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송교인)

송교인(宋敎仁)의 암살자는 손중산(孫中山)이다.

by 중은우시 2009. 1. 4.

 

 

 

작자: 미상

 

송교인 암살사건은 100% 원세개(袁世凱)와 무관하다. 조병균(趙秉均)총리와도 무관하다.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다음과 같다:

 

송교인암살의 흉수는 무사영(武士英), 진기미(陳其美), 응계형(應桂馨), 홍술조(洪述祖)인데 모두 공진회(共進會) 회원이며, 국민당 진영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모조리 국민당당원으로 손중산과 송교인의 지휘를 받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이익공동체이다. 대정치가 원세개와 조병균이 자기의 정적의 진영에 있는 사람을 찾아서 살수로 고용할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을 것이다. 정적의 아들을 찾아서 그의 부친을 죽이라고 한다면, 스스로 골치거리를 만드는 일이 아닌가. 이처럼 간단한 이치를 왜 모르는 것일까? 정말 우둔하기 짝이 없다. 송교인암살의 흉수가 어찌 원세개나 조병균총리가 될 수 있겠는가?

 

장영동은 <<백년의 억울함 - 원세개를 대신한 명예회복>>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썼다: ....송교인 암살사건의 주모자는 아주 분명하다. 진기미, 응계형, 홍술조는 모두 공진회 회원이다. 그들은 송교인이 국민당을 지도하는데 불만을 품고 있었고, 진기미는 더욱 송교인의 "의회당" 개조에 불만이 컸다.송교인을 암살하는 것은 손중산, 진기미에 있어서는 일거양득이다. 사람들을 선동하여 북경정부에 대한 불만을 부추길 수 있고, 자기의 정적을 제거할 수도 있다. 송교인사건의 최대 수혜자는 손중산과 진기미이다. 그들은 당내의 정적을 제거하고, 북경정부에 반대하도록 선동하는 목적도 달성했다. 나중에 손중산이 일으킨 "2차혁명"은 바로 그들의 목적이 드러난 것이다. 송교인사건의 최대수혜자가 어찌 원세개가 될 수 있는가?

 

손중산의 국민당이 확실한 증거를 확보하고 있다면, 원세개와 조병균이 송교인을 암살하였다고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송교인은 왜 법률적인 수단을 통해 원세개와 조병균을 수사하고 폭로하지 않았을까? 굳이 '2차혁명" 전쟁을 발동시켜 진상을 밝힐 기회를 없애버렸을까?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누가 송교인사건의 진상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일까?

 

정덕전(程德全)이 소위 "증거'를 공표한 이후, 이렇게 함으로써 국민당은 이미 원세개를 공격하는 목적을 달성했다고 보고, 국민당은 계속하여 법률수단으로 송교인사건을 심판하는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국민당은 마치 사건의 진상에 관심이 없는 듯이 보였다. 손중산은 그들의 목적이 바로 원세개를 골치아프도록 하는 것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사건은 그냥 내버려두고, 흐지부지해버린다. 손중산은 왜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송교인암살의 흉수가 원세개와 조병균총리라는 것을 입증하도록 하지 않았을까.

 

송교인은 시종 손중산을 자기의 친구로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원세개는 자신의 친구로 함께 사업을 추진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도 그랬다. 송교인은 원세개가 자기를 암살한 흉수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임종유언은 원세개에게 남겼지, 손중산에게 남기지 않았다. 손중산은 평생 암살을 아주 즐겼고,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은 암살해버렸다. 손중산이 어디로 가든 그곳에서는 연속적으로 암살사건이 벌어졌다. 그리고 암살된 사람은 모조리 손중산의 정적이나 반대파였다. 예를 들어, 국민당의 영수급인물인 도성장(陶成章), 신문계의 거두 황원용(黃遠庸), 이미 손중산을 대체하여 당내영수의 지위를 차지한 송교인(宋敎仁), 진형명(陳炯明)의 심복으로 월군(광동군)의 참모장인 등견(鄧鏗)...등. 사후에 밝혀진 증거에 따르면 도성장과 황원용은 손중산의 부하가 암살한 것이고, 암살지령은 손중산이 내렸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송교인은 왜 죽을 때까지도 자기를 암살한 흉수가 원세개는 아니라고 생각했을까? 송교인을 암살한 장소는 손중산/진기미의 국민당이 장악하고 있던 상해지역에서 발생했다. 이곳은 아주 미묘하다. 송교인암살의 해결과정은 마치 연극과도 같았다. 이처럼 빠른 속도로 사건이 해결된 것은, 마치 사건발생전에 미리 리허설을 해놓은 것같고, 연기자와 모든 자료를 준비해놓은 것같았다.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하여, 일찌기 상해도독을 지낸 손중산의 왼팔 진기미가 큰 힘을 발휘한다. "암살"은 진기미가 보기에 정치적 적수를 제거하는 혁명수단이다. 진기미의 관용수법이기도 하다. 민국초기에, 진기미는 도성장과 도준보(陶駿保)를 암살했다. 송교인사건이 발생한 후 2개월도 지나지 않아, 진기미는 다시 원세개의 통일치권을 옹호하고 손중산을 반대하는 서보산(徐寶山)을 폭사시킨다. 서보산과 송교인의 공통점이라면, 두 사람은 모두 원세개의 통일통치를 옹호했다는 것이고, 원세개와 밀접하게 협력하고 손중산의 폭력혁명에 반대하였다는 것이다. 두 사람은 모두 손중산과는 관계가 좋지 않고 원세개와는 관계가 좋았다는 것이다. 두 사람은 모두 손중산의 눈엣가시였던 것이다.

 

보충설명해야 할 것은, 흉수 무사영은 상해의 모범감옥에서 독살당한다는 것이다. "2차혁명"에서 소위 "증거"를 세상에 공개한 정덕전 마저도 국만당에 의하여 살해당한다. 이들 손중산의 혁명세력은 엄격하게 통제된 범위내에서 암살활동을 벌였고, 이는 원세개의 능력이 미치는 범위를 넘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