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송교인)

송교인암살사건: 그는 어떻게 암살당했는가?

중은우시 2013. 4. 13. 21:04

글: 김만루(金滿樓) 

 

 

 

송교인은 근대 호남의 걸출한 인물이다. 그의 일생은 유성과 같다. 생명중 가장 휘황하고 가장 찬란한 순간에 사라졌다. 역사와 후인들에게 큰 유감과 상상의 공간을 남겼다. 송교인의 생명은 아주 짧았다. 암살당하는 그 해에 그는 겨우 32살이었다. 그러나 이 32년의 세월동안 그는 역사에 농후한 일필을 남기는 동시에 후인들에게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도 남겼다. 도대체 누가 송교인을 암살했단 말인가? 목적은 무엇인가? 사건의 배후에는 어떤 역사적 진상이 숨어 있을까? 이 사건은 근대 중국의 발전에 어떤 작용을 했을까? 이 모든 것의 모든 것은 좀 더 사실이 밝혀져야한다. 여기에서는 암살사건을 소개하는 글로서 사건발생현장으로 가보도록 하자.

 

1913년 3월 20일 저녁 10시경, 상해 호녕기차역의 바깥은 등불이 어두었다. 황흥(黃興), 우우임(于右任)등의 배동하에 송교인은 열차대기실을 걸어나갔다. 북경으로 가기위해 기차를 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검표구로 빨리 걸어가고들 있을 때, 사선으로 돌연 한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리고는 "탕", "탕" 하는 몇 번의 총성이 울린다. 대오의 앞 줄에 있던 송교인의 표정이 고통슬워졌고, 그는 곁에 있던 쇠난간을 붙잡았다. 그리고 고통을 참으며 말했다: "나는 총을 맞았다.(我中槍了)"

 

사건이 발생하자 사람들은 모두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흉수는 몸이 민첩했다. 순식간에 어두운 밤 속으로 사라졌다. 모두 무슨 일인지 깨달은 후에는 송교인이 이미 차가운 땅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두 손은 상처를 입은 허리부분을 꽉 누르고 있었다. 선혈이 계속 흘러나왔다. 확실히 흉수의 암살대상은 분명했다. 그날 저녁의 초점인물이었던 송교인인 것이다.

 

흉수는 왜 이 시간을 택해서 암살을 저질렀을까? 송교인의 이번 북상에서 한가지 아주 큰 일을 해야 했다. 그것은 바로 북경으로 가서 조각(組閣)을 하는 것이다. 아마도 그는 초대 내각총리를 맡을 것이었다. 이 일을 얘기하자면 전해의 국회선거부터 얘기해야 한다. 무창의거가 발발한 후, 계속된 전쟁, 담판과 각양각색의 구심투각(勾心鬪角)과 막후거래를 거쳐, 국내의 각 세력은 최종적으로 이렇게 합의한다: 황제는 퇴위한다; 손중산은 물러난다; 원세개가 임시대총통이 된다. 이 반년동안의 풍운변환가운데 청나라황실은 완패하고, 혁명당은 허승(虛勝)을 거두며, 원세개를 대표로 하는 북양군벌이 전승을 거둔다.

 

다만, 원세개는 최종승리를 거두기는 했지만, "총통"의 앞에 아직도 "임시"라는 두 글자가 덧붙어 있었다. 바꾸어 말하자면, 당시의 모든 것은 과도기적인 성격이라는 말이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대총통이 되려면 그중 가장 중요한 한 단계가 남았다. 그것은 바로 국회선거이다.

 

원세개의 권력독점과 복벽을 막기 위하여, 손중산은 임시대총통에서 물러나면서, 3가지 조치를 해놓는다: 남경으로 천도하고, 원세개가 남경에서 취임하며,  <임시약법>을 준수할 것을 보장할 것. 원세개가 이를 준수하도록 하기 위하여, 손중산은 채원배, 송교인등을 "영원전사(迎袁專使)"로 북경에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전사단이 경성에 도착한 다음 날 저녁, 조곤이 이끄는 북양제3진이 돌연 쿠데타를 일으킨다. 북경 내지 북방의 국면은 돌연 혼란에 빠진다. 원세개가 남하하여 취임하고 천도하는 일은 이렇게 흐지부지된다.

