득이 잠시 상해를 떠나서 화를 피한다. 다행히 응계형의 집안은 돈이 있고, 뱃속에 글도 있어서, 나중에 돈으로 후보지현의 관직을 산다. 그리고 강소독련공소총판 원수훈(袁樹勳)의 문하로 들어간다. 여러해동안의 사회단련을 통하여, 응계형은 일처리가 시원스럽고 인물도 괜찮았다. 그리고 외국어도 할 줄 알았다. 그리하여 상사의 인정을 받는다. 얼마후 원수훈은 파격적으로 그를 강소관판인쇄국 좌판으로 임명한다. 그리고 5000냥의 관은으로 개설비용으로 쓰게 한다. 이치대로라면, 응계형은 이 기회를 잡아 일을 잘 했어야 한다. 그러나 그는 강산은 바뀌어도 본성은 바꾸기 어려웠다. 그는 부임한 후 열심히 공무를 본 것이 아니라. 마구 써버리고, 일은 제대로 하지 않았다. 그 결과 돈을 다 쓰고, 일은 하나도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리하여 상사의 추궁이 두려워응계형은 결국 도망쳐버리고 만다.

 

관료의 길이 이렇게 끝난 후, 응계형은 다시 하남으로 가서 한바탕 소동을 벌인다. 나중에는 고향으로 도망쳐와서 잠시 숨어지낸다. 이때 과거가 폐지되었으므로, 각지방의 사신들은 앞다투어 신식학당을 세워서 자신이 관직에 나가는 발판으로 삼는다. 응계형도 집안의 돈 5만은원을 가지고 고향에 학당을 세운다. 당시 규모는 적지 않았다. 학생은 이백여명이 되었다. 응계형이 일을 한번 벌이고자 할 때, 학당이 문중의 사당공유재산을 침범한 것으로 인하여 문중사람들과 분쟁이 일어난다. 이처럼 다급할 때 한 사람이 나타난다. 그가 바로 상해탄에서 이름을 날리게 되는 진기미(陳其美)였다.

 

진기미는 당시에 이미 혁명에 투신했고, 그 자신도 생각이 있었다. 지방에 세력이 있는 사람, 그리고 강호회당을 계속 주목한다. 한 우연한 기회에, 응계형이 만든 학당이 교무주임이 진기미와 이 문중재산다툼을 얘기한다. 진기미는 절강의 고향사람인 것을 보고, 응계형이 청방내에 상당한 지위와 권세를 지닌 것을 보고, 그와 교분을 맺는다. 나중에 혁명에 도움을 받으려고 생각한 것이다. 그후 진기미가 앞에 나서서 재산분쟁을 순조롭게 해결해준다. 이 과정에서, 응계형은 진기미가 인물이라고 여긴다. 쌍방은 서로 늦게 만난 것을 한탄하며 만나자마자 오래된 친구처럼 지낸다. 이렇게 같은 길을 가는 동지가 된다.

 

응계형과 진기미의 결합은 쌍방에 있어서 윈윈이었다. 먼저, 진기미는 응계형을 통하여 청방과 연합하여 혁명할 수 있었다. 이리하여 장강중하류를 개쳑한다; 응계형도 진기미를 통하여 혁명당의 한 일원이 되고, 신해혁명이 성공하자, 그는 자연히 흑에서 홍으로 바뀌고, 몸값도 배로 올라간다. 이 두 사람의 관계는 진기미는 응계형을 이용했고, 응계형은 진기미에게 투기했다. 쌍방은 서로 이를 잘 알았고, 각자 원하는 바를 얻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응계형은 혁명당인들을 확실히 많이 도와주었다. 진기미가 상해에서 혁명을 할 때, 자주 응계형의 사저에 머물렀다.거기서 먹을 것을 달라면 먹을 것을 주고, 마실 것을 달라면 마실 것을 주었다. 돈을 달라고 해도 주었다. 진기미나 다른 혁명당인들 예를 들어 우우임도 모두 응계형의 집에서 머문 적이 있고, 실질적인 도움을 받았었다.

