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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건문제)

건문제는 삼청산(三淸山)에 몸을 숨겼는가?

by 중은우시 2012. 5. 6.

글: 정계진(丁啓陣)

 

삼청산의 산자락에 도착했을 때, 현지 여유국(관광국)의 한 간부는 우리들에게 특별한 이벤트를 하나 만들어주겠다고 했다. 은퇴한 간부를 불렀는데, 옥산현 여유국장을 지낸 바 있는 관타오(官濤) 선생이었다. 그는 우리들에게 삼청산에 관련된 역사미스테리 하나를 소개해주었다. 당시, 그 관타오 선생을 처음 만났을 때, 겉으로 보기에는 그가 말이 어눌하고 성실하고 소박한 사람으로 보였다.

 

케이블카를 타고 다시 걸어서 약 2시간을 갔을 때, 삼청산 명승지의 가운데 있는 고산분지인 "삼청복지(三淸福地)"에 도착했다. 그때 관타오 선생은 돌연 하늘에서 떨어진 것처럼 우리들 앞에 나타난다. 그는 자신을 소개할 때, "관원(官員)의 관, 진타오(錦濤, 후진타오)의 타오'라고 소개했다. 그의 소박한 풍모와 말하는 풍격은 전혀 어울리지가 않았다. 주제로 들어갔는데, 바로 건문제 주윤문이 일찌기 삼청복지일대에 몸을 숨겼다는 여러가지 증거를 얘기하자, 사람들의 주목을 금방 끌었다. 그가 미스테리를 다 소개하자, 몇몇 유명블로거 특히 '이화교주'라는 자오리화(趙麗華)는 이미 그의 고증에 완전히 탄복했고, 건문제가 삼청산에 몸을 숨겼다는 주장을 전혀 의심하지 않고 믿었다.

 

관타오 선생은 건문제가 삼청산에 몸을 숨겼다는 것에 관해서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여러해 전부터이다. 2006년, 매체는 이미 그의 연구성과를 보도했다. <여유국장이 건문제의 수수께끼를 풀었다고 말하다. 주윤문은 삼청산에 몸을 숨겼다 우화등선하였다> 이 글은 신화사 난창(南昌) 주재기자가 보도한 것이며, 많은 매체가 전재했다. 관타오 선생은 이로 인하여 그의 연구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은퇴후, 여전히 여러번 삼청산을 오르며, 현지를 고찰했다. 관타오 선생에 따르면 건문제가 삼청산에 몸을 숨겼다는 '증거'는 아주 많다고 한다. 인터넷에서도 일부 찾아볼 수 있다. 그의 최신 발견중 몇 가지는 인터넷에서 찾아볼 수 없다. 여기서는 글읽는 사람들의 편의를 위하여 내 생각에 비교적 재미있는 증거를 몇 가지 열거하기로 한다:

 

