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건문제)

건문제 주윤문의 황위는 동생의 것을 빼앗은 것이다.

by 중은우시 2013. 4. 13.

글: 자작자애2 

 

홍무25년 구월 십이일, 명나라조정에서는 큰 사건이 하나 벌어진다. 주윤문(朱允)을 황태손(皇太孫)으로 삼은 것이다. 그러나 명나라의 상당히 많은 사람들은 주윤문이 황태손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가 황태손이 되는 것은 명분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주윤문이 황태손이 되어서는 안되는가? 정확히 말하자면, 주윤문은 자격이 없었다. 그의 유력한 경쟁자는 그보다 1살이 어린 동부이모(同父異母)의 동생 주윤통(朱允)이다. 그는 의문태자(懿文太子) 주표(朱標)의 셋째아들이다. 주윤통은 비록 주윤문보다 1살이 어렸지만, 그는 적자(嫡子)였다. 주윤문은 비록 1살이 많았지만 서자(庶子)였다. 종법제도에서 양자의 지위는 차이가 컸다. 주윤문이 후계자가 된다는 것은 <홍루몽>에서 가보옥의 지위를 가환이 차지한 것과 같다.

 

의문태자 주표의 정비(正妃), 즉 큰마누라는 상우춘(常遇春)의 딸이며, 남옥(藍玉)의 친외조카딸이다. 이 상태자비(常太子妃)는 주원장의 적장손(주표의 적장자)인 주웅영(朱雄英)을 낳았고, 두번째가 바로 이 주윤통이다. 홍무11년 십일월 초구일에 낳았다. 주윤통을 낳기 위하여 상태자비는 생명을 잃는다. 필자의 추단으로는 산후출혈때문에 죽은 것이다. 모친으로서 이는 쉽지 않은 일이다. 이 명나라궁중의 이야기는 필자가 역사서의 인색한 기록에서 찾아낸 것이니, 100% 정확하다.

 

의문태자 주표에게는 또 한 명의 차비(次妃)가 있었다. 즉 작은마누라이다. 그는 전 이부상서 여본(呂本)의 딸로 여차비(呂次妃)이다. 여차비는 아들 하나를 낳으니 그가 바로 주윤문이다. 나중에 의문태자 주표의 곁에는 여차비가 있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연속하여 두 아들을 더 낳는다. 주윤견, 주윤희. 이렇게 하여 여차비는 자신이 낳은 3명의 아들과, 태어나자마자 어미가 죽은 주윤통을 함께 기른다.

 

모친이 있는 아이는 보배와 같고, 모친이 없는 아이는 풀과 같다. 이 말은 황실내에서도 마찬가지로 성립된다.

여본은 아들이 없다. 즉, 여차비는 형제가 없다. 바꾸어 말하면, 주윤문의 외가는 전혀 세력이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주윤통과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주윤통의 친할아버지는 상우춘이고, 외할아버지는 남옥이다. 정국공 상무는 그의 큰외삼촌이고, 개국공 상승은 그의 둘째외삼촌이다. 풍승, 부우덕등 26명의 명제국의 '개국장군'들은 대부분 서로간에 인척관계로 얽혀 있다. 관계가 아주 가까웠다.

 

그리고 주윤통에게는 가장 유리한 신분이 있다. 적자이다. 이것은 서자인 주윤문이 아무리 노력하고 아무리 분전해도 바꿀 수가 없는 것이다. 종법제도에 따르면, 황제의 보좌는 주윤문에게 갈 수가 없다. 황태손을 세운다면 당연히 주윤통이 되어야 했다.

 

최근 글어 스스로 주윤문의 후대라는 사람들까지 나타났다. 중국에도 있고, 일본에도 있고, 심지어 유럽에도 있다. 그들중 어떤 사람은 주윤문을 "양황제(讓皇帝)"라고 한다. 필자는 그 말을 듣고 일소에 부쳤다. 정말 얼굴도 두껍다. 분명히 황위를 얼굴두껍게 동생 주윤통으로부터 빼앗아왔으면서, 굳이 포장을 해서 품격을 보이며 다시 넷째숙부 연왕 주체에게 양보하였다고? 실로 할 말이 없다. 그들은 아마 정말 조상 주윤문이 진룡이라고 생각하나보다. 그 중의 암흑은 보지를 못하고.