 

다행히 혀명당인들은 세번째 조치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임시약법>이다. 규정에 따르면, 정식의 국회선거는 그후 10개월내에 이루어져야 했다. 즉, 1913년 2월이전에 완성되어야 했다. 국회선거가 끝난 후, 비로소 진정한 의미에서의 중화민국 초대대총통이 탄생하는 것이다. 정식 대총통이 탄생한 후, 신생 중화민국은 세계각국 특히 열강의 승인을 받을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원세개는 아주 적극적이었다. 1912년 8월, 임시참의원은 <중화민국국회조직법>, <참의원의원선거법>, <중의원의원선거법>의 3개 법안을 통과시키고, 국회선거준비에 착수한다.

 

민국초기의 정치구조에 따르면, 국회가 탄생한 후, 새로운 대총통을 선거하는 외에, 새로운 내각도 국회선거에서 승리한 정장이 조직한다. 내각총리도 일반적으로 승리한 정당의 당수가 맡는다. 그러므로, 국내의 각파 정치역량은 모두 국회선거전에 힘을 모아서, 선거에서 승리를 거두고 뜻을 펼치고자 노력한다.

 

송교인의 여러 차레에 걸친 알선으로, 동맹회는 옃개 당파가 제출한 조건을 잡아들인다. 동맹회, 통일공화당등 5개 정당은 1912년 8월 병합하여 새로운 "국민당"을 성립한다고 선언한다. 재미있는 것은 오당합병대회에서, 이런 사건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국민당의 요구에 따라 새로 성립된 국민당은 '남녀평등'조항을 취소시켰다. 대회에 참가한 유명한 여성회원인 당군영(唐群英), 심패정(沈佩貞)등은 이를 듣고 아주 화가 났다. 마침 병합업무를 주재하던 송교인이 이들 여성영웅들의 곁에 있었다. 이들 여성들은 송교인과 말을 해도 잘 통하지 않자, 강인한 여성회원들은 송교인의 머리카락을 붙잡고, 그 자리에서 뺨을 몇 대 올려부친 것이다. 회의장에 있던 남성 혁명당원들이 모두 깜짝 놀라고 만다.

 

어찌되었건 합병후의 국민당은 유례없이 강대했다. 회의에서 손중산, 황흥, 송교인등 9명을 이사(理事)로 선임하고, 손중산을 이사장으로 모신다. 그외에 대회에서는 29명의 참의(參議)도 선출한다. 거기에는 유명한 혁명당원 호한민(胡漢民), 백문울(柏文蔚), 이열균(李烈鈞), 장계(張繼), 우우임, 마군무(馬君武)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회의후, 송교인은 득의하여 말한다. 이후 "민국정당은 우리가 독보적일 것이다. 공화당이 비록 횡행하지만 어찌 우리와 싸울 수 있을 것인가?"

 

말은 이렇게 했지만, 양계초(梁啓超)의 회귀는 곧 다가올 국회선거에 적지 않은 변수를 던졌다. 양계초는 무술변법으로 유명한 인물이고, 청나라말기부터 명성을 떨쳤다. 국내에서 그를 따르는 사람이 아주 많다. 나중에 일부 당파들 예를 들어 공화건설토론회, 국민협회, 공화통일당등 단체는 그의 기획하에 "민주당"으로 합병하여 성립된다. 일시에, 국민당, 공화당, 민주당의 삼족정립의 형세가 만들어진 것이다.

 

신해혁명후, 전 혁명당영수인 손중산과 황흥은 일부러 정계를 물러났다. 당무를 대리한 송교인은 아주 적극적이었다. 그는 10월중순 북경을 떠나 남하하여, 각 성시의 국민당 선거를 배치한다. 송교인의 노력하에, 국민당의 각지선거동원회는 아주 성공적이었다. 특히 송교인의 연설은 매력이 있었고, 많은 민중들이 와서 그의 연설을 들었다.

