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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송교인)

송교인암살사건: 수안통천 홍술조

by 중은우시 2013. 4. 13.

글: 김만루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응계형이 원세개 집단에 투신하는 과정에서, 한 사람이 핵심역할을 하는데, 그가 바로 송교인 암살사건의 또 다른 주요인물인 북경정부 내무부 비서 홍술조이다.

 

홍술조의 출신은 괜찮다. 그는 청나라때 건륭, 가경연간의 저명한 학자인 홍량길의 현손이다. 명문의 후예로 대대로 선비집안이다. 본인도 총명하고 영리하여, 어려서부터 시서를 읽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과거에는 계속 낙방했다. 나중에는 돈으로 후보도의 관직을 사서 관료의 길에 들어선다. 거인진사들과 비교하면, 정규출신은 아닌 셈이다. 다행히 집안 사람들의 인맥이 좋아서, 홍술조의 기회는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개인적인 문제점이 많았다. 그는 재주는 있으나 덕이 없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방탕하고 평소에 먹고마시고 계집질에 도박까지 하는 것을 다반사로 여겼다. 이익이 되면 아무 편이나 들어갔고, 뇌물을 받는데도 선수였다.

 

홍술조는 처음에 대만순무 유명전의 막하에 들어간다. 유명전은 그의 재주와 능력을 높이 샀다. 한때 그를 협동처로 보내어 병사를 맡고, 외교를 돕게 했을 정도였다. 그는 전망이 좋은 편이었다. 아쉽게도, 홍술조는 유명전이 호의를 배신한다. 군수물자를 구매하는 과정에서 홍술조는 간도 크게 군수물자를 전매하고, 외국과 사사로이 결탁한다. 일이 폭로된 후, 유명전은 크게 진노한다. 군법으로 그를 처벌하려 한 것이다. 놀란 나머지 홍술조는 사방에 부탁하고 뇌물을 바쳐서 죽음을 면하고 3년간 하옥되는데 그친다.

 

그후, 홍술조는 상해의 조계지역에서 활동한다. 그는 변호사통역의 일을 했다. 다만 이 기간동안 소송을 맡아서 당사자들에게 돈을 뜯어내어 사람들의 욕을 얻어먹는다. 얼마후 홍술조의 명성은 바닥에 떨어진다. 십리양장에서 속임수를 써봐야 그의 원대한 포부를 펼칠 수는 없었다. 그후 그는 각종 관계를 이용하여 다시 관료의 길로 들어선다. 1907년, 그는 좋은 기회를 붙잡는다. 당시 이홍장의 아들 이경방이 주영공사로 갔다. 홍술조는 사방에 부탁하여, 요행히 수행원 명단에 들어간다. 떠나기 전에, 이경방은 군기대신 구홍기에게 작별인사를 한다. 그리고 수행원 명단을 그에게 보여준다. 구홍기는 홍술조의 이름이 당당하게 들어있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란다. "이 자는 예전에 대형범죄를 저질렀다. 이런 사람을 네가 어찌 기용했는가?" 이경방은 그 말을 듣고 돌아와서 홍술조의 이름을 수행원 명단에서 지워버린다.

 

그후, 홍술조는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호남순무 유염삼, 호광총독 장지동, 직예총독 진기룡의 문하로 끼어들어가 상응한 직위를 얻는다. 그러나 하나의 예외도 없이, 마지막에는 부정부패로 파직당한다. 마지막 실업을 당한 후, 직예총독 진기룡은 그에 대하여 "담대망위"한다고 적고 그를 면직시키고 영원히 다시 쓰지 말라고 한다.

 

기이하다면 기이한 일이다. 홍술조와 같이 여러번 면직되고, 나쁜 행실이 드러난 인물이 어떤 재주와 수단을 부려서 청나라말기 각지방의 거물들이 그를 중용하고 그가 나쁜 짓을 하도록 놔두었을까? 자세히 살펴보면 이상할 것도 없다. 홀술조는 보통사람이 아니다. 그는 정명하고 능력있었고, 능력이 출중했다. 인간관계도 사통팔달했다. 예를 들어 그가 장지동의 문하에 있을 때, 일처리를 잘할 뿐아니라, 시도 잘 지어서 장지동의 환심을 샀다. 한때는 14곳에 일을 맡겨서 보내기도 했다. 그에게 능력이 없었다면 관료사회에서 물만난 고기처럼 잘 나갈 수 없었을 것이다.

