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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건문제)

건문제 연구붐을 어떤 각도에서 보아야 할 것인가?

by 중은우시 2010. 7. 21.

글: 모패기(毛佩琦)

 

최근 글어, 역사문화붐이 일어나고 있는데, 이 붐에서, 일부 사람들은 명나라때의 한 수수께끼사건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바로 건문제 행방의 미스테리이다. 건문제와 관련있다고 얘기되는 많은 유적, 문화재가 다시 선전되고 다시 강조되고 있다. 그뿐아니라, 게속하여 건문제와 관련있다고 주장되는 새로운 문물, 문화제가 나타나고 있다. 동시에 각지에는 자칭 건문제의 후예라는 사람이나 가족들이 속속 나타나서 , 그들의 혈통과 신분을  인정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재미있는 일은 비록 이 미스테리사건에 관심을 가지는 사회각계인사, 사학계 특히 명사학계에서는 이에 대하여 미적지근한 태도를 나타내고 있다. 대부분의 경우 그들은 소위 건문제의 유적, 문화재에 대하여는 부정적인 태도를 취한다. 다만, 자칭 건문제의 후손이라는 주장에 대하여는 아주 신중한 태도를 나타내고 있다.

 

건문제의 집정,정난지역,명성조 주체의 등극으로 발전하는 시기는 명사연구자들에게 중시되어 왔다. 선배사학자들인 맹삼, 호적, 왕숭무, 오함이 모두 이 이슈를 연구했다. 그중 사실을 정리하고 역사를 해석하는데 있어서 왕숭무 선생의 공헌이 가장 큰 편이다.

 

주원장이 명나라르 건립하고, 각종 조치를 취하여 그의 통치기반을 공고히 하였는데, 공신을 주살하는 것과  친왕을 분봉하는 것은 서로 보완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서로 모순되는 것이었다. 주원장이 남긴 정치유산중에서 두 가지 문제는 반드시 해결해야 했다. 첫째는 승상이 없는 중앙정치기구를 어떻게 운용하느냐는 것이고, 둘째는 강대한 친왕을 어떻게 처리하느냐는 것이다. 주원장은 일찌기 사보관(四輔官)을 두어 황제의 정무를 보좌하게 한 적이 있다. 후세인들은 사보관이 바로 나중에 나타나는 내각(內閣)의 남상이라고 본다. 그러나 건문제 주윤문은 주원장이 설계한 길을 걷지 않았다. 그의 방식은 육부상서의 지위를  한단계 끌어올려서, "상서를 1품으로 올리는 것"이었다. 이로 인하여 황제와 육부의 사이에 문제가 생기면 반드시 황제가 나서서 해결해야 했다. 황제의 통치력이 약하게 되면 육부는 군룡무수(群龍無首)의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행정적으로 이런 국면은 명백히 결함이 있는 것이다. 정치적으로 이것은 연왕 주체가 공격할 구실을 주었다. "조종께서 승상을 두지 못하게 하였는데, 이제는 오히려 승상이 6명이나 된다." 또 다른 측면으로, 건문제는 확실히 여러 권력자의 위협하에 있었다. 황제는 강대한 친왕들과 평화공존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삭번(削藩)은 필연적이다. 그러나 삭번은 큰 리스크를 안아야 한다. 또한 마찬가지로 조상이 정한 제도를 어기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도 주체가 거병하는 구실을 준다. 주윤문은 등극하자마자 정치적으로 피동적인 입장에 놓인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겉모습 뒤에는 심각한 논리적 법칙이 뒤따른다. 명나라가 건립된지 30년후에, 건문제는 반드시 말위에서 얻은 천하를 말아래에서 다스려야 하는 전환기를 맞이한다. 반드시 상무-중전(尙武-重典)의 방식에서 중문-관인(重文-寬仁)의 전환을 이루어야 했다. 건문제는 문신에게 의존했다. 무신의 지위는 부차적으로 되었다. 그러나, 이것도 주체에 이용된다. 주체는 '좌반문신을 토벌한다"고 하였다. 주체의 구호는 건문제의 아픈 곳을 건드린 것이다. 그리하여 조정의 문관,무관의 분열이 일어난다. 무신에 대하여는 회유하는 태도를 보임으로써, 주체는 동정을 얻는다. 자신을 박해받는 측이라고 얘기하며, 어쩔 수 없이 거병한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녕왕등과 손을 잡는다. 그리하여 정난지역은  두개의 숨은 그룹의 투쟁이라고 할 수 있는데, 바로 황제문신집단과 무신친왕집단이 그것이다.