 

사싱상 송교인의 연설을 들으러 온 사람들 중에는 국민당원, 신문기자, 보통민중을 제외하고, 북경에서 파견한 간첩들도 섞여 있었다. 매번 송교인의 연설이 끝나면, 원세개는 각종 채널을 통하여 국민당의 최신동향을 파악했다. 한번은, 송교인이 연설중에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이때 비록 군권과 정권을 장악하지는 못했지만, 세계의 미주국가에서 정치의 권위는 국회에 집중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일체의 운동을 중지하고 선거에 집중해야 한다. 우리는 국회에서 과반수의 의석을 얻어야 한다. 나아가서 중앙정부에서 일당의 책임내각을 구성할 수 있다; 물러나면, 엄밀하게 정부를 감독하여, 우리를 꺼려서 함부로 행동할 수 없게 하여야 한다. 당연히 해야할 일은 우리를 꺼려서라도 반드시 하게 만들어야 한다."

 

송교인의 이 말은 민주정치중 입법권지상, 권력견제와 균형의 핵심을 찔렀다. 그는 국민당을 여도하여 국회선거의 승리를 거둔 후 완전한 정당내각을 조직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교과서식의 모범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원세개는 이 말을 들은 후 기분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곁에 있는 막료에게 화를 내며 말했다: "송교인은 정당내각을 조직하려고 한단 말인가? 어찌 이렇게 심하게 몰아부친단 말인가?"

 

원세개는 북양계의 개산비조이다. 북양군은 그가 혼자서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서태후의 사후, 새로 정권을 잡은 섭정왕 재풍은 그를 쫓아내서 고향으로 가게 하여 요양하게 만든다. 만일 무창의거가 없었더라면, 아마도 고향에서 평생을 보냈을 것이고, 아무런 업적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신해혁명과정에서 원세개는 동산재기의 기회를 잡는다. 청나라조정과 혁명당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놀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혁명의 성과를 독차지하고, 중화민국 임시대총통에 오른다.

 

원세개는 비록 신파인물이지만, 부하들은 구관료이다. 혁명당인의 <임시약법>에서 주장하는 내각제를 그는 이해하지도 찬동하지도 않았다. 그는 일찌기 여러번 신변인사들에게 말했다: "총통, 총리, 총장. 세게 모둔 '총(總)'인데, 도대체 누가 대장이냐?" 민국초기의 정치체제에서의 삼권분립, 권력의 견제와 균형에 대하여도 원세개는 적응하지 못했다. 그의 부하들중 한 명은 정곡을 찔러서 말한 바 있다: '민주는 무주(無主)이고, 공화는 불화(不和)이다"

 

비룍 여러가지 불만이 있기는 해도, 민국이 막 건립되었고, 원세개도 공공연히 <임시약법>을 파기할 수 없었다. 그도 선거를 통하여 자신의 합법성을 증명할 필요가 있었다. 각측의 노력하에, 민국초기의 선거운동은 전국각지에서 활발하게 벌어진다.

 

1911년말, 송교인은 도원의 고향으로 가서 모친의 생신을 축하한다. 선거가 날로 치열해지고 있었기 때문에, 송교인은 집안사람들과 설날을 함께 보내지도 못하고 1913년 2월 1일 고향을 떠나 무한으로 간다. 국민당의 각성에서의 선거업무를 지도했다. 송교인의 주재와 적극적인 노력하에, 국민당은 제1기 국회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다.

 

 

그 해 3월, 선거결과가 공표된다:중의원 596명중 국민당이 269석을 차지한다; 참의원 274명중 국민당이 123석을 차지한다. 바꾸어 말하면, 중,참의원 870석 중에서 국민당이 392석을 차지하여 약 45%를 점유했다는 것이다. 비록 과반수의 절대적인 우세는 차지하지 못했지만, 그들이 점유한 의석수는 다른 정당을 훨씬 초과했다. 공화당, 통일당과 민주당의 3당이 연합하더라도 싸우기에는 부족할 정도였다.

 

국회선거의 승리는 국민당을 환호하게 만들었다. 송교인도 아주 격동한다. 그가 보기에 승리의 서광은 이미 눈앞에 다가왔다. 조각의 꿈도 곧 실현될 것이다. 그는 역사의 대무대에 오르게 된 것이다. 재야의 당수에서 정부로 들어가 권력을 잡고, 원세개외 헌정궤도에서 힘을 겨룰 수 있게 된 것이다. 다만, 그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엄청난 음모가 막 싹트고 있었고, 거대한 위험이 그를 향해서 다가오고 있는 줄은.