 

홍술조가 직예총독 진기룡에게 면직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신해혁명이 발발한다. 이제 그에게 기회가 다시 온 것이다. 상해의 유명인사중 조봉창이 있는데, 당시 남북평화협상은 주로 그의 사저인 석음당에서 진행되었다. 조봉창은 강소 무진 사람이다. 일찌기 장지동의 막부에서 수석막료로 있었다. 당시 호북에는 이런 말이 유행했다. "호북총독장지동, 일품부인조봉창" 그 뜻은 장지동이 조봉창의 말을 가장 잘 듣는다는 것이고, 그를 가장 신임한다는 말이었다. 나중에 장지동이 탄핵을 당하자, 조봉창도 연루되어 면직당한다. 장지동은 그를 상해에 두어 자신의 이목으로 삼는다. 강소,절강의 입헌파 인사들과의 교류와 연락을 맡았다. 이전에 널리 인맥관계를 축적했으므로, 조봉창은 남북의화에서 관건작용을 하고, 남북쌍방과 비밀리에 의사소통하는 '교량'이 되었다. 바로 이러하기 때문에, 조봉창은 별명을 하나 얻는데, "민국산파"였다.

 

조봉창과 홍술조는 무슨 관계인가? 말하자면 간단하다. 조봉창은 홍술조의 자형이다. 홀술조가 그의 처남이다. 조봉창이 남북평화협상을 추진할때, 홍술조도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다. 그가 중간에서 연락업무를 한 것이다. 그는 조봉창의 개인대표였다. 이 과정에서 홍술조는 원세개 수하의 두 간장인 당소의와 조병균을 알게 된다. 그리고 대량의 정보를 전해주어, 중화민국이 성립된 후, 논공행상때 홍술조는 내무부 비서가 된다. 그는 상사인 조병균의 신임을 받았다. 이전에 원세개의 북양집단과는 아무런 연원이 없어서 홍술조는 북경정부에 들어간 후 아주 열심히 일을 한다. 목적은 원세개의 핵심세력권에 진입하는 것이었다.

 

바로 이때 기회가 온 것이다. 신해혁명 1주기때 호북혁명당인이 강호방회와 손을 잡고 여원홍을 타도하려는 계획을 세웠다가 실패한 후, 원세개는 비밀방회가 민국후의 질서에 큰 위해를 끼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하여 엄격하게 각지의 방회을 엄격히 조사하라는 대총통령을 내린 후, 다시 당시 총리인 조병균에게 사람을 남쪽에 보내어 조사하도록 시킨다. 이때 파견한 사람이 다름아닌 홍술조였던 것이다.

 

조병균이 홍술조를 파견한 것은 홍술조가 일처리를 잘하는 외에, 또 다른 중요한 원인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홍술조도 방회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청방의 "대"자배 인물이다. 관료사회와 강호에서 여러해동안 굴렀기때문에, 홍술조는 남방의 형세를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이번에 남하한 임무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각지 방회를 엄금하는 통지령이 얼마나 잘 집행되는지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공진회가 '여원홍타도운동'에 참여한 후속업무를 처리하는 것이었다.

 

공진회는 청방, 홍문과 공구의 삼대 방회가 합병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표면적으로 보면 그것은 공개된 정당이지만, 실제로는 강호의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특히 회장인 응계형과 그 모임구성원들은 '여원홍타도운동'에 깊이 관여되어 있었다. 상황이 아주 복잡했다. 신해혁명때 혁명당, 신군과 강호회당의 '삼위일체'로 혁명을 성공시킨 교훈때문에 원세개는 그들에 대하여 어느 정도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방법을 강구하여 공진회를 해산시키는 것이 이번에 홍술조가 남하한 주요한 임무였다.

