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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송)

송영종(宋英宗)은 어떻게 죽었는가?

by 중은우시 2013. 4. 13.

글: 조염(趙炎) 

 

황제로서 송영종 조서(趙曙)는 행운아였다.

대외적으로, 그의 양부인 송인종은 그를 위하여 좋은 외교적 국면을 물려주었다. 요나라와는 왕래가 잦았고, 서하와도 평화공존하고 있었다. 필자가 통계를 내봤더니, 짧은 4년동안 요나라와 서로 사신을 주고받은 것이 6번에 이른다. 그리고 사신의 직급도 아주 높았다.

대내적으로, 유명한 재상 한기(韓琦)등이 보좌하여, 군신간에 화목했고, 선전을 베풀었으며 민생을 보살폈다. 여러번 국가의 재력을 들였고, 심지어 내탕금(황제의 개인자금)까지 투입하여 이재민을 도와주었다. 그리고 그는 몸소 근검절약을 실천하여, 많은 궁녀를 해산시켰고, 법죄를 단속하고, 풍속을 교화샜다. 그리하여, <송사>에는 "백세지하(百世之下), 흠앙고풍(欽仰高風), 영탄지덕(詠嘆至德), 하기성야(何其盛也)!"

 

황제로서 송영종은 또한 불행했다.

첫째는 재위기간이 너무 짧았다. 가우8년 4월(1063년 5월)부터 치평4년 정원(1067년 1월)까지 앞뒤를 다 합해서 4년이 되지 않는다. 그의 "치세융평(治世隆平)"의 이상은 실현되지 못했고, 총총 세상을 떠난다. 나이 겨우 35살이었다. 한창 나이였고, 연부역강하여 큰 일을 할 수 있는 때였다. 이는 조화농인이라 할 수 있고, 아쉬운 일이다.

둘째는 재위기간동안 전국에서 재난이 많이 발생하였다는 것이다. 천재도 있고, 인화도 있다. 치평원년 팔월, 숙주, 박주의 두 곳에서 수재가 일어나 근 천명이 사망한다. 이어 구, 십월에는 하남, 산동 및 강소절강에서 폭우가 내려 재난이 발생한다. 치평2년 팔월, 경성 개봉부에 홍수가 나서 천오백명이 죽는다. 치평3년 이월, 절강 온주의 도시가 모조리 불에 탄다. 이것은 인재이다. 민방 일만사천여칸을 태우고 백성 오천여명이 불에 타 죽는다. 금방 구제작업이 끝나자마자 치평4년 정월 그는 병사한다. 그는 시대를 잘못만났다고 할 수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렇다면, 송영종은 왜 신체건장할 때 병이 났는가, 도대체 무슨 불치의 병에 걸렸단 말인가?

 

자료가 부족하여, 필자는 그저 소거법으로 분석할 수밖에 없다. 조서는 사서에서 그가 "불위연희설만(不爲燕嬉褻慢), 복어검소여유자(服御儉素如儒者)"이다 즉, 그는 호색하지도 폭음폭식하지도, 차갑고 뜨거운 것이 균형을 잃지도, 생활에 규율이 없지도, 성격이 나쁘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병이 생길만한 원인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에 따르면 남는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정무에 바빠서 피곤해졌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미지의 어떤 요소라는 것이다.

 

황제가 열심히 정무를 보다가 피로로 죽은 사례가 역사상 없지는 않다. 그러나, 아주 적다. 청나라때 옹정제가 그중 한 사람이라고 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진시황이 각지를 순무한 것도 근정(勤政)으로 본다면 그도 포함시킬 수 있겠다. 그외에 다른 사람을 찾기는 어렵다.

 

송나라때 황제는 태조, 태종이 친히 병사를 이끌고 전투에 참가한 외에 나머지는 대부분 궁에 살며 잘 나가지 않았다. 정무는 대부분 재상이 이끄는 내각에 맡겨서 처리했다. 바빠야 얼마나 바쁘겠는가? 송진종이 요나라와 평화협약을 맺은 후, 북송은 평화시기에 접어든다. 그후의 송인종, 송영종, 송신종의 3대황제는 비교적 할 일이 없는 편이었다. 크게는 외환이 기본적으로 없었다. 여기에 내각설치도 비교적 과학적이었다. 일상사참(一相四參)이나 이상삼참(二相三參)이 있고, 아래에는 육부각사아문이 있다. 황제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내각대신과 만나서 회의하고 구두로 조서를 발표하면 된다. 피곤해야 얼마나 피곤하겠는가?