 

응계형이 사저는 프랑스조계에 있다. 집은 삽십여칸이어서 크기도 하고 안전하기도 했다. 무형중에 혁명당인들의 상해에서의 중요거점이자 피난소가 되었다. 이외에 응계형은 자신의 사회관계와 방회네트워크를 이용하여 혁명당인들에게 정보와 금전적 도움을 준다. 신해혁명과정에서, 응계형은 아주 적극적이었다. 그는 친히 결사대를 이끌고 강남제조국을 공격하기도 했고, 상해광복에 큰 공을 세운다.

 

상해광복후, 혁명진영은 두 파벌이 있었다. 하나는 진기미를 우두머리로 하는 동맹회이고, 다른 하나는 이섭화(李燮和), 도성장(陶成章)을 우두머리로 하는 광복회였다. 양세력은 서로 싸웠다. 청방의 지지하에 진기미는 비정상적인 수단으로 호군도독이 되고, 경쟁상대방인 이섭화는 화를 내며 오송군정분소를 설립한다. 부임후, 진기미도 보답을 한다. 청방의 거두인 이징오(李徵五)는 소장(少將)의 계급을 받고, 또 다른 거물 유복표(劉福彪)도 중임을 맡는다.

 

응계형은 진기미와 관계가 더욱 가까워진다. 호군도독부가 성립된 후, 응계형은 첩보과장에 임명된다. 그는 정보업무에 종사한다. 손중산이 해외에서 상해로 돌아올 때, 진기미는 응계형으로 하여금 접대와 보호업무를 담당하게 지시한다; 손중산이 남경으로 가서 임시대총통에 취임할 때, 역시 응계형이 호위대대를 조직하여, 가는 길의 보호를 책임졌다. 그후 응계형은 다시 총통부위대장(總統府衛隊長)에 임명된다. 이때 진기미, 손중산은 응계형을 아주 신뢰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하면서, 응계형은 혁명진영에서 전도가 유망했다. 그러나 응계형의 문제점은 실로 너무 많았다. 첫째, 응계형은 강호출신으로 그는 깡패기질을 지니고 있었다. 먹고 마시고 계집질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혁명당인들과 만나는 것도 자주 기원에서 했다. 둘째, 응계형은 혁명업무에 대하여 긴장을 풀고 느슨했다. 그가 총통부위대장으로 있을 때, 처음에는 오는 손님들에게 정중했다. 나중에 오는 사람이 많아지자, 경비를 책임진 응계형은 그저 일상적인 일로 여긴다. 어떤 때는 심지어 손님들에게 욕을 하기까지 했다. 나중에 손중산마저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를 임시정부 서무장으로 보직변경시킨다. 그러나, 응계형은 서무장이 된 후, 자주 직책을 이용하여 자신의 주머니를 불린다. 1은원으로 열 수 있는 주석을 그가 하면 5원이 된다. 음식은 똑같은데도. 그 차액은 자신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이 일이 발견된 후, 응계형은 상해로 쫓겨난다.

 

이에 대하여 응계형은 불만이 있었다. 이때 남경임시정부가 해산되었다. 원세개는 북경에서 새로 정권을 조직한다. 당시 각파는 신정권에 참여하기 위하여 '조당(組黨)'열풍이 분다. 응계형도 이 길을 가고자 했다. 1912년 6월, 청방, 홍문(洪門)과 공구(公口)의 삼대방회가 상해에서 공동으로 "중화민국공진회(共進會)"를 건립한다. 진기미의 지지하에, 응계형은 그보다 더욱 자격있는 청방의 원로들을 제치고 회장이 된다. 그는 민국초기 정치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했던 것이다.

 

공진회가 성립된 후, 응계형은 장강중하류에 지부를 설립하고, 병마를 모집하며 회중을 확대한다. 이때, 호북의 "수의삼무(首義三武)"중 하나인 저명한 혁명당인 장진무(張振武)가 여원홍, 원세개에게 피살된다. 현지의 혁명당인들이 '여원홍타도" 폭동에 나선다. 응계형도 요청을 받아 비밀리에 무창으로 가서 함께 대사를 도모한다.