 

다시 송교인암살사건의 현장으로 돌아가보자. 송교인은 총을 맞은 후, 몸이 곁에 있는 쇠난간으로 쓰러졌다. 왼손은 부상입은 허리를 꽉 누르고 있었고, 황흥, 우우임등이 도착했을 때, 송교인은 이미 고통으로 몸을 일으켜 서 있을 수 없었다. 흉수는 일찌감치 흔적도 보이지 않게 사라졌다. 송교인의 상세를 살펴본 후, 황흥등은 한편으로 경찰에 신고하여 흉수를 쫓으면서, 다른 한편으로 부근의 차량을 수배했다. 다행인 점은 기차역바깥의 정류장에 자동차가 한대 있었고, 우우임등은 급히 송교인을 자동차에 태워서, 기사에게 가장 빠른 속도로 부근의 호녕철로의원으로 가달라고 말한다.

 

의원에 도착한 후, 송교인은 이미 엄엄일식(奄奄一息)했다. 의사의 검사를 거쳐 총알은 등뒤에서 들어갔으며, 허리, 신장, 대장이 모두 부상을 입었고 상세가 심각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병원측은 반드시 수술을 해야 살릴 희망이 있다고 말한다. 시간을 벌기 위하여, 송교인은 밤12시 30분에 수술실로 들어가 수술을 시작한다. 노력을 해서, 의사는 겸자로 배에서 총알을 끄집어 낸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총알에 독이 있었다.

 

수술이 끝난 후, 송교인의 얼굴은 백지장 같았다. 그는 자신의 생명이 끝난다는 것을 알았다. 그후 신음하면서 곁에 있던 우우임에게 구술로 유언을 말한다: 하나는 그의 남경, 북경 및 동경에 보관하고 있던 서적을 모조리 남경도서관에 기부하라는 것이고, 둘째는 집안이 가난하고, 노모가 살아계시니, 황흥등 여러 친구들이 그의 사후에 대신 돌봐달라는 부탁이고, 셋째는 여러 동지들은 계속하여 구국에 분투하고, 그로 인하여 책임을 포기하지 말라달라는 것이었다.

 

이 말을 마친 후, 송교인은 고통이 극에 달하여 그는 두 손으로 어깨를 감싸안기도 하고, 십자로 만들기도 하여, 말할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리는 모습을 보였다. 곁에서 그의 임종을 지켜보는 친구들은 모두 측은한 마음에 눈물을 흘렸다. 황흥등과 상의한 후, 병원측은 송교인에 대하여 제2차수수을 집도하기로 한다. 내장을 다시 꿰매고 깨끗이 하며, 음식물과 더러운 피를 뽑아내기로 한 것이다. 이번 수술후 송교인의 상세는 더욱 악화된다. 고통속에서 그는 신음하며 말했다: "나는 남북을 조화시키고자 온갖 노력을 다했다. 그러나 유언비어를 퍼트리는 자들과 일반 인민들은 연유를 제대로 알지 못하여 매번 오해를 많이 했다. 나는 정말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하겠다."

 

할 말이 없게 만드는 것은 송교인이 임종전에 황흥으로 하여금 북경에 대필하여 전보를 치게 한 것이다. 원세개에게 암살경과를 보고하였다. 전보의 개략적인 뜻은 이렇다: 나는 원래 밤에 기차를 타고 북경으로 가려고 했는데, 그때 10시 45분 기차역에서 돌연 간인이 배후에서 총을 쏘았고, 총은 허리윗부분으로 뚫고 들어와 하복부로 갔다. 분명히 죽을 것이다. 내가 교육을 받은 이후 속신자애하여 다른 사람과 원한을 맺은 적이 없다. 지금 국가의 근본이 아직 공고히 되지 않았고, 백성의 행복이 증진되지 못했는데, 이렇게 죽으니 죽어도 여한이 남는다. 대총통께서 성의를 가기고 정의를 주재하고, 민권을 힘껏 보장하여 국가에 확실하고 흔들리지 않는 헌법이 있게 하여, 비록 내가 죽더라도 살아있는 것처럼 해달라.