 

이렇게 보면 도대체 무슨 원인일까? 자세히 <송사>를 읽어보면, 두 가지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다. 이것이 혹시 송영종의 죽음과 관련이 있을까? 판단은 여러분에게 맡긴다.

 

하나는 사서에 조서가 "질진(疾疹)"으로 죽었다고 한다. '질진'이 무슨 병인가. 당연히 이해를 '홍역'으로 해서는 안된다. 고인들이 말하는 '질진'은 그냥 '병'이다. 사마광도 <사좌복야제일찰자>에서 이렇게 말했다: "여기에 아이의 병으로 오랫동안 조정에 참여하지 못했다." 그래서 송영종이 병으로 죽었다는 것만 알 수 있지, 무슨 병인지는 알 수가 없다.

 

다른 하나는 영종이 즉위한지 얼마되지 않아 즉 치평원년 십일월, 개봉에 한번의 "대풍매(大風霾)"가 있었다는 것이다. 죽기 전에 즉 치평4년 정월 경술삭에 개봉에 다시 "대풍매"가 나타난다. 무엇이 "대풍매"인가? 최근에 나타난 악랄한 기후현상(스모그)과 같은 것일까?

 

고인의 기록을 보면, 같지는 않다. 다만 비슷하다. 서로 다른 점이라면 고인들이 쓴 "풍매"는 바로 황사로 인하여 하늘 색이 흐려진 것을 말한다. 환경오염과는 관계가 없다. 유사한 점이라면 '풍매'가 나타나면 가시거리가 아주 짧고, 낮에도 저녁같다는 것이다. 동시에 사람의 건강에 영향을 주어 호흡곤란이 나타나고, 모래가 목으로 들어가는 등의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원래 호흡기질환이 있는 사람이거나 비교적 유약한 사람이라면 '대풍매'기후일때 병이 도져서 위험해질 수도 있다.

 

치평원년 십일월의 개봉 "대풍매"는 바로 송인종의 장례를 막 지내고 나서이다. 송영종은 매일 태묘로 가서 제사를 지내야 했다. 송영종은 천성이 효성스러워 양부인 송인종을 대하는 것이 송효종이 양부 송고종을 대하는 것과 같았다. 모든 일에 효가 우선이었고, 무슨 일이 있어도 갔다. "풍매"날씨라고 하더라도 천자는 여전히 태묘로 갔다.

 

단지 1달이 지나서 십이월 기사일이 된다. 송영종은 이영각에 가서 시신의 경사강독을 듣는다. 사마광은 황제가 '기침'을 하는 것을 발견한다. 송영종이 이때 기관지에 문제가 생겼다는 말이다. 숙질인지 아니면 이번의 '풍매'로 인하여 생긴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치평2년 오월, 송영종은 다시 병이 발생한다. 이것이 호흡기질환인지 아닌지는 알 수가 없다. 어쨌든 금방 낫는다. "임술. 병이 낫다. 재신에 명하여, 천지, 종묘, 사직과 궁관에 감사하게 한다" 그후의 1년반동안 다시는 송영종이 병들었다는 기록이 없다. 그리고 치평4년 정월에 개봉에 다시 '대풍매'가 발생하고, 송영종은 병사한다. 이것은 기이하지 않은가?

 

개봉사람 조언위가 쓴 <운록만사>를 보면 북송 저일의 글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한다. 이 달의 '신해'일에 영종이 '개봉백성의 주세를 면제하느라' 바빴다. 일찌기 여러번 개봉부의 신하들에게 이를 금하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송사>의 "정사일, 황제가 복녕전에서 사망하다 나이 서른 여섯이다." 는 기록을 보면 전후로 며칠 차이가 나지 않는다. 정말 '병이 급하게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가정할 수 있을까? 첫째, 송영종은 원래 기관지 질병이 있었다. 천식. 그가 '연희설만'하지 않는 성격특징에서 거꾸로 추리해보면, 알 수 있다. 설보채를 생각해보면 알 것이다. 풍매 날씨에 장기간 제사지내느라 모종의 호흡기질환을 얻는다. 둘째, 사마광이 말한 '기침'이 만일 천식이라면, 영종의 두번째 병은 반복발작이다. 셋째, 나쁜 날씨에 외출하여 영종의 호흡기질환을 일으켰다. 만일 천식이라면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다.

 

이런 가설이 설립한다면, 송영종은 '대풍매'로 인하여 죽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