 

그리고, 건문제가 중문-관인의 전환을 이루기 위하여, 주원장과는 다른 치국이념을 취해야 했다. 그의 중요한 신하인  시강학사 방효유는 바로 이런 이념을 대표하다. 방효유는 관인을 주장했고, 심지어 균전(均田)을 주장했다. 그는 말했다. 만일 당초 진섭에게 약간의 밭이 있었다면 절대로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을 것이라고. 그의 균전방침은 정전제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이는 확실히 명나라에서 행할 수는 없는 제도였다. 방효유의 이상은 천진하면서도 책상머리의 생각이다. 그의 가장 뛰어난 주장은 군신관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황제는 백성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이다. 백성들이 황제를 모시는 것이 아니다. 만일 황제가 백성을 위하여 일하지 않는다면, 황제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래서 이백년후에 황종희는 방효유를 평가할 때, '죽음'이라는 한마디로 선생의 고심을 말살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방효유가 마지막에 죽은 것은 충군을 위한 것만이 아니라, 더욱 중요한 것은 자신의 정치이상을 위하여 죽은 것이다.

 

주체가 거병하면서 건문제의 잘못을 바로잡겠다(靖建文帝之難)고 하며, 건문제가 명나라의 조상이래의 제도를 파괴하였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조종의 법제를 회복시키겠다고 한다. 바로 이 점에 있어서 방효유등과 부닥쳤다. 사람들이 건문제의 정책을 칭송한 것은 '사년동안 관대한 정치로 이전의 엄격함을 해소했다'는데 있었다. 건문제는 등극하자마자 주원장시대의 억울한 사건을 대거 바로잡아 명예회복시키고, 쫓겨났던 관리자제를 다시 등용한다. 만일 주체가 다시 옛제도로 돌아간다면, 이들은 다시 지옥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 방효유 본인도 주원장시대에 해를 입었다. 그의 두 가까운 사람 즉 그의 부친 방극근, 스승 송렴이 모두 주원장때 억울하게 죄를 입었다. 방효유아 어찌 주체가 다시 주원장시대로 돌아가려는 것에 동의할 수 있겠는가? 그가 싸운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만, 주체가 소리높여 외친 구호는 그대로 실현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명나라는 이미 전환기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누가 집권하더라도, 문관치국으로 전환해야만 했다. 주원장이 정치유산에 대하여 주체는 더욱 온건하고 효과적인 방법을 택한다. 친왕에 대하여, 그는 교묘하게 그들의 실력을 약화시킨다. 그리하여 나중에 그를 보고 배워서 반란을 일으킨 친왕들은 모두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 중앙정치기구에서 그는 문신들을 내각에 넣는다. 황제, 육부, 내각은 이후 수백년간 정치의 기본모델이 되고, 영향을 오래 미친다. 다만 건문제의 생사불명과 그의 황위찬탈의 악명은 그의 통치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그는 일생동안 곳곳에서 전쟁을 벌이고 큰 일들을 벌인다. 비록 휘황한 업적을 일구어냈지만, 당시의 백성들에게 큰 부담을 지우기도 했다. 더욱 심각한 일은 환관의 중용과 동창의 건립, 금의위감옥을 회복시킨 일이다. 이는 나중에 모두 폐해로 남게 된다.