 

바로 이때, 호북도독 여원홍이 체포령을 내린 응계형이 상해 조계에 숨어 있었다. 홍술조는 이전에 응계형과 알지 못했다. 그를 찾아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다행히 홍술조는 인맥이 좋았고, 소식이 영통했다. 북경을 떠나기 전에 군계인사인 장소증에게 소개서를 써달라고 한다. 이를 응계형과 교문을 맺는 첫걸음으로 하였다. 장소증은 청나라말기 신군이 장군이다. 일찌기 신해년에 '난주병간'을 일으켰다. 민국이후 공진회의 발기인중 한 사람이다. 그와 응계형은 교분이 있었다. 홍솔조에게 소개서를 써준 것은 인정때문이었다.

 

1912년 9월, 홍술조는 장소증의 소개서를 가지고 상해로 간다. 그후 조계지역에 몸을 숨기고 있던 응계형을 찾아낸다. 같은 방회의 사람이다보니 홍술조와 응계형은 옛 친구를 만난 듯했고, 바로 마음이 맞았다. 견면례로, 홍술조가 한 첫번째 일은 여원홍의 체포령을 풀어주는 일이었다. 감격한 나머지, 응계형은 홍술조가 내력이 있고, 능력이 있는 인물이라는 것을 알고, 두 사람의 관계는 더욱 밀착되고, 서로 형제로 칭한다.

 

홍술조는 관료사회에서 여러 해를 굴렀다. 각종 권모술수와 수완은 익숙했다. 절강도독 주서가 칼과 총을 써서, 직접 진압한 방식과는 달리, 홍술조의 수단은 더욱 고명했다. 그는 총알하나 쓰지 않고, 응계형과 공진회해산문제를 순조롭게 해결한다. 그의 수단은 두 글자이다: 매수. 상세히 말하면 돈을 달라면 돈을 주고, 관직을 달라면 관직을 주겠다는 것이다.

 

응계형은 북경정부에 투신하겠다고 표시한다. 홍술조는 응계형을 데리고 남경으로 가서 강소도독 정덕전을 만난다. 원세개의 동의하에, 응계형은 강소주호순사장이 되고, 업무비로 매월 3천원을 받았다. 그중 강소에서 일천을 지급하고, 원세개정부가 이천을 지급했다. 이렇게 홍술조의 공진회 해산임무는 원만하게 완성된다. 응계형도 공진회 회장에서 일약 원세개의 상해 및 전체 남방의 두목이 된다. 응계형, 홍술조 두 사람은 모두 공을 세웠고, 모두 기뻐했다.

 

1912년 12월, 홍술조의 정교한 계획하게, 응계형은 북경으로 가서 총통 원세개와 총리 조병균을 만난다. 북경에 있는 기간동안, 원세개는 응계형을 만나고 정부명의로 3만대양을 내린다. 공진회의 해산비와 업무비조였다. 북경을 떠나기 전, 총리 조병균도 응계형을 접견하고, 국무원의 비밀코드책을 그에게 주어 사용하도록 주어 연락하기 편하게 한다. 아마도 공을 세우고 싶은 마음이 조급하여서인지, 응계형은 원세개와 만날 때 그를 중앙특파주호순사장으로 임명해달라고 요청한다. 그리고 능력있는 방회구성원을 정선하여 각성에서 각당의 행위를 정찰하도록 해달라고 건의한다. 그후에 그가 종합정리하여 언제든지 보고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응계형에 실망스럽게도, 원세개는 이에 대하여는 가부를 답하지 않는다.