 

모두 알다시피, 여원홍은 신해년에 혁명사병에 의하여 강제로 호북도독에오른다. 그러나 무창의거에 승리한 후, 여원홍은 신속히 태도를 바꾸어 호북도독의 위치를 굳힌다. 민국후, 여원홍은 자신의 지위를 보전하기 위하여 계속하여 이전에 그를 올려준 혁명당인을 박해하고 살해한다. 이로 인하여 혁명당인들은 극히 분노했고, 여원홍을 끌어내리겠다고 결심한다.

 

장진무가 피살된 후, 일부 상해에서 활동하던 혁명당인인 고빈, 고개문등은 비밀리에 호북으로 잠입해 들어가 비밀기관을 설립한다. 이름은 "진무회(振武會)"였다. 그들은 한편으로 여원홍이 호북혁명당인을 진압한 죄행을 폭로하고, 다른 한편으로 군대, 강호회당과 밀접하게 연락한다. 응계형은 당시 공진회를 대표하여 이에 참가한다.

 

1912년 10월 10일, 즉 무창의거 1주년기념일에 계획에 따라, 호북혁명당인들은 무창성 밖의 남호마대에서 그날 폭동을 일으키기로 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거사를 하기도 전에 여원홍에게 적발된다. 앞장선 혁명당인 고빈, 고개문등은 체포된 후 금방 처결된다. 남호마대는 급히 의거를 일으키나, 여원홍의 군대에 잔혹하게 진압된다. 모두 수백명이 피살당한다. 사후에, 여원홍은 응계형이 이 폭동에 가담했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그의 체포령을 내린다. 응계형은 소식을 듣고 급히 상해로 도망친다.

 

여원홍의 보고를 받은 후, 북경의 원세개는 강호회당이 민국후의 질서에 심각한 위협을 준다고 깨닫기 시작한다. 특히 방회가 군대외 결탁하면 그 폐해는 적지 않았다. 신해년의 일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모두 알 것이다. 당시의 신해혁명은 실제로 혁명당, 신군 그리고 강호회당의 3자가 결합한 것이다. 이번 호북폭동도 무창의거의 복제판이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원세개는 <대총통령>을 반포하여, 각성도독, 민정장은 각지의 방회를 엄격히 조사하고 만일 발견되면 강제해산시키고, 복종하지 않으면 그자리에서 체포하여 법에 따라 처벌하라고 하였다. 이런 상황하에서, 이미 각성에 권력을 잡고 있던 혁명당인들도 강호회당과는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그들과 같이 놀지 않겠다" 이는 응계형등으로 하여금 극도의 실망과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모두 알다시피, 혁명당인과 강호회당은 혁명시기에 밀접하게 협력했다. 그러나 혁명이 성공한 후, 혁명당인은 시대의 "홍인"이 되고 흠모할만한 관직을 가졌다. 사회지위도 신속히 올라가나. 방회의 사람들은 자신의 자질문제로 사회의 반감을 사고 갈수록 주변으로 밀려났다. 이렇게 서로 다른 처지에 놓이자 방회의 사람들은 마음 속으로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놀림을 당하고, 버림받았다는 느낌이 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응계형이 체포된 후, 한 법정실미때 변호사인 애례사의 말이 대표적이다. 당시 애례사는 이렇게 묻는다: 본인은 회가 있는가? 응계형은 대답한다: 있다. 애례사가 묻는다: 무슨 회인가? 응계형이 대답한다: 공진회이다. 애례사가 묻는다: 왜 이 회를 설립하였는가? 응계형이 대답한다: 동맹회가 국민당으로 합병된 후, 이전의 동지인 청홍방등을 모두 버렸기 때문이다. 애례사가 계속 묻는다: 청홍방은 어떤 조직인가? 응계형이 대답한다: 이전에 동맹회와 같다. 애례사가 묻는다: 청홍방은 어떤 사람으로 조직되었는가? 응계형이 말한다: 청나라때 소금을 팔던 사람, 군인이었던 사람이다. 애례사가 묻는다: 국민당은 이런 사람들을 신경쓰지 않았는데, 왜 너는 공진회를 만들었는가? 응계형이 대답한다: 청나라때 혁명을 같이 도모했다. 지금 국민당은 자신이 관직을 갖는데만 골몰하고, 청홍방에 반대한다. 그래서 회를 만들어 보호하려 한 것이고, 법률의 보호를 받고자 한 것이다.