 

바로 주윤통의 특수한 지위때문에, 나중에 사서에서 그에 관한 기록은 간단하기 그지없다. 나중의 건문제 주윤문이건 아니면 반란에 성공한 연왕 주체이건, 주윤통은 모두 그들이 감추어야할 대상이었다. 주윤문의 탐욕은 원래 동생의 것인 황제위였고, 나중에는 천애를 유랑하는 신세가 된다. 그리고 주윤통은 연왕 주체에 의하여 봉양에 연금되었다가 영락16년에 사망한다. 이것은 모두 뒷이야기이다. 주중팔(주원장)은 유가경전을 제대로 읽었고, 원칙성이 강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왜 수천년의 법도를 그가 이렇게 바꾼 것일까?

 

하하 우리 주중팔의 손에서는 뭐든지 일어날 수 있다. 주중팔은 이번 왕조대변혁과정에서 어떤 정치세력에 의하여 코가 꿰었는지도 모른다. 이는 그의 치명적인 약점을 보여준다. 후세의 군주들이 경계로 삼아야 할 일이다.

 

그렇다. 주윤통은 적자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모친을 극사(克死)시켰고, '불상지자(不祥之子)'이다. 무릇 주윤문을 옹립하고자 하는 무리들은 '불상지자'라는 이 몇자를 가지고, 점을 치느라 주화입마된 주원장의 내심세계에 파란을 일으켰다. 이 어린아니는 형인 주웅영(홍무15년), 할머니 마수영(홍무15년), 외할머니 남씨(홍무25년), 부친 주표(홍무25년)까지 극사시켰다. 누구든지 가까운 사람은 모두 그와는 극성이다.

현대인들은 모두 알고 있다. 소위 "극"이라는 것은 미신이고, 헛소리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큰 일이었다. 주윤통의 '적자'라는 광환은 즉시 빛을 잃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일부 사람들은 일찌기 태자 주표의 병이 심할 때부터 주윤문에게 '투자'를 한다. 그중 한 사람을 얘기하자면 황자징이다.

태자 주표가 병석에 있을 때, 주윤문은 매일 밤낮으로 모신다. 그리고 주윤통, 주윤견, 주윤희의 세 동생을 불러서 함께 산다. 이를 통하여 자신의 형으로서의 풍모를 드러낸 것이다. 부친 주표가 죽은 후에는 대성통곡을 한다. 이것은 자연적인 감정의 발로였을까 아니면 연기였을까?

 

필자는 냉정하게 지적하고 싶다. 주윤문은 연기였다. 비록 진실한 감정이 들어있기는 하겠지만, 그의 그 어린 나이를 볼 때, 어디서 그런 심기가 나왔겠는가? 모두 고수가 뒤에서 가르쳐준 것이다. 누구인가? 바로 황자징이다.

행운으로 황태손이 된 후, 주윤문은 동각문에서 흥분하여 황자징에게 말했다: "선생이 아니라면 어찌 지금이 있겠습니까."
주윤문의 성공적인 연기는 백발이 창창한 주원장의 칭찬을 받는다: "윤문, 이 아이는 좋은 아이군. 철이 들었어."

이렇게 '적자'인 주윤통은 점수가 깍이고, '서자'인 주윤문은 점수를 얻었다.

 

황자징 같은 자들은 왜 서자인 주윤문을 선택하여 옹립했을까? 적자인 주윤통이 아니라. 확실히, '적자' 주윤통이 황제가 되면 발언권을 가질 사람은 남옥, 상승, 풍승, 부우덕과 같은 인물들이다. 황자징에게는 차례가 돌아오기 힘들다. 서자인 주윤문이 황제가 되면 다르다. 황자징은 바로 제사(帝師)가 되는 것이다.