 

이때, 제1차 국회선거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이번 대선에서, 송교인이 이끄는 국민당이 다른 정당을 물리치고 최후의 승자가 된다. 국회가 소집될 때즘, 전 동맹회의 급진파 하해명, 윤중재등이 돌연 <환영국회단선언서>를 내놓고 국회의 남천을 주장한다. 의원들이 스스로 소집해서 상해에서 예비회의를 개최하고, 남경으로 가서 정식으로 국회를 성립하고자 한다. 그들의 이유는 이렇게 해야 행정권 즉 원세개정부의 입법권에 대한 무력간섭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국회남천은 입법기관의 독립과 안전을 보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손중산이 임시대총통에서 사임할 때, 남경천도주장을 한 바 있다. 다만 채원배 등으로 구성된 "영원전사단"이 북경에 도착한 다음 날, 북양군은 북경, 천진 등지에서 쿠데타를 일으킨다. 이런 상황하에서, 여론은 속속 혁명당인들의 사심이 작용했다고 비난한다. 손중산은 어쩔 수 없이 원세개에게 남경으로 와서 취임하라는 주장을 포기한다. 천도의 건은 이렇게 흐지부지되었다. 이번에 혁명당인은 옛 건을 다시 끄집어 낸 것이니, 당연히 다른 뜻을 품고 있는 것이다. 과연 <환영국회단선언서>가 공표되자, 사회에서 적지 않은 진동이 있게 된다.

 

혁명당인들이 다시 이런 수법을 쓰다니 원세개는 당연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그중의 이해관계를 잘 이해했다. 그러나, 원세개는 큰 일을 겪어본 사람이다. 그는 표면적으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암중으로는 혁명당인들과 힘겨루기를 시작한다. 이 때, 이미 북경정부에 투신한 전 안휘도독 손육균이 먼저 일어나 원세개를 도와주는 말을 한다. 그는 통전응ㄹ 내서 "스스로 국회를 소집하고, 스스로 국회장소를 선정하는 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일국양도"이다. 나아가 국회의 힘으로 정부를 와해시키려는 것이다. 이것은 대국을 무시하고, 고의로 교란시키는 행위이다. 이전의 천도풍파를 전철로 삼아야 한다; 그리고, 지난 해 손중산, 황흥이 북상하여 원세개와 면담한 후, 남북의견차이는 점점 사라졌다. 하해명등의 방식은 실제로 남북분열을 부추기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개인의 정치적 이익을 노리는 것이다. 이것은 인심을 얻기 힘든 행위이다. 손육균은 이전에 유명한 혁명당인이었으므로, 그의 통전이 발해지자, 즉시 여론계에 큰 반향을 불러온다. 동시에 혁명당의 극렬분자들로부터 엄중한 반박을 받는다.

 

그후, 원세개의 심복대장이자 직예총독인 풍국장도 통전을 발표한다. 그리하여 "환영국회단"을 심하게 비난하는 언론을 내놓는다. 손육균에 비하여 풍국장은 기세등등했다. 그는 엄정하게 "혁명교란분자"에게 경고했다. 각성의 선거가 끝났는데, 국회의원은 당연히 중앙에 모여, 정식국회도 당연히 중앙정부 소재지여야 한다. 나 풍국장은 군인으로서, 악을 원수처럼 미워했고, 나라를 목숨처럼 사랑한다. 사설을 고취시키는 것은 국가의 근본을 흔드는 것이고, 인심을 고혹시키는 것이다. 그런 자들은 조심하라. 풍국장의 이 말이 나오자, 북양계장군들과 북방각성의 도독들이 모두 지지하고 나선다. 여론이 신속히 바뀌게 된다.

 

이에 대하여, 원세개는 여전히 안심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그후 강소도독 정덕전에게 전령을 내려 "환영국회단"을 해산하도록 조치한다. 이와 동시에, 비밀리에 홍술조, 응계형, 장요경등을 파견하여 조사하게 한다. 도대체 누가 배후에서 장난치는지. 응계형은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상해로 돌아온 후 금방 남방형세를 밀전함의 방식으로 조병균에게 보고한다. 쌍방의 업무관계가 정식으로 확립된 것이다. 원세개가 걱정하는 '환영국회단'은 응계형이 금방 조사해낸다. 이는 혁명당중 격렬분자인 대계도, 하해명, 윤중재등이 상해 <민권보>에서 글력 고취한 것이다. 조병균에게 보낸 밀전에서 응계형은 적극적으로 두 가지 대응방법을 제시한다. 첫째는 금전매수이고 둘째는 문자고취, 쌍관제하로 하해명, 대계도등이 대응하기 어렵게 하는 것이다.