 

애례사는 계속 묻는다: 손문이 상해에 왔을 때, 너는 기억하는가? 응계형이 대답한다: 기억한다. 애례사가 묻는다: 손문이 상해에 왔을 때, 너는 돌봐준 적이 있는가? 응계형이 대답한다: 돌봐준 적이 있다. 애례사는 계속 묻는다: 어떻게 돌봐주었는가? 응계형이 대답한다: 당시 영국포방은 혁명당이 교전단체라고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순포를 보내어 돌봐주지 않았다. 그래서 프랑스조계에 거주했고, 모든 건물과 기구와 여러가지 비용은 내가 부담했다. 애례사가 묻는다: 너는 손문과 함께 남경으로 가지 않았는가? 응계형이 대답한다: 그렇다. 애례사가 묻는다: 당시 너를 서무장으로 임명하지 않았느냐? 응계형이 말한다: 상해에 있을 때 임명했다.

 

방회분자는 어쨌든 방회분자이다. 이들은 스스로 공신이라 생각했다. 혁명이 성공한 후 당연히 상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각지의 혁명신정권이 들어서자, 그들이 비상시기에 얻었던 권한을 하나하나 박탈당한다. 그리고 싸워서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자, 지방정권과의 갈등이 날로 격화된다.

 

원세개가 비밀결사를 엄금하는 통지령을 내린 후, 방회문제는 날로 민감해진다. 옛날의 맹우, 혁명당인들은 그들에 대하여 수수방관하거나 심지어 공동으로 탄압하는데 참여한다. 공진회활동이 가장 빈번했던 절강에서 원래 혁명당진영이었던 도독 주서(朱瑞)는 <해산공진회시>를 반포한다. 그는 공진회에 "나쁜 무리가 많고 좋은 무리는 적다. 무리를 믿고 횡행한다"고 하였다. 절강성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성내의 공진회지부는 모조리 해산시킨다. 따르지 않으면 체포하여 법에 따라 처리했다. 신해혁명1주기때, 절강은 공진회 회원 오십여명을 붙잡는다. 그리고 모조리 처결한다. 남방이 다른 성에서도 유사한 사건이 벌어졌다. 강서도독 이열균도 성내의 "홍진회"에 손을 써서 많이 죽인다. 운남도독 채악, 광주대리도독 진형명등도 옛날의 '혁명맹우'들을 즉시 해산시켰고, 말을 듣지 않으면 엄히 처벌했다.

 

혁명당인들의 방식에 방회인들은 불평불만이 가득했다. 마음 속으로 분개한다. 그들이 보기에, 원세개가 그들에게 이렇게 대하는 것은 그만이다. 그러나 혁명당인들이 이렇게 하는 것은 강을 건너고 나서 다리를 부수고, 우물 아래에 빠진 사람에게 돌을 던지는 행위가 아닌가. 옛날에 그들은 혁명당인들과 함께 생사를 드나들었다. 청나라조정을 무너뜨리기 위하여 죽음의 위험을 무릅썼다. 지금 혁명이 승리하였는데, 좋은 것은 혁명당인들이 다 가져가고, 방회분자들은 좋은 것을 챙기지도 못했을 뿐아니라, 오히려 계속 배척당하고 탄압받았다. 사는 것도 예전만 못했다. 이는 너무 불공평했다. 그리고, 그들이 가장 필요로 할 때, 옛날의 맹우인 혁명당인들은 그들에게 손을 뻗어주지 않았을 뿐아니라, 오히려 몸을 돌려 가버리고 모른체 했다. 그러니 이들이 분개하고 원한을 가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보복할 생각을 가지게 된다.