 

이상의 것들은 사학계에서 관심을 가지는 일들이다. 일부 학자는 주원장에서 건문제, 영락제에 이르는 시기에 대하여 새로운 해석을 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건문제역사에 대하여 보다 깊이있게 분석한다.

 

건문제에 대하여 관심이 있는 또 하나는 그의 행방이다. 수백년동안 그의 행방은 풀리지 않는 미스테리였다.

 

임오년에 혈우성풍을 잔혹하게 진압한 후, 주체는 양사기에게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만일 자녕이 오늘날 여기 있다면 짐은 그를 기용했을 것이다" 인종 주고치도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방휴유같은 자들은 모두 충신이다" 비록 영락제이래로 역대황제들이 모두 비슷하게 말하기는 했는데, 왜 건문제에 대하여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을까? 문제는 건문제의 역사상 지위를 긍정한다는 것은 바로 주체가 황위찬탈의 불법을 저질렀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 인종이후로, 역대황제는 모두 주체의 후손이다. 건문제의 지위를 회복시켜준다는 것은 그들의 통치에서 정통성 합법성을 잃게 되는 일이다. 영종이 즉위하고, 정통을 년호로 삼았는데, 이는 바로 당시 집정자의 두 가지 난제를 설명해준다. 건문제를 명예회복시켜주고 싶으면서도, 일부러 자신의 정통지위를 강조해야 했다. 그리하여 인종도 영종처럼, 건문제를 철저히 명예회복시켜주지 못한다. 건문제를 명예회복시켜주지만 철저히 시켜주지 않는 상태는 민간의 기대를 불러일으켰다. 건문제는 오랫동안 공정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리하여 민간여론의 동정을 받는다. 사람들은 갈수록 건문제를 동정하게 된다. 일단 단속이 느슨해지면, 여러가지 전설이 속속 나타났다. 만력제에 이르러서는 건문제에 관한 서적이 대량 출판된다. 이루 서적은 심지어 건문제의 전설이 진실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감정이 이성을 댗한 것이고, 추측이 사실을 대체한 것이다. 이것은 논리에는 맞지 않는다. 이러한 현상에 대하여, 선배학자 호적은 '츨루(層壘)로 형성된 고대사"라는 말을 한 바 있다. 마치 눈덩이처럼 전설이 나중으로 가면 갈수록 더욱 완비되고 풍부해진다. 껍질을 벗기고 원형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어떤 학자는 건문제에 관한 사적의 편찬과 전승에 대하여 고증,해석을 해서, 건문제에 대한 전설의 형성과 전승과정에 대하여 더 많이 이해하도록 해주기도 했다.

 

문제는 건문제의 행방에 대하여 왜 최근들어 이렇게 관심이 많아졌느냐이다. 필자는 최근 들어 광의의 역사문화붐의 하나라고 본다. 사람들은 경제가 일정한 정도로 발전하면, 문화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중화민족이 부흥을 하고자 노력할 때, 사람들은 자신의 역사를 더욱 많이 되돌아보게 된다. 건문제에 대한 여러가지 전설이 다시 유행하고 새로 발전하는 것은 문화학, 사회학, 민속학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그러나 필자는 동시에 건문제의 행방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선배들의 연구성과에도 주목해주면 좋겠다. 만일 건문제의 전설에 대하여 고찰한다면, 과학적인 연구방법이 추측을 대신해야 한다. 엄숙하고 고증을 거친 사료가 전설을 대신해야 한다. 감성을 이성으로 되돌리고, 감정을 과학으로 회귀시켜야 한다.

 

또 다른 측면으로, 필자는 건문제의 전설이 계속 전해지고 새로 발전하는 것에 반대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새로운 민속이고 민간문화이다. 그들은 문화생활을 풍부하게 해주고, 관광프로젝트를 확대시켜준다.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러나 절대로 사학연구와 혼동해서는 안될 것이다.