삼청복지의 도교건축물은 대부분 축소된 소전(小殿), 소묘(小廟)이다. 이것은 건문제의 당시 재력과 관련있다. 전당은 비록 작지만, 규제는 전혀 줄이지 않았다. '삼청복지'를 들어가는 초입의 길가에 소형 석재 묘우(廟宇)가 있다. 편액에는 "구천응원부(九天應元府)"라고 적혀 있다. 이는 뇌신의 도호인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九天應元雷聲普化天尊)"에서 따온 것이며, 뇌신을 모신다. 그러나, 관타오 선생은 이렇게 생각한다. 그중의  '응천(應天)'이라는 두 글자를 가지고 연상을 한 것이다. 이것은 암암리에 응천부(應天府) 즉, 남경(난징, 南京)을 표시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삼청복지에 자칭 삼청산 개산지조(開山之祖)라는 도사 왕호(王祜, 1423-1515)의 분묘가 있다. 분묘의 위치는 '좌청룡, 우백호, 선선무, 후주작'의 풍수개념에 부합하지 않는다. 삼청복지에서의 위치도 그다지 이상적이지 못하다. 묘 앞의 평지에 있는 담장도 비가 오면 쓸려간다고 한다. 형식에서도, 왕호묘는 또 다른 능원인 명치산첨벽운장죽지소(明治山詹碧雲藏竹之所)'에 전혀 미치지 못한다. 개산지조가 스스로 낮은 위치를 선택하다니, 형식에서도 멀지 않은 곳의 한 능원에 못미치게 하다니, 이를 보면 그 능원의 주인이 보통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 왕호묘 부근의 길가에 있는 암벽에는 "방호상(方豪上)"이라는 세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는 건문제가 나라를 되찾았다는 정보를 숨기고 있다. 그중 "방(方)"은 주체가 등극할 때의 조서작성을 거절하여 십족이 멸하는 벌을 받은 대신 방효유(方孝儒)를 가리킨다고 본다. 소형 석재 묘구의 앞에 있는 향로에는 "홍치정사(弘治丁巳)"라는 관지(款識)가 있는데, 이는 주윤문을 가리킨다고 본다. 왜냐하면 주윤문이 태어난 해가 '정사년'이기 때문이다. 또 한 곳의 지면에 있는 암석에는 간단하게 뱀의 몸 위에 작은 용이 붙어있는 것을 그려서 새겼다. 이것은 보복을 뜻한다고 본다: 용진압서(龍鎭壓鼠). 주윤문은 뱀띠(小龍)이다. 주체는 1360년생으로 쥐띠이다. 삼청궁 앞의 패방에는 한 폭의 석각대련이 있다. "운로초요입문진국궁지경(雲路遙入門盡鞠躬之敬), 천안지척등단개부수지공(天顔咫尺登壇皆俯首之恭)". '천안'은 제왕의 용안을 가리키는 말이다. 당시 삼청궁 주지 첨벽운(詹碧雲)은 바로 지척 거리에 있었다. 삼청궁 대전의 석주(石柱)의 영련(楹聯)은 "일통대명축황조어백세천세만세(一統大明祝皇祚於百世千世萬世), 삼원무극존도기어옥청상청태청(三元無極存道氣於玉淸上淸太淸)". 전설에 따르면 건문제가 삼청산에 은신하며 쓴 것이라고 하는데, 내용상 들어맞는다. 삼청상 대전문앞의 '청정'이라는 네모난 연못의 바닥에는 석룡(石龍)이 있다. 전체 구성상으로 '갇혀있는 용(囚龍)"의 형세이다. 수룡의 수염은 영락제의 화상에 있는 수염과 유사하고, 수룡에게는 발톱이 4개인데, 이는 주체가 넷째라는 것과 들어맞는다. "명치산첨벽운장죽지소"의 첨벽운이 바로 주윤문의 가명이다. "명치산"은 암중으로 대명강산을 다스린 바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장죽"은 서책전적을 숨겼다는 것이 아니라, "죽(竹, Zhu)'과 '주(主, Zhu)'는 발음이 같기 때문이다. 즉, 황제라는 뜻이다. 전체 능원의 건축은 곳곳에서 구오지존(九五至尊)의 의미가 드러난다. 건축의 풍격은 남경 명태조 주원장의 효릉과 아주 비슷하다. 실제로 사람들로 하여금 일찌기 대명을 다스린 바 있는 사람을 우르러 받들라는 의미이다. 능원의 동북측에 암벽에는 ""등강(騰崗)"이라는 두 글자가 새겨져 있다. '등'은 뱀이라는 뜻이고 민간에서는 소룡이라고도 부른다. 주윤문이 뱀띠라는 것과 들어맞는다(주윤문은 1377년생으로 음력 정사년이다). 그의 죽위시 나이가 21세에 불과하므로, '소룡'과 들어맞는다.

 

여기서 한 가지 인정할 것은 관타오 선생의 연구는 아주 재미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명사 전문가인 팡즈위안(方志遠) 선생이 지적한 것처럼, 도교의 고건축경관, 마애석각, 석조, 영련, 경관경점의 명명, 민간전설등을 가지고 건문제가 삼청산에 은거하고 매장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느 정도 이치에 맞기는 하지만 역시 긴 고증의 과정이 필요하다. 더욱 유력한 증거는, 첨벽운의 분묘에서 의관과 유골이 나오거나, 왕호의 후손이 나와야 할 것이다.

 

필자는 명사의 건문제에 대하여는 연구한 바 없다. 그저 연구방법으로부터 판단할 수밖에 없다. 관타오선생의 연구는 기본적으로 결론이 앞서고, 모든 증거는 그 먼저 내놓은 결론을 증멍하기 위한 것이다. 이렇게 하면 쉽게 두 가지 편차가 발생한다. 하나는 선택적으로 증거물을 취한다는 것이다. 결론에 유리한 증거물은 모두 주목하고, 내놓지만, 결론에 불리한 증거물은 모조리 숨겨버리거나 언급하지 않는 것이다. 둘째는 증거물을 견강부회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증거물 자체에 대하여는 연구하지 않는다. 결론을 앞세운 연구자들은 왕왕 상상력을 발휘하여, 계속 추가하여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려 한다. 관타오 선생의 해설을 다 듣고 난 후, 나는 그의 말을 믿는 몇몇 동행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쉽게 믿어서는 안된다고. 나는 "인인절부(隣人竊斧)"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웃사람이 그의 도끼를 훔쳤다고 의심할 때는 이웃사람의 말한마디, 행동하나, 움직임하나도 모두 그가 도끼를 훔친 사람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그가 나중에 산에서 자신이 잃어버린 도끼를 찾고 난 후에는 이웃사람의 말한마디, 행동하나 움직임하나도 모두 그의 도끼를 훔칠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관타오 선생은 바로 건문제가 삼청산에 몸을 숨겼다고 의심하는 단계이다. 그러므로, 그의 눈에는 모든 흔적은 건문제가 삼청산에 있었다는 것으로 모여질 수밖에 없다.