 

동맹회를 국민당으로 개조하는 과정에서, 청홍방을 포함한 강호방회는 모조리 배척된다. 송교인은 그중의 주도자였다. 그러니 응계형등의 복수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응계형은 어쨌든 혁명당인이다. 당시 신분도 아직 폭로되지 않았다. 송교인이 호남회관에서 장례를 치를 때, 응계형은 현장에서 잘 보살피고 있었다. 그러나 누가 생각했으랴. 그가 바로 송교인을 암살한 주모자일줄.

 

응계형같은 사람들의 정서에 대하여, 어떤 사람들은 민감하게 느꼈다. 이것은 바로 송교인 암살사건의 또 다른 주인공인 북경 내무부 비서 홍술조이다. 바로 호북혁명당인들의 폭동이 실패한 후, 홍술조는 원세개의 명을 받아 남하하여 각성지방정권과 긴장관계에 있는 강호방회를 조사한다. 응계형과 접촉한 후, 홍술조는 발견한다. 강호회당은 하나로 뭉쳐져 있지 않은 것이다. 만일 잘 처리하면, 방회에 끼어들 수 있을 뿐아니라, 그들과 혁명당인들의 관계를 이간질할 수 있을 것이며, 원세개정부에 이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홍술조의 방법은 복잡하지도 않았다. 금전으로 유인하고 지위를 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방식은 응계형같은 사람에게 아주 쓸모있었다. 방회의 사람들은 원래 무슨 신성한 혁명신앙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그저 사회변혁때의 투기분자였다. 일단 투기가 실패하면 다른 길을 찾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홍술조를 대표로 하는 원세개정부가 해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응계형등은 신속히 원세개쪽으로 붙고, 혁명당인들과는 헤어진다.

 

원세개가 응계형과 같은 사람을 매수한 것은 주로 강호회당이 통제하기 힘든 사회역량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그들이 혁명당과 결맹을 맺으면, 조금만 잘못하면 예측할 수 없는 정치적 격변이 일어날 수 있었다. 그것은 심각한 사회불안정요소였다. 그리하여 공진회와 같은 방회조직을 해산시킨다면 좋은 일이지만, 이용할 수 있으면 더욱 이상적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홍술조가 남하한 주요이유였다.

 

남북정쟁이 날로 격화되는 상황하에서, 원세개가 응계형을 매수한데는 또 하나의 중요한 원인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응계형의 특수한 지위와 사회관게를 이용하여 북경측에서 혁명당인에 대한 정보를 획득하는 것이다. 다시 응계형의 면목은 아직 폭로되지 않았기 때문에, 최소한 표면적으로는 그가 혁명당의 상층부 진기미등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송교인은 일찌기 황흥을 소개하여 공채 육십만 및 약 40여만의 각종 주식을 응계형이 의풍은행에 저당잡힌 일이 있다. 이런 관계가 아니었다면, 황흥은 절대로 이같은 거금을 응계형에게 주어 처리하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원세개라는 새로운 배경을 얻자, 응계형은 힘을 다했다. 온갖 방법으로 공을 세우고자 했다. 홍술조의 보고에 따르면, 응계형은 앞으로 북경정부에 복종하고, "힘을 다하겠다"고 하였다. 당시에는 또 하나의 유리한 조건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혁명당인과 공진회가 모두 상해를 활동중심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방회의 촉각은 각 사회로 침투해 있었고, 이것은 응게형이 상대방의 정보를 수집하는데 편리하게 해주었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매수된 응계형은 실제로 원세개정부와 진기미등 혁명당인과의 중간에서의 "이중간첩"이었다. 만일 균형을 잘 맞춘다면 응계형은 좌우봉원(左右逢源)할 수 있고, 이를 통하여 비황등달(飛黃騰達)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주목할 점은, 응계형의 변화과정에서 홍술조는 줄을 대어주었을 뿐아니라, 어느 정도 주도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송교인암살사건'의 핵심인물인 홍술조는 어떤 사람인가, 그는 무엇을 하였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