 

응계형의 업무성과와 건의에 대하여 원세개측은 아주 만족한다. 그후 그의 계책에 따라 일처리한다. 당시 상해에 <민강보>라는 신문사가 있었는데, <민권보>와는 글자 하나 차이였다. 최초에 국민당인이 간행한 신문이나 경영난으로 응계형이 기회를 보아 매수한 것이다. 이것을 국민당내부로 들어가는 틈으로 삼았다. 응계형의 계획은 순조롭게 실시된다. <민강보>는 매수된 후 금방 창끝을 돌려, 원세개정부의 남방에서의 여론고취수가 된다. 매수의 댓가로, 응계형은 북경정부를 대표하여 매월 <민강보>에 천원가량의 보조금을 주었고, 원세개등이 보기에 이 거래는 상당히 괜찮은 편이었다. 

 

사실상, <민권보>측도 철판처럼 단결해 있던 것이 아니었다. 금전매수는 여전히 유효했다. 원세개의 기밀비서 장일린은 이렇게 말한다. 당시 악사의라는 사람이 일찌기 북경에서 비밀리에 조병균을 만났는데, 그가 상해에서 <민권보>의 윤중재등과 교섭한 바 있으며, 윤중재는 마음을 돌릴 수 있으나,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으므로, 이들을 해산시켜야 한다면, 북경정부에서 만원의 해산비를 지급해달라고 했다고 한다. 이 보고를 받은 후, 원세개는 강소도독 정덕전에게 처리하도록 지시한다. 그러나 정덕전은 회신에서 이렇게 말한다. '환영국회단'은 이미 3천원을 받아갔다. 이것이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는 상황을 보아서 처리하겠다.

 

이렇게 하여 혁명당 격렬분자들이 고취한 '환영국회단'은 일시에 흥기했고, 원세개정부에 거짓투항하려는 뜻을 보였다. 위기는 이제 기본적으로 해결되었다. 홍술조, 응계형등 '환영국회단'파괴의 비밀활동에 종사한 사람들은 큰 공을 세운 셈이다. 공을 세우고나서, 홍술조, 응계형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그후에 북상하여 조각하려는 국민당 당수 송교인을 노린다. 이같이 앞장서서 주군의 걱정을 덜어주려는 생각이 나타난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국민당은 선거에서 대성공을 거둔 후, 송교인이 장사, 무창, 상해, 항주, 남경등지에서 연설을 한다. 그중에는 북경정부를 공격하는 격렬한 언사도 있었다. 이는 원세개의 큰 불만과 경계심을 불러일으켰다. 원세개가 남방에 심은 두목으로서, 응계형은 방회의 각지 관계연락망을 활용하여 송교인의 행적과 일언일행을 모조리 북경에 보고한다.

 

일이 어긋나게 된 것은 송교인의 각지에서의 연설이 여론의 큰 지지를 받게 되고, 북상하여 조각하는 일이 확정된 일로 여겨지게 되었다. 이에 대하여, 송교인의 반대편 혹은 정치적 라이벌인 원세개와 조병균은 어느 정도 불안과 불쾌감을 느꼈다. 신인으로서, 홍술조, 응계형은 금방 주군의 이런 미묘한 심리를 파악한다. 그후 계책을 내놓는다. 그것은 바로 여론을 이용하여 국민당의 수뇌인물인 손중산, 황흥과 송교인의 명예에 먹칠을 하는 것이다. 소위 "손,황,송열사"이다.

 

1913년 2월 2일, 응계형이 조병균에게 보낸 밀전에서 이렇게 말한다: "손, 황, 여, 송은 운동이 격렬하다. 여원홍은 밖에서 화교의 자금지원을 받는다. 국민당은 모두 송교인을 총리로 추대한다. 이미 일몬에서 손황송열사를 매입했다. 경찰청의 송교인사기사건형사사건 공술을 10만권 인쇄하여 요코하마에서 발행할 예정이다."