 

죽기 전에도 기대를 끊지않았다. 장사쇠(章士釗)는 그가 "죽어서까지 깨닫지 못했다(至死不悟)"라고 하였다. 듣는 사람의 마음이 쓰릴 수밖에 없다.

 

3월 22일 새벽 4시, 송교인은 고통중에 사망하고 만다. 나이 겨우 32살이었다. 임종전에, 송교인은 두 둔을 똑바로 뜨고 감지 못했다. 두 손은 꽉 쥐고 있었고, 눈에는 눈물이 있었다. 그가 이 아름다운 세계를 얼마나 그리워하고 버리기 힘들어했는지 알 수 있다.

 

<민립보>의 보도에 따르면, 송교인이 죽을 때, 황흥, 우우임, 진기미(陳其美), 거정(居正) 및 송교인의 비서인 유백(劉白)등 10여명이 있었다고 한다. 황흥은 몸을 숙여 송교인의 귀에 대고 말했다: "둔초(鈍初). 우리가 당신의 모든 것을 돌보겠다. 안심하고 가시오." 우우임은 곡을 하며 말했다: "둔초, 이 일의 흉수는 이미 80%는 해결했소." 송교인의 호흡이 멈춘 후, 이들은 시신을 붙들고 통곡했다. 진기미는 더더욱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 "이럴 수가 없다. 이 일을 절대 이럴 수가 없다."

 

다음 날, 진기미는 사람을 보내어 관을 사오고 사진관의 사람에게 송교인의 유체를 사진찍게 한다. 사진을 찍기 전에, 사람들 사이에 논쟁이 일어난다. 황흥등은 송교인의 의관을 정제하여, 그의 평생이 광명정대했다는 것을 보여주자고 말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송교인이 남에게 암살되었으니, 프랑스대형명의 지도자 마라가 암살당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의 맨 몸과 상처도 찍어두자고 말한다. 나중의 연구자들에게 역사적인 사진이 될 수 있도록.

 

논쟁의 결과, 결국 두 장의 사진을 찍기로 한다. 하나는 의관정제한 사진이고, 다른 하나는 맨몸에 상처를 드러낸 사진이다. 당시 장사에서 공부하고 있던 좌순생(左舜生)은 나중에 이렇게 회고한다. 그는 일찌기 <민립보>, <민권보>에서 송교인의 나신유상을 보았고, 이는 평생 잊을 수 없는 깊은 인상을 남겼다. 수십년후, 그는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치명적인 상처는 복부이고, 얼굴은 살아있는 것같았다."

 

송교인 암살소식이 전해진 후, 국내외의 여론은 깜짝 놀란다. 이때 일본의 철로정책을 시찰중이던 손중산도 나카사키에서 전보를 보낸다. 국민당인들에게 전력을 다하여 송교인암살의 흉수를 찾아내고, 그의 원한을 풀어달라고 말한다. 송교인의 순난을 기념하기 위하여, 국민당 상해교통부는 정식 통고를 보낸다: "본당 대리이사장 송선생의 상에 각당원은 흑사(黑紗)를 매어 애도를 표해달라."

 

3월 23일 오후, 국민당에서는 송교인을 위하여 융중한 장례식을 치른다. <민립보>의 보도에 따르면, 장례인원은 12부분으로 구성되었는데, 기치전도, 군악대, 화정식유상, 쌍마차가 끄는 화채영구, 꽃다발, 관목등이었다. 그리고 맨손의 혼성제3여단과 해군병사들이 호송했고, 국민당원과 장례식 내빈은 천명이 넘었다. 수행차량이 이백여대였다. 길거리에는 순경이 총을 들고 수행했고 규모의 크지 장면의 융중함은 상해에서 전례없는 것이었다.

 

국민당이 막 국회선거에서 승리를 거둔 때였고, 당수인 송교인이 초대 내각총리를 맡을 것이었기 때문에 이 민감한 시기에 송교인의 암살은 분명히 정교하게 계획된 정치적 암살이다. 목적으 그를 죽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송교인을 죽였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