 

건문제는 역사상 몇 되지 않는 숙부에게 권력을 빼앗긴 황제이고, 그에게서 황제보좌를 빼앗아간 사람이 유명한 명성조 영락제 주체이며, 또한 사서에서는 남경성이 함락된 후의 그의 행방에 대하여 모호하게 적었고, 모순이 많으므로,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사람의 주의를 끌 수 있는 요소가 있고 논쟁이 끊이지 않는 것이다. 건문제의 행방에 관하여 필자는 아래와 같은 세 가지 견해를 가지고 있다:

 

첫째, 주체(영락제)가 등극한 후 주윤문은 만의 하나 불에 타서 죽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의 정치생애는 이미 끝났다. 황제로서 그는 죽은 것이다. 설사 그의 몸이 승려나 도사로 변장하여 요행히 살아남았다고 하더라도, 거의 행시주육(行屍走肉)이나 다름없다. 국가민생과 관련이 없다. 역사발전과 관련이 없다. 게다가 명성조 주체는 고의로 기록을 말살하고 뜯어고쳤으며, 수수께끼를 남겼다(사람을 시켜 곳곳에서 건문제를 찾게 했는데, 아마도 주윤문이 죽지 않을 수도 있다는 허상을 보이기 위한 것이다. 이를 통하여 숙부가 조카를 죽였다는 악명을 뒤집어쓰지 않으려 한 것이다). 진상은 이미 알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건문제가 어디에 숨었는지는 지금 보기에 그다지 학술적 연구가치가 없다.

 

둘째, "고금다소사(古今多少事), 도부소담중(都付笑談中)". 주윤문의 마음씨가 인자했어도 좋다. 주체의 사람됨이 과감하고 모략이 있어도 좋다. 그들은 모두 수백년 전의 사람들이다. 그들이 사활을 다툰 것도 우리에게는 그저 역사이야기일 뿐이다. 그저 재미있으면 된다. 옛사람들의 이야기를 가지고 술마실 때 안주거리로 삼으면 된다. 그러면서 동정의 눈물 한 방울 정도 떨어뜨려 주면 그만이다. 마음 속의 불평불만을 터트리면 된다. 그러나, 그 뿐이다. 건문제 본인은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이다. 우리는 그가 황제보좌를 잃은 것에 대하여 계속 마음에 두고 아쉬워하고 따질 필요가 있을까?

 

셋째, 명승지에는 이야기가 필요하다. 아름다운 여자의 이야기, 풍류재자의 이야기, 아름다운 여자와 풍류재자의 사랑이야기, 황제의 이야기, 황제가 운나쁘게 망한 이야기, 모두 우리 국민들이 듣기 좋아하는 이야기들이다. 그래서 이들 이야기는 명승지를 선전하는데, 관광업을 발전시키는데 큰 역할을 한다. 관타오 선생처럼(관타오 선생이 이 설을 제기하기 전에 일찌감치, 상요시 문물고고연구소의 황투치가 출판한 저작 <삼청산도교문화고략>에는 <명대 건문제 실종의 수수께끼와 삼청산 행적추적>이라는 글이 있다. 여기서 이미 건문제가 삼청산으로 도망오고, 옥산 경내에 은거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추단한 바 있다), 십여년의 시간을 들여서 명승지와 쫓겨난 황제의 관계를 연구하며 여러가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줄 수 있게 된 것은 삼청산에 있어서 장시(江西) 관광사업에 있어서 유익한 것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관타오 선생의 연구는 아마도 학술가치는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현지의 관광업에는 혜택이 클 것이고, 현지 민중들도 이득을 볼 것이다. 그러므로 일정한 경제적 가치가 있다.

 

필자에 있어서, 삼청산을 유람하면서, 관타오 선생의 건문제가 삼청복지에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는 것은 상당히 재미있는 경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