 

이 밀전에서, 응계형은 허허실실, 실실허허했다. 그는 국민당의 "운동이 격렬하다"고 하며 송교인을 총리로 추대하려 한다고 말했다. 이것은 당연히 사실이다. 그러나 소위 일본에서 '손황송열사"를 구매했다는 것 그리고 "10만권을 인쇄하여 요코하마에서 발행한다"는 것은 있지도 않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응계형이 이 밀전을 보낸 의도는 무엇인가? 원래 이것은 정치사기였다.

 

밀전의 다음 내용을 보자. 응계형은 이렇게 말한다. 손중산이 이 소식을 들은 후, 즉시 황흥에게 사람을 일본으로 보내어 '거금을 주고 매입하여 없애라'고 했다. 그는 이미 사람을 시켜 '삼십만을 구하도록 했다' 당연히, 이것은 표면적으로 응하면서 암중으로 부연한 것이다. 지금 이미 삼만원은 손에 넣었고, 다시 사람을 보내어 "그쪽에서 협박하여 그들로 하여금 한편을 봐주면 다른 쪽을 잃고, 여러 골짜기를 다 메우기 어렵고, 하나가 고개숙이면 하나가 들고 일어난다. 비록 가격을 백배로 하더라도 효과를 내지 못할 것이다."

 

전문은 마지막으로 응계형이 손중산, 황흥, 송교인등을 폄훼하는 일을 잊지 않았음을 드러낸다. 그는 일찌기 손중산과 "일을 함께 하였으므로, 그를 가장 잘 알고 있다. 헛된 말을 하여 명예를 얻은 외에, 실로 정책은 없다. 그러나 여전히 헛된 명성으로 사람을 움직일 수 있다. 황, 송은 말할 것도 없다."

 

원세개, 조병균은 이 밀전을 받은 후 과연 흥취를 나타낸다. 그후 홍술조가 응계형에게 답전을 보낸다: "긴요한 문장을 이미 약간 드러냈다. 반드시 격렬한 거동이 있을 거라고 말했다" 이런 말은 조병균의 앞에서 '돈을 한웅큼 받아내기'에 좋다. 설득력을 더 하기 위하여, 홍술조는 이틀 후, 응계형에게 원세개가 밀전을 받아본 후의 반응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원총통이 "본 후에 얼굴에 기쁜 기색을 나타냈다. 동생이 아주 능력이 있다고 말했다. 이미 파악했으니 진행해달라...운운" 이뿐아니라, 원세개의 얖에서 돈으로 매수한 일도 언급한다. 원총통은 말했다. 송교인사기사건의 형사기록이 진실한 자료라면 중상을 내리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아마도 이 일을 너무 심하게 밀어부쳤다고 생각했는지, 홍술조는 전문에서 마지막에 특별히 응계형에게 당부한다. 반드시 기밀유지에 주의하라고. 지나치게 많은 사람이 알게 하지 말라고. 이후 밀전은 조병균의 비서 정모를 통하여 전하지 말라고 했다. 왜냐하면 조총리가 일하는 곳이 "절차는 그다지 기밀유지가 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일단 밀함을 보내면, 밀전에 "함도"라는 두 글자 혹은 "건조기"라는 세 글자를 덧붙이면 된다. 그렇게 하면 우체국에서 늦게 처리하지 않는다.

 

일일후 이미 기다리지 못하게 된 홍술조는 다시 응계형에게 밀전을 보낸다. 응계형이 즉시 일을 처리하라고. "송사기사건의 사건내용, 기록"을 하루빨리 보내라. 그래야 상금을 받을 수 있다. 그렇다면 독자는 아마도 의문을 가질 것이다. "손,황,송열사"는 도대체 있었는가 없었는가. 손중산, 황흥, 송교인의 명예를 훼손하려던 것이 어찌 암살사건으로 승화되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