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몽광정우(夢光情雨)
11세기초인 1004년, 송,요 두 나라는 유명한 '전연지맹"을 맺는다. 당말의 '안사의 난'이후 계속하여 전란이 끊이지 않았던 중국의 북방지역에 드디어 평화의 기운이 돌게 된 것이다. 중원을 점거한 북송왕조는 태평성대를 누렸고, 모든 것은 완벽했다. 더 이상 재난이 발생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좋은 시절은 오래 가지 않았다. 37년후, 조용하던 북송왕조의 서북지역이 더 이상 조용하지 않게 되었다. 원래 북송정난군절도사(定難軍節度使), 서평왕(西平王)인 이원호(李元昊)가 돌연 병력을 이끌고 남침하였다. 이제 요나라만을 적으로 간주하고, 서량등 지역은 신경도 쓰지 않았던 북송왕조의 군신들은 비로소 혼탁한 눈을 들어 멀리 서북을 주시하게 딘다. 이원호. 도대체 어떤 자인가? 사람들은 속으로 스르로에게 물어본다.
<송사>, <서하서사> <요사> <금사>등의 사서에 나오는 '서하'부분을 보면, 서하국의 개국황제의 성이 이(李)씨이다가, 조(趙)씨로 바뀌고, 다시 기괴한 복성인 "외명(嵬名)"으로 바뀌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의 이름도 금방 이원호(李元昊)이다가 금방 조낭소(趙曩霄)이다가 금방 아주 기괴한 이름인 "외명외리오주(嵬名嵬理烏珠)"로 바뀌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눈이 어지럽고 도대체 이 황제는 정신이 이상한 것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이다.
그의 정신이 이상한 것은 아니다.
400여년전인 7세기때 복성 탁발(拓跋)에 두글자 이름 적사(赤辭)를 가진 당항족 귀족이 있었다. 그는 부하를 이끌고 기련산(祁連山) 남록의 시달목(柴達木)부지를 떠나 당나라에 투항한다. '천가한(天可汗)" 이세민은 탁발적사에게 국성인 이(李)씨를 하사한다. 이것이 바로 '이원호'의 성이 '이'인 유래이다. 이적사(李赤辭), 즉 탁발적사는 바로 이원조의 먼 조상이다.
북송이 변량에 수도를 정한 후, 당시 중원각처의 할거세력을 복속시킨다. 서북 구석에 쳐박혀 있던 이적사의 후손인 당나라의 정난군절도사 이계봉(李繼捧)은 일가를 이끌고 송나라에 투항한다. 송태종 조광의는 그의 성을 '조(趙)'씨로 고치고 이름을 '보충(保忠)'이라 지어준다. 조보충 및 그의 동생 조보길(趙保吉)은 한편 송왕조의 상사(賞賜)를 받으면서, 다른 한편 송나라와 대치하는 요나라에도 몰래 추파를 보낸다. 얼마후, 조보길이 병사하고 아들 조덕명(趙德明)이 자리를 승계한다. 역사책에서는 "덕명이 본국에서는 황제로 칭하고, 송, 거란에 글을 올릴 대는 황제로 칭하지 않고 신하로칭했다"고 한다.
이원호는 바로 조덕명의 아들이다. 그는 부친, 조부를 따라 적지 않은 '유산'을 물려받았고, 조, 이 두개의 성도물려받는다. 그리고 그는 "또 다른 이름이 '낭소'이고, 어릴 때의 자가 '외리'이다." 이렇게 하여, 역사책에 한 사람이 세 개의 성을 가지고, 세개의 성에 세 가지 이름을 가진 괴이한 일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한 사람이 3개의 성을 가졌다는 것은 쉽게 삼국시대의 유명한, '삼성가노(三姓家奴)" 여포를 떠올리게 돈다. 기실, 이런 연상은 잘못된 것이다. 여포 한 사람이 세 가지 성(정, 동, 여)을 가진 것은 후안무치한 행동이다. 그러나 서하제국의 이 개국황제는 선조의 성이 이씨였고, 나중에 조씨성을 받았고, 다시 외명으로 개성한 것이니, 이는 민족을 단결시키려는 책략이었다.
1028년, 서하의 기국황제 이원호(호칭의 편의를 위하여 본문에서는 이 서하의 개국황제를 '이원호'라 칭하기로 한다)는 병력을 이끌고 서량부(西凉府)를 공격하여 함락시키는데 공이 있어, 부친 이덕명에 의하여 후계자로 봉해진다. 3년후, 이덕명이 병사하고, 야심만만한 이원호가 즉위한다. 그는 연호를 '현도(顯道)'로 바꾸고, 북송의 정통을 인정하지 않기 시작한다. 자신이 나라를 건립하려는 것이다. 서하의 개국황제인 이원호의 이러한 조치에 대하여 많은 수구귀족들은 반대한다. 구귀족의 반란을 일거에 평정한 후,서하의 이원호는 건국을 선포한다. 국호를 '대하(大夏)'라 하고, 수도를 흥경부(興慶府)에 둔다. 연호는 '천수예법연조(天授禮法延祚)'라 하고, 그 자신은 '시문영무흥법건예인효황제(始文英武興法建禮仁孝皇帝)"라 한다.
민족을 단결시키기 위하여, 당항족 귀족들이 칭호에서 그와 일체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서하개국황제는 당항족의 성인 '외명'을 쓰고, 북송이 그에게 준 '서평왕'이라는 봉호도 버린다. 당항어인 "오주(烏珠)"(兀卒이라고도 쓰며, 그 의미는 푸른 왕의 아들 한자로 하늘의 아들 즉 天子와 같다)라 칭했다.
재위기간동안, 서하개국황제 이원호는 통치의 편리라는 각도에서 출발하여, 자신의 성명, 칭호를 바꾸었을 뿐아니라, 친히 서하제국의 군제, 관제, 법제를 정비하고, 서하문자를 만든다. 그리고 서적을 발간한다. 일시에 이 방원만리의 소수민족정권은 서북의 강국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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