이를 보면, <주례>를 많이 읽었지만, 도대체 어디로 읽었는지 모르겠다. 어디든 자신에게 유리하면 그쪽에 붙는 것이다.

황자징 한 사람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반드시 일당의 협조가 필요했다. 그것이 바로 "한파(漢派)", "강남파(江南派)"가 연합전선을 결성한 것이다.

 

서자 주윤문을 세우는데, '개국장군'들이 집단적으로 반발하면 어떡할 것인가? 방법을 생각하여 그들을 갈라놓으면 된다. 송국공 풍승, 영국공 부우덕등은 홍무25년 팔월 십팔일에 성지를 받고 준비를 마치고, 구월초에 남경을 출발한다. 16위 민병조직의 건설을 완성하고, 개간목적지에 도착한다. 풍승등이 다시 남경으로 돌아와 업무보고를 하는데, 시간은 이미 홍무25년 십이월 이십육일이다. 바깥에 나가있던 시간이 3개월에 이른다.

여러 '개국장군'들이 산서로 가 있던 3개월동안, 명나라의 조정에서는 큰 사건이 벌어진다. 정식으로 제3대 지도자의 핵심이 확립되었다. 주윤문을 황태손으로 삼은 것이다. 시간은 구월 십이일, 바로 26명의 개국장군들이 산서로 가는 도중이었다.

 

여기서 의문이 들 수 밖에 없다. 이게 무슨 뜻인가. 이처럼 국가에서 후계자를 정하는 큰 일에 26명의 '개국장군'들은 떠나게 하다니. 왜 그랬을까? 26명의 '개국장군'들이 남경을 떠난지 6일만에, 이처럼 황급히 주윤문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왜 그랬을까?

26명의 '개국장군'이 남경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주윤문의 황태손의 지위가 기정사실이 되어 있었다. 모두 원하든 원치않든 인정해야만 했다. 조정의 그 멍청하고 집요한 북방문관들은 어떻게 했는가? 먼저 얼렀다. 황태손은 인효하다. 만일 그래도 깨닫지 못하고 투항하지 않으면, 그들을 사전에 사직시켜 집으로 돌려보냈다. 공부시랑 정언문은 이렇게 하여 산서 울주의 고향으로 가서 손자나 안게 되었다. 시간은 홍무26년 정월 이십칠일의 일이다.

 

하남사람 능한은 얼굴이 두꺼웠다. 죽어도 수도 남경에서 떠나지 않으려 했다. 그냥 놔두고 나중에 다시 수습하면 된다.

산서사람 원태(袁泰, 도찰원우도어사)는 적절한 때 죽었다. 팔월초에 죽었다. 구월십이일에 책봉되었는데. 만일 원태가 죽지 않았다면 그는 분명히 상소를 이리저리 올렸을 것이다. 아마도 그랬으면 골치아팠을 것이다. 첨휘(詹徽)가 이부로 옮겨간 후, 도찰원은 통제를 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태를 따르는 사람이 도찰원에는 많았다.

당연히 이들은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주윤통과 아무런 친인척관계도 없고, 그저 종법주의의 원칙을 가지고 얘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저 멍청한 자들일 뿐이다.

 

가장 다루기 어려운 사람은 막 반란을 진압하고 돌아온 남옥이다. 이 남옥에 있어서 주윤통은 가까운 친척이다.

어떡할 것인가. 시기를 기다려야 한다. 홍무23년 호당(胡黨)을 공격한 투쟁경험을 다시 한번 쓸 수 밖에 없다. 그렇게 하면 남옥도 처리할 수 있다.

남옥은 태자 주표가 사망하기 전인 홍무25년 춘삼월에 남경을 떠난다. 홍무26년 정월 십이일에 남경으로 돌아온다. 반년이나 나가 있었는데, 조정에 이런 큰 변고가 생긴 것이다. 정치형세가 달라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